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문화가 우리보다 활성화된 서양에서는 초판이 꽤 가치가 있지만 나는 초판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초판보다는 개정판을 더 좋아한다. 어쨌든 초판보다 업그레이드되었다는 뜻이니까. 내 책도 마찬가지다. 나는 내가 낸 16권의 책을 모두 소장하지는 않는데 초판을 선호하지 않는 내 취향 때문이기도 하다.

 

초판은 자잘한 오타와 오류가 있기 마련이어서 자랑스럽게 내 서재에 두고 싶은 마음이 줄어든다. 그래서 이리저리 나눠주거나 심지어 내다 버리기도 한다. 재작년에 낸 <10대를 위한 나의 첫 철학 읽기 수업>이 재 쇄를 찍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초판을 2천 부 찍는 출판사이고 내가 철학 전문가가 아니다 보니 초판 소진이 어려웠다


2쇄에 대한 선인세를 지급하는 출판사라서(출판사에 따라서 2쇄부터는 판매 수량에 대해서만 인세를 지급하기도 한다) 적지 않은 수입이 생긴 것보다는 초판의 오류를 수정할 수 있게 된 것이 더 기쁘다. 2쇄 본이 도착하면 초판은 재활용 상자로 직행할 운명이다.

 

3년 전인가 한 대형출판사에서 낸 초등학생용 인문 교양서 전집(신기하게도 인터넷 서점에서는 판매하지 않고 오프라인을 통해서 판매한다) 에 공동저자로 참여했는데 얼마 전 재인용을 하겠다며 인세를 지급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같은 출판사에서 낸 내용을 같은 출판사가 내는 다른 책에 인용할 때도 인세를 지급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인용 분량은 원고지 4매이며 원고료는 4만 원이다. 어제 재인용에 대한 계약서가 도착했는데 무려 7장 분량이다. 서명을 10번 가까이하면서 든 생각이 내가 이 수고를 하고 우체국에 들러 우편료를 부담하면 4만 원 중에 얼마나 남을까였다. 세금도 제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출판계가 저작권에 이토록 철저하게 대응한다는 것은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기꺼이 주섬주섬 밀봉해서 우체국에 들리는 수고를 감수하기로.

 

한가지 더 흥미로운 소식이 있었다. 2015년에 낸 <수집의 즐거움>에 관한 것인데 어떤 문화 전시 전문 업체 대표님께서 수집에 관한 애플리케이션 사업을 새로 시작했다면서 내 조언을 받고 싶다고. 고양에 업장을 둔 분이 포항까지 내려오시겠다는 것인데 심지어 자문료를 지급하고 싶다며 정중하게 요청하셨다


자문료보다는 타인의 수고와 콘텐츠를 귀하게 여기는 드문 분이라서 대뜸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단지 문제는 내가 자문료를 받을만한 위인인가 하는 것이다. 이런 우려를 미리 알렸는데도 굳이 내려오신다고 해서 약속을 잡을 참이다. 솔직히 2015년에 낸 책이라 나도 내 책에 무슨 내용을 썼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래서 매우 드문 일인데 내가 쓴 책을 대충이라도 다시 읽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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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범죄심리학자라는 한 국회의원 후보가 한 대파 한뿌리 850원 이야기로 세상이 시끄럽다. 대통령이 대파 한 단을 850원이면 합리적이라고 말했다가 입방아에 오른 것을 변명한답시고 한 단이 아니고 한 뿌리를 850원이라고 말한 것. 그래서 생각난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 나오는 양파 한뿌리 이야기다.

 

옛날에 매우 인색한 노파 한 사람이 있었는데.

죽고 나서 보니 그 할머니는 평생 착한 일을 단 한 가지도 안 했다.


악마들은 할머니를 붙잡아서 지속 불바다 속에 던져 넣었다.

그때 할머니의 수호천사가 할머니가 했던 단 하나의 선행을 찾아냈다.

"하느님, 저 할머니는 텃밭에서 다 썩어가는 양파 한뿌리를 뽑아 거지에게 준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하느님은 "그 양파를 가지고 가서 불바다 속의 그녀에게 내밀어라.

