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꺽정>의 작가 벽초 홍명희 관련 자료를 검색해 보다 그 가문의 내력이 인상 깊었다. 일단 대대로
아주 대단한 권세를 가진 가문이었고, 아버지 홍범식이 금산군수 재직 당시 경술 국치를 비관하여 자결하였고,  
그 자신 독립운동 및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 월북하여 부수상까지 지냈다고 한다.
한편 그의 손자 홍석중은 그 유명한 <황진이>의 작가로 남한에서 만해문학상까지 수상하였다고 하니 글발도 분명 피를
타고 흐르는 것인가 보다. 월북 관련한 사연이야 민감한 사안이라 가치 판단을 할 대목이 못되고  
그 이전 대단한 가문에서 권세를 누릴 수 있었음에도 그것을 거부하고 자결한 그의 아버지와
독립운동으로 고초를 겪은 그의 전력이, 가진 것과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내던지고 명분 그것도 다수, 대중을 위한 명분에  
투신할 수 있었던 용기가 놀라웠다. 명분이라는 것이 실질적인 이득에 부합될 때야 가장 절묘한 지점이겠지만
대부분이 그렇지 않은 경우이고 그 지점에서 자신이 가진 것들을 포기하기란 결코 쉬운 걸음이 아니기에. 

경주 최부자는 그 막대한 자금을 끊임없이 독립자금에 부었다고 한다. 또 실지로 12대손 형제 최윤, 최준은 한 명은 친일행각,
다른 한 명은 독립운동을 하는 엇갈리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동생 최윤의 친일행각이 형의 독립운동을 위한
위장이었다는 얘기가 잘 알려져 있다니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진부한 용어가 그들 주위에 그대로 얹혀도 괜찮을 것 같다.  

가진 자들이 때로는 그것을 포기하고, 때로는 그것을 나눠주면서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은 분명 그 어떤 이기심에서
발현되는 욕심임을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자기가 가진 돈으로 소비욕구를 충족시키고 외국에서 아이를 출산하고
하는 것이야 그 여건이 되었을 때 자유의사에 의한 것이고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바에야 입아프게 욕할 소재로는
힘빠진다. 그렇지만 그래도 절대다수보다 더 나은 여건에서의 인간이 그렇지 못한 다수를 의식하고 때로는 배려하면서
조금 뒤로 물러나 주거나 때로는 앞으로 나와 주는 것이 감정적인 결핍에 후달리는 다수에게 위안이 된다면, 너무 빈약한
요구일까. 솔직히 말하면 덜 화나게 덜 힘빠지게 해달라는 것. 그게 참견쟁이에 욕심쟁이에 열등쟁이의 튀어나온 보기 싫은
입술일지라도.

언론이 가하는 박해는 희생자가 된 사람이 개인적으로 무시해 버릴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중략> 이러한 불행을 막을 수 있는 근본적인 치료법은 단 하나, 대중이 관대한 태도를 기르는 것뿐이다. 대중에게 관대한 태도를 기르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참된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의 수를 늘려서, 그들이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데서 으뜸가는 즐거움을 찾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러셀의 <행복의 정복>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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