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치고 정치 - 김어준의 명랑시민정치교본
김어준 지음, 지승호 엮음 / 푸른숲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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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공포는 불확실성이었다. - 그런 불확실성, 나는 이게 바로 공포의 원형질에 해당한다고 봐. -p35 

우가, 쎈 놈은 더 가져가도 된다는, 질서와 위계를 당연시 하는 수직적 관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면, 좌는 누구나 같은 조건에선 같은 정도의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믿는 수평적 관계를 지향하지. 그러니 연대가 키워드가 되는 거고, 그 연대를 작동시키는 엔진은 염치가 되는 거지. 인간이 가진 염치, 우의 엔진이 욕망과 공포인데 반해서, 그렇게 우는 동물의 반응이고, 좌는 이성의 작용이라고 할 수 있겠지. -p44 

우리가 겪는 무수한 일상과 삶의 갈등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자기 바닥을 확인하는 과정, 그건 자신이 구체적으로 어떤 인간인지 받아들이고 하나의 독립적 인격체가 되어가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절차지. 그리고 그런 과정을 겪고 나서야 자신만의 균형 감각을 획득하는 거다.  -p268 

정치를 이해하려면 결국은 인간을 이해해야 하고 인간을 이해하려면 단일 학문으로는 안 된다. 인간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팩트와 가치와 논리와 감성과 무의식과 맥락과 그가 속한 상황과 그 상황을 지배하는 프레임과 그로 인한 이해득실과 그 이해득실에 따른 공포와 욕망, 그 모두를 동시에 같은 크기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통섭해야 한다. 나는 통섭한다.(웃음)    -p292 

좋은 컨텐츠의 가장 첫 번째 조건을 애티튜드라고 생각해. (중략) 이 새로운 공간에선, 광고하면 스팸이고, 전파되면 정보다. 어차피 나쁜 컨텐츠는 저절로 죽고 좋은 컨텐츠는 혼자 성장한다. 그 본질을 이해하고 컨텐츠가 스스로 성장할 떄까지 버티는 배짱이, 첫 번째로 요구되는 애티튜트야. 절대 구걸하면 안 돼. (중략) 두 번째는 대중 언어로 말하는 자세 (중략) 세 번째는 쫄지 않는 자세 (중략) 마지막으로 덕 볼 생각을 하지 않는 자세.  

그렇다면 <나는 꼼수다>의 전달자와 애티튜드와 컨텐츠로 새로운 메시지 유통 구조를 확보해 무엇을 하려는 거냐. 논리적 정합성과 명분, 이념을 중시하는 범진보가, 자주 잊거나 잃곤 하는 감성의 부족분을 보완하고 싶어. 진보의 인간적 면모를 보여주고 싶다고. 그렇게 진보의 프레임을 확장하고 싶어.  -p307 

 

 

 

   

 우울한 날들을 보내고 있는 요즘. 하루하루를 버티는 힘 중에 하나가 김어준의 방송들이다. 월요일엔 하니 티비의 '뉴욕타임즈', 목요일엔 '나는 꼼수다', 그 외의 날들엔 '김어준의 색다른 상담소' 간혹 윤도현의 두시의 데이트 중 '연애와 국제정치'   

최근 내가 본 사람들 중에 가장 당당한 사람이다. 자신의 삶과 생각에 대해 부끄러운 것도, 자신감 있는 것도 당당하게 이야기 하는 것이 참 멋졌다. 자신의 말로서는 무학의 통찰이라고 하지만 직접 경험이든 간접 경험이든 많은 경험을 통해 얻게 되는 생각과 느낌들이 나름의 과정을 거쳐 탄탄한 논리를 가지게 된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떤 상황에 대해 부정적으로 이야기 하기 보다 유머로써 표현하고 희화화 하여 가볍게 다루는 것이 참 좋다. 항상 작은 것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 나에게 가장 부러운 점이다. 그가 던지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힘이 될때가 많다. 그래서 그의 방송과 글을 찾아서 듣고, 읽게 되나 보다.  

