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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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 그렇게 싫어하는 것은 아니니까.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미워할 만큼 기대하거나 사랑을 나눈 적이 없으니까......
그래서 싫어하지도 못하는 사이니까........-p196-
 
그 사람 살아만 있으면 영영 감옥에 있어도 괜찮았단 말이야
살아만 있으면 
왜 진작 말하지 않았니
내 입으로 누구한테도 그런 말을 ...... 해본 적이 없었어 오빠. -p283-284-
 
   
 

 공지영을 싫어했는데 이 소설을 읽고 나서는 그녀의 글을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책을 읽는 내내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눈이 젖어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윤수의 블루노트는 중간중간 마음을 흔들어 놓았고,
유정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삶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들었다.

 
책은 진작 알았지만 공지영이라는 작가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부러 외면하고 있었다.
그녀의 삶 자체가 가난이라든지 몸으로 사는 삶과는 동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몸으로 사는 사람들의 삶을 그리려고 하는 것이 참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있는 사람들이 가지는 우월감에서 아래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각이라고 해야하나.
그런 감정이 참 맘에 안들었는데, 이 소설에서도 역시 그런 느낌이 들긴 했지만
그걸 풀어가는 과정이 전 보다 힘이 풀리고,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런데 책을 읽기 전 영화를 만들게 되었다는 소식을 먼저 접하게 되었다.
그래서 주인공이 이나영과 강동원이라는 걸 떠올리면서 책을 읽게 되었는데
윤수의 슬픈 이미지를 어떻게 강동원이 연기할지 나름 걱정이 되었다.
읽으면서 내가 생각한 윤수를 강동원이 잘 연기해줄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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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인 김승옥 - 김승옥의 문학과 예술에 바침
백문임 외 지음 / 앨피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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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을 알게 된 것이 언제였던가.열심히 공부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국어교육과 학생인데 현대문학 작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승옥의 주옥같은 작품들을 언제 읽었던가. 소설지도론을 배우면서? 아니다 문학비평 수업을 들으면서? 아니다. 아마 내가 처음 김승옥의 작품을 읽게 된 것은 4학년 들어 임용고사를 준비하면서였을 것이다.

1960년대 황무지와 같았던 한국문학계에 내려진 축복같은 존재. 감수성의 혁명. 한글세대로서 이상 이후 뛰어난 귀재의 작가라는 찬사를 받으며 혜성같이 나타난 그의 유명한 작품 '무진기행'과 '서울1964년 겨울'을 나는 임용 준비를 위해 읽었던 것이다.

뛰어난 찬사를 받은 그의 작품들을 80년생의 대학생이 2000년대에 읽으면서 어떤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그저 아아... 그렇구나. 무진의 의미가 무엇이고, 1960년대 당시의 현실이 이랬구나 정도만 느꼈다. 내게 중요한 것은 시험에 나올 법 한 것을 집어내고 외우는 것이었으니까.

어느 순간이었을까? 김승옥의 글들이 예사로 느껴지지 않았던 순간이. 그의 문장 하나하나가 가슴에 내리 꽂는 순간이 있었다.
그리고 60년대 문단의 찬사를 받으며 젊은 나이에 동인문학상까지 수상한 그가 다작하지 못한 채 사라진 이유가 궁금했다. 그는 무얼하고 지내는 걸까? 그는 왜 소설쓰기를 그만 둔 것일까?

   
  <벗들아. 너희들의 이성(理性)을 과시하며 나를 조롱하지 말아다오.
벗들은 교과서의 가르침대로 한 번쯤은 내게 충고를 하고 그리고 내가 우쭐우쭐하고 있는 사이에 그들은 토라진 계집애들처럼 홱 돌아서서 어깨를 아주 나란히 하고 총총히 떠나 버린다.
너의 의견과 나의 의견이 있을 뿐―우리들이 내리는 공통된 결론.

딱한 친구를 보는 것은 내 자신을 보는 것보다 더 괴롭다. 내게 점심을 사준 어느 친구에게 답례(答禮)로 음담(淫談)을 하나 들려주었더니 내게 잘 보이려고 그 순진하기 짝이 없는 친구. 자기도 그쯤은 예사라는 듯한 태도로 기상천회의 음담을 이마에 심줄을 세워 가며 하는 그 모습. 억지로 따라 웃어 주긴 했지만 서글퍼서 나는 죽고만 싶었다.

안색(顔色)을 팔고 국화(菊花)를 사는 노인을 보았다. 저렇게 늙고 싶은데. 

