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과 관련하여 앞서 올렸던 글(이전글 링크)의 '사례 1'에는 논지를 좁히기 위해 부러 언급하지 않았던 여러 문제가 있다.


"사례 1. 결혼을 했고 아이가 있는 여성 직장 동료들에게서 아이 돌봄과 가사 도움에 지불하는 비용이 급여와 거의 비슷하다는 한탄을 들을 때가 있다. 밖에 나와서 번 돈을 그냥 고스란히 가져다 바치는 격이라고. 경제적인 부분만 생각하면 그냥 집에 있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고."


그 중 하나는 왜 이런 고민을 여성만 하냐는 것이다. 왜 '부불가사노동'과 '부불가사노동+임금계약노동' 사이에서 명시적, 묵시적으로 선택을 강요받는 게 주로 여성이냔 말이다. 여기에는 물론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이 책에서 찾을 수 있는 이유는 임금노동시장의 구조가 여성에게 불리하게 설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성과 남성은 같은 일을 하고 차등적인 임금을 지불받는다. 성별 임금 격차 탓에 남성이 임금노동시장에서 돈을 벌어 오고 여성이 부불가사노동을 하는 것이 가족 단위에서 경제적 이득을 높이는 선택이 된다(이하 1번과 3번 참고).


현재의 구조 내에서 가능한 선택을 네 가지로 단순화해보자. 현실의 성별 임금 격차(관련기사 링크)를 고려해서 남성 임금노동의 값을 100, 여성 임금노동의 값을 70, 가사노동의 값을 0이라 가정하자.


1. 남성(임금노동) + 여성(가사노동) = 100

2. 남성(임금노동) + 여성(가사노동+임금노동) = 170

3. 남성(가사노동) + 여성(임금노동) = 70

4. 남성(가사노동+임금노동) + 여성(임금노동) = 170


경제적 가치로 따지자면 2번과 4번이 같은 효용을 내지만, 한쪽 성별에 대한 착취의 정도로 따지자면, 2번은 여성에 대한 착취의 정도가, 4번은 남성에 대한 착취의 정도가 가장 높을 것이다. 현실에서 왜 1번과 2번이 흔하고, 3번과 4번이 희귀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현 구조를 뒤엎지 않는 한 이런 상황에서 가장 현명한 선택은 여성이 가사노동만 하는 것일 수 있다.


(108) "취업"을 남성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주요 조건으로 상정할 경우 집 밖에서 일하기를 원치 않는 여성들을 소외시킬 수 있다. 이들은 가족들을 돌보느라 충분히 힘들게 일하고 있고, 만일 이들이 취업을 한다면 이것이 해방의 경험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돈이 필요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일자리를 갖는다고 해서 결코 가사노동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밥부터 먹을래요? 영화부터 볼래요?"라는 제한적인 선택지가 주어질 때 우리가 해야할 일은 밥이 나을지 영화가 나을지 고민하는 게 아니라 "너랑 데이트 안 할건데"하고 틀 밖으로 유유히 빠져나가는 것이다. 물론 선택지 밖으로 나가기 위해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이 너무 많기는 하다. 대충 꼽아보아도, 자본주의, 세계화, 신자유주의, 유엔, 맑스.. 뭐 이 정도?


(134) 여성주의 운동이 국가가 재생산노동을 노동으로 인정하고 이에 대한 재정적 책임을 지게 하기 위해 투쟁했더라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얼마 안 되는 복지혜택들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가사노동문제"에 대한 신식민주의적 해법이 등장하는 일을 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여성주의 운동이 국가가 재생산노동에 임금을 지불하도록 강제할 경우 이는 가사노동의 조건을 개선하고 여성들 간의 연대를 구축하는 데 상당한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한국에서 양육과 관련한 가사노동에 국가가 지불하는 임금 격으로 볼 수 있는 제도는 크게 세 가지가 있는 듯하다. 보육료/유아학비(아이사랑카드), 가정양육수당, 부모급여이다. 가정양육수당과 부모급여는 계좌이체로 통장에 바로 입금되지만 보육료/유아학비는 아이사랑카드라는 바우처 카드를 통해 어린이집/유치원에 결제한 비용의 일부를 보조금 형태로 지원한다. 이중 보육료/유아학비와 가정양육수당은 상호보완적인 제도이다(자격요건에 따라 둘 중 하나만 지급된다). 즉, 아이를 어린이집/유치원에 보낼 경우 보육료/유아학비를 받을 수 있고, 어린이집/유치원에 보내지 않고 가정에서 양육할 경우 가정양육수당이 지급된다.