전에 '건투를 빈다'도 줄을 그으며 읽었다. 그리고 거기에 나오는 '십대에게 고함'은 수업할 때 아이들과 함께 읽으며 이야기 나누었는데 꽤나 반응이 좋았다. 현학적이지 않고, 솔직한 그의 말투와 문장이 아이들에게도 감동을 준 것이겠지. 

요즘 '나는 꼼수다'를 들으며 김어준의 매력에 또 빠져들었다. 혼자만의 삶을 추구하기 보다 다같이 사는 사회의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겠다는 그의 다짐이 이 방송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것 같다. 쫄지말고, 웃으며 서로를 위로하는. 이번 책에서 정치에 관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 정치에 관해 자신 나름대로의 해석과 앞으로의 정치에 대한 그의 생각을 통해 내가 가진 정치에 관한 생각도 비교해보았다. 이 책을 통해서 사람들이 좀 더 사회 현실이나 정치에 관해 많은 관심과 참여를 가질 수 있었음 좋겠다. 

그리고 마지막... 김어준 정말 매력적인 수컷이다. 만나고 싶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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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Q정전
루쉰 지음, 전형준 옮김 / 창비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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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누운 채  배 밑바닥에 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나는 나의 길을 가는 중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생각했다. 나는 결국 룬투와 이 정도까지 격절되었지만, 우리의 후배들은 아직 한마음이다. 훙얼은 수이성을 그리워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희망한다. 그들은 더 이상 나처럼, 사람들끼리 결절되지 않기를...... 그러나 나는 또한, 그들이 한마음이 되려고 하다가 그 때문에 나처럼 괴롭고 떠도는 삶을 사는 것은 원하지 않고, 그들이 룬투처럼 괴롭고 마비된 삶을 사는 것도 원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처럼 괴롭고 방종한 삶을 사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마땅히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아직 살아보지 못한 삶을.
  희망을 생각하자 나는 갑자기 무서워졌다. 룬투가 향로와 촛대를 달라고 했을 때 나는 그가 우상을 숭배하면서 언제나 그것을 잊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몰래 그를 비웃었었다. 지금 내가 말하는 희망이라는 것도 나 자신이 만들어낸 우상이 아닐까? 다만 그의 소망은 아주 가까운 것이고 나의 소망은 아득히 먼 것이라는 것뿐이다.

 몽롱한 가운데, 나의 눈앞에 해변의 초록빛 모래밭이 펼쳐졌다. 그 위의 쪽빛 하늘에는 황금빛 둥근 달이 걸려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희망은 본래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지상의 길과 같다. 사실은, 원래 지상에는 길이 없었는데, 걸어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자 길이 된 것이다.         [19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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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페는 죽을 때 나의 직업은 시라고 하였다 - 개정판
남진우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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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작열하는 젊음의 열사를 건너 신라와 질마재라는 영원으로 통하는 가상의 시공간에 이른 뒤에도 그의 시가 일깨우는 삶에 대한 열렬한 애모는 변함이 없다. 그의 시세계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꽃과 여인은 바로 시인이 추구하는 궁극의 대상, 삶을 삶답게 해주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가치 있는 증거물이다. 삶, 그 자체를 위한 삶 - 여기에 서정주 시의 토대와 성과와 한계가 자리잡고 있다. 삶은 그보다 더 가치 있고 고귀한 그 무엇을 위해 희생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 오직 삶을 진작시키고 그 지평을 확장시키는 데 삶의 모든 순간을 바쳐야 한다는 것, 이것이 서정주 시의 한결같은 전언이다. 아무리 그가 신라를 이상화하고 풍류와 영원을 읊조리더라도 - 시인이 실제 현실에서 노정한 정치적 오류와 일상에서의 주책스러운 면모까지 포함해서 - 그는 어디까지나 소박한 현실주의자요 쾌락주의자의 틀에서 한 번도 벗어나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서정주의 시에서 고도의 형이상학이나 윤리적 강건함을 찾으려드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그의 시는 언어로 이루어진 미학적 구조물이라는 점에 충실할 뿐이다. 그러나 그것만이라도 이토록 완벽에 가깝게 달성될 수 있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시라는 주술을 통해 우리 모두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삶의 열락에 젖게 만드는 게 어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p19