"당신네 같은 처녀들보다는 닳아진 창녀(娼女)를 난 더 좋아합니다."라고 말하여 한 처녀를 울려 보냈다. 왜 나는 거짓말을 했을까? 창가(娼家)는 구경도 못한 놈이.

경계하면서 사랑하는 척. 시기하며 친한 척. 기뻐하며 슬퍼해 주는 척. 저는 너그럽습니다. 라고 표시하기 위하여 웃으려는 저 입술의 비뚤어져 가는 저 선(線)이여 <모나리자>같은 선생님. 만수무강하십쇼.
"이걸 안 하면. 넌 굶어 죽어. 알겠어?"
"네."
"이걸 안 하면. 넌 동지를 배반하는 거야. 알겠어?"
"네."
"남들이 그걸 할 때 그걸 구경하고 있는 네가 아무렇지도 않은 심정으로 그들을 구경하듯이. 이번에 네가 한다고 해서 거리를 지나가는 너를 특별히 너만 바라보며 웃거나 할 사람은 없어. 알겠어?"
"네."

<데모>에 한 번 참가하는데 자신에게 몇 번 다짐해야 했던가. 알고보니 <데모크라시>가 팽개쳐 버릴 도련님이였구나.

돈이 있었으면 좋겠다. 상냥한 여인이 있었으면 좋겠다. 아담한 방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것들만 있으면 문학도 버리겠다고 장담해 본다. 쓴다는 것도 결국은 아편(阿片). 말라만 가고 헛소리를 하게 되고. 아아. 건강한 사람이 되고 싶다. 파이프를 물고 소파에 파묻혀 앉은 독자가 되고 싶다. 물론 고뇌를 사랑하는 사람을 존경한다. 그렇지만 그들을 존경하기만 하면 그걸로써 의무감이 해방을 느끼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그럼. 돼지가 되라고요? 맞습니다. 돼지가 됐었더라면…… 

제게도 역시 사는 편이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때가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인생 전체를 훑어 생각할 때가 아니라. 음식을 맛나게 먹을 때나 밤거리에서 불빛이 밝은 쇼 윈도우를 구경할 때나 맘에 드는 옷을 입을 때 나와 같이 뭐 여럿 앞에서 큰 소리로 얘기하기엔 창피할 정도로 시시한 일을 하고 있을 때 말입니다.

박수 받고 싶어서 철봉대를 붙들고 다섯 바퀴 돌고, 집에 돌아와서 껍질이 벗겨져 쓰린 손바닥을 호호 불다.

치한인가보다. 나는 정말. 좀 <쌘치>한 치한인가보다.

서울 역전(驛前) 광장의 남쪽에 있는 공중변소엘 들어가다. 먼지가 앉고 때낀벽에는 희미한 연필글씨로 편지 서두(序頭)의 낙서(落書)가 있었다. ―<아버님 보옵소서>
누더기를 입고 머리가 산발한 지게 품팔이꾼이 손가락 만한 연필에 연방 침을 칠해가며 울면서 이 편지의 낙서를 하고 있는 게 상상되다. 고향에서는 예의바르게. 매일새벽. 아버님의 방문 밖에서 아침 문안을 드리던 아들. 금의환향(錦衣還鄕)을 맹세하고 상경했지만 이제는 돌아가기도 부끄럽고 편지 올리기도 괴로워서 ……아, 왜 맹세했던가. 왜 맹세했던가.

일본(日本) 어느 엉터리 시인의 단가(短歌) 하나를.
<웃기 잘하던
그 청년이 죽으면
세상도 조금은 쓸쓸해지겠지.>

오늘 새벽 나는 유서를 고쳐 썼다. <나는 착한 사람입니다>라고. 단 한가지 남은 거짓말만이라도 철저하고 싶다는 마음에서이다. 이미 죽어 버린 사람에 대해서는 그 사람을 조금이라도 미화(美化)시켜 주려는 선의가 세상엔 아직 있기 때문에 나의 이러한 유서는 어쩌면 액면(額面) 그대로 받아들여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마각(馬脚)이 드러나면 그때는. 오늘 오후에 나는 유서를 찢어 버렸다. 

가엾다. 가엾다. 가엾다. 가엾다. 가엾다. 가엾다. 가엾다. 이젠 됐나. 김군?

천번만 먹을 갈아 보고 싶다. 그러면 내 가슴에도 진실만이 결정(結晶)되어 남을까? ―한 <카타르시스>신봉자의 독백. 

