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지만 확실한 행복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 문학사상사 / 1997년 5월
구판절판


바다라는 것은 역시 가까이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그 냄새를 맡으며 생활하지 않으면 진짜 좋은 점을 알 수 없는 게 아닐까?

<나는 쇠고기와 바다를 무척 좋아한다>-82쪽

그러나 'UFO'를 '유포'라고 읽을 때마다, 나는 언제나 골치가 아플 지경이다. 'UFO'는역시 '유 에프 오'다. 죽어도 '유포'가 좋다고 하는 사람은 'U.S.A'를 '유사'라고 읽으십시오. 안 그렇습니까?

<집사람이 UFO를 '유포'라고 읽을 때>-96쪽

나는 원고료를 주지 않는 원고는 절대로 쓰지 않는다. 굉장히 건방진 소리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프로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설사 아무리 싸더라도 원고료만큼은 현금으로 받는다. 술 한 잔 사주고 입을 싹 씻어버리는 건 딱 질색이다. 나도 원고 마감일을 엄수하니까, 그 쪽도 지불 약속을 정확히 지켜주기를 원한다.

<내가 준 보수와 내가 받은 원고료>-101쪽

맛있는 두부를 먹기 위한 요령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제대로 된 두부 가게에서 두부를 살 것(슈퍼는 안 된다). 또 하나는 집에 돌아오면 즉시 물을 담은 그릇에 옮겨 냉장고에 집어넣을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온 그날 안에 먹어야 한다. 그러니까 두북 가게는 반드시 집 근처에 있어야 한다. 멀리 있으면 일일이 부지런을 떨어가며 사러 갈 수가 없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언제나처럼 산책을 다녀오는 길에 두부 가게에 들러보니까 셔터가 내려져 있고, '점포 임대함'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었다.
항상 싱글벙글 사람 좋던 두부 가게 일가가 돌연 가게 문을 닫고 어디론가 떠나가버린 것이다. 앞으로 나는 도대체 어디서 두부를 사란 말인가?

<나의 두부 먹는 방식>-128쪽

두부를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은 뭘까, 하고 한가할 때 한 번 생각해본 적이 있다. 대답은 하나밖에 없다. 정사를 한 뒤에 먹는 것이다.

<가장 맛있는 두부는 정사 후에>-132쪽

그 미모의 미망인은 두부를 두 모 사가지고, 한 모에 파와 생강을 곁들여 맥주와 함께 내 앞에 내놓는다. 그리고 "우선 잠시 두부하고 들고 계세요. 금방 저녁식사를 준비할게요"와 같은 애교섞인 말을 한다.
이러한 '우선'막간을 때우는 것 같은 두부의 섹시한 뉘앙스가 더할 수 없이 좋다.

<가장 맛있는 두부는 정사 후에>-133쪽

비록 메뉴에 비프 커틀릿이 없어도 식당차라는 것은 꽤 좋은 것이다. 뭐라고 할까, 옛날 풍의 식당 분위기가 나서 좋다. 먹기 전과 먹고 난 다음에 다른 장소에 있다는 것도 마음에 든다. 그리고 덜커덩덜커덩 하는 진동음도 좋다.
.
.
식당차의 그 '스쳐가는 제도' 속에서, 내가 특히 마음에 들어하는 것은 아침부터 맥주를 마실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어느 레스토랑이나 아침부터 맥주 정도는 마실 수 있지만, 약간 시키기가 창피하고, 또 그다지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는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 식사하는 즐거움> -138쪽

어째서 일부러 삿포로까지 가서 영화를 구경해야 했는지, 나로서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모르는 고장에 가면 이상하게도 영화가 보고 싶어진다. 그래서 지금까지 전국 각지의 참으로 많은 영화관에 들어가서 수많은 영화를 관람했다. 낯선 고장의 낯선 영화관에 들어가서 영화를 보고 있으면, 영화가 묘하게 몸에 스며들어 온다. 이것은 어쩌면 영화의 즐거움이 본질적으로 안타까움과 동거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든다.