 오늘날에 이르러 사람들은 엄청난 양으로 쏟아져 나오는 책들에 둘러싸인 채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책이, 세상이란 미로에 갇힌 사람들을 출구로 이는 표지판 구실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미로의 내부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미로 역할을 하기에 이른 듯하다. 한 권의 책이 사라진 자리를 대신해 무수한 책들이 저마다 현란한 주장과 수사로 무장/치장한 채 스스로를 과시하고 있지만 그것은 듣는 사람의 가슴에 내밀한 속삭임으로 다가서지 못하고 귓전을 스쳐지나가는 소음으로 여겨지고 있다. 책은 많아도 진정 읽는 사람의 영혼을 뒤흔들고 삶의 나침반이 되어주는 결정적인 단 한 권의 책은 발견하기 힘든 시대, 풍요 속의 궁핍을 강요하는 이런 시대에 우리는, 프랑스의 한 철학자가 책을 앞에 두고 그랬듯 "오늘도 우리에게 일용할 굶주림을 주시옵고"라고 기쁜 마음으로 기도드릴 수만은 없는 실정이다.   -p28~29

 장정일의 경우 그는 열심히 읽고, 읽은 것에 대해 쉴 새 없이 이야기하는 것을 자기실존의 근거로 삼고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독서의 잡식성이 곧 독서의 풍요로움을 보장해주진 않는다. 거의 숨 돌릴 틈도 없이 읽고 씌어진 때문인지 그의 책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앎에의 의지'라기 보다는 '문자에 대한 허기'에 가깝다. 그래서 때로 강박적으로 여겨지는 그이 독서중독증이 과연 어떤 콤플렉스의 발현인지 생각해보게 하는 한편, 그토록 부지런히 읽어댄 그가 과연 정확히 읽긴 한 것인지, 그 책의 내용을 충분히 저작했으며 핵심을 짚어 낸 것인지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킨다.    -p123

 이처럼 쓴 사람과 읽는 사람 사이에 공명 작용을 일으키는 정서적 감응력 밑에 김훈 특유의 탐미적 허무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그의 글을 채색하고 있는 온갖 수사와 지식의 허세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이 궁극적으로 말하는 것은 삶의 정처없음과 소멸하는 것의 아름다움으로 귀결된다. 그의 글을 읽을 때 받게 되는 하염없는 쓸쓸함은 바로 이 탐미적 허무주의에서 연유한다.

 이 점과 관련하여 나는 이 자리에서 그가 들려준 인상적인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것은 정비(靜飛)라는 낯선 단어에 관한 것이다. 고요한 비상, 정지한 듯 날아가는 비행, 이 말은 무슨 뜻을 ㅎ마축하고 있는가. 저 먼 북쪽 나라에 사는 새들은 추운 계절이 다가오면 한 철을 깃들일 따뜻한 곳을 찾아 아래로 아래로 남하한다. 그중 한 무리는 시베리아에서 동쪽 해안을 타고 우리나라를 거쳐 동남아시아로 내려가고 다른 한 무리는 중앙아시아를 거치고 희말라야 산맥을 넘어 인도 쪽으로 내려간다. 그런데 이 철새 무리가 높은 산이나 광막한 바다를 만날 때 취하는 비행법이 바로 '정비'이다. 새눈 보통 죽지에 연결된 가슴 뼈의 움직임으로 비상하지만 아주 먼 거리를 여행할 때에는 가만히 날개를 펴고 기류에 몸을 맡긴 채 예정된 공간을 통과한다. 사실 조그만 새가 근육이나 뼈의 힘으로 그 높은 산맥을 넘을 수는 없을 것이다. 저대한 장벽과 맞닥뜨린 새는 경망스런 날개짓 대신 광대무변한 우주의 섭리에 몸을 의탁함으로써 목적을 성취한다.