어느 날. 고향의 어머니께 보내고 싶은 마음 간절했던 편지의 한 구절―<실은 의사(醫師)가 되고 싶었는데 병자(病者)가 되어 버렸어. 라고 힘없이 말하며 병들어 죽어 간 친구를 오늘보고 왔습니다.> 

누이에게 쓰고 싶던 편지의 한 구절―<도시에 가서 침묵을 배웠던 네가. 도시에서 조리에 맞지 않는 감정의 기교만을 배운 나보다 얼마나 훌륭했던가.>

별도 보이지 않는 밤에. 고향의 논두렁이 그리워서 중량교쪽 어느 논두렁에 가서 서다. 개구리들이. 거꾸러져라 거꾸러져라 거꾸러져라 거꾸러져라. 고 내게 외쳐대다.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중 5. 일지초(日誌抄)에서>

 
   

 
도시의 개인주의와 군중 속에서의 고독. 그 속에서 침묵을 배웠던 누이가 감정의 기교만을 배운 자신보다 얼마나 훌륭한가.... 그 속에서 느끼는 자괴감을 김승옥은 개구리가 거꾸러져라 거꾸러져라 거꾸러져라 거꾸러져라. 고 자신에게 외쳐댄다고 표현했다.

나는 무진기행에서 당신은 무진을 떠나고 있습니다.라는 표지판을 보자 얼굴이 붉어졌다는 표현보다 이 말이 더 가슴에 와닿았다. 그리고 김승옥의 작품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김승옥의 작품은 60년대의 작품들 몇편. 그리고 그 후의 삶은 전혀 알 수 없었다. 어느 참고서에서 기독교에 헌신하고 있다는 사실만 잠깐 보았을 뿐.

우연히 들른 서점에서 <르레상스인 김승옥>이라는 책을 보았다. 다른 책을 사려고 했지만 그책을 보고 선뜻 사버렸다. 김승옥을 존경하는 여러 젊은 학자들이 김승옥의 문학과 영화, 만화, 그리고 그의 인생 전반에 관해 고찰한 글들을 모은 책이었다. 김승옥의 젊은 시절의 모습이 표지에 드러난 책. 조심스럽게 그 책을 펼쳤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내가 궁금해하던 김승옥의 삶이 펼쳐졌다. 소설가로서 등단을 했지만 그 전에 파고다 영감이라는 만화를 통해서 만화가 활동도 했으며, 소설이 크게 히트를 치고 단편집도 출간이 되었지만 출판사와의 마찰로 인세를 받지 못했다는 것 그로 인해 생활고에 시달리고 좀 더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기 위해, 대중들과 가까이 가기 위해 영화를 선택하게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얼마 전에 뇌를 다쳐 이제는 말을 잘 하지 못하고, 다시 언어를 배우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김승옥의 작품들을 읽고 그의 삶을 생각해보면 이상이 떠오른다. 물론 이상과 김승옥의 삶과 문학은 판이하게 다르지만 젊은 날 뛰어난 작품을 쓰고 그 이후 짧은 생을 마감했거나 작품활동이 멈췄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의 대표적인 작품들이 생생하게 살아남아 젊은 작가들을 가슴 뛰게도 하고, 좌절하게도 만든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들의 젊음은 어떻게 그리 찬란한 글로써 남았는지... 작품들을 읽고 있으면 질투심에, 부러움에, 가슴이 두근거릴 뿐이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군중 속의 고독과 개인주의적인 삶, 그리고 그 속에서 감정의 기교만 늘어가는 우리들. 우리 자신에게 반성의 의미로, 또는 새로운 세대에 대한 희망의 메세지로서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는 그 빛을 발하고 있다. 
 

-06.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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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벌이의 지겨움 - 김훈 世設, 두번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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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놀기를 좋아하고 일하기를 싫어한다. 나는 일이라면 딱 질색이다. 내가 일을 싫어하는 까닭은 분명하고도 정당하다. 일은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소외시키기 때문이다. 부지런을 떨수록 나는 점점 더 나로부터 멀어져서, 낯선 사물이 되어 간다. 일은 내 몸을 나로부터 분리시킨다. 나의 현존이 몸으로부터 떠나 갈 때, 나는 불쾌하고 불안하고 불편하다.

