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함께 대전에 있는 계족산 그러니까 닭 다리산에놀러 갔다. 14.5 km가 황톳길로 조성된 특이한 곳이다. 어쨌든 남들이 하는 대로 맨발로 황톳길을 따라서 한 30분 정도 걸었을 때였다. 출판사에서 문자가 왔는데 <고전적이지 않은 고전 읽기> 2쇄를 찍어야 하는데 초판에 오탈자가 있으면 알려달라는 소식이다. 


반가운 마음에 냉큼 전화를 걸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전화를 끊었다. 아내가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별생각 없이 ‘내가 낸 책(제목을 알려줘 봐야 아내는 모른다. 내가 숱한 책을 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관심이 없어서 그렇다)이 2쇄를 찍는다는군’이라고 대답을 했다. 아내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뭐, 당신이 낸 책이 2쇄를 찍는다고?”


그러니까 내가 낸 허접한 책이 2쇄를 찍는다는 것이 어이없다는 것이다. 이어진 말이 더 가관이었다.


“아니, 대체 초판을 몇 부 찍었길래 2쇄를 찍어?” 

“한 오십 권찍은 거야?”


나의 출간에 관해서 아내가 무시하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다. 사실 나 자신도 내가 ‘작가’라고 불릴만한 사람인지 회의적이며 이 일에 대해서 아내가 무관심 하는 것이 편하기도 하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쓴 책이 초판을 50부라고 말하는 것은 임계점을 넘는 발언이다.


 물론 점잖은 아내의 입장에서는 기특한 일이긴 한데 멋쩍어서 농담을 한 것은 알지만 말이다.아내의 한 마디에 분기탱천한 나는 이렇게 말해버렸다.


“이봐, 오십 권이 아니고 이천권이라고. 이천권”


이 말이 발화된 순간 후회가 밀려왔다. 50권이 아니고 2천 권이라는 사실 때문에 나의 은밀한 판도라의 상자는 막 열릴 참이다. 그동안 아내의 무관심에 힘입어 저술 활동으로 번 돈으로 아내에게 눈에 띈 배분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쁜 예감은 항상 적중한다.경사도가 높은 코스라 숨을 헐떡일 만도 한데 아내는 차분하고 명확한 목소리로 이렇게 묻는다. 


“그 책 가격이 얼마야?” 


머뭇거리면서 1만4천 원이라고 대답을 했다. 다음 질문이 이어졌다.


 “그럼 권당 당신한테 지급되는 인세가 얼마지?”


 이 대목에서 체포를 암시하며 자수하라고 은근히 압박하는 수사관 ‘포르피리온’를 대하는 주인공 ‘라스콜니코프’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더 올라갈 곳이 없는 나뭇가지를 붙들고 있는데 표범에게 이미 뒷다리를 물린 나무늘보가 바로 나였다. 모든 것을 체념하고 사실대로 책값의 10%라고 말했다. 아내는 더 질문을 하지 않았다. 대신 혼잣말이 이어졌다.


“그럼 한 권에 1,400원이군.”


“아까 초판을 2천 부 찍는다고 했지? ”


“그럼 초판이 다 팔리면 인세가 24만 원? 아니 28만 원인가?”


영어 선생인 나나 국어 선생인 아내나 1400X2000이일초 만에 암산이 되지 않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어이없는 계산을 하는 아내를 보고 안도감보다는 수리계측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아내가 안타깝기까지 했다. 어쨌든 잠시 뒤에 아내는 정답을 찾았다.


“아, 280만 원이구나”조용히 아내의 처분을 기다렸다. 어쩌겠는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아내의 말이 이어졌다.


“음. 작가가 책을 써서 돈을 버는 것이 참 어렵군. 몇만 권은 팔아야 돈을 좀 벌겠는데”


갑자기 산 공기가 시원해졌고 발걸음은 가벼워졌다.



황톳길을 걷기 사직한 지 한 시간이 훌쩍 지났고, 산 아래에서 4.5km 정도를 걸었다. 마침 시원한 음료수를 파는 할아버지를 만났다. 놀랍게도 그 할아버지는 산 입구에서 지게로 물건을 이고 와서 팔고 있었다. 아내는 생수를 나는 생수를 샀다


. 땀으로 축축해진 만 원짜리 지폐를 조심스럽게 건넸는데 할아버지는 주섬주섬 잔돈을 챙기신다. 팔천 원을 내주신다.아무 물건도 없이 맨몸으로 걷기에도 쉽지 않은 거리인데 연로하신 할아버지가 지게로 이고 온 물건인데 가격이 너무 평범해서 멍하니 한참을 할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서 있었다.


