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공간들
윤광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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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18년째 출간 소식이 뜨면 예약 주문을 하는 작가가 있다. 서재가 터져 나갈 만큼 책으로 싸여있는데도 ‘재미없는 책만 있다’고 혹평을 하는 아내가 유일하게 찾아서 읽는 작가가 있다. 시인이나 소설가가 아닌데도 내가 글쓰기를 배우고 싶은 작가가 있다. 일단 읽기 시작하면 다 읽지 않고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작가가 있다. 그가 바로 글 쓰는 사진작가 윤광준이다.



<내가 사랑한 공간들>은 물건을 주로 다룬 그간의 글과는 주제가 사뭇 다르다. 우리나라에서 글을 가장 맛깔나게 쓰는 그가 ‘공간’을 선택한 이유를 상상해봤다. 답은 간단한 것 같다. 공간은 물건들의 집이니까. 한 사람이 사용하던 물건이나 생활한 공간은 더 내밀하게 그 주인을 추억하게 한다. 나로 말하자면 서울로 떠나기 전까지 딸아이가 사용하던 방에 들어가거나, 돌아가시기 전에 어머니의 휠체어를 끌고 산책하던 요양원 산책길을 재회하면 그리움이 치솟는다.



<내가 사랑한 공간들>은 말 그대로 윤광준 선생이 반해서 즐겨 찾는 공간들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서울 6호선 녹사평역, 씨마크 호텔, 스타필드, 현대카드 라이브러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롯데 콘서트홀, 뮤지엄 산, 베어트리파크, 죽설헌, 보안 1942등.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반 가게로’ 찬사를 받는 ‘풍월당’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이 익히 알고 있는 장소도 있지만 이름도 낯선 곳도 있다. 



‘서울 6호선 녹사평역’편은 유럽의 지하철 이야기라는 맛있는 반찬이 섞여서 윤광준 표 명품 요리가 되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편은 이 건물과 관련된 흥미로운 역사가 담겨 있어서 또 다른 현대사 교과서로도 손색이 없겠다. ‘풍월당’ 편은 예술을 사랑하는 설립자의 맑은 영혼이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하다가 당혹스러운 부분이 있다. 너무 반갑고 빨리 읽고 싶은 마음에 ‘휙’책을 넘겨보지도 않고 바로 내지를 펼쳐 읽기 시작했는데 과연 글 잘 쓰는 윤광준 선생의 글은 따뜻하고 재미가 있는데 텍스트만 이어지더라. 아무리 글쓰기 실력이 수려하더라도 복잡한 구조를 가진 건축물을 설명하는데 사진이 없으면 답답하지 않은가.


 설명이 수려하면 더욱더 그렇다. 궁금하면 ‘휙’ 뒷장을 넘겨보면 되지 라고 충고하지 마시라. 텍스트에서 잠시라도 눈을 떼기 싫었으니까. 왜 등산을 하다 보면 그런 순간이 있지 않은가. 끊임없이 산길만 이어질 것 같았는데 어느 순간 눈앞에 산 아래 장관이 펼쳐지는 순간 말이다. 이 책이 그랬다. 어느 순간 ‘공간’ 사진이 나타난다. 


글쓰기 실력에 어지간한 자신이 없으면 사진 자료를 먼저 제시하거나 텍스트와 함께 싣는다. 독자의 시선을 사진으로 장악하면 글쓰기 실력이 다소 부족하더라도 상쇄가 되니까. <내가 사랑한 공간들>은 그 반대다. 텍스트가 이어지고 사진이 나중에 등장한다. 이게 묘한 재미가 있더라. 오롯이 텍스트로만 건물의 모습을 상상하고 작가의 정감 있는 글을 더듬어 나가다 보면 사진작가 윤광준의 사진이 눈 앞에 펼쳐진다. 마치 베토벤 9번 교향곡에서 ‘환희의 송가’가 등장하는 장면과 같은 ‘탁 트임’을 맛보게 된다.

<내가 사랑한 공간들>은 가족과 함께 갈 만한 아름답고 재미난 공간이 많지만 내가 감탄했고 가장 윤광준답다고 생각한 부분은 ‘나의 화장실 순례기’ 편이다. 타일과 목재로 내부를 마감하고 둥근 세면대 거울이 걸린 ‘사운즈 한남’ 화장실, 묵직하고 차분한 ‘포시즌스 호텔 서울’ 화장실, 우아한 분위기의 조명과 차분한 색채의 조합이 세련된 인천 ‘파라다이스시티 호텔’ 화장실, 탄탄하게 짜 놓은 나무틀 사이로 볼일을 보는 ‘김제 망해사’ 해우소 등.



윤광준 선생이 가장 인상적이라고 극찬한 호텔 화장실은 장차 이 책을 읽을 독자들을 위한 선물로 남겨둔다. 아직 이 책의 출간 소식을 모르는 듯한 아내가 가능한 한 늦게 이 책을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사랑한 공간들>을 서재 구석에 숨겨두기로 했다. <내가 사랑한 공간들>에 나오는 멋진 공간으로 아내를 데려가서 가장의 위엄을 뽐내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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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9-11-30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그래서 일전에 저의 서재에 그런 댓글을 남기셨군요. 아닌가...
전 반대로 화장실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어서 요즘도 가끔 안 좋은 꿈을 꾸곤 합니다.
윤광준 씨 글 잘 쓴다는 말은 들어 보긴했는데
읽어 볼 기회도 없을뿐만 아니라 잘 쓰면 얼마나 잘 쓰겠어 했는데
그러면 안 되겠네요.ㅠ
기억하겠습니다.^^

박균호 2019-11-30 17:53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이고요. ^^ 윤광준 선생 사진 에세이 참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