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단단함 - 세상.영화.책
오길영 지음 / 소명출판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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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단단함>은 영문학을 전공한 대학교수가 쓴 문화 에세이다. 오길영 선생이 쓴 이 책을 읽기로 결심하는 데는 약간의 주저함이 필요했다. 제목도 표지도 묵직하다. 결국 이 책을 읽기로 한 것은 오길영 선생이 SNS에 올리는 일상적인 글을 읽고 있자니 현학적이고 어려운 글을 추구하는 학자가 아니라는 알겠고, 문학 이론서를 주로 내는 <소명출판>이 출간을 결정했다면 '무슨' 이유가 있겠거니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단단함>을 읽자마자 망치로 뒤통수를 맞는 듯한 충격이 있었다. 가령 이런 '단언'이 그랬다.

첫째, 지금도 작가의 "불결'한 삶과 작품을 분리하는 케케묵은 독법을 내세우는 시각이 있다는 것, 자신의 무지를 그런 식으로 눙쳐서는 곤란하다. 그건 현대문학 이론의 동향에 눈 감은 채 수십 년 전 작품 물신주의를 신봉하는 것이다. 둘째, 여전히 미당의 추종자들이 많다는 것. 이 평론가는 일제 강점기를 "지금의 이북"과 동일시하면서 그때는 "비판의 자유"가 없었으므로 "일률적으로 친일파를 매도"해서는 안 된다고 아량을 베푼다.


대학교수가 쓴 말랑말랑하고 여유를 찬양하는 에세이거나, 그들만의 리그에서 사용하는 암호문의 나열인 것으로 오해하는 독자들이 없기를 바란다. 나도 그런 선입견이 없지는 않았지만 책을 다 읽고 덮었을 때는 '문화예술에 관한 실질적인 가치관의 정립과 방향'을 제시해주는 실용적인 책이라는 것을 알았다.

미당의 문학과 친일행위를 분리할 것인가? 라는 고민은 문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두는 사람이라면 평생에 걸친 고민이 될 수 있다. 나만 해도 '친일만 안 했어도'라는 말로 은근히 양다리를 걸치는 편이다. 이 문제를 두고 깊은 사유나 연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단언을 할 수 없었다. 

거창하게 예술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리는 티브이 드라마를 보면서도 비슷한 고민을 하게 된다. 가령 드라마 <야인시대>에 등장하는 자유당 부역자 임화수를 생각해보자. 그의 악행을 보면서 분노를 하지만 막상 사형을 앞두고 어머니와 면회를 하면서 임화수가 눈물을 쏟는데 내레이터가 "그는 보기 드문 효자였다고 한다"라는 멘트를 하면 마음이 흔들린다. 

집에서 효자인 임화수와 밖에서 독재 정부에 부역하는 임화수를 어떻게 정리를 할 것인지 잠시나마 고민을 하게 된다.<아름다운 단단함>을 읽은 독자라면 더 그런 고민을 하지 않게 된다. 맥락과 시각의 크기를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집에서 따뜻한 효자는 좁은 시각이고 민주주의라는 큰 시각에서 보면 독재정권의 부역자다. 

큰 시각으로 평가하자는 기준을 생각하면 한 사람을 어떤 카테고리에 포함해야 할지 고민이 되지 않는다. 세월호 비극을 두고 '아이는 또 있지 않은가'라든가 '또 낳으면 되지 않는가'라고 말을 하는 악마를 만나면 오길영 선생의 이 단언을 생각해보자.

윤리는 그 어떤 아이로 대체할 수 없는 "이 아이"의 존재를 인정하는 태도에 기반한다.


~다로 끝나는 단언의 글은 우연히 나오지 않는다. 수년간의 각고의 노력과 사색이 필요하다. <아름다운 단단함>에는 ~다로 끝나는 오길영 선생의 단언과 정의가 가득하다.

사생활을 들먹이기 시작하면, 아마도 세계문학사나 영화사에서 살아남을 작가나 감독, 배우, 예술가는 거의 없을 것이다. 도덕군자이면서 뛰어난 작가, 감독, 배우, 예술가를 나는 거의 알지 못한다.