 할아버지가 건네주신8천 원을 송구해서 냉큼 주머니에 다시 넣지도 못한 채였다.할아버지는 그런 나를 바라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8천 원 내 드리면 맞지요?”


황망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아무말도 생각나지 않았고 이제 막 평지로 들어셨는데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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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9-08-10 13: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따뜻한 마음 가지신 작가님. 2쇄 축하드립니다. 아내분 바람대로 몇 만권 기원합니다. ^^

박균호 2019-08-10 15:29   좋아요 0 | URL
음...그냥 걸어가기도 힘든 산길을 그 무거운 걸 지게로 옮겨서 파는 건데 편의점 가격이랑 별 반 다르지 않아서 마음이 좀 아프더라구요.. 제가 특별히 마음이 따뜻하지는 않은데 연로하신 할아버지라서 좀 그랬애요...축하 감사합니다..

chagall 2020-09-23 0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선생님이셨네요, 작가님.
집콕 독서를 읽다가 직접 쓰신 글이 있어서 혼자 반가운 마음에 댓글 남기고 갑니다. ^^

박균호 2020-09-23 05:48   좋아요 0 | URL
일찍 일어나셨군요....제 부족한 책도 읽어주시고 ㅎ 정말 감사해요.
 
언어사춘기 - 주인의 삶 vs. 노예의 삶, 언어사춘기가 결정한다 푸른들녘 교육폴더 8
김경집 지음 / 들녘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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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플라토닉 사랑을 나누는 편이다. 독서가는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육체적인 사랑을 나누는 부류도 있고 플라토닉 사랑을 나누는 독서가도 있다. 책을 읽으면서 마구 접고, 속지에 메모를 휘갈기며 필요하면 찢어서 메모지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책과 육체적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이다. 나처럼 플라토닉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은 오늘 읽고 있는 책을 내일 재활용 통에 버릴지라도 내지를 접지 않고, 메모하지 않으며 심지어 띄지도 고스란히 제자리에 둔다.

김경집 선생의 신간 <언어 사춘기>도 당연히 조신하게 읽기 시작했다. 인문학자가 쓴 책이니 이론적이고 철학적인 깨우침을 주는 책으로 생각했다. 나의 플라토닉 사랑은 금방 격렬한 육체적인 사랑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참신하고 신선한 통찰력이 넘치는 구절이 많아서 차분하게 수첩에 메모할 여유가 없었다. 

연필로 마구 밑줄을 긋고 내지를 접어가며 꼭 실천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어떤 구절에서는 내 자식이 청소년기였을 때 이 책을 읽었다면 얼마나 좋았느냐는 한탄을 했다. 하다 못해 내 자식이 10대 전후 때 이 책을 읽었다면 얼마나 좋았느냐는 한탄을 했다. <언어사춘기>는 사변적인 책이 아니다. 다분히 통찰력이 번득이고 실천을 하게 하는 책이다. 대학 시절 ‘나의 언어의 한계는 곧 세계의 한계다’라는 말을 좋아했었다. 언어와 문학을 전공하는 학생으로서 막연히 좋아한 말인데 <언어사춘기>를 읽고 나서야 비로소 왜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인지 알게 되었다. 아울러 언어의 한계를 넓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언어 사춘기’라는 말에 대한 설명이 먼저 필요하겠다. 신체의 발달단계뿐만 아니라 사람의 언어의 발달 단계에도 아동과 성인 사이에 사춘기가 존재하는데 이를 ‘언어사춘기’라고 한다. 아동의 말은 길이가 짧고, 형용사와 부사의 사용이 빈도가 낮으며 욕설도 많이 섞여 있다. 어른의 언어는 그 반대다. 감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짧은 언어가 아니고 관념과 개념의 언어다.