사실 이 제도를 살펴보게 된 것은 이전글에 달린 단발머리님의 댓글 덕분이다. "가사노동 임금과 관련해서는, 예전에... 10년 전쯤이었을 거에요. 아이를 집에서 돌보면 아무 혜택(?)이 없지만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면 해당 비용을 국가가 전부 보조해 주는 정책이 있어서, 엄마들이 아이들을 반강제적으로 어린이집에 맡겼던 일이 있었어요. 그 돈 엄마들 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거든요"라는 제보에 공분한 것이다.


실제로 2013년 3월 이전까지 보육료/유아학비의 지원대상을 살펴보면, '만 0-2세 전 계층(보육료만 해당), 만 3-4세 소득하위 70%, 만 5세 전 계층'으로 비교적 넓게 적용되는 반면, 가정양육수당의 지원대상은 '36개월 미만 차상위계층'으로 그 적용대상이 매우 좁은 것을 알 수 있다. 2013년 3월 이후로는 제도가 보완되어서 보육료/유아학비의 지원대상이 '만 0-5세 전 계층(유아학비는 만 3-5세만 해당), 양육수당의 지원대상은 '취학전 영유아 전 계층'으로 넓어졌다. 그러나 지원 금액에서 여전히 차이가 난다.


출처: 2013년 1월 25일 배포된 관련 보도자료


즉, 원치 않아도 정부 보조금 지원을 받기 위해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는 사태는 지원대상 확대 전 정책의 과도기에 양육수당 수령 자격요건에 해당하지 않아 (혹은 가정에서 양육하는 것보다 시설에 아이를 맡겨야 더 크게 보상해주는 제도적 성격 때문에) 발생했을 것이다.


몇몇 자료를 살펴보니, 과거 관련 복지제도의 수립과 시행이 출산/양육 부담을 줄여서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취업)를 늘리자는 방향이었다면, 최근의 정책 목표는 출산/양육 부담을 줄여서 일단 한 명이라도 낳게 하자로 바뀌고 있는 듯하다(미안합니다만.. 그래도 안 낳습니다).


(172) 따라서 사적 영역을 생산관계의 영역과 반자본주의 투쟁의 영역으로 재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낙태금지정책은 노동력공급규제를 위한 도구로 해독할 수 있고, 출산율의 급락과 이혼의 증가는 자본주의적 노동규율에 대한 저항의 사례로 독해할 수 있다. 개인적인 것은 정치성을 띠고, 자본과 국가가 우리의 삶과 재생산에 끼어들어 침실까지 침투하게 된 것이다.


노동의 가치는 오히려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거부를 통해 입증되고 창조되기도 한다는 점은 사회적인 법칙처럼 보인다. 재생산노동을 자신들의 타고난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여성들의 운동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보이지도, 가치가 매겨지지도 않은 채 방치되어 있던 가사노동의 사례가 바로 이와 같았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부불가사노동의 중심성을 밝히고, 사회에 대한 우리의 상을, 노동자의 생산이 일 단위와 세대 단위로 이루어지는 가정이라는 플랜테이션농장과 조립라인의 거대한 순환으로 재구성한 것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전개된 가사노동에 대한 여성들의 반란이었다.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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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02-28 19:5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잘 정리된 글 잘 읽었습니다 먼지님. 아 이거 읽으니까 전에 “가임기 여성 지도” 이딴거나 만든거 보고 개빡쳤던 기억이.... 결론은 저도 응 안낳아

책먼지 2023-03-01 00:11   좋아요 1 | URL
에휴.. 분노하기도 지친다.. 우리가 애 안 낳아서 망할 나라면 망해야죠 뭐. 어차피 이 지독한 시스템은 여자들이 애를 안 낳으면 안 낳는대로 결국은 또다른 착취형태와 대상을 찾을 듯요!!!