다행이다. 나는 도스토옙스키를 버리지 않아도 되고, 아내는 이 모 배우를 내치지 않아도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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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9-12-02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도스토옙스키는 왜...? 도박꾼이라서요?
전 고은 시인을 어떻게 봐야할지 모르겠더라구요.
해외 언론이나 작가들은 고은 사태를 어떻게 인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라 기대가 있었는데
올핸 후보에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문학적 업적을 생각하면 그렇긴한데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또 그렇지가 않거든요.
따로 보아야 하지만 어쩔수 없는...
이 책 읽을 뻔했는데 기회를 놓친 게 좀 아쉽군요.

박균호 2019-12-02 15:44   좋아요 0 | URL
아...도끼는 그냥 농담삼아 한 이야기죠.
고은은 전 사람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냥 고질적인 성범죄자입니다. 근데 웃기는 것은 그가 쓴 일기를 묶어서 낸 책을 읽어보니 더 가관이더라구요. 차마 입에 올리기 싫은 음탕한 짓꺼리를 하고도 버젓이 책에 실어 났더라구요.
 
나쓰메 소세키 - 인생의 이야기
나쓰메 소세키 지음, 박성민 옮김 / 시와서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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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일본의 한 문예가가 한 결정을 두고 전 일본이 들썩거렸다. 그 문예가는 도쿄제국대학 강사 자리를 그만두고 아사히신문사에 입사를 한 것이다. 지금도 최고 명문대학이지만 당시 도쿄제국대학의 위엄은 더욱 대단해서 이 대학 출신만이 ‘학사’로 불릴 자격이 주어졌다. 도쿄제국대학 강사 자리를 박차고 선택한 아사히신문사의 입사 과정도 독특했다. 신문사가 먼저 이 문예가에게 조건을 제시하며 입사를 제의했다. 이 문예가가 제의받은 조건은 이랬다.


우선 월급을 도쿄제국대학의 2배를 지급하며, 1년에 100회 문예작품을 아사히신문에 연재하며 출근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다만 대학에 강의를 나가는 것은 금지되었다. 말하자면 아사히신문사 전속 문예가 자리 인 셈이다. 이 제안에 따라 일본의 최고대학 선생자리를 그만두고 신문사 직원이 된 사람이 ‘나쓰메 소세키’다. 누가 봐도 이상한 결정이었으나 당시 일본 대학의 상황이나 나쓰메 소세키 개인적인 상황을 고려하면 납득이 된다.


우선 다음 글을 읽어 보자.


지금의 서생은 학교를 여관처럼 생각한다. 돈을 지불하면 잠시 머물 수 있는 곳이라 여길 뿐,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곧바로 숙박지를 옮긴다. 학생들을 대하는 교장은 여관 주인 같고, 교사는 심부름꾼이다. 주인인 교장조차도 때로는 손님들 기분에 맞춰주지 않으면 안 될 판에 하물며 심부름꾼은 오죽하랴. 훈육은커녕 해고되지 않는 것을 행복으로 여길 정도다. 당연히 학생은 거만해지고 교사의 가치는 땅에 떨어진다. -<나쓰메 소세키 인생의 이야기>10쪽 시와서 출판사


나쓰메 소세키가 교사로 근무한 마쓰야마 중학교에서 발행하는 교지에 실은 글이다. 한마디로 당시 학교의 처지를 비판하고 손님인 학생의 비위를 맞춰주지 않으면 언제든 해고될 수 있는 교사의 처지를 비관하고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나는 교육자로 적합하지 않고, 교육가의 자격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런 부적합한 사람이 입에 풀칠할 방법을 찾다 보니 가장 얻기 쉬운 것이 교사의 지위였다. -<나쓰메 소세키 인생의 이야기>10쪽 시와서 출판사


본인 스스로 교직에 대해서 관심도 없고 적성도 맞지 않는다고 토로한 것이다. 호구지책으로 어쩔 수 없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잠시 동안 교직에 몸담은 것뿐이다. 애초부터 자신이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아는 사람’이 권해서 교사가 되었다. 나쓰메 소세키의 인생을 대표하는 주요한 결정들 즉 건축가의 꿈을 포기하고 문과대학에 입학 한 것, 교사가 된 것, 소설을 쓴 것 또한 ‘남들이 그렇게 말을 해주어서’ 결정했다.