아이의 언어보다는 어른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어떤 형태로든 성공적인 삶을 살 가능성이 당연히 높다. 논리적이고 현명을 판단을 할 확률도 높다. 대략 10세 전후에 형성되는 언어 사춘기는 당연히 어른의 언어를 습득하는 최적의 시기인데 이시기를 놓치면 어른의 언어를 습득할 확률이 낮아지고, 어른의 언어가 지닌 의미 있는 생활과 인생을 누릴 수 없는 가능성이 낮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어사춘기>는 당신의 자녀가 어른의 언어를 습득할 수 있도록 도울 방법을 제시한다. ‘언어 사춘기’라는 용어가 참신하듯이 이 책의 저자 김경집 선생이 제시하는 방법은 독특하고 신선하며 창의적이다. 김경집 선생이 말하는 어른의 언어를 습듭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독서다. 그러나 부모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상황인데 아무리 독서의 중요성을 노래 불러봐야 자녀가 읽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사실 요즘 아이들에게는 책 말고도 재미있는 매체가 너무 많다. 영상이나 시각 매체에 대한 과도한 몰입 때문에 어른의 언어로 도약하기 힘든 요즘 아이들을 위한 김경집 선생이 알려주는 꿀 팁 하나를 소개한다. 자식들이 사용할 교과서를 2권 구매한 다음 진도에 맞춰서 미리 읽는다. 학창 시절 기억을 떠올리며 그 당시 중요했던 개념이나 어휘를 생각해내고 노트에 옮겨 적은 다음 아이들과 대화를 할 때 의식적으로 그 개념이나 어휘를 사용한다.

자연스럽게 아이들에게 생소한 개념이나 어휘를 부모와의 대화를 통해서 노출하는 것이다. 아이는 학교에서 부모가 대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알려준 어휘나 개념을 떠올리고 수업 내용을 친근하게 느낄 것이다. 교사로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느낀 것은 각 교과에 사용되는 어휘나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학업 성취도가 낮은 학생일수록 사전적인 의미 자체를 모른 경우가 많았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교과서에는 어른의 언어가 주로 사용된다. 독서를 통해서 어른의 언어를 습득하지 못하면 학업에 흥미를 잃는 경우가 많은 것은 자명하다. 아이들에게 낱말을 만져보게 하면 이해력과 공감 능력 뿐만 아니라 상상력도 크게 향상된다는 김경집 선생의 주장도 소중하다. 

나만 해도 그렇다. 어린 시절 재미나게 읽었던 서양동화에 등장하는 많은 서양 물건이나 지명을 만져 보지 못해서 얼마나 아쉬웠는지 모른다. 1970년대 산골에 사는 소년이 읽는 동화 속 명사 중에서 실제로 보고 듣고 경험하지 못한 것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실물을 보고 구경하지 못하더라도 도감이나 지도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그 단어를 만지게 할 수 있다. 그래서 도감이나 지도가 중요하다. 나는 아이들의 교과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사회과 부도’라고 생각한다. 

내킨 김에 ‘도감’을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인터넷 서점에 ‘도감’을 검색했다. 실제로 다양한 분야의 도감이 검색되었다. 정신없이 장바구니에 담다 보니 서글픈 사실을 알게 되었다. 탐나고 진귀한 도감은 대부분 일본에서 출간되었더라. 생물이나 지리 역사 같은 보편적인 분야뿐만 아니라 <아저씨 도감>, <남편 도감>, <일자리 도감>, <세계의 샌드위치 도감>, <소련 전차 군단 도감>, <맥주 도감>도 모두 일본 작가의 책이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나온 좋은 도감도 많았지만 주로 소재가 우리나라의 것으로 국한된 것이 대부분 이었다. 김경집 선생의 독서론은 뻔하지 않아서 좋다. 휴가 때 책을 한 권 들고 가서 반만 읽고 그다음 내용을 궁금해 하면서 복귀하고 나머지를 읽기를 권한다거나, 자신만의 공간이 아닌 남들이 보라는 식으로 많은 사람이 있는 공간에서 읽으라는 등. 

지난주에 이제 막 한참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를 둔 학부모에게 좋은 책을 추천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대답을 하지 않았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기 때문에 내가 추천한 책이 당사자에게는 재미가 없는 책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덮고 나서 생각이 바꿨다. <언어 사춘기>를 권하기로 했다. 이 책으로 아이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책을 읽지 않으면 나처럼 땅을 치고 후회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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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살면서 불편한 것 중의 하나가 ‘선을 넘어 오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외국에 여행만 했지 본격적으로 살아 본 적이 없어서 외국의 사정은 정확히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사정은 그렇다. 다른 사람의 사생활에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는 일, 공공장소에서 소란스럽게 하는 일이 선을 넘는 대표적인 행위가 되겠다.