<생소한 고장에선 이상하게도 영화관에 가고 싶다>-140-141쪽

때때로 혼자 토론회를 벌이며 즐기곤 한다. 가령 '인간에게는 꼬리가 있는 편이 좋은가 나쁜가' 하는 식의 테마로 꼬리 지지파 A와 꼬리 배척파 B를 교대로 혼자 해가면서 말이다. 그런 걸 하고 있노라면, 인간의 의견 혹은 사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애매모호하고 임시변통적인가 하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물론 그 애매모호하고 임시변통적인 점이 더할 수 없이 사랑스러운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올해엔 설날은 비교적 즐겁다라고 쓰고 싶다>-184쪽

며칠 전에 오모테산도를 걸어가다가, 안자이 미즈마루 씨와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미즈마루 씨는 바쁘다 바쁘다 하면서도, 언제나 그 부근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옛 종업원이 선물한 단골 삽화가의 그림 있는 티셔츠>-222쪽

나에게 있어서 잠이라는 것은 걸쭉한 과즙이 듬뿍 들어 있는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과실과 비슷하다. 이불 속에 들어가서 '잘 먹겠습니다!'하는 느낌으로 눈을 감고, 그 잠의 과즙을 쪽쪽 빨아먹고, 다 빨아먹고 난 다음에 잠이 깨는 것이다. 약간 이상한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정말로 그렇게 느끼고 있으니까 어쩔 수가 없다.

<내 잠버릇의 3대 특징>-230쪽

좀더 자세히 분석해보면 나는 똑같이 '여느 때와 다른 것'이라도, 여느 때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 무엇인가가 생기는 것보다는, 여느 때는 무엇인가가 있는 곳에 아무것도 없게 되는 마이너스 상황, 즉 결락 상황 쪽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교통 파업 같은 것은 내 취미에 딱 들어맞는다. 만일 반교통 파업 같은 것이 존재해서, 그날은 열차 수가 3배로 증가한다고 해도 그런 종류의 비일상성은 그다지 내 마음을 매료시키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교통 파업은 즐겁다>-233-234쪽

아무래도 나이를 먹으면, '아연실색'하는 경험이 날이 갈수록 많아져 가는 것 같다. 참으로 난처한 일이다.

<가장 걱정되는 건 중년의 비만>-245쪽

뜨거운 커피 위에 푸짐하게 흰 크림이 얹혀 있고, 럼주의 향기가 탁 하고 코를 찌른다. 그리고 크림과 커피와 럼주의 향기가 일체가 되어서 구수하게 누른 듯한 냄새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건 정말 대단한 것이다. 그리고 확실히 몸이 따뜻해진다.

<겨울이 되면 먹고 싶어지는 것>-270쪽

사전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상당히 재미있고 인정미 있는 것이다. 공부나 작업을 하기 위해 사용할 때는 '나는 사전이다'하고 턱 버티고 있는 것 같아 가까이하기가 퍽 어렵지만, 일단 책상을 떠나 복도에서 고양이와 함께 딩굴면서 유유히 책장 페이지를 넘기거나 하고 있노라면 상대방(사전)로 릴랙스해져서, '그럼 우리끼리 이야긴데 말야......' 하는 측면을 나타내보이기 시작한다.

<책 한 권 갖고 무인도에 간다면 무슨 책을?>-293-294쪽

트루먼 카포티의 단편 [밤의 나무]-30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상의 아름다운 도서관 이상의 도서관 50
최정태 글.사진 / 한길사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뉴욕 공공도서관

 

 

 

 

 

 

 

 

중세의 지식인들은 여행에서 가장 먼저 찾는 곳이 도서관이었단다.

무의식 속에서 지식인 흉내 좀 내보고 싶었던 건지 뉴욕 여행 중 가장 찾고 싶었던 곳은 바로 이 뉴욕 공공도서관. 두 달여간의 일정 동안 틈만 나면 찾아가서 가이드투어도 하고 전시실 기웃거리기도 하고 늘어지게 쉬다 오기도 했다. 정말 요긴했던 건 명품 아울렛 가기 전 이곳에서 할인쿠폰을 출력했던 것. 덕분에 내 얼굴 사진까지 박힌 도서관회원카드랑 복사카드도 만들어 꽤 으쓱한 기념품도 생겼고.