-김훈. 밥벌이의 지겨움. 목수들의 일터에서 놀다 중

 
   

생각해보면 일을 하지 않는 지금의 나는 나에 대해서 고민하고, 생각하며, 내가 판단하는 대로 생활하고 있다. 나는 일에 얽메여 있지 않기 때문에 일과 관련 된 것에 정신을 쏟아 부어 나 자신으로 부터 멀어지는 경우가 없다. 나는 오로지 나 자신과 나의 앞날과 나의 과거와 나의 현재를 생각하며 온전히 나로 존재한다. 지금 이 시간만큼 온전하게 나를 위해, 나만을 생각하며 지낼 시간이 있었는가. 할 일이 없는 지금의 시간이 온전한 나만의 시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05.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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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여관
임철우 지음 / 한겨레출판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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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한, 고통이 여전히 지속되는 한, 그건 과거가 아니라 그들에게 엄연한 현재야.

그런데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라고?

컴퓨터 자판의 삭제키를 눌러 버리듯이, 그렇게 간단하게 지워버리라고?

 천만에. 너희들은 정작 그 사람들을 삭제하고 싶은 거겠지.

어쨌거나 너와 동시대인임에 분명한 그들의 삶, 아니 존재 자체를 깨끗이 지워버리고 싶어 견딜 수가 없는 거겠지. 왜냐면 지겨운 그들의 삶은 실상 바로 너희 어미와 아비, 할아비와 할미가 살아온 시간들이고, 그러므로 너하고도 결코 무관할 수 없을 테니까. 그 고약한 인분 덩이를 눈앞에 빤히 놓아두고서야 아무 일도 없다는 양 훌쩍 뛰어넘어, 저 현란한 너희들의 미래 속으로 홀가분하게 내달려가기란 아무래도 거북스럽고 기분 찜찜할 테니까. 안그래?
 
   

100년 전을 생각해본다. 딱 백년 전이다. 1905년 그때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우리가 배운 국사 시간을 더듬거려 생각해보면 막 개화가 시작되었던 시기이고, 일제의 침략을 받은 시기라는 것이다. 자 그럼 그 때부터 우리 나라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살짝 더듬어 보자.

1913년에는 3.1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 나갔고, 1932년에는 역시 대한의 독립을 위해 윤봉길, 이봉창 의사들의 의거가 있었고, 1945년에는 그렇게 원하던 해방이 이루어 졌다. 그러나  1948년에는 수많은 민간인들이 죄없이 죽어간 제주 4.3사건이 일어났고, 1950년에는 6.25 즉 한국전쟁이 일어났으며, 1953년에 휴전이 이루어졌고, 그 이후 남한에서는 이승만이 독재정권을 유지하다 1960년 4.19로 인해 하야를 선언하였으며, 그 이후 1961년 박정희가 정권을 잡고, 독재정치 아래에서 경제개발을 추진하다 1979년 박정희가 김재규에 의해 죽었으며 그 뒤를 이어 전두환이 정권을 잡고 1980년 광주에서 5.18이 일어났다.

살짝쿵만 들여다 봐도 우리나라의 100년사는 정말 다사다난 했다. 한 사람이 1905년에 태어나 지금껏 살았다면 이 모든 역사를 지켜보았을 것이다. 길다면 길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게 길지 않은 시간에 우리는 어떻게 이런 많은 아픔을 겪어 왔는지...

옛날 이야기 꺼내면 사람들은 또 그 이야기냐고 한다. 맞다. 이제 잊을때도 되었는데, 아니 너는 겪어보지도 못한 일들이지 않느냐라고 묻는다면 할 말 없다. 가장 최근에 일어난 1980년 5.18에 나는 어머니의 복중에서 태어나기 위해 열심히 자라는 중이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이땅에 속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땅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아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지금의 자유로운 세상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준 것은 아니니까. 짧은 역사 속에서 자유를 가져다 준 그들에게 감사하다고 절하지 못할 망정, 그들을 잊지는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유없이 죽어간 억울하고 쓸쓸한 영혼들에게 연민의 정이라도 느껴줘야 하지 않겠느냐 말이지.

백년의 역사는 죽은 사람에게도 산 사람에게도 몸으로 마음으로 모두 잊혀지지 않는 역사이다. 이 역사 속에서 살아남은 인물들과 죽은 인물들이 모두 모이는 곳이 바로 백년여관이다. 제주 4.3항쟁에서 살아남은 복수와 5.18에서 살아남은 진우, 6.25 전쟁 이후 고아가 되었다 미국으로 입양된 요안, 베트남 전쟁에서 팔을 하나 잃고, 고엽제에 시달리는 문태, 그리고 일본식 목제 건물인 백년여관의 전 주인 하야시의 열다섯살 난 어린 조선인 첩.  인물들을 두고만 봐도 우리의 역사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살아남은 인물들만이 아니라 억울하게 죽어서 영혼이 된 자들이 바다를 떠돌며 손형태의 푸른 빛으로 발하는 모습. 그것들이 천년만에 온다는 개기일식날 백년여관에 모두 모인다.

