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2disc)
임순례 감독, 엄태웅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 스포일러 경고 *

   요즘 핸드볼이 뜨겁다! 지난 여름 올림픽 아시아 예선에서의 ‘억울한’ 판정시비 이후 어렵사리 성사된 재경기 결정, 그 재경기에서 남·녀팀 모두 ‘숙적’ 일본을 ‘완파’하고 거두어낸 ‘짜릿한’ 승리. 값진 베이징 올림픽 진출권 획득. 이와 함께 적절한 시기에 등장한 핸드볼 소재의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하 우생순)’은 핸드볼 열기의 불씨이자 기름이 되어 극장가에서 한창 활활 타오르고 있다. 요즘만 같아라, 풍년이다, 우리 핸드볼! 

  개봉 이후 연이어 박스오피스 1위를 달리며 400만 관중을 돌파한 ‘우생순’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명승부 끝에 아쉽게 은메달을 획득했던 여자 핸드볼 국가대표 선수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만들어졌다. 문소리, 김정은 이 두 주연의 캐스팅만으로도 영화에 무게와 기대가 적지 않게 실리기는 하지만 무엇보다도 (비록 많지 않은 사람에게 일지라도) 영화의 무게감과 기대치를 풍족케 하는 건 바로 임순례 감독의 작품이라는 점이다. 영화 ‘세 친구’, ‘와이키키 브라더스’등을 만들어 온 임순례 감독은 줄곧 이 세상의 비주류들에게 카메라 앵글을 맞추고 그들의 고단한 삶 속에서의 얕은 달콤함과 진한 애틋함들을 진솔하게 그려왔다. 그런데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 것일까, 그간 비주류를 줄곧 그려왔던 그녀 역시 냉철한 영화‘시장’에서는 비주류로 머물 수밖에 없었다. (뜨거운 열정과 진심으로 땀 흘리고 있더라도 훨씬 더 소외된 감독분들께는 임순례 감독을 ‘비주류’라 부르는 것이 죄송하다만...) ‘우생순’의 홍보시 영화의 수월한 흥행을 위해 예고편에 감독의 이름을 아예 배제시켰었다는 이야기는 왠지 좀 서글프다. 마치 ‘우생순’이 가난하고 촌스러운 엄마가 부끄러워 학교에 오지 못하게 하려는 철없는 아이같아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그런 마음을 먹은 아이를 탓해야 할까, 그런 마음을 먹게끔 만든 사회 환경을 탓해야 할까. 

  영화는 올림픽 2연패의 주역이었던 금메달리스트 미숙(문소리)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여자 핸드볼 국가대표팀의 몇 달여간의 올림픽 여정을 그리고 있다. 팀의 갈등과 불화, 형편없는 실력. 그러한 위기를 극복하고 더욱 굳게 똘똘 뭉치게 된 팀. 결국 이루어낸 (아쉬워도) 뛰어난 결실. 영화의 기본 이야기는 이렇듯 여느 명랑 스포츠 만화의 구조와 같이 참 단순하고 그저 평면적으로만 감동적이다. 그래서, 식상하다. 그래서, 올림픽 본선에서의 숨가뿐 경기 장면과 장엄한 배경음악의 조화 속에 가슴이 뭉클하다가도 이내 내가 왜 뭉클해야하나? 의구심이 솟는다. 

  덩달아 혜경(김정은)의 감독대행일 때와 선수일 때의 팀원들을 대하는 태도의 엄청난 차이, 서로 이빨로 물어뜯고 입술로 헐뜯던 팀원들 간의 급속도로 해소된 갈등과 끈끈해진 유대, 대표팀 감독 승필(엄태웅)과 선수들 간의 극심한 반목과 몰이해에서 상호존중과 배려로의 전환, 혜경이 미숙에게 건넨 “넌 핸드볼을 위해 태어난 최고의 선수니까.”란 너무도 명랑 만화틱한 부자연스러운 대사, 혜경과 승필의 억지스런 사랑의 피어남 등 껄끄러운 문제들이 끊임없이 피어오른다. 이렇듯, (철저히 나의 기준, 나의 판단이지만) ‘우생순’은 인기영화는 될지언정 결코 훌륭한 영화는 못된다. 

