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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이별 - 김형경 애도 심리 에세이
김형경 지음 / 푸른숲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어두컴컴하고 인적이 드믄 한적한 골목 안 쪽 흐린 불빛의 작은 간판이 하나 매달린 허름한 식당의 문 앞에 앉아있다. 누가 드나들면 밤의 찬 공기가 내 등을 스치고 주방의 안쪽까지 들이 닥쳐 늙은 주인이 막 건져 썰고 있는 삶은 돼지고기의 흰 김을 헤치고 흐트러뜨려 시야를 가리고 늙은 눈썹에 서리게 한다. 담배연기와 거친 입담 어디서는 작은 속삭임들이 오가지만 우리가 마주한 자리는 맑은 술만 오갈뿐 기쁜 표정은 아니다. 허리가 잔뜩 굽은 할머니가 꽃무늬 쟁반에 김이 나는 삶은 고기와 무친 굴 새빨갛다 못해 검붉은 김치가 든 접시를 들고 한번, 마늘과 새우젓이 든 접시를 들고 한번, 콩나물국과 노란배추를 들고 한번, 소주를 들고 한번, 이렇게 와서 우리를 몹시 미안하게 만든다. D는 성큼 일어나 소주를 바꿔들고 온다. 굴이다. 이건 내가 몹시 좋아하는 겨울 배추와 부드러운 삶은 고기, 맛좋은 김치에 생굴인 것이다. 나는 소주를 여러 번 나눠 마신다. 두 달 째 변함없이 절뚝이며 걷고 계절 알러지에 고생이지만 소주를 마다하진 않는다. 나는 삼십년 동안 먹지 않던 굴에 대한 내밀한 얘기를 잠깐 D에게 말한다. 조금 슬퍼져서 세 번 쯤 말하기를 멈추다가 느릿느릿, 굴은 내게 그래. 하고 씨익 웃는다. 늙은 사장님 맛있어요? 묻고 나는 입 안 가득 배추와 고기와 굴을 넣고 우적우적 씹다가 놀라 고개만 크게 끄덕인다. 말을 하고 나니 굴 얘기는 가벼운 것이 되어 작은 고통을 극복하게 하고 문득, 김형경이 고맙고, 보쌈은 맛있으며 나는 약간 행복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