귀국 마지막날에도 잠시 찾아갔었는데, 그전까지만 해도 행복한 여행 끝난다는 게 그리 실감나지 않다가, 이 도서관 문을 나서려니까 "아, 어쩌면 내 일생에서 이곳에 오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구나'라는 생각에 코끝이 시큰, 눈물이 피잉ㅡ. 엎어지면 코닿을 곳에 국회도서관이 있으면서도 자주 가지 않았으면서 괜히 뉴욕의 이 도서관은 돌아서려니 마음이 짠했다. 저녁 무렵의 맨해튼을 터벅터벅 걸으며 생각해보니 마음이 짠했던 이유는, 도서관이 너무도 아름다웠기 때문. 비단 뉴욕 공공도서관 뿐이랴. 보스턴의 콩코드 마을에서 우연히 들렀던 작은 도서관도, 한적한 곳에 있다는 게 너무 아까울 정도로 아름다움을 자랑했다. 아, 짜증나. 이 나라는 도서관을 왜 이렇게 아름답게 지어놓은 거야. 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도서관은 회색건물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우리나라에도 최근엔 꽤나 예쁘고 정감 있는 어린이 도서관을 많이 짓는 모양인데, 성인을 위한 감각적이고 아름다운 도서관도 많이 좀 생겼으면 좋겠다. (이 부분은 요즘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북카페'가 대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글쓴이가 직접 찍었다는 책 속 사진들은 하나같이 너무나도 아름답다. 전문 사진작가가 아닌지라 구도며 색감은 투박하지만, 괜스레 멋들여 찍은 게 아니라서 그런지 그게 또 도서관 사진답고 자꾸 보게 된다. 손 닿는 곳에 꽂아두고 생각날 때마다 꺼내 사진만 들여다봐도 명화집 못지 않게 기분이 좋다. 쇼핑 명소나 유명 식당 찾아가는 여행이 아닌, 도서관 투어는 또 얼마나 멋진 테마인가.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도서관이라고 소개해 놓은 곳이 규장각과 해인사라는 것. 고개가 갸우뚱.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야 규장각과 해인사도 도서관 축에 속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도서관의 의미로 본다면 이건 좀 뜬금없는 듯.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을 자랑스레 생각하는 건 좋지만 책 전체로 놓고 본다면, 차라리 최근에 지은 괜찮은 어린이도서관이라든가 정독도서관, 국회도서관 같은 곳이 나와야 맞지 않나? 억지로 세계 유수의 도서관들과 '급'을 맞추기 위해 규장각과 해인사를 갖다 붙인 느낌이다. 이건 왠지 저자의 의도라기보다는 출판사 편집자의 계산된 의도인 듯도 하고. 우리나라의 꽤 괜찮은 도서관을 발굴해서 실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당신들이 생각하는" 도서관 말고 "우리가 생각하는" 도서관을 실어달라는 말이다.

여행 전 한번쯤 들춰보고, 도서관도 여행 코스에 넣도록 유도하는 좋은 책이다. 어쨌거나 고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상의 아름다운 도서관 이상의 도서관 50
최정태 글.사진 / 한길사 / 2006년 8월
구판절판


"...책을 읽는 취미는 이보다 한 단계 더 낮은 수준의 취미를 멀리할 수 있게 한다." (by 카네기)

<뉴욕 공공도서관>-21쪽

앨런 G.토머스 [아름다운 책]
-26쪽

중세 시대 지식인들이 여행에서 가장 먼저 찾는 곳은 도서관이었다. 당시 귀족, 성직자, 학자들의 도서관 순례는 지식과 교양을 재충전하고,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며, 영혼의 요양을 겸한 여행으로서, 그들에게는 보편적인 지적 행사였다.