  그렇지만 이러한 나의 평이 결코 ‘우생순’의 모든 것은 아니다. 앞서 밝힌 한계를 보완할 수 있는 의미들은 영화 곳곳에서 콕콕 박혀있다. 우리가 너무도 쉽게 생각하듯 화려한 부와 명예 속의 금메달리스트란 착각과는 달리, 미숙은 남편의 빚과 소속 실업팀의 해체로 비루한 현실 속에서 생계를 유지하기위해 핸드볼 유니폼이 아닌 마트아줌마의 앞치마를 두르고 코트가 아닌 마트를 고단하게 뜀박질한다. 그녀가 아테네 올림픽 대표팀에 선뜻 합류하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도, 결국 합류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도 어쩔 수 없이 돈 문제때문. 그녀의 지금까지의 ‘평생’을 올곧이 바쳐온 핸드볼, 국가대표란 명예도 불안한 생계유지와 흔들리는 가족의 부양 앞에선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했다. 꿋꿋하고 되도록 담담하게 현실을 헤쳐가려는 그녀의 어깨가 퍽 무거워 보인다. 그녀의 점프슛은 통쾌하기에 앞서 무표정스럽다. 골이 터지는 것이 아니라 애써 억누르며 쌓아둔 다른 무언가가 터질 것만 같다. 사회적 약자를 생산함으로써만 존립 가능한 고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주류로 밀려난 ‘아류들’의 고단함, 솟아남이 없는 혼신의 발버둥. 돈 신의 악력에 사로잡혀버린 삶. 미숙의 삶은 우리 사회의 현실을 투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 외에도 관중도 응원도 없는 썰렁한 경기장에서 핸드볼큰잔치 우승(그들만의 우승)을 하고 그 순간 바로 소속 실업팀 해체를 겪어야하는 열악한 한국 비주류 스포츠계의 현실, 자율적 자발이 아닌 자발을 빙자한 타율과 규제 속에 기계처럼 운동선수들을 관리하는 태능선수촌의 현실, 경기력 유지를 위해 피임방지약을 과다 복용하여 불임 증상에 이른 사례와 여성 운동선수에 대한 편견 등을 통한 한국 여성 스포츠 문화의 취약함, 국제대회에서의 단기적·고성적만을 중시하는 체육협회의 근시안적이고 저급한 사고 등 ‘우생순’이 날카롭게 던져주는 현실의 모습들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거리와 의미들을 선물한다. 

  자, 여기까지는 철저하게 나의 주관적인 ‘우생순’ 바라보기였고, 끝으로 ‘우생순’에 감동하고 눈물 훔쳤던 수많은 이들에게 말을 한번 건네려고 한다. 여기저기에서 관객평을 훑어보았을 때 관객 모두가 감동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 많은 이들이 가슴저려했음은 알 수 있었다.

  당신은 영화의 어느 장면에서 가슴이 뭉클하셨나요? 눈물이 흐르시던가요? 아, 네, 그 장면이라고요? 그렇죠. 저도 그때 마음이 얼마나 찡해지던지요. 다른 많은 분들도 거기서 눈물이 날 정도였다고 이야기하던걸요. 참 마음 아프면서도 찡하고 가슴 얼얼한 영화라고 기억하시겠네요. 그렇죠? 아, 그런데 여기서 커다란 의문 하나! ‘우생순’을 보며 가슴 아파하고 눈물 흘릴 정도의 당신의 그 떨리는 감수성이라면 영화 ‘웰컴 투 동막골’과 ‘화려한 휴가’를 보면서도 분명 가슴이 젖어오셨을텐데요, 제 예상이 맞나요? 아, 역시 그러셨군요. 그렇다면 이렇게 사람냄새나는 당신은 그 저릿함과 젖어듦으로부터 무엇을 길어올리셨나요? 과연 어떠한 의미를 다듬으셨나요?

  ‘웰컴 투 동막골’을 통해 북한을 바라보는 눈을, 통일에 대한 시각을 재정립해보셨나요? ‘화려한 휴가’를 통해 우리 현대사의 아픔에 공감하고 5·18에 얽힌 비극과 희망의 두 갈래가 오늘날 어떻게 이어져오고 있는지 생각해보셨나요? ‘우생순’을 통해 비인기 종목 스포츠 선수들의 고난에 잠시라도 동참하셨다면 올림픽과 같은 빅 스포츠 이벤트 때에만 그 비인기 스포츠에 목 터져라 열광하던 자신의 일면 괴상한 모습을 되돌아 보셨나요?