나쓰메 소세키의 대표작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조차도 ‘써 달라고 부탁을 해서’ 썼고, 한 회로 마칠 생각이었는데 ‘계속 써달라고’ 하는 바람에 더 써 나가다 보니 어쩌다가 장편소설이 되었다. 오죽했으면 스스로 본인 인생은 ‘남이 만들어 준 것’이라고 토로했겠는가. 


소세키가 대학 선생 자리를 그만 둔 것은 그가 교직에 대한 흥미와 적성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일본의 대학 교수에 대한 열악한 처우도 무시할 수 없다. 아마노 이쿠오가 짓고 박광현. 정종현이 번역한 <제국대학>에는 당시 도쿄제국대학의 열악한 재정상황과 교수에 대한 처우가 설명되어 있다. 이 책에 따르면 당시 대학 교수의 봉급은 2,370엔인데 직급이 낮은 관리들의 그것과 비슷했다. 조교수는 1천 엔에 불과했다. 당시 도쿄제국대학의 교수들은 열악한 교수에 대한 처우 때문에 마음 놓고 연구에 매진할 수도 없고 우수한 인재를 교수로 초빙하기도 어렵고, 다른 직장으로 이직하려는 교수를 막을 방법도 없다고 개탄했다. 국가가 학자를 우대하지 않는 현실을 비판한 것인데 그들의 우려는 틀리지 않아서 나쓰메 소세키는 도쿄제국대학을 그만두고 신문사 직원이 되어 버린 것이다. 


제국대학이 교수 월급을 ‘붓으로 살짝 스친 듯하게’ 줘야하고 설립이나 운영과정에서 민간이나 각 지방에게 자금을 의지할 수 밖 에 없었던 것은 당시 제국주의로 무장한 일본이 끊임없이 군사비를 증액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관리들이 한정된 교육관련 예산으로 제국대학에 특혜를 부여했는데도 제국대학은 제정이 열악했다.


어쨌든 아사히신문사로 이직할 당시 나스메 소세키는 ‘강사’에 불과했고 자식은 무려 6명이었다. 대학 강사로 일하게 된 것 또한 본인의 선택이 아니었다. 국비 장학생으로 뽑혀 영국에서 2년 동안 유학을 한 것에 대한 의무복무였다.  비록 신문사로 이직하고 나서 월급은 2배로 올랐지만 나스메 소세키는 부유한 삶을 누리지는 못했다. <나쓰메 소세키 인생의 이야기>에는 그의 궁색한 살림살이 이야기가 잘 묘사되어 있다.


집주인은 다른 임차인과의 관계를 생각해서 집세를 40엔이라고 말해달라고 부탁했지만 너무나도 솔직한 나쓰메 소세키는 이를 무시하고 월세 35엔짜리라고 말하고 다녔던 그의 집은 300평 대지에 7칸의 방이 있었다. 저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우선 7개의 방중에 가장인 소세키가 2칸을 차지했고 아내와 6명의 아이가 있었으니 그의 집은 늘 북적거렸을 것이다.


천정은 빗물이 새서 얼룩이 졌고 바닥은 다다미가 깔리지 않은 마루였는데 틈새로 바람이 새어 들어와 겨울에는 추위로 고통받아야했다. 햇살이 비쳐드는 곳에서 글쓰기를 좋아했지만 그의 집에서는 그런 호사를 누릴 수 없어서 툇마루로 책상을 들고 나가 햇볕을 머리 위로 받아가면서 글을 쓰기도 했다. 햇살이 따뜻한 것을 넘어서 뜨거운 지경이 되면 밀짚모자를 쓰고 글을 썼다고 한다.


1909년 아사히신문사로 이직한지 2년이 되던 해에 나쓰메 소세키는 또 한 번 세간의 이목을 받았다. 당시 유력 잡지였던 <태양>이 문예계의 각 분야별로 명가를 정하는 독자투표를 진행했는데 나쓰메 소세키가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아 금으로 만든 상패를 주는  1위에 올랐다. 나쓰메 소세키는 ‘영광은 고맙지만’ 상패는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나쓰메 소세키가 말한  ‘상패 거절 이유’는 이랬다. 우선 자신의 가치를 아무런 배려 없이 투표하는 사람 마음대로 정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구나 졸지에 투표를 당하는 사람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는 다는 점에서 자신을 1등으로 뽑은 투표는 다수의 폭군이 동맹을 맺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워싱턴이나 나폴레옹 중에서 누가 더 위대한가라는 질문으로 어른들을 곤란하게 만들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상기시키면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문예가들의 순위를 매긴다는 것이 사리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1위로 뽑힌 자신의 명예는 동료 문예가들의 명예를 깎아서 갖다 붙인 것이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나스메 소세키 자신의 작품을 읽고 감동을 한 독자들의 선물은 받았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의 명예를 깎아내리거나 우열을 염두에 두고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꺼이 받았다고 설명했다. 