남들이 생각하는 적당한 나이에 적당한 자리에 취직을 한 것 까지는 좋았는데 딸 하나만 두는 여지를 주는 바람에 적잖은 오지라퍼에게 시달리긴 했지만 유독 내가 참지 못하겠는 것은 카페나 식당에서 소란스럽게 대화를 하는 사람들이다. 내 사생활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싫어하듯이 굳이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강제로 듣고 싶지 않다. 


주말에 모처럼 가족들과 외식을 했다. 서울 한복판에 있는 백화점 식당가에서 밥을 먹으려니 마침 식사시간이라 그런지 빈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한 참을 기다리다 마침내 빈자리를 발견하고 간신히 세 식구가 앉아서 식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옆자리 대여섯 명의 어린아이들이 창가에 기대서 노래를 부르고 논다. 유치원생쯤 나이로 보였다. 


상당히 고층에 위치한 식당이라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는 창가로만 가도 아랫배가 찔끔하는 공포가 느껴지는데 어린아이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아이들은 씩씩하고 노래를 합창단처럼 부르고 젊은 엄마들은 박수를 치며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어차피 대화를 하기 위해서 식당을 간 것도 아니고 아이들이니까 좀 소란스러워도 그러려니 했다. 


갈수록 아이들의 공연은 격렬해졌다. 엄마들의 열띤 호응이 아이들을 춤추게 했나 보다. 이젠 관중들에게 팬 서비스를 하려는지 의자 위를 뜀박질을 하면서 노래와 율동을 선보였다. 소란스러웠지만 어쩌겠는가. 다만 아이들이 의자 위를 뛰어다니다가 다치지는 않을까 염려스러웠는데 아이들의 엄마들은 제 자식들의 운동신경을 무척이나 신뢰하는 모양이다. 연신 박수를 치고 즐거워한다.


아이들의 공연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다른 아이들의 엄마가 봉투 꾸러미를 두어 개 들고 왔다. 별 생각 없이 보았는데 먹거리를 꺼내는 것이 아닌가. 때마침 식당 직원이 득달같이 달려왔다. 그 직원의 말은 외부 음식을 반입해서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러니까 도합 4명의 젊은 엄마들은 복잡한 식사시간에 식탁 3개를 임의로 합쳐서 10명에 가까운 엄마와 아이들이 앉을 자리를 마련한 다음 외부에서 가져온 음식을 그 자리에서 먹으려고 한 것. 직원의 제지를 받고 엄마들은 모여서 긴급회의를 하더니 다른 장소를 정하고 그 식당을 떠났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자신들이 맘대로 붙여 놓은 식탁 3개를 원래의 위치로 되돌리지 않고 그냥 가 버린 것.


어제 모 여성 작가의 북 콘서트에 다녀왔다. 귀담아 들을 말이 많았는데 유독 인상적인 대목이 있었다. 이야기 거리 소재를 어떻게 발굴하느냐는 질문에 지하철이나 공공장소에서 다른 사람의 대화를 일삼아 듣는 다는 것. 특히 이별을 하는 연인이 있으면 일부러 자리를 뜨지 않고 귀를 기울여 다 듣고 온다는 것이다. 청중들은 다들 기발하고 재미나게 생각한 모양이다. 박장대소가 터져 나왔다. 물론 나도 참 귀엽고 재미난 분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식당이나 카페에서 호탕하게(?) 큰 소리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속으로 쌍욕을 하면서 부랴부랴 그 자리를 뜨곤 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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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9-07-29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공질서나 어떤 도덕 같은 면에서 개념이 없는 경우가 많죠 미국에서도 솔직히 백인아이들은 이런 교육이 잘 돼있고 나머지는 각양각색으로 엉망입니다 많이 배우고 말고 혹은 돈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근대시민의식 같은 면에서는 아직 많이 모자란 걸 느껴요 저도 공공장소에서 시끄러운 건 질색입니다

박균호 2019-07-29 12:28   좋아요 0 | URL
아..정말 끔찍한 사람들이었어요. 장사하는 분들은 보살이 되어야 할 듯 해요. 참 재미난 것은 요새 우리나라도 개인정보에 대해서 엄청 민감하잖아요. 근데 식당이나 카페에 있으면 더이상 개인적일 수가 없는 개인 정보를 내놓고 스스로 방출한다는 거에요..ㅎㅎ 몇 단계만 거치면 모두 알만한 사람이 되는 시골 동네 카페에서도 그렇더라구요.

moonnight 2019-07-29 13: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헐 굉장한 분들을 만나셨네요ㅠㅠ; 저 역시 식당이나 카페에서 떠드는 사람들 질색이에요-_-