  일본에는 아우슈비츠, 홀로코스트에 관련된 서적들이 참 다양하고 많다고 합니다. 그러한 주제의 책들이 일본인들에게 활발히 읽히고 있다고 하네요. 그런데 그럼에도 그 많은 일본 독자들이 아우슈비츠와 홀로코스트에 대한 주제를 일본이란 자신들의 국가의 역사와 현실에 조금도 연계시켜 생각하지 못함이 너무도 의아스럽고 걱정스럽다고 지적한 재일조선인이 있었습니다. 아우슈비츠, 홀로코스트에 버금갈 역사적 만행을 저리른 과거가 있고, 그 과거를 오히려 은폐하고 미화하려는 현실이 엄연히 존재하는데 그 일본인들에게 책의 내용은 그저 활자로서만 존재했을 뿐, 현실로 길어올려지지 못한 것입니다. 보기에 안타깝죠? 일본인들, 왜 그 사람들은 그런 책을 활발히 읽으면서도 반성하지 못하는 걸까요?

  그런데요 이와 똑같은 안타까움을, 이와 똑같은 질문을 당신에게도 드리고 싶네요. 당신, 왜 그런 영화들을 보며 눈물까지 훔쳐놓고서 왜 자기 머리로 더 생각하고 현실의 체로 영화의 감상을 걸러내지 못하는 건가요? 


  변하지 않았다. 내 눈에는, 무엇도 변해보이지 않는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웰컴 투 동막골’, ‘화려한 휴가’, ‘우생순’을 보며 감동에 젖었어도 무엇도 변하지 않았다. 북한, 통일에 대한 사고의 경직성과 우리 현대사에 대한 심각한 무지, 사회적 약자의 고단한 처지와 비주류 스포츠 종목의 취약한 기반, 국가주의·민족주의에 매여 매번 폭발하는 올림픽의 열광은 그저 그대로이다. 앞서 말한 일본인들에게 그 책이 그저 책이었듯이 우리들에게 그 영화들은 그저 영화였을 뿐. 우리가 느꼈던 가슴 뭉클함은 그저 스크린 속 가상세계, 가상인물들의 고난에서 비롯된 것일 뿐, 우리는 그저 푹신한 극장 의자에 몸을 맡긴 채 팔짱을 끼고 관망한다. 영화를 보며 젖어든 당신의 감성에 나는 ‘위선’이란 판결을 단호히 내려도 될까? 때론 위선이 악보다 악한 것을 수도 있지 않을까? 아, 우리에게 치열히 요구되는 것은 떨리는 감성이란 희망을, 그 ‘위선’을 ‘선’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자신을 되돌아봄의 노력이다. 

  맞다, 요즘 핸드볼은 뜨겁다! 요즘만 같아라, 풍년이다, 우리 핸드볼!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지않아 보릿고개는 어김없이 찾아올 것이며 ‘우리 핸드볼’은 다시금 ‘빵구’날 정도로 주린 배를 움켜잡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차가운 무관심 속에서 아사할 것이다. 우리들은 위선자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감독: 임순례,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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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어린 맘을 주었다고 해서
작은 정을 주었다고 해서
그의 거짓없는 맘을 받았다고 해서
그의 깊은 정을 받았다고 해서
내 모든것을 걸어버리는
깊은 사랑의 수렁에 빠지지 않기를

한동안 이유없이 연락이 없다고 해서
내가 그를 아끼는 만큼
내가 그를 그리워 하는 만큼
그가 내게 사랑의 관심을 안준다고 해서
쉽게 잊어버리는
쉽게 포기하는
그런 가볍게 여기는 인연이 아니기를

이 세상을 살아가다 힘든 일 있어
위안을 받고 싶은 그 누군가가
당신이기를
그리고 나이기를

이 세상 살아가다 기쁜 일 있어
자랑하고 싶은 그 누군가가
당신이기를
그리고 나이기를

이 세상 다하는 날까지
내게 가장 소중한 친구
내게 가장 미더운 친구
내게 가장 따뜻한 친구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이가
당신이기를
그리고 나이기를

이 세상 다하는 날까지
서로에게 위안을 주는
서로에게 행복을 주는
서로에게 기쁨을 주는
따뜻함으로 기억되는 이가
당신이기를
그리고 나이기를

지금의 당신과
나의 인연이
그런 인연이기를 
 

- 어떤 이의 깊은 울림을 따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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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08년 2월 22일
대구 달서구.
 
구청의 대대적인 노점상 단속. 
우리사회 수준의 현주소.

안타까움만이 더해가는 우리 한국사회.
 

