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쓰메 소세키 - 인생의 이야기
나쓰메 소세키 지음, 박성민 옮김 / 시와서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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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일본의 한 문예가가 한 결정을 두고 전 일본이 들썩거렸다. 그 문예가는 도쿄제국대학 강사 자리를 그만두고 아사히신문사에 입사를 한 것이다. 지금도 최고 명문대학이지만 당시 도쿄제국대학의 위엄은 더욱 대단해서 이 대학 출신만이 ‘학사’로 불릴 자격이 주어졌다. 도쿄제국대학 강사 자리를 박차고 선택한 아사히신문사의 입사 과정도 독특했다. 신문사가 먼저 이 문예가에게 조건을 제시하며 입사를 제의했다. 이 문예가가 제의받은 조건은 이랬다.


우선 월급을 도쿄제국대학의 2배를 지급하며, 1년에 100회 문예작품을 아사히신문에 연재하며 출근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다만 대학에 강의를 나가는 것은 금지되었다. 말하자면 아사히신문사 전속 문예가 자리 인 셈이다. 이 제안에 따라 일본의 최고대학 선생자리를 그만두고 신문사 직원이 된 사람이 ‘나쓰메 소세키’다. 누가 봐도 이상한 결정이었으나 당시 일본 대학의 상황이나 나쓰메 소세키 개인적인 상황을 고려하면 납득이 된다.


우선 다음 글을 읽어 보자.


지금의 서생은 학교를 여관처럼 생각한다. 돈을 지불하면 잠시 머물 수 있는 곳이라 여길 뿐,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곧바로 숙박지를 옮긴다. 학생들을 대하는 교장은 여관 주인 같고, 교사는 심부름꾼이다. 주인인 교장조차도 때로는 손님들 기분에 맞춰주지 않으면 안 될 판에 하물며 심부름꾼은 오죽하랴. 훈육은커녕 해고되지 않는 것을 행복으로 여길 정도다. 당연히 학생은 거만해지고 교사의 가치는 땅에 떨어진다. -<나쓰메 소세키 인생의 이야기>10쪽 시와서 출판사


나쓰메 소세키가 교사로 근무한 마쓰야마 중학교에서 발행하는 교지에 실은 글이다. 한마디로 당시 학교의 처지를 비판하고 손님인 학생의 비위를 맞춰주지 않으면 언제든 해고될 수 있는 교사의 처지를 비관하고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나는 교육자로 적합하지 않고, 교육가의 자격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런 부적합한 사람이 입에 풀칠할 방법을 찾다 보니 가장 얻기 쉬운 것이 교사의 지위였다. -<나쓰메 소세키 인생의 이야기>10쪽 시와서 출판사


본인 스스로 교직에 대해서 관심도 없고 적성도 맞지 않는다고 토로한 것이다. 호구지책으로 어쩔 수 없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잠시 동안 교직에 몸담은 것뿐이다. 애초부터 자신이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아는 사람’이 권해서 교사가 되었다. 나쓰메 소세키의 인생을 대표하는 주요한 결정들 즉 건축가의 꿈을 포기하고 문과대학에 입학 한 것, 교사가 된 것, 소설을 쓴 것 또한 ‘남들이 그렇게 말을 해주어서’ 결정했다.


나쓰메 소세키의 대표작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조차도 ‘써 달라고 부탁을 해서’ 썼고, 한 회로 마칠 생각이었는데 ‘계속 써달라고’ 하는 바람에 더 써 나가다 보니 어쩌다가 장편소설이 되었다. 오죽했으면 스스로 본인 인생은 ‘남이 만들어 준 것’이라고 토로했겠는가. 


소세키가 대학 선생 자리를 그만 둔 것은 그가 교직에 대한 흥미와 적성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일본의 대학 교수에 대한 열악한 처우도 무시할 수 없다. 아마노 이쿠오가 짓고 박광현. 정종현이 번역한 <제국대학>에는 당시 도쿄제국대학의 열악한 재정상황과 교수에 대한 처우가 설명되어 있다. 이 책에 따르면 당시 대학 교수의 봉급은 2,370엔인데 직급이 낮은 관리들의 그것과 비슷했다. 조교수는 1천 엔에 불과했다. 당시 도쿄제국대학의 교수들은 열악한 교수에 대한 처우 때문에 마음 놓고 연구에 매진할 수도 없고 우수한 인재를 교수로 초빙하기도 어렵고, 다른 직장으로 이직하려는 교수를 막을 방법도 없다고 개탄했다. 국가가 학자를 우대하지 않는 현실을 비판한 것인데 그들의 우려는 틀리지 않아서 나쓰메 소세키는 도쿄제국대학을 그만두고 신문사 직원이 되어 버린 것이다. 