처음 이 책을 읽을 때 참 읽기가 힘들었다. 부분적인 2인칭 서술의 기법도 낯설기도 했지만 무언가 어둡고 끈적하며 습한 느낌. 더디게 더디게 읽혀지는 그 내용들. 지루한 서술 때문이 아니라 내용에 담겨진 비릿하며 끈적거리는 것들이 읽는 동안을 힘들게 했는 듯 하다.

화려한 듯 하지만 정말 피와 눈물로 얼룩진 우리나라.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라고 할 수 있는 100년의 시간. 그 짧은 시간에 일어난 푸른 멍들과 피빛 생채기들을 우리는 잊으려 한다. 하지만 그것은 잊으려고 한다고 잊혀지는 것이 아니고, 잊어서도 안되는 것이다. 적어도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잊으려고 노력하지 않아야 한다. 오히려 더 기억해내고 밝혀 낼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05.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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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그친 일요일. 신랑이 쉬어서 간만에 아가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아가랑 동생이랑 밥 같이 먹고, 책 반납할 겸 도서관에도 들렸다. 울 아가 처음 간 도서관을 낯설어 하지 않고 좋아라 했다. 글을 아직 읽지 못해서 그냥 뛰어다니기 바빴지만 나중에 나가자고 하니 가기 싫다며 울었다. 엄마처럼 도서관을 즐겨찾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오늘 도서관에서 '만화 박정희 1,2권과 오윤 전집 2권,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를 빌렸다. 아직 몇 권의 책들을 읽다가 그만 두었는데 한 권 진득하게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다. 이것저것 사놓은 책도 많은데 언제쯤 다 읽으려나? 

그제 포럼에서 적은 필기를 간단하게 정리하려고 보았다. 그때 들었던 이야기들 중에 참 인상적이었던 것이 두 강연자 분 들이 개념어를 확실하게 알고 있고, 설명할 수 있다는 것과 많은 사람들의 이론을 잘 알고, 그것을 발언에 적절히 인용할 줄 안다는 것이었다. 아.... 나는 읽고 나면 다 까먹는데 역시... 뭔가 다르다. 

- 관계, 공동체를 강조하면서도 자율적, 주체적 인간을 강조한다. 공부는 고독한 과정이라고 배우고 버릇되다 보니 팀 프로젝트가 잘 수행되지 못한다. 이것이 곧 근대교육의 모습이다. 자율적 독립적 존재가 아니라 외로운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얇고 위태로운 관계. 

- 언어라는 것은 불완전한 것임을 알면서도 소통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 말하기와 글쓰기가 고통스럽다. -> 말에 대한 불신. 말로 인한 상처의 경험을 통해 소통은 불가능하다라고 생각하게 함. 혼자 있을 때 내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때 가장 진실된다고 생각한다 : 일기쓰기 , 페르소나(가면) :1. 정치(공적), 2,극장: 연기 -> 솔직함을 필요로 하지 않고, 사실을 따져나가거나 연기를 하는 것.  

- 감정의 정도로 소통하는 것이 아이들이라면 교사는 의미를 전달하려고 한다. 소통의 방법이 무엇인가 : 감정, 정서의 정도로 모인 공통체 

- 동감 : 감정이입. 공감 : 사건을 보았을 때 나의 운명을 보게 되고 직감하게 되는 것(공포감 발생)  예 - 후쿠시마 원전 사태에 대해 동감한 사람은 '아 안됐다', 공감한 사람은 '고리 원자력 발전소는 안전한가?'  -> 당대인을 만드는 것, 공감하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 교육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공감하게 가르칠 것인가 => 경험을 통해 ; 내 주변 사람의 삶, 인생을 듣고, 알았기 때문에 당대의 일로 끄집어져 나와야 한다.  

- 경험과 체험의 차이 : 경험은 희박함, 체험은 넘쳐남, 잘 가꾸어진 것  

- 증언으로서의 글쓰기 ->당대인의 포지션에서 당대인의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학교, 교실에서 경험이 있을 수 있는 공간 ; 장소 

 언제나 부족한 걸 느낀다. 부족한 걸 채우려고 노력하면서도 넘치지 않도록 조심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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