우리들,
부디, 제발,
타인의 아픔과 눈물에 공감할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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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깜찍, 반짝, 예쁜 아동 모델들이 유독 눈에 많이 띄는 요즘의 미디어 세상. 특히나 각종 CF의 카메라 앵글은 이 ‘꼬마’들을 분주히도 쫓고 있고 많은 사람들은 이 ‘꼬마’들의 매력에 폭 빠져든다. 나는 언제 이 꼬마들에 들떴을까, 한번 떠올려보자. 베스킨라빈스, 트롬 세탁기 등 여러 CF들이 머릿속을 스쳐갈 것이다. 베스킨라빈스 꼬마 광고의 등장 이후 하나하나 세어보면 꼬마들이 메인인 광고의 수는 족히 20여 편은 되는 것 같다. 또한 트롬 세탁기의 꼬마는 모델료로 단발 2천만 원 이상을 받으며 5~6편의 CF, 뮤직비디오 등에 출현하였고 베스킨라빈스의 꼬마도 지금까지 6편의 CF, 4편의 영화 등에 출현하였다. 그리고 미디어의 수용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스타급 꼬마는 앞선 둘을 포함해 5명 이상을 꼽아볼 수 있는 등 종으로 보나 횡으로 보나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아동 모델들의 확 뜨임현상은 확연하다.  


<아동 모델 정다빈과 정채은>

    그렇다면 이러한 아동 모델들의 확 뜨임현상의 이유는 무엇일까? 달리 말하면, 우리는 왜 이 꼬마들에게 열광하는가? CF 속에서 이 꼬마들이 나타내는 이미지들을 종합해 나열해보면 귀여움, 예쁨, 순수, 평온, 화목, 풍요 정도가 되지 않을까. 이러한, 아동 모델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고유의 이미지들은 포화상태의 광고시장에서 소비자들의 감성을 떨리게 할 수 있는 훌륭한 전략이다. 그리고 광고의 수용자들은 실제로 떨려한다. 나 역시 이 꼬마들의 미소에 살살 녹아버렸다! 당신은? 당신 또한 그러하지 아니한가?! (철저히 광고주의 시각, 어른의 시각을 거쳐 인위적으로 생산된 이미지란 비판적 시각은 여기선 잠시 가볍게 접어두자. 어느 광고에선가는 꼬마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너무도 인위적인 어른의 언어와 한껏 꾸며진 표정이 당황스러웠지만 그런 기억들은 잠시 잊자. 아주 잠시만.) 

  그럼 이쯤에서 아동 모델들의 확 뜨임현상에 편승하여 나 또한 한 명의 아주 어여쁜 꼬마 아이를 소개하려 한다. 여느 아동 모델 뺨치게 예쁘고 귀여운, 허나 여느 아동 모델들처럼 결코 풍요롭지도 평온하지만도 못한, 다시 허나 여느 아동 모델들보다도 하얗고 해맑은 웃음을 간직한, 그럼으로써 여느 아동 모델들보다도 내 마음을 살살 녹여버린 꼬마아이, 김예슬을. 


<스타급 아동 모델 정다빈(좌상), 정채은(좌하)과 인간극장 ‘반짝반짝 작은별’의 김예슬. 나는 예슬이가 다빈, 채은 못지않게 객관적으로 정말 예쁘다고 생각하는데 과연 5년, 10년이 지난 후에 이들을 비교해본다면... 어떠할까. 앞으로 이들이 각기 나아갈 길의 풍광은 너무도 상이하다. >

  나는 예슬이를 인간극장 ‘반짝반짝 작은별’에서 만났다. 예슬이는 광주 서구의 한 외곽에서 65살의 할머니, 14살의 오빠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엄마는 예슬이가 3살 때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 사고의 충격으로 술과 담배에 쩔어 든 아빠도 몇 달 후 사고를 당해 팔다리가 마비되어 병원에 머물러있다. 자연스레 집안은 기울어졌고 생계유지란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만 하는 예슬이의 할머니는 리어카를 끌고, 여기저기 고장난 몸을 이끌고 거리로 나섰다. 아침부터 밤까지 할머니의 리어카를 하나하나 채워가는 것은 각종 폐지와 고물들. 예슬이와 예슬이의 오빠는 학교가 끝나면 할머니와 함께 리어카를 이끌고 밤거리를 나선다. 예슬이는 추위 속에서 호호 녹여가며 그 연하고 조그마한 손으로 폐박스를 뜯어 옮기고, 그 작은 몸으로 리어카를 뒤에서 밀고 때론 앞에서 끌어간다. 리어카를 가득 채워 집에 돌아오면 할머니와 오빠가 폐지와 고물들을 정리하는 동안 예슬이는 조촐한, 참으로 조촐한 저녁상을 차린다. 그 조그마한 녀석이 일에 임하는 자세가 아주 열심이고, 제법 능숙하다. 