박균호 2019-07-29 13:40   좋아요 0 | URL
네, 어떤 의미에서 굉장한 분들이더라구요 ^^

가지않은길 2020-05-03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카페나 지하철에서 외국인이 더 시끄럽게 떠드는 경우를 많이 봤는데 한국 사람들도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있으면 용기가 생기는 건지 아주 시끄러워서 질색이네요. 코로나도 있고 했으니 사회적 거리두기와 함께 선 넘지 않기가 생활화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박균호 2020-05-03 10:23   좋아요 0 | URL
네, 공공장소에서 남의 사생활을 강제로 듣는 것은 정말 곤역인데 말이죠. 편안하고 조용한 휴일 되시길 바랍니다.
 
제가 결혼을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이주윤 지음 / 한빛비즈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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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결혼을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는 참 잘 지은 제목이다. 너무 추상적이어서 책의 내용을 짐작할 수 없는 것도 아니고, 너무 가벼워서 속이 보이지도 않고, 너무 직선적이어서 상술이 보이는 것도 아니다. 제목도 그렇고, 표지에 있는 ‘시집가라는 잔소리 때문에 제 영혼이 아주 너덜 너들 합니다’라는 말풍선만 보아도 굳이 읽지 않아도 무슨 내용의 책인지 짐작이 된다. 나와 혈연관계가 아닌 성인이 결혼을 하건 이혼을 하건 관심도 없고 한 마디도 보탤 생각이 없다. 타인의 출산 문제는 더욱 그렇다. 


결혼이나 페미니즘 또는 성별의 역할과 관련된 ‘무쏘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든가 ‘나 혼자 잘 산다’는 류의 책을 읽지 않는다. 그런 책을 쓴 사람이 선택하고 좋아하는 삶을 존중하지만 관심도 없기 때문이다. 간혹 배타적인 원망이나 조소가 담겨 있는 것으로 예상되는 책은 더욱 기겁하는 편이다. 타협이나 대화의 여지가 없는 주의나 화자를 멀리한다. 


<제가 결혼을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는 제목은 배타적인 주장이나 불특정 다수에 대한 반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독자로 하여금 어떤 ‘속사정’이 있는 것인지 호기심을 자아낸다. 제목 그대로 결혼 제도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대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제목을 보자마자 바로 주문을 해서 도착한 책을 단숨에 읽었다.


직접 확인한 저자가 결혼을 하지 않는 속사정은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결혼을 해서 남들처럼 살고 싶지만 결혼하고 싶었던 남자들이 나와 결혼을 하지 않았을 뿐’이란다.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렇다고 부모에게 연애 실패담과 그동안 겪었던 ‘찌질이 열전’을 부모에게 구술할 수는 없잖은가? 아무리 부모자식관계라도 말 못할 속사정이 있는 법이다.


우리 부부는 무남독녀인 딸아이를 고등학교 3년 동안 학교에 데려다 주고 마치면 데리러 갔었다. 학교 정문이 아닌 학교와 붙어 있는 성당 앞 에 내려다 주고 데려왔었다. 그쪽이 좀 더 편리했기 때문이다. 그 성당은 학교 안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어서 딸아이도 그게 편하다고 했다. 아침엔 딸아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안쓰러워했고 밤에 데리러 갈 때는 반가웠고 함께 아이스크림을 사 먹는 것이 지금 생각해보니 큰 즐거움이었다. 


딸아이의 졸업식에 우리 부부는 나란히 성당으로 갔다. 딸아이가 우리 눈에서 매일 사라지던 그 성당 길을 걸어서 학교 안으로 들어가려했다. 성당 입구 쪽으로 걸어가는데 순간 당황했다. 성당에서 지그재그 형태로 아주 좁은 길이 나 있었고 그 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야 겨우 교정에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길은 우리 부부가 매일 딸아이의 뒷모습과 앞모습을 보았던 성당 앞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순간 눈물이 왈칵 나오려는 것이었다. 3년 동안 딸아이는 우리 부부가 모르는 또 다른 좁은 길을 걸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우리 부부가 학교에 도착했다고 생각한 그 시간에 딸아이는 그 좁은 길을 눈을 맞으며 걸었을 터이고, 바람을 이기며 걸었을 터이고, 매서운 추위에 옷을 여미며 걸었을 터였다. 입시 결과가 발표되면서 초반에 여러 대학에 잇달아 불합격하면서 학교에 가기 싫다던 딸아이는 그 길을 혼자 걸으면서 얼마나 괴로웠을까를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고등학교 시절 자주 방 안에 틀어박혀 말도 하지 않고, 짜증을 자주 냈을 때 우리 부부는 내심 섭섭했더랬다.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는데 딸아이는 고등학교 2학년 시절에 이미 엄청난 스트레스와 학업에 대한 고민이 극에 달했다고 한다. 우리 부부는 그런 속사정도 모르고 그저 짜증을 내는 딸아이를 걱정하고 적당히 눈치만 보았었다. 