다만 석 달 동안 사심 없이 투표를 진행하고 집계했을 뿐만 아니라 10명의 문인에게 상패를 수여할 계획을 세운 <태양>의 의도에서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하며 그 의도를 오해했다면 언제든지 사과를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로 그의 ‘상패 거절 이유’는 끝난다. 그걸로 끝났을 것 같은 나쓰메 소세키와 <태양>와의 묘한 인연은 2년 뒤에 발생한 또 다른 사건 때문에 이어진다. 


1911년 2월 문부성이 나쓰메 소세키에게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하겠다고 연락을 해왔다. 말하자면 박사학위를 받을 당사자도 모르는 사이에 결정된 일이란 말이다.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나 또한 의아했다. 


우리가 박사를 취득하는 과정이랑 너무 다르지 않는가 말이다. 오늘날 박사학위를 받자면 5년 이상 동안 연구에 매진해야 하는 것이 보통이고 논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또 얼마나 피땀을 흘려야 하는가. 오늘날 우리나라의 교육관련 제도는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예를 들면 학사, 생도라는 용어 자체가 일본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고등학생 이하를 생도라고 부르고 대학생을 학생이라고 불렀다. 대학을 졸업하면 수여하는 ‘학위’라는 용어도 일본이 만든 용어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교육제도와 일본의 그것은 닮은 구석이 많은데 아무리 100년 전 일본의 일이라지만 당사자도 모르는 박사학위수여라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제국대학>에 내 의문에 대한 해답이 나와 있었다.


1887년 발표된 도쿄대학의 ‘학위령’에 따르면 그 당시 박사학위를 따기 위해서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첫 번째 길은 오늘날 우리가 떠올리는 학위취득방식이다. 즉 대학원에 입학을 해서 시험을 거친 사람에게 박사학위를 주는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첫 번 째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과 동등하거나 더 이상의 학력이 있는 자에게 대학의 평의회를 거쳐 문무대신이 박사학위를 주는 방식이다. 


두 번째 방법은 또 두 가지 경우로 나눠지는데 본인이 쓴 논문 한편을 제출해서 대학의 심의를 거쳐서 박사학위를 받는 ‘논문박사’와 문부대신이 대학원 시험을 통과한 사람과 실력이 동등하다고 판단한 사람의 경우다. 대학 평의회에 추천하고 3분의 2이상이 찬성하면 그 사람에게 수여하는 ‘추천박사’다. 


1898년에는 추천 박사제도가 두 가지로 나누어졌다. 박사회에서 학위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인정한 자와 제국대학의 총장이 문부대신에게 추천한 문과대학 교수도 박사학위를 받았다. 1911년 문부대신이 나쓰메 소세키에게 수여하겠다고 한 박사 학위가 바로 박사회에서 추천해서 수여하는 것이었다. 


1898년 발표된 학위령은 1920년까지 존속하는데 그때가지의 학위 수여에 관한 통계를 보면 흥미롭다. 대학원에 입학하고 정식시험에 합격해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3%에 불과했다. 대학원에 다니지 않고 논문 한편을 제출하고 통과해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초창기(1887년~1894년 사이의 14%) 보다 많이  증가해서 63%를 차지한다. 문제는 나쓰메 소세키가 해당하는 박사회 추천과 제국대학 총장의 추천에 의한 박사학위 수여 비율이었다. 


나쓰메 소세키가 속한 문학 계열은 그나마 추천 박사의 비율이 23%에 지나지 않았지만 법학계열은 84%, 공학계열은 76%에 육박했다. 이 세태를 두고 <태양>이 우후죽순처럼 실력이 없는 박사학위가 나온다는 의미로 ‘죽순박사’라고 비꼬며 비판했다. 변변한 한 권의 저서도 없는 사람이 박사가 된다면 그 실력을 누가 인정하겠느냐는 지적이었다. <태양>이 ‘죽순박사’를 비판한 것은 소세키가 박사학위를 거절한 1911년 이후의 일 인 것으로 추정된다. 