청아 2023-02-28 20:3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낸시 프레이저 <좌파의 길>읽고 있는데요. 거기에도 자본주의가
거의 공짜로 가져가는 자연 생태계조건, 부불 가사노동등이
식인적인 자본주의의 핵심적인 기반이라고 하더군요. 그럼에도 교묘하게 안그런척 하고 있고 그 반작용, 결과물을
자연의 역습과 출산률하락으로
모두가 되돌려 받는 것 같습니다.

우끼 2023-02-28 21:35   좋아요 4 | URL
와…. 리뷰 써주실거죠 기대하고 있어요

책먼지 2023-03-01 00:17   좋아요 3 | URL
적어주신 부분이 완전 이 책과 공명하는 것 같아요!! 저는 사실 자연이 훼손되고 기후가 급변해도 지구는 멀쩡하고 인간종만 멸종할 것 같고, 출산률이 하락해서 나라가 망할거면 망하라지의 입장이지만 그럼에도 다음 세대가 걱정되고 미안한 마음은 듭니다ㅠㅠ <좌파의 길> 안그래도 관심두고 있어서 보관함에 넣어두었는데 읽어봐야겠어요!!!

다락방 2023-02-28 21:2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는 페데리치 읽는 여성들을 좋아합니다!!!!!!!!!!! 영광있으라!!!!!!!!!

책먼지 2023-03-01 00:20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 내일 삼일절이라 오늘 달리셨군요??? 일단 아멘입니다ㅋㅋㅋㅋ

우끼 2023-02-28 22: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세히 정리해주셔서 감사드려요!!!

책먼지 2023-03-01 00:25   좋아요 1 | URL
이렇게 말씀해주시니 정리한 보람이 있습니다💕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2023-03-01 0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01 0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쟝쟝 2023-03-01 01:0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혹시 책먼지님 정치를 하실 생각은…?😍 (분석력 반해버림)

책먼지 2023-03-01 09:15   좋아요 1 | URL
그곳은 논리와 분석력이 통하지 않는 곳인 듯합니다만.. 보내주신다면 일단 여가부 없앤다는 인간들부터 드잡이하고🔥(아 근데 부대끼는 거 상상만해도 싫네요..)

자목련 2023-03-01 09: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쟝쟝 님 댓글에 한 표!

책먼지 2023-03-01 14:47   좋아요 0 | URL
소중한 한 표 감사드립니다..?? 제 선거구는 자목련님 계신 곳으로!!!

잠자냥 2023-03-02 1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거릿 생어의 여성과 새로운 인류>와 엮어서 이 글 읽으니 더 잘 다가오네요. 생어는 여성이 무지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사회적 재앙(재생산에만 몰두하는)을 불러오는 일에 동조해왔다고 보면서, 여성이 먼저 깨어야 한다고, 재차 여성이 깨어나야 함을 역설합니다. 현재 한국 사회 출생률 0.78인가요? 이 결과는 결국 유례없이 고등교육을 받은 세대인 현재의 한국 여성들이 이 사회가 재생산을 해봤자 자신에게 또 아이들에게도 아무런 이득이 될 것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자명하게 알고 선택한 당연한 수순이라고 봅니다. 그런데도 노예가 필요한 지배층의 저 늙은이 남성들은 출생률 높이기 위해서 어린이청을 신설하네 뭐네 하면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계속 헛다리만 짚고 있는 거죠. 0.78보다 더 떨어질 것입니다.

책먼지 2023-03-02 10:45   좋아요 1 | URL
자냥오별에 빛나는 그 책이군요!! <좌파의 길> 받고, 이 책도 받습니다!! 가장 최근 집계로 0.78이고 이게 옛날 동독 수준이라고 하더라고요?? 제대로 된 사회에선 나올 수 없는 수치라고요.. 그니까요 우리가 지금 얼마나 똑똑하고 현명한 최선의 결정을 하고 있는 건지 니들만 모르지!!! 실컷 헛짓거리하라고 놔두죠 뭐 더 떨어져도 정신 못차리고 헛발질하겠지 에휴..