  카메라는 이러한 환경에서 삶을 꾸려가고 헤쳐가고 있는 예슬이의 가족을 차분히 그리고 담담히 응시한다. 할머니가 아파서 못 일어나시는 어느 밤에는 오빠와 예슬이 단 둘이 할머니 몰래 리어카를 끌고 나가기도 하고, 지금은 비어있는 옛 집에 찾아가 찾아낸 엄마의 사진을 고이 접어 주머니에 넣기도 하고, 100원 200원 모아온 용돈으로, 한 시간이나 걸어 시내에 나가 할머니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오기도 한다. 어린 것 단 둘이 리어카를 끌고 밤거리를 헤매는 모습이 한켠 대견하면서도 왠지 불안하고, 엄마 사진을 찾아 밝게 웃는 얼굴의 내면엔 얼마나 뭉클한 그리움이 담겨있을까 안타깝고, 큰마음 먹고 준비한 할머니의 크리스마스 선물은 너무도 소박하여 마냥 슬프다. 



<오빠와 함께 리어카를 끌고 있는 예슬이>

  그러나 이러한 나의 동정적 감상이 무색하게, 예슬이의 얼굴은 결코 찌들어있거나 어둡지 않다. 왜 그런 상황에서도 찡그리지 않고 웃고 있니, 어째서 투정부리지 않고 묵묵히 집안의 일에 동참하고 있니, 어떻게 구석에 쭈그려 앉아 우울해하지 않고 할머니와 오빠와 함께 오순도순 맑은 대화를 이어갈 수 있니? 아, 이러한 예슬이의 꿋꿋한 모습을 보며 이 꼬마의 미래에 대해, 감히 희망을 걸어봐도 되려나. 그런데 검고 짙은 스모그 속에서 생각이 뒤엉켜가는 건 왜일까. 

  예슬이네 할머니의 한숨은 왜인지 깊어만 간다. 과거 연골 수술을 받았던 무릎의 통증은 날이 갈수록 더해만 가고 백내장으로 눈까지 점점 어두워져 간다. 또한 석 달 후면 지금 살고 있는, 초라하지만 아늑했던 집을 비워줘야만 한다. 폐지와 고물을 한 가득 모아 끙끙 힘겹게 고물상까지 옮겨가 팔아도 받을 수 있는 돈은 고작 100kg에 7500원 미만. 과연 새 보금자리는 어떻게 구할 수 있으려나. 손주, 손녀가 ‘고등핵교’ 졸업할 때까지는 죽지 않고 살아서, 아무리 아프고 고단해도 계속 일해서 ‘애기들’ 대학 보내는 게 소원이라는 할머니의 말이 내 가슴을 불안한 먹먹함으로 때린다.

     

<우리 아이들 때문에 못 갖고 와도 웃어요. 아이들이 웃겨 븐께....>

  “기분 좋죠. 어떤 때는 (폐지와 고물을 팔아) 4만원도 할 때가 있어요. ... 그때 최고 좋죠. 그때 우리 애기들 천원씩 탁탁 주면 돈 갖고 춤춘디요. 얼마나 좋다고 춤 춘다고요.”

  한 쪽에서는 매일밤 고단하게 고사리 손까지 품들여 올린 4만원의 수입에 더덩실 춤을 추고, 한 쪽에서는 4천만원이란 금액도 1~2초 사이에 가볍고 우습게 나뒹군다. 누군가에겐 4억원도 우습다. 이러한 직접 비교, 이러한 극한 차이. 그냥 통밥만 굴려 생각해봐도, 직관에만 귀를 기울여봐도 어라, 이거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무언가 찝찝한 느낌이 끈적히 달라붙지 않는가? 극한 차이, 명백한 불합리함. 혹여 능력주의 사회에선 당연한 현상이라고 차갑게 말하는 당신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당신일지라도 예슬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주 조금이나마 느꼈을 안타까움까지 부정하진 못할 것이다. 그런 안타까움이 바로, 본인은 명확히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극한 차이의 현상이 무언가 문제가 있는 현실임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는 징표가 아닐까. 나는 우리 개개인이 예슬이를 보고 들으며 가슴에서 솟았던 느낌들을 좀 더 열심히 되돌아보고, 대면해주길 바란다. 그저 단순한 안타까움, 일차원적인 찝찝함에 머물지 않길 바란다. 그러한 안타까움, 찝찝함을 덜어낼 수 있는 현실적 방법은 없을지 고민해주길 바란다. 