정리하자면 나쓰메 소세키는 1909년 <태양>이 수여한 ‘금으로 만든 상패’를 거절하고 1911년에는 문부성이 주는 박사학위를 거절했다. 석 달 동안 공을 들여서 일을 한 끝에 수여하기로 한 ‘상패’를 거절당한 <태양>은 그 이후에 나쓰메 소세키의 ‘박사학위 거부’를 옹호한 것이다.


이쯤에서 <나쓰메 소세키 인생의 이야기>에 나오는 ‘박사 학위 거절 사유’가 궁금해진다. 추천박사는 본인이 신청한 것도 아니고 학위 수여는 문부대신의 ‘명령’이었다. 따라서 소세키는 박사학위를 거절한 것이 아니고 거부한 것에 가까운 당시로서는 돌출행동이었다. 당연히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나쓰메 소세키는 박사학위가 흔해지면 학문의 목적이 학위취득이라는 오해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과 박사학위를 취득하지 않는 학자는 제 실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부작용을 우려했다. 또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위치에 오르기 위해서는 운이 아니라 오직 실력과 업적에 의해서야 한다는 스승의 가르침을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나쓰메 소세키는 괴짜가 아니다. 영국 유학 시절 가족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물건이 많이 전시된 거리를 일부러 피해 산책을 한 가족을 사랑한 가장이자 노력과 업적이 없는 부귀영화를 누릴 생각이 없는 지식인 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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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공간들
윤광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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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18년째 출간 소식이 뜨면 예약 주문을 하는 작가가 있다. 서재가 터져 나갈 만큼 책으로 싸여있는데도 ‘재미없는 책만 있다’고 혹평을 하는 아내가 유일하게 찾아서 읽는 작가가 있다. 시인이나 소설가가 아닌데도 내가 글쓰기를 배우고 싶은 작가가 있다. 일단 읽기 시작하면 다 읽지 않고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작가가 있다. 그가 바로 글 쓰는 사진작가 윤광준이다.



<내가 사랑한 공간들>은 물건을 주로 다룬 그간의 글과는 주제가 사뭇 다르다. 우리나라에서 글을 가장 맛깔나게 쓰는 그가 ‘공간’을 선택한 이유를 상상해봤다. 답은 간단한 것 같다. 공간은 물건들의 집이니까. 한 사람이 사용하던 물건이나 생활한 공간은 더 내밀하게 그 주인을 추억하게 한다. 나로 말하자면 서울로 떠나기 전까지 딸아이가 사용하던 방에 들어가거나, 돌아가시기 전에 어머니의 휠체어를 끌고 산책하던 요양원 산책길을 재회하면 그리움이 치솟는다.



<내가 사랑한 공간들>은 말 그대로 윤광준 선생이 반해서 즐겨 찾는 공간들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서울 6호선 녹사평역, 씨마크 호텔, 스타필드, 현대카드 라이브러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롯데 콘서트홀, 뮤지엄 산, 베어트리파크, 죽설헌, 보안 1942등.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반 가게로’ 찬사를 받는 ‘풍월당’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이 익히 알고 있는 장소도 있지만 이름도 낯선 곳도 있다. 



‘서울 6호선 녹사평역’편은 유럽의 지하철 이야기라는 맛있는 반찬이 섞여서 윤광준 표 명품 요리가 되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편은 이 건물과 관련된 흥미로운 역사가 담겨 있어서 또 다른 현대사 교과서로도 손색이 없겠다. ‘풍월당’ 편은 예술을 사랑하는 설립자의 맑은 영혼이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하다가 당혹스러운 부분이 있다. 너무 반갑고 빨리 읽고 싶은 마음에 ‘휙’책을 넘겨보지도 않고 바로 내지를 펼쳐 읽기 시작했는데 과연 글 잘 쓰는 윤광준 선생의 글은 따뜻하고 재미가 있는데 텍스트만 이어지더라. 아무리 글쓰기 실력이 수려하더라도 복잡한 구조를 가진 건축물을 설명하는데 사진이 없으면 답답하지 않은가.