이제 겨우 20살이 된 딸아이도 부모가 모르는 속사정이 많은데 30대를 넘긴 이주윤 저자는 오죽하겠는가? 역시 기대한 대로 이 책에는 저자의 재미난 연애담 뿐만 아니라 세상을 보는 따뜻한 시선이 가득했다. 애초에 그녀의 남다른 속사정과 진솔한 에피소드를 기대하고 <제가 결혼을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를 들었지만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이 숨어 있었다.


사과문

나를 만났던, 나를 만나는, 나를 만날 남자들에게 

깊은 사죄의 말씀을 전합니다.

지랄 맞은 성격에 지쳤던, 지친, 지칠 당신들에게

진심으로 미안합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아실런지요.

당신들은 나와 헤어지면 그만이지만

나는 이런 나와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요.


이주윤은 겸손하며 유머스럽고 따뜻하다. 


사람들 참 귀엽다. 안 그래도 먹고 살기 바빠 죽겠는데, 발걸음을 멈추어 이 작은 가계에 굳이 들어와, 온갖 수모를 겪어가며 피땀 흘려 번 돈으로, 사랑하는 누군가를 기쁘게 해주려 초콜릿을 사 가지고서, 총총거리며 그이를 향해 걸어가는 모습이라니,


세상을 이토록 따뜻하게 보는 사람이 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모처럼 글을 읽고 가슴이 따뜻해지는 경험을 한다. 모처럼 내가 읽은 책을 아내에게 건네줄 생각이다. 책을 읽고 나서 저자가 잘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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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에 아줌마 누벨솔레이 1
후카자와 우시오 지음, 김민정 옮김 / 아르띠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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훔친 책, 선물 받은 책, 읽고 나서 리뷰를 작성해야 하는 책은 모두 재미가 없다. 책을 훔치는 행위에 쾌감을 느끼기 때문에 막상 훔치고 나면 그 책을 재미나게 읽기가 힘들다. 선물 받은 책이 자신의 독서 취향에 맞을 확률은 높지 않기 때문에 재미가 없다. 리뷰를 쓰기 위해서 읽은 책은 즐거움이 아니라 숙제라서 재미가 없다.


 불행하게도 ‘후카자와 우시오’ 작가의 <가나에 아줌마>도 내가 고르고 내 돈을 주고 산 책이 아니고 리뷰를 작성하기 위해서 읽은 책에 속했다. 책을 읽는 것은 맛있는 음식을 먹고 배설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본능의 즐거움에 충실해야 그 본연의 맛이 제대로 느껴지는 법이다. 평범한 재일교포의 일상생활을 통해서 재일 동포사회의 고민과 애환을 그려낸다는 이 책의 콘셉트 또한 그다지 흥미를 끌지 못했다. 


재일 동포의 애환과 고충을 담은 소설이라면 이미 2006년에 읽은 ‘가네시로 카즈키’가 쓴 <GO> 를 통해서 궁극의 즐거움을 맛보기도 했다. ‘가네시로 카즈키’ 또한 ‘후카자와 우시오’ 작가와 마찬가지로 조총련계 재일교포 2세 작가라는 점도 굳이 <가나에 아줌마>를 통해서 뭔가 새로운 재미가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감소시키기도 했다. <가나에 아줌마>는 6개의 에피소드가 마치 단편소설처럼 엮어져 있는데 첫 에피소드는 재일 교포 사이에서 중매쟁이로 유명한 가나에 아줌마의 ‘업무’를 이야기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존경받는 선생님의 위치로 군림하는 중매쟁이 ‘가나에’가 중매 수수료뿐만 아니라 결혼과 연계된 행사를 자신과 제휴가 되어 있는 한복집과 호텔에서 치르게 하면서 수익을 극대화하면서 풍요롭지는 않으나 남부럽지 않게 산다는 전개였다. 역시 별다른 재미가 없었다. 이 책에 대해서 뭔가 쓰기는 해야겠는데 쓸 말은 없고 걱정이 왈칵 밀려왔다. 