  세상을 뒤집어엎어 만민평등의 세상을 만들자 외치진 않겠다. 다만 OECD 가입국, 첨단기술 강국, 세계 10대 경제규모 등을 자랑으로 내세우는 이 나라에서 좀 더 튼실한 사회안전망을 구축하지 않고 있음이 (‘못함’이 아닌 ‘안함’이다.) 그저 기이할 뿐이다. 이 땅에서는 과연 조금 더 튼실한 사회안전망 구축이 그저 요원한 이상일까. 많이도 아니다, 그저 조금, 그저 조금만, 조금만 더도 안되는 것인가. 왜 우리는 끙끙 앓는 노파와 9살 먹은 어린 꼬마를 춥고 깜깜한 밤에 폐지를 주워오도록 거리로 내몰고 있으며, 다 스러져가는 초라한 집에서조차 내쫓으려 하는가. 이 노파와 꼬마가 적어도 초라한 집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고, 제때에 최소한의 병원 진료라도 받을 수 있고, 학교 교육으로부터 이탈됨을 걱정하지 않고, 일주일에 2~3번만 폐지를 주워와도 생계를 근근이 유지해갈 수 있는 사회시스템은 정말 그리도 요원해야만 하는가. 이러한 냉혹함이 현재 우리 사회의 수준이다, 우리들의 인격적 수준이다. 이는 우리 사회와 우리 사회 구성원 각자의 가치관과 지향의 문제이다. 주체조차 사물화되는 고도자본주의 사회에 그저 푹 절어버린 가치관과 지향들. 

 

<누가 이들을 거리로 내몰고 있는가.>

  예슬이의 이야기에 일말의 안타까움을 느꼈다면 당신은 혹 ‘사회복지’란 ‘상품’을 ‘소비’해줄 마음은 안드는가? 아서라, 천박하게 뿌리내린 우리 고도자본주의 한국 사회에서의 소비란 오직 나만을 위한 것임을(‘나’가 ‘진정 나’인지의 문제는 미루어두자). ‘사회복지’란 공공을 위한 ‘상품’은 아무리 예쁘게 포장을 해도 이미 사회주류의 룰을 어긴 상품, 그 태생부터 도태의 운명을 타고 난 것을 어찌할까. 선진국, 7대 경제대국, 국민소득 4만 달러, 이건희의 삼성, 이명박에 대한 선망과 지지. 10억 모으기, 50평 아파트, 로또, 프로토, 의대, 고시, 대기업 입사로 빽빽이 가득 찬 인생지도. 이러한 생각과 지향에 줄서기한 우리 대다수가 동시에 예슬이를 보며 안타까워함은 심각한 자가당착, 양의 탈을 쓴 자위, 독한 가식이다. 물론 본인은 깨닫지 못하겠지만. 우리, 단순 일차원적인 안타까움을 넘어서지 못할 거라면 감히 안타까워하지도 말자. 내가 지향하는 세상, 이루려는 삶과 예슬이를 보며 흘린 눈물 사이의 엄청난 거리차를 직시하지 못할거라면 어서 추한 눈물을 뚝 그쳐라. 우리의 자위가 때론 너무도 역겹다. (오바했나? 나 또한 가식의 글을 끝맺는다.)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 어떤 지독한 일을 겪을지라도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된다. - 황석영의 '바리데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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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정원 - 전2권 세트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5월
평점 :
절판


 

  누군가는 80년대를 이렇게 표현했다. 

 “군사독재권력과 민주운동 간의 피어린 대결이 숨 막히게 진행된 저 80년대.” 

  그래, 고개가 끄덕여지다가 순간, 세차게 의문이 돋는다. 그런데 그 시절을 과연 ‘피어린 대결’, ‘숨 막힌 진행’으로 표현해도 되는 것일까. 과연 저들의 피흘림, 숨막힘과 이들의 피흘림, 숨막힘을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과연 정당한 일일까. 무언가 부당하지 않은가. 부당하다. 부당하다. 시뻘건 피의 분한 비린내를 아프게 맡아야만 했고 잔인한 어둠 속에서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숨 죽여만 했던 이들은 과연 누구였는가, 언제나, 늘, 누구였던가. 