잠자냥 2023-03-02 11:30   좋아요 1 | URL
지금 한국은 더 망가지기도 어려울 정도로 망가진, 제대로 된 사회가 아니니까요.
최재천 교수도 현재 한국 여성들이 진화학점 관점에서 봐도 아주 현명한 선택을 하고 있는 거라고....ㅎㅎㅎㅎ

책먼지 2023-03-02 11:53   좋아요 1 | URL
저 그 유투브 영상 너무 좋아서 박수치면서 보다 사방팔방 공유했어요!! 최근에 나온 저서 <다윈의 사도들>도 궁금한데.. 조만간 책지름으로 보답하려고요!!!

단발머리 2023-03-02 23: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아... 책먼지님 페이퍼에 등장하다니 가문의 영광입니다. 안 그래도 다락방님이 ‘영광있으라!!‘ 외쳐주셨네요 ㅋㅋㅋㅋㅋㅋㅋ

너무 잘 정리해 주셔서 기립해서 읽었습니다. 현재 구조 내에서의 가능한 선택 1, 2, 3, 4가 너무 인상적이었구요. 또이또이(0점?!)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한국의 기혼 여성들은 결국 일을 그만두고 가사노동에 전념하게 되지만 적지 않은 기간 내에 아이들 학원비의 압박으로 다시 저임금, 파트타임의 불안정한 일자리로 쫓겨나는 현실을 목도한 똑똑한 여성들의 위업, 출생률 0.78. 이것도 예전일인데요. 어느 강의 자리에서, 정희진쌤이 출생률 1.2를 언급하시면서 .... 이건 정말, 회복되기 어려운.... (말을 못 이으심) 이렇게 말씀하셨던 기억이 나요. 말로 설명이 안 되는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네요.
책먼지님의 좋은 글을 오래오래 읽고 싶네요. 너무 즐겁고 행복합니다!!

책먼지 2023-03-03 09:39   좋아요 1 | URL
단발님 제가 무단으로 인용해서 혹시 폐를 끼친 건 아닌지 염려스러웠는데 통크게 받아주시고 또 이렇게 우쭈쭈 칭찬세례를 퍼부어주셔서 그야말로 영광입니다!! 다락방님 조금 취하셨던 거 맞죠?(소곤소곤)
제 글이 뭐라고.. 조목조목 요약정리까지 해주셔서 지금 막 얼떨떨합니다!!
1.2 때도 이미 희진쌤이 말잇못일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는데 더 떨어졌고 더 떨어지리라는 것이죠..? (심지어 하락세가 가파른 것 같아요)
저 여러 플랫폼에서 방황했는데 이제 그만 방황해도 될 것 같아요ㅠㅠ 단발님을 비롯해 이미 오랜 기간 차곡차곡 글을 쌓아올려두신 알라디너 분들의 어깨에 서서 오래오래 머물고 싶은 마음..💕 (투비 때문에 어수선해보이긴 합니다만..)
좋은 코멘트로 제 생각을 넓혀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겁고 행복하다는 말씀에 제 하루가 밝아집니다🥹

단발머리 2023-03-03 10:14   좋아요 2 | URL
아이고, 그럴리가요. 여기 알라딘 세상은 서로의 글과 댓글을 인용하고 보충하고 질문하고 답하는 지식 공동체로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죄송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

먼댓글이라고 아시나요, 책먼지님? 책먼지님의 글에 제가 댓글을 달고 싶은데 내용이 너무 길면 따로 페이퍼를 쓰고요, 책먼지님의 글을 제 글의 먼댓글로 지정하면, 두 개의 글이 연결됩니다. 물론 자기 글에 자기 글을 연결해도 되고요 (제가 자주 씁니다. 새 글 쓰기 힘들때요 ㅎㅎㅎㅎ)
서로의 레퍼런스가 되는 알라딘 월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역사는 물론이요. 패션, 커피, 알라딘 굿즈 심지어 오늘의 날씨까지. 뭐든지 물어보면 답이 나오는 동네가 알라딘입니다. 이 책 살까요? 하고 물으시면, 그 책 사야하는 이유 5가지와 사지 말아야할 이유 5가지를 동시에 얻으실 수 있는....
책먼지님의 멋진 활약 기대합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네요.
책먼지님의 좋은 글을 오래오래 읽고 싶어요!!

책먼지 2023-03-03 15:19   좋아요 1 | URL
단발님 제 하트 천만개 받으세요!!! 이 살뜰한 환영에 몸이 떨립니다🥹 알려주신 먼댓글도 유용하게 사용해보겠습니다!! 오래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