<비블링겐 수도원도서관>-3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음울한 짐승 동서 미스터리 북스 85
에도가와 란포 지음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6월
장바구니담기


서재는 그 사람의 성격과 비밀을 쉽게 알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음울한 짐승>-70쪽

두 사람의 다소 지적인 청년이 한 방안에서 생활하고 있다면 머리의 우수성에 대한 경쟁이 있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2전 동화>-128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쇼펜하우어 인생론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지음, 최민홍 옮김 / 집문당 / 2023년 12월
구판절판


배가 똑바로 항해하기 위해서 압력을 가하는 물체가 필요한 것처럼, 인간은 누구나 항상 다소의 걱정과 괴로움과 불행이 필요한 것이다.-7쪽

애정은 어떤 환경에 이르면 급속도로 증진하여 그 불길이 다른 정열을 능가하며 모든 사려를 물리치고 큰 위력과 고집을 부리게 된다. 그리하여 어떠한 장애라도 물리치고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내걸며 그래도 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으면 자살까지도 한다.-57쪽

이성적인 선책이 결혼에 이르는 경우는 있으나, 결코 열렬한 사랑에 빠지는 일은 없다.-74쪽

이 생존 의지의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욕구는 우선 앞으로 태어날 개체에 작용할 수 있는 바탕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당사자들은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 사랑을 하고 있는 줄 알고 갖은 애를 다 쓰지만, 그들이 하는 일은 전적으로 형이상학적인 목적을 이루는 데 있다. 이와 같이 미래의 개체가 생존을 원하고 또 실제로 생존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찾는 돌파력은 모든 생물의 원천인 생존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 형이상학적인 생존에의 욕구는 앞으로 양친이 될 두 남녀가 상대방에 대하여 갖고 있는 강력한 연정으로 나타나며, 그들에게 하나의 아름다운 환상을 주어 이 세상의 모든 가치를 희생해서라도 서로 결합하게 한다.-77쪽

사랑을 하고 있는 모습은 대개 희극적이며 때로는 비극적으로 보인다. 이것은 결국 그 어느 경우에 있어서나 그들이 종족의 혼령에 속하여 전적으로 그 지배를 받기 때문에 그의 행동이 자기의 성격과 조화가 되지 않는 데 이유가 있다.-81쪽

때때로 사랑은 애인에 대한 증오심과 타협하는 경우가 있는데, 플라톤은 그것을 '양에 대한 늑대의 사랑'에 비유하였다. 이 경우에 본인이 아무리 애써 결심하여도 사랑에 빠진 개체는 도저히 그 냉정한 소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법이다.
'나는 그녀를 사랑도 하고 미워도 한다.'(셰익스피어)ㅡ이런 경우에는 애인에 대한 증오심에 불타 드디어는 살해하여 버리고 자기도 자살하는 일까지 생긴다.-83쪽

흥미는 작자가 우리들에게 이데아를 인식시키려고 묘사한 정경을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128쪽

일반적으로 무엇이고 자기에게 부합되지 않는 일, 부주의에서 일어난 일, 졸렬한 일, 우매한 일을 하게 되면, 나중에 몰래 마음을 깨무는 벌레, 마음을 찌르는 가시가 나타나게 마련이다.-134쪽

낙천주의의 근원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면, 세계의 유일한 제1원리인 '살려는 의지'가 조성한 현상을 거울에 비쳐보고 자기의 모습에 현혹되어 멋대로 떠드는 찬사의 일종에 지나지 않는다.-145쪽

직업은 하나의 가면에 불과하며, 거의 모두 그 밑에 돈벌이꾼이 숨어 있다.-159쪽

그런가 하면 가면무도회의 도노천처럼 일반인이 어디든지 갖고 다니는 가면이 있다. 예컨대 의리, 예절, 그럴 듯한 동정, 히죽히죽 웃기를 잘하는 우정 등이 그것이며, 그 밑에는 품팔이꾼, 장사꾼, 사기꾼이 숨어 있다.
그리고 보면 가장 정직한 층은 상인이다. 그들만은 돈벌이라는 가면을 쓰지 않고 돌아다니며 사회적으로 알맞게 낮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160쪽