  “지난 새천년 봄에 출간된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창작과 비평)은 1980년대를 ‘관념, 시대, 역사’의 기존 틀에서 벗어나 ‘현실, 개인, 일상’이라는 새로운 틀로 바라본 걸작”이란 호평처럼 <오래된 정원>은 어두운 시대를 끊임없이 몸으로 부대끼며 견뎌내고 이겨내야만 했던 한 남자와 한 여자의 현실, 개인, 일상을 치열하게 그리고 있으며 또한 잊어서는 안될 한 시대의 진실을 끊임없이 진솔한 글로 버무려온 황석영을 통해 그려지는 이야기이기에 한층 각별하다. 80년대 군부독재에 반대하다가 젊음을 온통 감옥에서 보낸 민주활동가 오현우. 17년이란 긴 시간이 지난 눈 내리는 어느 겨울, 형을 마친 그는 하얗게 세어버린 머리칼을 어루만지며 교도소를 나선다. 세월을 따라 변해 버린 가족과 사회의 풍경, 모든 것이 그에게는 낯설기만 하다. 허나 단 한 사람, 감옥에 있던 17년 동안 단 한번도 만나지 못했던, 소식조차 접하지 못했던 그럼에도 늘 함께했던 한 얼굴만이 익숙하게 다가온다. 잊을 수 없는 그 얼굴, 바로 한윤희. 며칠 후, 현우의 누나는 그에게 한윤희의 편지를 건넨다. 

  혹시 누님...... 한선생 주소 아세요?
  내가 말했지? 편지 갖구 있다구. 너, 괜찮겠지......
  누님은 내게 가까이 다가앉았다.
  아주 오래 있다가 얘기해줄려구 그랬는데...... 그 사람, 죽었어.
  나는 숨을 두 번에 걸쳐 나누어서 크게 들이켰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17년 동안 그려왔던 그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 없다. 

  1980년, 군부로부터 도피생활을 하던 오현우는 그를 숨겨줄 사람으로 한윤희를 소개받는다. 이제 막 봄의 문턱, 포근하고 흙냄새 풍기는 바람이 잔잔히 불어오는 갈뫼, 봄바람처럼 싱그러운 윤희. 현우는 윤희와의 갈뫼 생활 속에서 마치 딴 세상에라도 온 듯한 따스한 평화로움을 느낀다. 하지만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지나며, 시대적 사명감과 평온한 현실안주 사이에서 갈등하던 현우는 결국 갈뫼를 떠나, 아니 윤희를 떠나 새로운 활동을 펼칠 결심을 한다. 윤희는 그를 잡고 싶지만 잡지 않는다. 

  그렇게 그들은 헤어지고 17년이란 긴 세월이 흐른다. 한 명은 감옥이란 ‘그 안’에서 한 명은 ‘이쪽 밖’에서. 다시 현재. 윤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는 갈뫼를 찾아간 현우. 그는 윤희가 남겨둔 일기, 그림과 함께 17년 전의 과거로 빠져든다. 과연, 그는 그곳에서 그토록 꿈꾸었던 그들의 오래된 정원을 찾을 수 있을까?

  80년대에 태어난 나는 그 어두운 시대를 어떻게 지나왔던가. 물론, 아무런 어두움도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그 시대의 어둠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앞서 나는 어떤 어둠도 인식조차 못했었다. 난 그저 너무 어렸던 것이다. 그렇다. 그렇게 나는 80년대를 동심에 한껏 즐거웠음으로만 기억할 뿐 80년대의 사회와는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았다. 공교육의 기간을 거치면서도 누구 하나, 어느 교과서 하나 80년대의 사회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기에 그 시대와 나와의 단절은 공고하게 지속됐다. 아니, 남 탓만해서는 어찌하랴. 한 때는 시험 성적이, 한 때는 군대가, 한 때는 취직만이 인생의 거진 유일한 초점이었기에 80년대의 사회는 언제나 관심 밖이었다, 지금 역시. 

  너무도 어렸기에 인식조차 못했던 80년대의 어두움. 나이 스물이 훌쩍 넘고 어른이란 표딱지를 달고 있는 지금, 여전히 80년대의 어둠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고 지금 이 2000년대의 어둠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아직도 ‘너무 어리기’때문일까?

  철학자 김상봉은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80년 광주에 빚진 사람이다. 우리의 삶은 그때 거기서 죽어간 사람들이 흘린 피 값으로 대신 사준 것이다. 하기야 우리가 빚진 것이 어디 80년 광주뿐이겠는가? 멀리는 전봉준에게서부터 가까이는 전태일까지 자유를 향한 고통스런 장정에 자기를 바쳤던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우리는 여기 이렇게 살아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타인의 죽음에 빚진 것이며, 우리의 풍요는 타인의 가난에 힘입은 것이다. 내가 대학생이랍시고 잔디밭에서 음악실에서 또는 다방에서 빈둥거리던 바로 그 시간에 똥물세례를 받으며 구사대의 발길에 차이던 동일방직 여공들이 없었더라면 나는 과연 무엇이었겠으며 또 무엇이 되었겠는가? 그들이 노동하며 흘린 땀으로 내 몸은 자랐고, 그들이 입술을 깨물며 흘렸던 눈물로 내 영혼이 성숙했다. 그들의 슬픔과 눈물은 내 존재의 조건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깨어서 생각해보라. 우리는 자기가 존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슬픔과 고통의 빚을 지고 있는가?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티없는 행복을 짓밟고 서 있는가? 지금 우리가 누리는 풍요가 우리와 피부색이 같거나 다른 사람들의 비참한 빈곤 위에 터하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는가?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 내 존재를 지탱하는 것은 타인의 눈물이다. 