 설명이 수려하면 더욱더 그렇다. 궁금하면 ‘휙’ 뒷장을 넘겨보면 되지 라고 충고하지 마시라. 텍스트에서 잠시라도 눈을 떼기 싫었으니까. 왜 등산을 하다 보면 그런 순간이 있지 않은가. 끊임없이 산길만 이어질 것 같았는데 어느 순간 눈앞에 산 아래 장관이 펼쳐지는 순간 말이다. 이 책이 그랬다. 어느 순간 ‘공간’ 사진이 나타난다. 


글쓰기 실력에 어지간한 자신이 없으면 사진 자료를 먼저 제시하거나 텍스트와 함께 싣는다. 독자의 시선을 사진으로 장악하면 글쓰기 실력이 다소 부족하더라도 상쇄가 되니까. <내가 사랑한 공간들>은 그 반대다. 텍스트가 이어지고 사진이 나중에 등장한다. 이게 묘한 재미가 있더라. 오롯이 텍스트로만 건물의 모습을 상상하고 작가의 정감 있는 글을 더듬어 나가다 보면 사진작가 윤광준의 사진이 눈 앞에 펼쳐진다. 마치 베토벤 9번 교향곡에서 ‘환희의 송가’가 등장하는 장면과 같은 ‘탁 트임’을 맛보게 된다.

<내가 사랑한 공간들>은 가족과 함께 갈 만한 아름답고 재미난 공간이 많지만 내가 감탄했고 가장 윤광준답다고 생각한 부분은 ‘나의 화장실 순례기’ 편이다. 타일과 목재로 내부를 마감하고 둥근 세면대 거울이 걸린 ‘사운즈 한남’ 화장실, 묵직하고 차분한 ‘포시즌스 호텔 서울’ 화장실, 우아한 분위기의 조명과 차분한 색채의 조합이 세련된 인천 ‘파라다이스시티 호텔’ 화장실, 탄탄하게 짜 놓은 나무틀 사이로 볼일을 보는 ‘김제 망해사’ 해우소 등.



윤광준 선생이 가장 인상적이라고 극찬한 호텔 화장실은 장차 이 책을 읽을 독자들을 위한 선물로 남겨둔다. 아직 이 책의 출간 소식을 모르는 듯한 아내가 가능한 한 늦게 이 책을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사랑한 공간들>을 서재 구석에 숨겨두기로 했다. <내가 사랑한 공간들>에 나오는 멋진 공간으로 아내를 데려가서 가장의 위엄을 뽐내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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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9-11-30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그래서 일전에 저의 서재에 그런 댓글을 남기셨군요. 아닌가...
전 반대로 화장실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어서 요즘도 가끔 안 좋은 꿈을 꾸곤 합니다.
윤광준 씨 글 잘 쓴다는 말은 들어 보긴했는데
읽어 볼 기회도 없을뿐만 아니라 잘 쓰면 얼마나 잘 쓰겠어 했는데
그러면 안 되겠네요.ㅠ
기억하겠습니다.^^

박균호 2019-11-30 17:53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이고요. ^^ 윤광준 선생 사진 에세이 참 좋아요.
 

지난주 종조모께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셨다. 장례식장에서 한나절 머물다가 집으로 내려왔다. 나에게는 넷째 할아버지의 아내가 되는 고인은 우리 집안에서 독특하고 특별한 분이셨다. 유교적 관습의 틀 속에서 옹기종기 유대관계를 지켜나가던 다른 친척과는 달리 깊은 산 속에 혼자 사는 꽃사슴과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다. 탑골을 본거지로 하는 함양박씨 일족이라는 소속감과 유대관계를 다지는 명절과 제사에 일절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다. 집안의 다른 여인네처럼 일찌감치 종갓집 와서 음식을 장만하고, 차례나 제사가 끝나면 큰 방에 둘러앉아 왁자지껄하게 수다를 떨다가, 늦은 오후가 되면 성미 급한 남편들의 재촉에 쫓겨 명절 음식을 싸 들고 길을 떠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지금 생각해보니 독실한 개신교 신자라서 유교적 제례에 불참했을 수도 있고 워낙 허약한 분이어서 귀향길 자체를 자제했을 수도 있겠다. 종조모님은 일찍이 병약한 건강 문제로 유명했던 분이다. 집안 아주머니들이 번갈아 가면서 종조모님을 대신해서 빨래해주었다니 ‘시집을 올 때부터 병자’였다는 말이 대단한 과장은 아닌 듯하다. 나는 잘 모르지만 젊은 시절부터 종조모님에 대한 주변의 건강에 대한 평판과 진단을 고려하면 50년 전에 고인이 되었다고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고. 