 이 에피소드는 탐욕스러운 독서가인 그가 분명 어느 책에선가 보고 자신의 상상력을 덧붙여 들려준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이야기 속엔 인간 김훈이 동경하는 삶의 방식, 나아가 글쓰기의 형식이 암시돼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의 글엔 거대한 기류에 온 몸을 맡기고 '지금 이곳'이라는 허허로운 시공간을 가로지르는 한 존재의 긴장과 열정 그리고 지혜가 숨어 있다. 조금만 자세를 흐트려도 수천 미터 아래의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질지도 모를 위험을 안고 그는 날고 있다. 그의 글 표면을 관류하는 유유자적함 이면엔 실은 세상에 대한 원초적 허무와 절망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이다.  -p169~170

 뒤라스의 거의 모든 소설이 그렇듯이 이 작품의 주제 또한 '사랑의 불가능성'이다. 뒤라스는 일체의 분장이나 가식 없이 작품 속에 직접 출연하여 자신의 내면을 적나라하게 고백하고 있다. 그녀는 앙드레아를 향해 "나는 당신에게 말하고 싶었지요. 당신을 사랑한다고, 그렇게 외치고 싶었지요. 그게 다예요."라고 말하다가도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이중의 제로"라고 회한에 잠겨 되뇐다. 뒤라스의 언어에는 이처럼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대상을 휩싸고 돌며, 부재를 현존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삶에 대한 정열로 뒤바꾸고자 하는 지난한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p237

 소설의 주요 갈등은 "인간을 가축으로 개조하는 일을 질리지도 않고 열심히 수행"하는 학교 당국 및 기성세대와 여기에 반항하는 주인공과 그 동료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p243

 어쨌든 작가는 말한다. 어느 시대나 있기 마련인 권력의 앞잡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의 복수는 그들보다 즐겁게 사는 것이다. 라고.    -p244 : 무라카미 류 <69>

"어렸을 때 나는 사치라고 하면 모피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자택 같은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생각되었다. 지금은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 대해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게 사치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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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사랑은, 그것이 진정한 것인 한 '사치'이다. 그것은 감히 인간이 누리려고 해서는 안 되는 금단의 영역 저편에 놓여 있는 것이다. 오직 사랑에 빠져 있는 두 당사자만 그 사실을 모를 뿐이다. 아니, 사랑이 사치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 사람은 이미 늙은 것인지 모른다.
-268~269 : 아니 에르노 <단순한 열정>

 
   

 남진우의 <숲으로된 성벽>을 사면서 같이 산 책이다. 제목이 심상치 않다. 부제로는 <남진우의 문학수첩>이라는 말이 달려 있다. 80~90년대까지 그가 부지런히 읽은 책들에 대한 서평 모음이라고 보면 되겠다. 대부분의 작품이 모르는 것들이지만 서평을 읽는 재미가 쏠쏠했던 것은 책의 내용과, 서평 안에 '과연 그렇구나;라고 감탄할 수 있는 표현들이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름 관심을 갖게 하는 작품들도 생겨나 메모지 구석에 '김화영'이나 '장 그르니에','미셀 투르니에' 등의 작가 이름을 적기도 하였다.
 한 권을 다 읽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이 책, 저 책 여러 권에 동시에 손 대서 읽다 보니 그랬다. 요즘 사실 책이 잘 안 읽혔다. 미하엘 엔데의 <모모>를 다시 읽었고, 녹색평론에 실린 글과 함께 정리해보려다 미뤄둔 상태이다. 그리고 이책 저책 사기는 많이 사두고 질 읽지 못하고 있다. 갑자기 눈이 나빠져 안경을 새로이 맞춰야 하는 것도 있고 이래저래 시간이 잘 나지도 않았다. 한 편으로는 쌓여가는 신문과 주간지, 월간지 등과 더불어 넘쳐나는 활자들 속에 질려 읽기가 지리해진 탓도 있으리라.