출판사에서 보내준 보도자료를 참고해서 ‘신문 서평’이라도 써야겠는데 워낙 꼼꼼하지 않은 성격이라 보도자료도 어디에 두었는지 보이지 않는다.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다. 리뷰를 작성하기 위한 책은 재미가 없지만, 역설적이게도 꼼꼼하게 읽어야 한다. 분명 작가는 고심하고 집필을 했을 터이고, 나름의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무심히 두 번째 에피소드 <사주팔자>를 읽기 시작했다. 


중매쟁이에 이어서 이번엔 사주팔자를 보는 교포의 이야기다. 사실은 사주팔자를 보는 점쟁이 이야기라면 나도 장편은 아니라도 단편 소설 한 편 정도는 쓸 수 있는 경험을 가지고 있어서 더욱더 느슨하게 읽어 나갔다. 방심은 금물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뒤통수를 맞는 기분을 느끼다니.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별걱정 없이 노년을 즐기는 것으로 보였던 가나에 아줌마의 남편이 두 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해서 점쟁이에게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가슴 아픈 개인사를 고백했기  때문이다.


 이건 마치 추리소설 급의 반전이다. <가나에 아줌마>는 절대로 방심하면서 읽으면 안 되는 소설이다. 별다른 연관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등장인물들이 어느 순간 훅 들어와 전체 이야기의 짜임새를 견고하게 만들고 퍼즐을 완성하기 때문이다. 사주팔자 에피소드에서 내 가슴을 후벼 파고든 부분이 있었다. 가나에 아주머니의 남편이 오래전에 북한으로 가서 소식이 끊긴 외아들의 안부를 점쟁이에게 물었는데 점괘는 문제의 아들은 예순 이전에 갑자기 ‘픽’하고 운세가 끊기고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그러고 보니 가나에 아줌마가 악착같이 돈을 벌려고 하는 이유가 설명된다. 조총련에서 활동하는 아버지의 신념 때문에 북한에 간 아들의 생사도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아들을 위해서 송금을 해야 하고, 무능한 남편을 만나 고생하는 딸자식과 외손자를 지원해야 한다. 어쨌든 가나에 아줌마가 이미 북한에서 사망한 것을 알게 된 점쟁이는 사실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 가혹하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말한다. “저, 아드님은 현재 금전적 지원이 필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장성한 자식들이 모시고 있는 것 같습니다.”


 소설이라는 가상의 이야기 속에서 한 인물이 다른 인물에게 보내는 위로와 배려가 독자가 이렇게 따뜻한 위로가 된다니 참 신기한 일이다. 세 번째 에피소드 <돌잔치>는 ‘후카자와 우시오’ 작가를 적어도 심리 파악과 묘사에 있어서 천재라고 생각하게 된 부분이다. 가령 이런 문장들이 그랬다. 


스튜를 숟가락 위에 조금 얹어 입으로 가져간다. 마나가 만든 요리를 먹을 때는 주의할 점이 있다.  처음부터 한꺼번에 많은 양을 입안에 넣었다간 어떤 불상사가 생길지 모른다. 종종 상상을 초월한 맛이 날 때가 있다. 보니 자연스레 신중해졌다. 


스튜를 씹으며 숨을 멈췄다가 삼킨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뿜어버릴 것 같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맛이 이상해서 콧물이 나올 것 같다. 눈물도 날 것 같은 기분이다. 하지만 마나가 아까부터 계속 지켜보고 있는 탓에 다다키는 아무렇지 않은 듯 태평한 얼굴을 최대한 유지하며 스튜를 연달아 입으로 가져갔다. 마지막 한 입을 꿀꺽 삼킬 때까지 마나는 시선을 떼지 않았다. 


사실 소설속의 남편이 먹은 스튜의 정체는 이렇다. 이제 막 젖을 떼기로 작정한 아내가 모유를 버리기 아까워서 실험정신(?)으로 스튜를 만드는 재료에 포함한 것. 어쨌거나 세상에 여성 작가가 어떻게 이토록 세밀하게 남자의 심리를 잘 파악하고 묘사한단 말인가? 그것도 웃음을 참으려고 허벅지를 꼬집어야 할 정도로 재미나게 말이다. 일본에 사는 남자나 한국에 사는 남자나 어쩌면 이토록 남편들은 하나 같이 소심한지 감탄하게 된다. 