만일 어떤 사람에게 이용 가치가 많으면 그런 이쪽의 생각을 그의 앞에서는 마치 죄라도 되는 듯이 숨겨둘 필요가 있다. 이러한 속임수는 유쾌한 일은 못 되지만, 거기에는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개는 귀여워만 하면 이쪽을 주인으로 알아주지 않는 법이다. 인간에게도 이와 같은 버릇이 있다.-161쪽

세상 사람들은 흔히 대인물의 도량이 너그러움을 찬양한다. 그런데 이 관용은 타인에 대한 깊은 모멸에서 비롯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하여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가 이 모멸감에 가득 차게 되면 주위의 인간을 자기와 동등하게 보지 않으며, 그들에게는 자기 자신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을 바라지 않게 되어, 마치 우리가 다른 동물이 미욱하고 지각 없음을 탓하지 않는 것처럼, 세상의 속물들에게 아량을 베풀게 되는 것이다.-163-164쪽

이 세상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거처이지만, 그것은 개개인의 견해와 태도에 따라서 다르게 보이며, 두뇌의 차이에 따라서 별개의 세계로 간주되는 것이다. 즉 다시 말하면 주관의 작용에 따라서 혹은 빈약하고 공허하고 평범한 것으로 보이며, 혹은 풍부하고 다채롭고 의미심장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 사실을 잘 입증하는 것은 괴테나 바이런의 시로서, 그 소재는 현실에허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지만, 둔한 독자들은 이 시인들의 뛰어난 관찰력이나 상상력에 의해 일상 생활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중에서 아름다운 시의 소재를 발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저버리고, 오직 이들만이 이런 시적인 사건에 접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이유에서 우울한 사람은 곳곳에서 비극을, 명랑한 사람은 희극을, 무관심한 사람은 무미건조한 광경만을 바라보게 마련이다.-168쪽

세속적인 사람들은 재물, 지위, 아내, 자식, 친구 그리고 서클 회원 등등 자기 이외의 것에서 행복을 구하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없어지거나 자기의 기대에 어긋나면 그 행복도 곧 사라져 버린다. 결국 이들의 생활 태도는 자기의 중심을 자기 밖에 두고 있는 셈이다.-194쪽

'명예는 목숨보다 더 소중하다'고 떠드는 것은, 자기의 존재나 행복은 있으나마나 하고 자기에 대한 제3자의 견해만이 가장 소중함을 의미한다.-213쪽

자기가 남의 호감을 사고 있다는 확신만큼 삶에 대한 활기를 북돋아 주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자기에 대한 남들의 호감은 이윽고 애호와 협조를 은연중에 기대할 수 있으며, 자기 하나만의 힘보다 다수의 힘이 인생의 재난을 당하였을 때 훨씬 더 큰 의지가 되기 때문이다.-222쪽

나는 내 생각대로 말하고, 남들은
그들의 취미대로 삶을 즐긴다.
이는 또한 이것대로 족하나니
개에게는 개가, 소에게는 소가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에피알모스-283쪽

산 너머 바다 건너 두루 다녀도
장소가 다를 뿐, 마음은 언제나 한결같도다.

-호라츠-249쪽

비관적인 눈으로 이 세상을 일종의 지옥이라고 간주하고 그 불길이 미치지 못하거나 가책을 받지 않는 사람은 이치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다. 우매한 자들은 쾌락을 찾아 번번히 실패하고, 현명한 사람은 실재적인 재앙을 피하고 비실재적인 쾌락을 구하지 않으므로 절망에 빠지는 일이 없다.-254쪽

한 인간이 누리는 행복이 어느 정도인가를 측정하려면, 그 즐거움보다도 우환을 살펴보아야 한다. 우환의 내용이 사소할수록 그가 누리는 행복은 크기 때문이다. 즉, 사소한 일에 대하여 한탄하는 것은 어느 정도의 행복을 이미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큰 불행이 닥치면 사소한 걱정은 거들떠볼 경황이 없는 것이다.-259쪽