그녀가 알아서 붙잡고 기어 나오게 하라.

만약 불바다에서 나오면 천국으로 가지만, 양파가 끊어진다면 지금 있는 그곳에 남게 되리라."


천사는 양파를 들고 가서 불바다 속의 그녀에게 내밀었다.

"할머니, 어서 붙잡고 올라와요. 조심조심. , 거의 다 됐어요."

그런데 그때 다른 죄인들이 할머니 다리를 붙잡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자신들도 살고 싶었다.


할머니는 그들을 발로 걷어차며 "아이고, 이건 내 양파야. 너희들 것이 아니라고!"

그녀가 이 말을 하기 무섭게 양파는 그만 툭 끊어져 버렸다.


그리고 할머니와 다른 죄수들은 다시 불바다 속으로 떨어지고 수호천사는 울면서 떠났다고 한다.

=====

 

이 이야기로 도스토옙스키는 타인을 배척하는 탐욕을 경계하고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세상을 설파한 것이다. 양파 한뿌리, 대파 한뿌리로 주는 메시지가 이토록 극명하게 다르다니 놀라운 일이다


도스토옙스키가 쓴 소설을 읽어보면 범죄 심리학자의 대가로 모두가 인정하게 된다는 사실도 흥미로운 일이다. 도스토옙스키 당신은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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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4-03-26 2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동안 범죄심리 프로파일을 저 지경으로 했다고 생각하니 오싹합니다.

박균호 2024-03-26 20:13   좋아요 1 | URL
그러니까요. 애초에 저런 사람이 프로파일 행세하면서 유명세를 떨친 것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해요.

호시우행 2024-03-27 04: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양파 한뿌리에 매달린 탐욕의 모습이 그려지네요.ㅠㅠ

박균호 2024-03-27 05:10   좋아요 1 | URL
내 그렇죠

다섯 2024-04-01 10: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말이 그 사람의 실체를 드러낸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나의 실체도 말에서 드러난다는 사실을 기억해둡니다.

박균호 2024-04-01 10:52   좋아요 1 | URL
그럼요 신언서판 아니겠습니까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는 부제목 ‘교구 소년의 성장’을 봐서도 잘 알 수 있듯이 구빈원에서 태어나자마자 고아가 된 올리버가 자신을 학대하는 구빈원 관리와 일하던 장의사로부터 도망쳐 런던에 도착해서 우여곡절 끝에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건강을 회복하고 교육받으며 신체적 정신적으로 성숙하는 내용을 다루는 성장 소설이다. ‘올리버 트위스트’는 올리버 자신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범죄행위에 가담하였으며, 그를 둘러싼 많은 범죄자의 생활이 세밀하게 묘사되고 있으므로 범죄 소설로 읽힐 수도 있다.

‘올리버 트위스트’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실존 인물을 모델로 기반하였으며 범죄 행각 또한 자료에 근거한다. 대략적인 줄거리 정도가 허구일 뿐이지 소설 대부분을 차지하는 배경 묘사를 포함한 대부분의 서술은 모두 사실에 근거한 자료를 토대로 한 것이다. 많은 런던 시민은 야심한 시간이나 새벽에 자료를 모으기 위해서 런던의 뒷골목을 배회하는 디킨스를 목격할 수 있었다. 그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표현함으로써 하층민에 대한 배려와 지원 정책을 영국 사회에 요구한 것이다. 작가 개인의 상상력에 기반한 묘사보다 역사적 사실은 훨씬 더 큰 설득력과 공감을 얻기 마련이다.

