집이 있어 아이들은 떠날 수 있고 어미새가 있어 어린 새들은 날갯짓을 배운다. 내가 바다를 건너는 수고를 한 번이라도 했다면 그건 아버지가 이미 바다를 건너왔기 때문이다.-31쪽
통영, 섬진강, 해남 등 지도에 실린 그 이름들은 저마다 다르지만, 그 무렵이면 그곳의 이름은 같아진다. 봄나라.-34쪽
그나마 삶이 마음에 드는 것은, 첫째 모든 것은 어쨌든 지나간다는 것, 둘째 한 번 지나가면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것.-34쪽
<일본인의 시정-하이쿠편>
'세상은 사흘 / 보지 못한 동안에 / 벚꽃이라네'-35쪽
키친 테이블 노블이라는 게 있다면, 세상의 모든 키친 테이블 노블은 애잔하기 그지없다. 어떤 경우에도 그 소설은 전적으로 자신을 위해 씌어지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스탠드를 밝히고 노트를 꺼내 뭔가를 한없이 긁적여 나간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직장에서 돌아와 뭔가를 한없이 긁적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지만 긁적이는 동안, 자기 자신이 치유받는다. 그들의 작품에 열광한 수많은 독자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키친 테이블 노블이 실제로 하는 일은 그 글을 쓰는 사람을 치유하는 일이다.-60쪽
나는 밤을 사랑한다. 밤은 천 개의 눈을 가진 검은 얼굴을 지녔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면 그 눈들은 저마다 빛을 낸다. 그 빛 속 하나하나에 그대들이 있다. 외로운 그대들, 저마다 멀리 떨어진 불빛처럼 멀리서 흔들린다. 문득 바람이 그대 창으로 부는가, 그런 걱정이 든다. 하지만 그건 멀리 있기 때문에 흔들리는 빛이다. 한때 우리는 너무나 가까웠으나, 그리하여 조금의 흔들림도 상상할 수 없었지만......-93쪽
당나라 시인 왕창련의 <부용루에서 신점을 보내다> 中
'낙양의 친구들이 안부를 물어보면 한 조각 얼음 같은 마음 옥병에 간직했다고 하게.'-97쪽
승객이 거의 없는 밤의 시외버스고 대관령을 넘어가고 있어 귀가 멍멍하고, 진부하기 짝이 없으나마 그 나이로서는 너무나 설득력이 넘치는 연애담을 들은 직후라면, 그 누가 부르든 김광석의 노래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내가 아는 한, 김광석이 부른 노래란 그런 노래다. 그의 노래에는 청춘의 결정적 순간에만 맛볼 수 있는 설득력이 있다.-135쪽
그러니까, 사랑이 막 끝났을 즈음이었다. 한 사람을 향해서만 쏟아지던 감정이 갈 곳을 잃고 마음속에서 넘쳐나고 있었다. 채 처리하지 못한 감정이 넘쳐나게 되자, 자연스레 육체적인 활동은 정지됐다. 밥을 먹기 위해 숟가락을 드는 일도, 혹은 학교에 나가 수업을 듣는 일도 육체적으로 너무나 힘들어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나는 하루종일 방안에 처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136쪽
새 양말 한짝도 살 수 없는 처지라니!-143쪽
삶이 입 속의 혀 같은 것이라면 내 마음대로 이리저리 돌려도 보고 힘들긴 해도 뒤집어보기도 할 텐데, 세상일이 그렇지는 않더라.-153쪽
다음날, 늦도록 잠을 자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먼저 깨어나 내 책을 뒤적이던 사내가 나보다 먼저 전화를 받았다. 전화 속에서 어떤 여자가 나를 찾고 있었다. 사내는 내가 숨겨놓은 양주라도 찾았다는 듯이 눈을 반짝이며 왜 아침부터 김연수 씨를 찾는 것이냐고 농을 걸었다. 하지만 여자는 완강하게 김연수 씨만을 찾았다. 그녀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내는 더 완강하게 왜 아침부터 김연수 씨를 찾느냐고 되물었다. 아마, 그 사내 역시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전화를 건 여자가 말했다. 여기는 출판사인데, 김연수 씨에게 전할 말이 있다. 실망한 표정으로 사내가 물었다. 출판사에서 왜 아침부터 김연수 씨를 찾느냐? 여자가 다시 말했다. 당신은 누구냐? 사내가 말했다. 나는 장석남이다. 어머, 장석남 씨가 왜 거기 있어요? 저, 정은숙이에요. 둘은 마치 그날 아침에 전화하기로 했던 사람들인 양 한참 얘기했다. 그 다음에 내가 전화를 받았다. 그건 내가 시인으로 등단하게 됐다는 소식을 알리는 전화였다.
(김연수와 장석남에게 이런 인연이 있었다니...!!!!!)-170쪽
G.K. 체스터튼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랑하는 것은 쉽다. 그것이 사라질 때를 상상할 수 있다면.-191쪽
낑낑대며 얼어붙은 나무 창문을 열고 바깥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노라면 1월 새벽 공기에서는 후추처럼 매운 냄새가 나면서 콧구멍이 들어붙었다.-2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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