현재에 대하여는 세네카가 말한 바와 같이 '하루는 생애의 한 토막이요, 한 토막이 곧 생애이다'라고 생각하여, 현재라는 유일한 실재를 되도록 즐겁게 보내야 한다.-265쪽

반성과 지식만 풍부하고 경험이 적은 것은, 책 한 페이지에 본문이 두 줄인데 주석이 40행이나 있는 것과 같으며, 반성과 지식이 따르지 않는 산만한 경험은 주석이 없어 뜻을 알 수 없는 책, 예컨대 저 지폰트 판으로 된 고전 총서와 흡사하다.-268쪽

인간은 추우면 서로 비벼대며 몸을 녹이기도 하는 것처럼, 사교도 피차에 전신적인 체온을 나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자기 정신에 충분히 온기가 있는 자라면, 이런 마찰을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교적인 자는 대체로 지능적인 진가가 없는 자이며, 비사교적인 자는 뛰어난 인물임을 의미한다고 보아도 틀림이 없다.-274쪽

인간의 행`불행에 관한 모든 일에 자기의 상상력을 되도록 억제해야 한다. 더구나 상상력을 동원하여 공중누각을 쌓아서는 안 된다. 이보다 더 큰 낭비가 없으니, 그 누각은 곧 한숨을 토하여 자기 자신을 괴롭히게 된다.-285쪽

그런데 이 활동적인 본능을 질서있게, 따라서 가장 유효하게 만족시키려면 적당한 절제가 필요하다. 이 활동ㅡ무엇에 종사하고, 무엇을 만들며, 적어도 무엇을 배운다는 것은 행복 없이 못할 요건이며, 인간은 활동을 요구하고 활동에 의해 어떤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 본능적인 욕구이다. 그리하여 이 욕구를 가장 크게 만족시키는 것은 바구니건, 책이건 어쨌든 무엇을 만들고 성취하는 일이며, 가장 직접적인 행복을 가져오는 것은 자기 손에서 일이 착착 진척되고 날로 완성되어 가는 것을 목격하는 일이다.-289쪽

남에게 사기를 당한 돈은 가장 유효하게 쓴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로 인하여 분명히 '조심'을 샀기 때문이다.-321-322쪽

'장단을 치지 말고 말하라'라는 오랜 처세의 가르침은, 자기가 할 말만 요령있게 하고 그 해석은 남에게 맡기라는 의미이다. 일반 사람들은 이해력이 부족하므로, 그들이 해석을 내리는 것은 그 이야기를 한 현장에서 떠난 연후의 일이다. 이와는 달리 장단을 치며 말하는 것은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되므로 당장의 일시적인 효과는 있어도, 분명히 영구적인 효과는 거두지 못한다.-322-323쪽

옜날에 누가 인생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으로, 지혜와 힘과 운명의 셋을 들었는데, 이것은 실로 정당하 견해이다. 나는 그 중에서 특히 운명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고 싶다. 즉, 인간의 생애는 하나의 항해와 같은 것이며, 여기 대하여 바람의 역할을 하는 것을 우리는 운명ㅡ시운이니, 행운이니, 혹은 불운이지 하고 부르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길이 급속히 앞으로 밀려 나가거나 뒤로 후퇴하는 것은 그 때문이며, 여기 비하면 우리 자신의 노력이나 능력은 대단히 허무하여, 다만 노의 구실을 할 뿐이다. -323-324쪽

마치 계절에 있어서의 봄처럼, 인생의 봄에 있어서도 해가 너무 길어서 지루한 경우가 있을 정도이지만, 드디어 인생의 가을에 접어들면 낮은 짧아만지는 대신에 청명한 날씨가 계속된다.-340쪽

여행의 그 1개월은 가정생활의 4개월보다 더 길게 느껴진다.-344쪽

대체로 비유해 말하면 생애의 전반기 40년은 본문이고, 나중 30년은 거기에 대한 주석이다. 우리는 이 주석에 대하여 비로소 본문의 진정한 의미와 관련성, 그리고 전반적인 대의와 묘미를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34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