오늘날 독자들은 런던의 소매치기들이 왜 그토록 자주 손수건을 훔치는지 의아할지도 모른다. 코 묻은 손수건이 무슨 가치가 있어서 훈련까지 해가면서 손수건에 탐닉하는지 현대 독자들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런 손수건 소매치기 또한 찰스 디킨스가 얼마나 사실에 집착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18~19세기 영국 사회의 신사와 숙녀들에게 손수건은 요즘처럼 값싼 물건이 아니라 대부분 비단 소재의 수공예로 만든 아름답고 정교한 수를 놓은 제법 비싼 필수품이었다. 당시 런던 시민에게 손수건은 요즘으로 치면 스마트폰과 같은 기능을 수행했다. 이를테면 손수건을 건네주는 것은 미안하다는 뜻이었으며, 손수건을 접은 것은 상대에게 말을 하라는 표시였고, 손수건을 자기 어깨 위에 걸치는 것은 상대에게 자신을 따라오라는 신호였다.

공공장소에서 자신의 감정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것을 꺼렸던 빅토리아 시대 여성들은 손수건을 통해서 자기 의사를 표현했다. 말하자면 당시 여성들에게 손수건은 스마트폰으로 보내는 문자메시지였다. 또 아무래도 지갑이나 다른 귀중품보다 신경을 덜 썼기 때문에 다른 물건보다 위험부담이 없이 쉽게 훔칠 수 있기도 했다. 한 마디로 당시 영국에서 손수건은 훔치기 쉬웠고, 훔치고 나서 숨기기도 쉬웠으며 팔기도 쉬운 물건이었다. 작고 가벼우며 비싼데다 추적하기 어려운 손수건 소매치기는 얼마나 매력적인 사업이었겠는가?

고전은 과거에 대한 배경지식이 필요하므로 읽기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고전소설 속 세밀한 지식을 파헤치는 재미도 있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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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걸리버 여행기를 모르는 독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300쪽이 넘는 이 소설 완역본의 독자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걸리버 여행기가 출간되었을 때 이 책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갈렸다.

 

굉장히 새롭고 괴이한 소설이어서 독자들에게 즐거움과 놀라움을 동시에 느끼게 해준다는 호평도 있었다. 정치, 교육, 윤리 종교, 법률 제도가 저지른 수많은 오류와 부정에 대한 풍자라는 칭찬도 있었다. 반대로 이 소설을 비판한 사람들은 저자인 조너선 스위프트를 인간 혐오로 가득 찬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기도 했다.

 

말이 다스리는 나라에서 돌아온 걸리버가 인간에게 거부감을 느낀 나머지 가족을 내팽겨두고 말과 함께 생활한다는 설정이 그렇다. 18세기 유럽은 르네상스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인간 존엄성에 대한 자각이 이제 막 깨어나려는 시대였다. 이런 시대에 인간의 존엄성과 지적 능력을 의심한 걸리버 여행기는 비난을 살 수밖에 없었다.

 

스위프트가 인간을 혐오한다는 비판은 그에게는 가혹하리만큼 억울한 일이었다. 스위프트는 평생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려고 애썼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수입 중 일부를 떼어 가난한 자를 돕는 기금을 조성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수입을 생활비, 빈민 구제비, 자신이 죽은 후 자선을 위한 기금으로 삼등분하는 등 계획적이고 실천적인 빈민 구제에 나섰다.

 

스위프트가 평생 적립한 기금으로 그의 사후 더블린에 성 패트릭 병원이 건립되었다는 사실만 보아도 그가 웬만한 부자보다 더 열심히 빈민 구제에 앞장섰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스위프트는 인간을 혐오하기는커녕 고통받는 민중들이 노예와 같은 삶에서 벗어나 인간다운 삶을 살기를 염원했던 인물이었다.

 

걸리버 여행기에서 인간 혐오라고 오해할 수 있는 내용들은 인간을 혐오하고자 함이 아니었고, 당시 부패한 권력과 사회를 비판하고 풍자한 것이다. 스위프트는 걸리버 여행기곳곳에, 인간에 대한 분노와 미움을 담고 있지만 그가 소설을 통해서 추구한 것은 인간이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이지 인간 혐오가 아니다. 소설가이자 신학자이기도 했던 스위프트는 아일랜드 독립운동의 지도자로도 활동했다.