50년 전에도 ‘아니, 아직 그 사모님이 살아 계신단 말이냐?’며 오래 보지 못한 지인을 놀라게 한 분이다.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모르는 사이에 고인이 되어서 놀라게 하는 것이 아니고 살아 계신 것으로 놀라게 한 분이 종조모님 말고 얼마나 더 있을까 싶다. 그래서 그런지 시집온 이후로 평생 명절에 시댁을 찾지 않은 며느리를 탓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저 아프고 일을 해서는 안 되는 식구로 여겼던 모양이다. 워낙 왜소하고 마른 체구이셨다. 종손인 나도 넷째 종조모님이 명절 때 고향에 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해본 일이 없다.


이상한 일이다. 종조모님은 평생 명절 제사 차례에 불참했지만, 우리 집안 어른이라는 정체성에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다른 어른에 비해서 어른으로서의 위세와 친근감 또한 뒤지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어른과는 달리 종조모님을 뵐 때는 한 번이라도 더 생각하고 말을 하고, 옷깃을 한번이라도 더 여미고 인사를 했었다.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50년 이상 이 세상을 함께 했지만 96세를 일기로 소천하신 작은 할머니를 뵌 적은 많지 않다. 20년 전인가 이런 일이 있었다. 작은 할아버지 댁을 인사차 갔었는데 할아버지는 어디 가시고 없고 할머니만 ‘이불을 끼고’ 안방에 앉아 계셨다. 근황을 여쭈니 ‘이불만 끼고’ 사신다고 하셨다. 놀라운 일도 아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오래 기억할 만한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오랜만에 외출하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한 아이가 할머니 뒤를 졸졸 따라오더라는 것이다.

“너, 왜 나를 따라오니?”

“네, 할머니 저기 뒤에서 나쁜 아이들이 저를 따라와서 무서워요”

“아, 그래? 그럼 나하고 같이 가자. 이리 오너라”


아이를 만났다는 곳은 대구의 중심가 거리 중의 하나였고 할머니 말고도 지나가는 건장한 사람은 많았을 것이다. 그 아이는 왜 자그마한 키에, 구부정한 허리, 마른 체구를 가진 병자로 보이는 할머니 품으로 들어오려고 했을까. 누가 봐도 이상한 일이었는데 나는 그 아이가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았다. 할머니는 연약한 외형을 가지고 있었지만 내 눈에는 환자로 보이지 않았다.


영민함과 따뜻한 배려심이 묻어 나오는 눈빛을 가지고 계신 분이다. 온화한 인상에서는 누구라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의지와 힘이 내비치는 분이다. 품 안으로 들어오는 아이를 내치지 않고 함께 걸었던 할머니의 행위에는 결심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평생을 기도하면서 살아오신 따뜻한 분은 무서울 것도 주저할 것도 없으니까. 장례식장이 있는 안성에서 한참을 운전해서 대전 밑으로 오니까 도로는 한산했고 초저녁 밤은 고요했다. 고향 집 내 방에서 벽에 기대어 있다 보면 은은하게 교회 음악 소리가 들려올 시간이다. 교회는 다니지 않았지만 마치 자장가로도 들리는 그 소리를 나는 무척 좋아했고 평온함을 느꼈었다.


어둠이 깔린 도롯가로는 안개처럼 수증기가 몽글몽글 올라가고 긴 여행에 지친 아내는 조수석에서 고요히 잠들고 있었다. 할머니와 나눴던 마치 꿈속에서 있었던 일로 느껴지는 추억이 생각났다. 


그날도 딱 지금처럼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초저녁이었다. 고향 집에 있었는데 전화가 왔다. 할머니셨다. “이 좋은 것을 나 혼자 누리고 죽으면 죄가 될 것 같아서‘전화를 하셨단다. 첫 마디를 듣고 할머니가 하도 오래 아프셔서 ‘죽은 사람도 살려내는 명약’이라도 알려주시려나 싶었다. 이야기를 듣자 하니 ‘교회’ 말씀을 하셨다. 