  위에 글들은 읽으면서 내 입장에서 '그렇구나!' 라고 감탄한 것들이다. 글들을 대할 때 나는 그 글들에서 내 이야기를 찾는다. 내가 가지고 있는 숨은 모습을 글을 통해 찾는 것이다. 내가 책을 읽는 행위가 단순히 '문자에 대한 허기'가 아니라 '삶의 방향을 찾는' 일이 되었음 한다는 생각을 이 책을 읽으며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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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비룡소 걸작선 13
미하엘 엔데 지음, 한미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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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는 어리석은 사람이 갑자기 아주 사려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게끔 귀기울여 들을 줄 알았다. 상대방이 그런 생각을 하게끔 무슨 말이나 질문을 해서가 아니었다. 모모는 가만히 앉아서 따뜻한 관심을 갖고 온 마음으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글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사람을 커다랗고 까만 눈으로 말끄러미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도 깜짝 놀랄 만큼 지혜로운 생각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모모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거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문득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겠끔, 그렇게 귀기울여 들을 줄 알았다. 모모에게 말을 하다 보면 수줍음이 많은 사람도 어느덧 거침이 없는 대담한 사람이 되었다. 불행한 사람, 억눌린 사람은 마음이 밝아지고 희망을 갖게 되었다. 내 인생은 실패했고 아무 의미도 없다. 나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다. 마치 망가진 냄비처럼 언제라도 다른 사람으로 대치될 수 있는 그저 그런 수백만의 평범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하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모모를 찾아와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그러면 그 사람은 말을 하는 중에 벌써 어느새 자기가 근본적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와 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이 세상에서 소중한 존재다.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었다.

 모모는 그렇게 귀기울여 들을 줄 알았다.           -p23~24
 

 시간을 아끼는 사이에 실제로는 전혀 다른 것을 아끼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아무도 자신의 삶이 점점 빈곤해지고, 획일화되고, 차가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점을 절실하게 느끼는 것, 그것은 아이들 몫이었다. 사람들은 이제 아이들을 위해서도 시간을 낼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삶이며, 삶은 가슴 속에 깃들여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시간을 아끼면 아낄수록 가진 것이 점점 줄어들었다.   -p97~98

 

"아, 그 수많은 죽어 간 시간들......"
"그래, 저 바깥 '아무 데도 없는 집' 주변에서 점점 더 높이 자라고 있는 연기의 담장은 죽은 시간으로 이루어졌단다. 아직은 탁트인 하늘이 충분하니까 나도 사람들에게 손상되지 않은 시간을 보낼 수 있어. 허나 침침한 연기가 이곳의 하늘을 뒤덮어 버리면, 내가 보내는 시간에는 모두 회색 신사들의 유령 같은 시간이 섞이게 되지. 그것을 받는 이들은 그들로 인해 병이 들게 돼. 그것도 죽을 병이."
 모모는 할 말을 잊고 호라 박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윽고 모모는 나직이 물었다.
 "그 병은 어떤 병인데요?"
"처음에는 거의 눈치를 채지 못해. 허나 어느 날 갑자기 아무것도 하고 싶은 의욕이 없어지지. 어떤 것에도 흥미를 느낄 수 없지. 한 마디로 몹시 지루한 게야. 허나 이런 증상은 사라지기는커녕 점점 더 카지게 마련이란다. 하루할, 한 주일 한 주일이 지나면서 점점 악화되는 게지. 그러면 그 사람은 차츰 기분이 언짢아지고, 가슴 속에 텅 빈 것 같고, 스스로와 이 세상에 대해 불만을 느끼게 된다다. 그 다음에는 그런 감정마저 서서히 사라져 결국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게 되지. 무관심해지고, 잿빛이 되는 게야. 온 세상이 낯설게 느껴지고, 자기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 같아지는 게지. 이제 그 사람은 화도 내지 않고, 뜨겁게 열광하는 법도 없어. 기뻐하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아. 웃음과 눈물을 잊는 게야. 그러면 그 사람은 차디차게 변해서, 그 어떤 것도, 그 어떤 사람도 사랑할 수 없게 된단다. 그 지경까지 이르면 그 병은 고칠 수가 없어. 회복할 길이 없는 게야. 그 사람은 공허한 잿빛 얼굴을 하고 바삐 돌아다니게 되지. 회색 신사와 똑같아진단다. 그래, 그들 중의 하나가 되지. 그 병의 이름은 '견딜 수 없는 지루함'이란다.   -p328~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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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돋을새김 푸른책장 시리즈 11
장 자크 루소 지음, 이환 옮김 / 돋을새김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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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에 인용문을 입력하세요교육은 세 가지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자연.인간.사물이 그것이다. 자연은 인간을 내적으로 성장시키고 인간은 그 성장을 활용하도록 돕는다. 반면 사물은 그것과 부딪쳐 얻는 경험의 측면에서 교육을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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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인은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존재한다. 그는 단지 독립된 실체일뿐이다. 반면 시민은 분모에 의해 값이 결정되는 분자와 같은 사회적 존재이다. 훌륭한 사회제도란 인간의 본성을 유연하게 변화시켜 그 사회의 가치에 맞게 상대적인 존재, 즉 '나'를 '우리'라는 공동체로 융합시키는 제도이다. 이 제도 안에서 '나'는 더 이상 단순한 개체가 아니다. 전체를 의식하고 사고하는 사회적 유기체 속에서의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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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간다는 것은 단지 목숨을 부지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신체 감각을 총동원해 자아를 느끼고, 가진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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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교육을 참고 견뎌야만 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설령 교육이 합당한 목적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억압과 굴종으로. 마치 노예나 죄수처럼 속박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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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은 결핍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결핍을 느끼게 하는 욕망 때문이다.