 

그는 1724‘M. B. 드래피어라는 필명으로 영국의 아일랜드 식민지 지배 정책을 비판하는 공개편지를 발표했다. 그러자 영국 정부는 ‘M. B. 드래피어의 정체를 제보하는 자에게 3백 파운드를 지급한다는 현상문을 내걸었다. ‘M. B. 드래피어의 정체가 스위프트임을 대다수 아일랜드 사람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스위프트를 당국에 신고하지 않았다. 평소 가난한 자와 약한 자를 위해서 헌신한 스위프트는 아일랜드 국가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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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2024-03-12 2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현실을 잊고 그 시대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경험은 우리가 고전소설을 읽을 때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즐거움 가운데 하나다˝라는 말로 유혹하는 세이렌의 음성(^^)을 듣습니다. 수고하셨고, 잘 읽도록 하겠습니다.

박균호 2024-03-13 04:27   좋아요 1 | URL
아...다섯님 정말 감사합니다 !!!

호시우행 2024-03-12 23: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걸리버가 인간 혐오를 추구한 소설은 결코 아니지요.

박균호 2024-03-13 04:27   좋아요 1 | URL
네 저도 읽어보니 그렇더라구요 ^^
 

누가 봐도 해맑은 졸업 사진인데 알고 보면 슬픈 사진이다. 부모가 참석하지 않고 친척도 형제자매도 없이 혼자 참석한 졸업식이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아내가 치료 중이라 무남독녀 졸업식에 가지 못했다. 나 혼자만이라도 가고 싶었는데 그러면 더 슬플 것이라는 게 딸아이의 만류에 그러질 못했다. 딸아이 졸업식 사진을 볼 때마다 내가 슬픈 이유다. 해맑게 웃고 있어서 더 슬프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제 갓 입사한 신입사원 졸업식에 팀원분들이 와주셨다. 모두 각자의 카메라를 별도로 준비해 와서 딸아이를 마치 자신들의 막냇동생이나 된 듯이 학교 굿즈를 사주고 꽃다발도 안겨주셨다. 내가 평생 몸담은 공직사회에는 없는 문화다. 참으로 따뜻하고 고마운 분들이다.

 

1%의 시청률에 매일 희비가 오가고 더 높은 연봉을 찾아 이직을 밥 먹듯이 하는 방송국이 이토록 따뜻한 면이 있는 곳이었다니. 한 선배가 딸아이에게 밥을 사주면서 너도 후배가 들어오면 잘 해준다고 하면 된다고 하셨단다. 요즘 공직사회는 그야말로 각자도생의 정글이다. 정년이 보장된 안정된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이 이상할 정도로 오직 본인과 본인의 업무만 챙기는 문화가 팽배하다. 내가 불편하지 않고 다치지 않는 것이 최우선이다.

 

공공기관이 예전에도 그랬던 것은 아닌 것 같다. 내가 운전 면허시험을 보러 갈 때 온 선생님들이 간절히 내 합격을 기원하고 내 전화를 기다렸다고 한다. 매일 나를 운전면허학원에 데려다 주시기도 했다. 이제 다시 올 수 없는 추억일 뿐이다. 나도 후배들에게 잘 해줘야 할텐데 괜한 엉뚱한 화가 될지 두려워 주저하게 된다.


딸아이와 단둘이서 독서토론회를 한달에 한 번 하기로 했다. 과연 딸아이가 결혼하기전에 세계문학필독서 50를 다 마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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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3-05 1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고, 정말 마음이 짠하셨겠어요. 그래도 저렇게 밝게 웃고 있으니 보기 좋네요. 따님 졸업 축하드려요.
책 너무 잘 읽고있습니다. 따님과 한 달에 한 번 독서토론 그것도 결혼하기 전. 할 수 있을 거 같은데요? 그러면 두 분께 다 잊지 못할 좋은 추억이 될 것 같습니다. 가끔 실황중계 부탁드립니다. ^^
근데 학교 굿즈가 있었군요.
저 땐 상상도 못 하던건데...

박균호 2024-03-05 10:24   좋아요 2 | URL
감사해요. 야망은 큰데 실천이 잘 될지 모르겠습니다. 워낙 공사다망한 따님분이라..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