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이덕일 / 김영사 / 200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철학적 관념이 정치적 도그마가 되었을 때 현실과 일으키는 충돌, 그 충돌이 변질 확대되어가는 모습과 인간의 이기심의 원형이 빚어내는 비극의 중심에 그는 서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3천번 이상 언급된 당쟁가이며 300년이 넘게 신화화 되어 온 그의 존재를 적나라하게 해부하는 작가에게 그의 후손들과 사학계의 반응은 격렬했다고 한다. 또한 이 작업을 시작하면서 수많은 우려와 걱정도 함께 등에 지고 작가는 관념의 극치인 '예학'이 지배했던 조선 후기 사회를 조망한다. 
 

그가 중심에 있었던 예송논쟁의 핵심은 청에 볼모로 잡혀갔다 귀국후 급서한 소현세자가 아닌 차자 봉림대군이 왕통을 승계한 데에 있다. 장자가 아닌 차자와 차자부의 사망시 공교롭게 생존해 있었던 대비의 복제를 둘러싼 이 논쟁은 사실 남인과 서인의 골깊은 갈등의 분출에 지나지 않았다. 민생은 물건너 가고 명분과 사리사략만 잔존해 있던 당시 정치의 구린 근성이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고등학교 시절 예송논쟁은 아무리 읽어 봐도 이해안되고 아무리 들어봐도 졸리기만 했는데 역시 이덕일의 명쾌한 설명은 깔끔한 개념화가 가능케 했다. 저자에 대한 논쟁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역사적 팩트의 제시와 체계화에 대한 그의 능력에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무리인 것 같다. 
 

송시열이 백성보다 당의 이익에 연연했던 것으로 묘사되는 반면, 개인적인 검소함과 주변관리에 대한 칭찬은 저자가 일방적으로 그를 부정적으로 그렸다고 보기도 힘든 부분이라 후손들의 반응이 조금 이해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83세에 숙종에게 올린 장희빈의 후사 원자 책봉에 반대하는 소로 그는 사약을 받게 된다. 그의 유연이 의미심장하다.  

   
  나의 관은 덧붙인 널빤지를 사용하라.
 
   

효종의 장례 때 관이 작아 널빤지를 덧대어 사용한 것이 그가 죽음을 앞둔 그 상황에서도 떠올랐던 것은, 왕에 대한 미안함과 더불어 효종의 종통을 부인했다는 공격에 대한 방어 명분에 그가 죽을 때까지 매달렸음을 시사할 수도 있다. '명분' 그에게 있어 목숨과도 같았던 이 화두는 조선후기 서양문물에 대한 개방과 더불어 다른 사상에 대한 개방의 옥쇄를 굳게 밀봉하는 길고 긴 여진을 남기게도 된다.  

상생과 공존의 정치는 실존되고 증오와 독존이 판치는 그 곳...지금도 그 곳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이 책도 여전히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고, 저자의 책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음이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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