  나는 김상봉의 이 말이 왜 우리가 우리와 상관도 없던 과거와 관계를 맺어야하며, 왜 황석영이 굳이 한 시대의 진실을 600여 페이지 분량의 글로 애써 써내려갔는지에 대한 현답이라 생각한다. 정말로 어렸을 때는 ‘너무 어려도’ 되었지만 아직까지 ‘너무 어리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나 자신, 당신 자신의 문제가 아니겠는가. 

  체험과 기억이 직접적으로 없는 경우일지라도 우리는 문학을 통해, 영화를 통해, 음악을 통해 간접적인 경험을 할 수 있다. 상상력의 힘.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자. 우리는 하늘을 날아보았고 맨발로 바다를 건너보았으며 대통령이 되기도 하였으며 비극적인 사랑에도 빠져봤다. 경험은 간접적이되 감각은 비교적 생생하다. 상상력의 힘을 10억 모으기, 메이커 아파트 구매, 귀족적 문화의 향유, 로또 1등 당첨 등에 모두 쏟아버리지 말고 <오래된 정원>에 한번 ‘투자’해보는 건 어떻겠는가, 80년대를 기억하지 못하는 80년대생들이여! 80년대 당시엔 지금의 나, 당신, 우리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나이인 20대였을 오현우와 한윤희. 우리들의 부모님, 삼촌, 이모와 같은 세대의 또래로서 동시대를 살았을 오현우와 한윤희. 어째서 서로 사랑했던 현우와 윤희는 서로의 소식도 전하지 못한 채 그토록 긴 시간을 이별해야만 했는가? 내가 연인과 떨어져 소식도 모른 채 17년을 감옥에 가있을 수 있을까? 현우와 윤희를 이별하고 고뇌하게 만든 80년대에 우리 부모님은 과연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셨을까? 그 80년대엔 우리 부모님의 연애 또한 힘겨웠을까? 나와 나의 애인이 80년대에 연애를 했다면 어떤 장면들이 가능할까? 부디, 상상력의 힘을 뻗쳐보자. 부디, 오현우와 한윤희의 슬픔과 고통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당신도 이제는 나이가 많이 들었겠지요. 우리가 지켜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버티어왔던 가치들은 산산이 부서졌지만 아직도 속세의 먼지 가운데서 빛나고 있어요. 살아 있는 한 우리는 또 한번 다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그 외롭고 캄캄한 벽 속에서 무엇을 찾았나요? 혹시 바위틈 사이로 뚫린 길을 걸어들어가 갑자기 환하고 찬란한 빛 가운데 색색가지의 꽃이 만발한 세상을 본 건 아닌가요. 당신은 우리의 오래된 정원을 찾았나요? 

  윤희의 기록은 거기서 끝났다. 내가 누님에게서 전달받은 마지막 편지는 구십육년 여름이라고 되어 있었다. 나는 그네의 마지막 글귀를 기억한다. 

  당신은 그 안에서 나는 이쪽 바깥에서 한 세상을 보냈어요. 힘든 적도 많았지만 우리 이 모든 나날들과 화해해요. 잘 가요, 여보.

  눈물이 떨어진다. 가슴 속 파장이 퍼지고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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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6-30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책을 읽었다는 건, 뭔가 통하는 구석이 있을거라 믿는 근거가 되죠.^^
가슴 아픈 우리 역사~~~ 80년 광주에 빚진, 산자의 죄의식도 갖고 있어요.
영화는 광주에서조차 한주만에 내려서 못 봤어요.ㅜㅜ

Arm 2008-07-01 23:30   좋아요 0 | URL
역시나 황석영 선생님의 냄새가 배어있는 책이 영화보다 많이 더 좋았어요!
책이 영화화되면 그 둘을 비교하며 보는 재미도 쏠쏠한 것 같아요-
순오기님이 바라시면 영화파일 보내드릴게요! ^^
아, 그런데 광주에 사시는군요- 아, 광주...

순오기 2008-07-02 00:08   좋아요 0 | URL
그래서 제가 '광주댁'으로도 통한다죠.
결혼 후 왔으니까 올해 20년째...자칭 '광주홍보대사'로 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