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설주의보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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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과 병동에서 초초하게 기다리다 진료를 받고 짐작보다 훨씬 큰 고통에 허둥대며 집으로 되돌아온다. 수치는 당장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어서 나는 무슨 큰일을 치룬 사람처럼 당당하게 결근을 청한다. 빈 집은 어지러운 봄빛이다.  


약봉지에 인쇄된 37 이라는 숫자를 보고 실없이 웃는다. 행복이라기보다는, 어쨌든 나는 37의 숫자를 보고 웃으며, 숫자에 몰래 기쁘다. 서른일곱이라면 누군가와 아직은 연애를 할 만한 나이이기도 할 것이다.  


문경의 한참 외곽 한고비 큰 언덕을 지나 내 달은 동내어귀 비탈에서 거짓말처럼 윤의 소설에서나 나올법한 파릇한 보리밭을 만난다. 나는 방금 비오는 부석사 무량수전에서 나무기둥들을 손바닥으로 하나씩 쓰다듬고 올려다보고 눈에 새긴 후 숙소를 찾아 들어가는 길이었다. 여행 잡지에서나 나올 법 한 한 뼘 보리밭에 본래의 색을 알아볼 수 없게 낡은 동그란 BUSSTOP 표지판이 기울어진 채 그림처럼 서 있다. 여행 가방에는 읽다만 그의 소설이 있고 나는 그림 같은 보리밭을 무심히 지나간다. 그래야 다시 올수 있다

윤의 소설은 연애의 기대감을 갖게 한다. 그보다 설레는 일이 있을까. 내게도 내 이웃에게도 일어날 법 한 이야기들이 그의 손을 거치면 제법 고상하게 포장되어 통속도 각각의 이유가 있고 품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그것도 그의 얘기여서 가능하다. 그의 남다른 시선에는 관계에 대한 연민과 온기가 있고 포악하지 않으며 나쁜 연애도 산뜻하다.  


누구네 아낙이 딴 사내와 도망을 갔다 카더라는 풍문에도 그럴만했겠지, 눈 먼 사랑이 왔었던 거겠지, 불가항력 이었던 거야, 하고 슬쩍 넘기는 마음이 되는 것이다. 그의 얘기를 읽노라면 불온한 연애도 비루한 삶도 살아볼 만하고 견뎌 기대해볼 만 한 것이 되고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유연하게 받아들이게 된 내 나이를 더불어 새삼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윤의 소설을 읽고 총총히 부인과 병동을 찾은 서른일곱도 아닌 나는 이제 연애는 참말 힘들어진 것일 게다. 여전한 강원 산간의 대설주의보에 환호하는 마음과는 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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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0-04-05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렇게 말씀하시면 냉큼 읽어볼 밖에요. :)

rainer 2010-04-14 10:09   좋아요 0 | URL
치우침이 심해서요. 불편함도 의도된 거라고 생각 되어지는걸요.(이런, 맙소사!)
리뷰가 평이고 독후 일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페이퍼를 이쪽에 넣어봤어요.^^
(으흐흐)

2010-04-05 2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06 1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