신체의 고통과 양심의 가책을 빼고 나면 불행은 모두 상상적인 것에서 연유한다.

지나치게 소유함으로써 불행해지지 말라. 지나치게 행복하려고 애쓰지 말라. 그 욕망이 당신을 불행하게 할 것이다.

앞날에 대한 생각이 우리를 불행으로 이끈다. 불확실한 미래를 전망하면서 현재를 소홀히 한다는 것은 얼마나 미친 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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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의도를 남의 도움 없이 행동으로 옮겼을 때만이, 진정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한 것이 된다. 그런 점에서 최고의 행복은 권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에 있다. 자유로운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만 하되, 하고 싶은 일만 한다. 이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나의 원칙이며 교육에 접목시켜야 할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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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인간을 악화시킨다. 사회는 개인이 스스로의 힘에 대해 지닌 권리를 빼앗을 뿐만 아니라, 개인의 욕망에 따른 능력 자체를 제한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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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요하지 않는 한, 아이는 스스로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싶은가? 그렇다면 간단하다. 그것이 이익이라는 점을 깨닫게 하기만 하면 된다. 모르면 불편하고, 불편하면 결국 손해이다. 알면 편하고, 그것은 결국 이익이다. 그러니까 현재의 이익, 그것만이 아이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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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과 강요로 아이를 규율하지 말라. 남의 의견에 순종하는 아이로 만들지 말라. 자신이 좋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그에게 좋은 것이란 없는 법이다. 자신이 좋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그에게 좋은 것이란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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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은 인간에게 자연적인 것이긴 하나 본래부터 지니고 있던 것은 아니다. 수치심은 악을 알면서 생기는 감정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여 아이에게 그런 감정이 생기는 걸까? 수치심과 정숙함에 대한 교육이 역설적으로 그것을 알게 한다. 이 앎이 화재의 진원지이다. 얼굴을 붉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죄인이다. 순수한 사람은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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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대한 감정을 지속시키는 것은 기억이다. 그리고 그것을 증폭시키는 것은 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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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얼굴은 단지 자연의 책임이 아니다. 습관화된 감정의 누적된 결과이다. 그 결과가 인간의 얼굴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러니까 나이 들어서의 얼굴은 그 자신의 책임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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