나의 경우를 말해보자. 아내와 냉전을 치를 때 내가 아내에게 보내는 최강의 메시지는 밥을 먹지 않는 것이다. 밥을 먹지 않음으로써나 자신이 먹고 사는 일에 초월할 만큼 화가 났다는 것을 아내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밥을 먹지 않는 것이야말로 남편이 가지고 있는 가장 비장한 무기다. 


냉전이 장기화할수록 화는 줄어들고 식욕은 고개를 든다. 그렇다고 밥을 먹을 만큼 나의 분노가 줄어 들었다는 것을 적에게 알려줄 수는 없다. 치욕스러운 일일뿐더러 냉전체제가 나의 백기로 마무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몰래 밖에 나가서 배를 허겁지겁 채우고 집에 들어와서는 배고픔 따위는 안중에 없다는 근엄한 표정을 짓는 것이 나의 필승전략이다. 


가정의 냉정이 늘 그러하듯이, 어이없이 갑자기 평화가 찾아온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아내는 돌아온 평화를 자축이라도 하듯이 진수성찬을 내놓는다. 가장의 권위와 그간 보여주었던 나의 분노의 진정성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서 ‘오랜만에 밥을 먹는다는 것을 잘 보여주기 위해서’ 최대한 맛있게 먹어주어야 했고 이미 포화상태를 초과한 내 위장을 괴롭혀야 한다.


 여기까지라면 그나마 참을 만하다. 냉전체제 동안 맛있는 음식을 아버지라는 경쟁자 없이 독식한 딸아이가 밥을 남겼고 아내의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오면 어쩌냔 말이다. “괜찮아. 밥 남겨도 돼. 아빠가 대신 먹어 줄 거니까” 


소설속의 두 집안이 합동으로 치루는 돌잔치에서 서로 돋보이려고 경쟁을 하는 장면을 읽다 보니 마치 삼국지에 나오는 적벽대전을 보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물론 사회경제적 위치가 열등한 우리의 주인공 부부가 돌잡이에서만이라도 이기려고 기를 썼지만 무심한 아들 녀석이 돈을 잡지 않고 제 아빠를 닮아 엄마의 가슴을 잡았다는 웃기고 슬픈 마무리가 기다리고 있었지만.


 이토록 사소한 소재로 이토록 거대한 긴장감을 느끼게 해주는 장면은 작가의 천재성을 다시 확인하게 해준다. 재일 동포 집안에 시집온 일본인 며느리의 고군분투기를 읽다 보니 나도 모르게 분노가 생긴다. 요즘 시대에 “우리 때는 제사를 지내고 나서 남자들과 밥도 한자리에서 못 먹었어”라고 며느리에게 말하는 시어머니라니. 


이 소설을 읽으면서 느낀 것인데 제일 동포들은 본토에서조차 구제도의 악습으로 치부되는 결혼관이나 시부모와 며느리의 관계나 제사 따위를 신줏단지 모시듯 한다는 것이다. 하긴 조총련 출신의 한국계 미국인이 자동차 번호로 “YANG BAN”을 선택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이야기가 결코 거짓이 아님을 알겠다.


 <가나에 아주머니>는 <GO> 를 비롯한 다른 제일동포작가들의 작품과 뚜렷이 차별된다. 중매, 사주팔자, 돌잔치, 제사와 같이 가장 한국적인 소재로 이야기를 전개해가지만 결국에는 결혼생활과 치매라는 전 인류적인 관심사로 귀결된다. 가나에 아줌마가 주인공이지만 가나에 아주머니와 연관된 주변 인물들이 모두 주인공이며, 사소한 일상생활의 이야기이지만 결국엔 인류의 관심사로 확대된다. 


이토록 치밀하고 유머 있는 소설은 처음이다.  한국의 재료로 요리한 ‘오만과 편견’이라고 본다. 내 욕심으로는 ‘오만과 편견’보다 더 윗길이다. 문학평론가 라면 다 읽기도 전에 리뷰를 쓰고 싶어서 조바심이 나는 책이다. 5분 간격으로 휴대폰을 확인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일지라도 지하철이나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서도 읽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이 책은 그런 책이다. 


그건 그렇고, 너무 재미나서 마구 밑줄을 긋고 짬뽕을 먹으면서 읽다가 책에 국물을 흘린 이 불충을 어찌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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