제국대학이 교수 월급을 ‘붓으로 살짝 스친 듯하게’ 줘야하고 설립이나 운영과정에서 민간이나 각 지방에게 자금을 의지할 수 밖 에 없었던 것은 당시 제국주의로 무장한 일본이 끊임없이 군사비를 증액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관리들이 한정된 교육관련 예산으로 제국대학에 특혜를 부여했는데도 제국대학은 제정이 열악했다.


어쨌든 아사히신문사로 이직할 당시 나스메 소세키는 ‘강사’에 불과했고 자식은 무려 6명이었다. 대학 강사로 일하게 된 것 또한 본인의 선택이 아니었다. 국비 장학생으로 뽑혀 영국에서 2년 동안 유학을 한 것에 대한 의무복무였다.  비록 신문사로 이직하고 나서 월급은 2배로 올랐지만 나스메 소세키는 부유한 삶을 누리지는 못했다. <나쓰메 소세키 인생의 이야기>에는 그의 궁색한 살림살이 이야기가 잘 묘사되어 있다.


집주인은 다른 임차인과의 관계를 생각해서 집세를 40엔이라고 말해달라고 부탁했지만 너무나도 솔직한 나쓰메 소세키는 이를 무시하고 월세 35엔짜리라고 말하고 다녔던 그의 집은 300평 대지에 7칸의 방이 있었다. 저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우선 7개의 방중에 가장인 소세키가 2칸을 차지했고 아내와 6명의 아이가 있었으니 그의 집은 늘 북적거렸을 것이다.


천정은 빗물이 새서 얼룩이 졌고 바닥은 다다미가 깔리지 않은 마루였는데 틈새로 바람이 새어 들어와 겨울에는 추위로 고통받아야했다. 햇살이 비쳐드는 곳에서 글쓰기를 좋아했지만 그의 집에서는 그런 호사를 누릴 수 없어서 툇마루로 책상을 들고 나가 햇볕을 머리 위로 받아가면서 글을 쓰기도 했다. 햇살이 따뜻한 것을 넘어서 뜨거운 지경이 되면 밀짚모자를 쓰고 글을 썼다고 한다.


1909년 아사히신문사로 이직한지 2년이 되던 해에 나쓰메 소세키는 또 한 번 세간의 이목을 받았다. 당시 유력 잡지였던 <태양>이 문예계의 각 분야별로 명가를 정하는 독자투표를 진행했는데 나쓰메 소세키가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아 금으로 만든 상패를 주는  1위에 올랐다. 나쓰메 소세키는 ‘영광은 고맙지만’ 상패는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나쓰메 소세키가 말한  ‘상패 거절 이유’는 이랬다. 우선 자신의 가치를 아무런 배려 없이 투표하는 사람 마음대로 정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구나 졸지에 투표를 당하는 사람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는 다는 점에서 자신을 1등으로 뽑은 투표는 다수의 폭군이 동맹을 맺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워싱턴이나 나폴레옹 중에서 누가 더 위대한가라는 질문으로 어른들을 곤란하게 만들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상기시키면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문예가들의 순위를 매긴다는 것이 사리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1위로 뽑힌 자신의 명예는 동료 문예가들의 명예를 깎아서 갖다 붙인 것이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나스메 소세키 자신의 작품을 읽고 감동을 한 독자들의 선물은 받았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의 명예를 깎아내리거나 우열을 염두에 두고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꺼이 받았다고 설명했다. 


다만 석 달 동안 사심 없이 투표를 진행하고 집계했을 뿐만 아니라 10명의 문인에게 상패를 수여할 계획을 세운 <태양>의 의도에서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하며 그 의도를 오해했다면 언제든지 사과를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로 그의 ‘상패 거절 이유’는 끝난다. 그걸로 끝났을 것 같은 나쓰메 소세키와 <태양>와의 묘한 인연은 2년 뒤에 발생한 또 다른 사건 때문에 이어진다. 


1911년 2월 문부성이 나쓰메 소세키에게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하겠다고 연락을 해왔다. 말하자면 박사학위를 받을 당사자도 모르는 사이에 결정된 일이란 말이다.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나 또한 의아했다. 