‘죽을 때까지 유교 사상을 버릴 수 없다’고 단언한 아버지의 아들이며, 그 아버지를 종교처럼 생각하는 아들인 나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이다. 구미에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한마디도 듣지 못하는 것이 탑골을 본거지로 하는 함양박씨 남자들의 주요한 특징이다. 할머니가 알려주신다는 것이 귀한 정보가 아니라는 실망감은 다소 실망감은 있었지만 대략 20분간의 말씀을 조신하고 귀하게 들었다.


 타고난 성품과는 다르게 말이다. 손자로서 어른의 말씀을 공손하게 들어야 한다는 윤리적인 이유가 아니라 할머니의 말씀이 어찌나 따뜻했는지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었다. 할머니의 말씀은 온전히 손자에 대한 연민과 배려 그리고 사랑만 있었지 세속적인 다른 말로 부를 수 없었다. 간곡하게 ‘가까운 아무 교회나 다녀라’고 하시는데 ‘알겠어요’라고 대답할 수 있는 밖 에 없지 않은가. 


무작정 할머니 품으로 와 함께 걸었던 그 아이도 나처럼 따뜻했을 것이다. 그날이 할머니와 내가 나눴던 처음이고 마지막 통화였다. 물론 예수님 믿으라는 이야기도 그랬다. 집으로 가는 길은 평온했지만, 할머니의 간곡하고 따뜻한 부탁을 들어드리지 못한 죄책감과 조문을 다 하지 못한 아쉬움으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문득 유난히 하늘이 포근하게 느껴져서 올려 보았다. 그림 같은 구름 위에서 할머니와 내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순간 할머니가 말씀하신 ‘이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알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할머니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은 멀지 않을 터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안방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눌 때 할머니에게서 예수님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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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9-11-26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분간 잘 들어주시고 알겠어요 라고 대답해 주신 것으로 충분할 듯 합니다. 종조모께서도 만족하셨을 거에요. 종조모님도 훌륭하시지만 그 분 품성 자체로 인정하시고 평생 명절 차례 불참하셨어도 탓하지 않으신 다른 어르신들도 존경스럽습니다. 박균호 작가님 글에서 느껴지는 따스함도 물림인가 생각해봅니다^^

박균호 2019-11-26 22:41   좋아요 0 | URL
늘 좋게 말씀해 주셔서 따뜻한 위로가 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내가 쓴 <고전적이지 않은 고전 읽기>가 ‘세종도서’에 선정되었습니다. ‘대한출판문화협회 우수 도서’에 연이은 경사입니다. 부족한 제가 책을 쓰면서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특히 원고 쓰는것이 어렵다고 ‘더 이상 못해먹겠다’며 투정을 부린 저를 다독거려주시고 아낌없는 조언을 주신 갈매나무출판사 박선경 사장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고전적이지 않은 고전 읽기>는 고전을 색다르고 재미있는 시각으로 읽자는 생각으로 쓴 책인데 또 다른 독자의 또 다른 시각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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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9-11-25 15: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축하합니다. 올해 좋은 일이 많으셨군요.
근데 원고료 반환에 계약 파기까지 하셨다니 마음 고생이 심하셨나 봅니다.
또 그런만큼 기쁨이 남다르시겠어요.^^

박균호 2019-11-25 16:49   좋아요 1 | URL
정말 고맙습니다. 파기를 하고 그런 것은 아니고요. 그냥 원고 쓰기 힘들다고 투정 부린거에요.

빵굽는건축가 2019-11-25 15: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박균호 2019-11-25 16:50   좋아요 0 | URL
네 정말 고맙습니다.

moonnight 2019-11-26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축하합니다. 고생하셨는데 보람도 크시겠어요^^

박균호 2019-11-26 11:23   좋아요 0 | URL
네 고맙습니다!!

sslmo 2019-11-26 17: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이 책을 쓰시면서 힘들어 하시는 것도 지켜보았고,
읽어보고 한낱 투정에 지나지않으셨다는 걸 확인한 저로서는,
많이 축하드릴밖에요~^^

박균호 2019-11-26 23:16   좋아요 0 | URL
아, 따뜻한 말씀 정말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