우리가 박사를 취득하는 과정이랑 너무 다르지 않는가 말이다. 오늘날 박사학위를 받자면 5년 이상 동안 연구에 매진해야 하는 것이 보통이고 논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또 얼마나 피땀을 흘려야 하는가. 오늘날 우리나라의 교육관련 제도는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예를 들면 학사, 생도라는 용어 자체가 일본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고등학생 이하를 생도라고 부르고 대학생을 학생이라고 불렀다. 대학을 졸업하면 수여하는 ‘학위’라는 용어도 일본이 만든 용어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교육제도와 일본의 그것은 닮은 구석이 많은데 아무리 100년 전 일본의 일이라지만 당사자도 모르는 박사학위수여라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제국대학>에 내 의문에 대한 해답이 나와 있었다.


1887년 발표된 도쿄대학의 ‘학위령’에 따르면 그 당시 박사학위를 따기 위해서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첫 번째 길은 오늘날 우리가 떠올리는 학위취득방식이다. 즉 대학원에 입학을 해서 시험을 거친 사람에게 박사학위를 주는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첫 번 째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과 동등하거나 더 이상의 학력이 있는 자에게 대학의 평의회를 거쳐 문무대신이 박사학위를 주는 방식이다. 


두 번째 방법은 또 두 가지 경우로 나눠지는데 본인이 쓴 논문 한편을 제출해서 대학의 심의를 거쳐서 박사학위를 받는 ‘논문박사’와 문부대신이 대학원 시험을 통과한 사람과 실력이 동등하다고 판단한 사람의 경우다. 대학 평의회에 추천하고 3분의 2이상이 찬성하면 그 사람에게 수여하는 ‘추천박사’다. 


1898년에는 추천 박사제도가 두 가지로 나누어졌다. 박사회에서 학위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인정한 자와 제국대학의 총장이 문부대신에게 추천한 문과대학 교수도 박사학위를 받았다. 1911년 문부대신이 나쓰메 소세키에게 수여하겠다고 한 박사 학위가 바로 박사회에서 추천해서 수여하는 것이었다. 


1898년 발표된 학위령은 1920년까지 존속하는데 그때가지의 학위 수여에 관한 통계를 보면 흥미롭다. 대학원에 입학하고 정식시험에 합격해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3%에 불과했다. 대학원에 다니지 않고 논문 한편을 제출하고 통과해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초창기(1887년~1894년 사이의 14%) 보다 많이  증가해서 63%를 차지한다. 문제는 나쓰메 소세키가 해당하는 박사회 추천과 제국대학 총장의 추천에 의한 박사학위 수여 비율이었다. 


나쓰메 소세키가 속한 문학 계열은 그나마 추천 박사의 비율이 23%에 지나지 않았지만 법학계열은 84%, 공학계열은 76%에 육박했다. 이 세태를 두고 <태양>이 우후죽순처럼 실력이 없는 박사학위가 나온다는 의미로 ‘죽순박사’라고 비꼬며 비판했다. 변변한 한 권의 저서도 없는 사람이 박사가 된다면 그 실력을 누가 인정하겠느냐는 지적이었다. <태양>이 ‘죽순박사’를 비판한 것은 소세키가 박사학위를 거절한 1911년 이후의 일 인 것으로 추정된다. 


정리하자면 나쓰메 소세키는 1909년 <태양>이 수여한 ‘금으로 만든 상패’를 거절하고 1911년에는 문부성이 주는 박사학위를 거절했다. 석 달 동안 공을 들여서 일을 한 끝에 수여하기로 한 ‘상패’를 거절당한 <태양>은 그 이후에 나쓰메 소세키의 ‘박사학위 거부’를 옹호한 것이다.


이쯤에서 <나쓰메 소세키 인생의 이야기>에 나오는 ‘박사 학위 거절 사유’가 궁금해진다. 추천박사는 본인이 신청한 것도 아니고 학위 수여는 문부대신의 ‘명령’이었다. 따라서 소세키는 박사학위를 거절한 것이 아니고 거부한 것에 가까운 당시로서는 돌출행동이었다. 당연히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나쓰메 소세키는 박사학위가 흔해지면 학문의 목적이 학위취득이라는 오해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과 박사학위를 취득하지 않는 학자는 제 실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부작용을 우려했다. 또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위치에 오르기 위해서는 운이 아니라 오직 실력과 업적에 의해서야 한다는 스승의 가르침을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나쓰메 소세키는 괴짜가 아니다. 영국 유학 시절 가족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물건이 많이 전시된 거리를 일부러 피해 산책을 한 가족을 사랑한 가장이자 노력과 업적이 없는 부귀영화를 누릴 생각이 없는 지식인 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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