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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소년이 온다 : 한강 장편소설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평점 :
판매중지
장구한 역사 속에서 인간을 본질적으로 신뢰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을 긍정하느냐고 반문한다면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합니다. 인간이 인간을 훼손하고 폄하하고 사람이 타인의 삶을 유린하고 파괴하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여전히 그러한 것들이 종국에 승리하는 것은 아니라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항변할 뿐입니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참으로 복합적이고 그의 생은 읽기 어려운 텍스트입니다. 깔끔하게 떨어지는 단문으로 인간을 정의하는 것을 나는 믿지 못합니다. 어제는 고귀한 일을 행했던 오른손으로 오늘은 잔인하도록 이기적인 비겁한 행동을 하는 왼손을 숨기는 인간의 치사한 면으로 인간 전체를 매도하거나 역사 전체를 악으로 규정짓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는 여전히 배우는 중입니다. 나는 여전히 의심하고 회의하고 반문합니다. 아주 많이 늙어 깊이 성숙하여도 나는 똑 떨어지는 답을 얻을 거라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오늘은 여전히 많은 질문과 돌아오지 않는 답들을 더듬어 봅니다.
그녀는 인간을 믿지 않았다. 어떤 표정, 어떤 진실, 어떤 유려한 문장도 완전하게 신뢰하지 않았다. 오로지 끈질긴 의심과 차가운 질문들 속에서 살아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소년이 온다>는 1980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 운동의 현장에 있었던 젊은이들의 잊혀진 잃어버린 목소리를 각자의 시선에서 복원해 낸다. 비단 열여섯 살 소년 동호 한 명의 이야기가 이야기가 아니라, 그를 중심으로 뜻하지 않게 역사의 격랑에 휩쓸리게 된 청년들의 그 날의 경험, 그 일이 남긴 상흔이 그들의 이후의 삶에 어떻게 드리워졌는지에 대한 천착은 실제 그들의 떨리는 목소리를 귓전에서 듣게 하는 착각을 낳게 할 정도로 생생하고 처절하다. 작가가 그들을 '너', 혹은 '그녀'로 거리두기를 하며 객관화와 중립의 거리두기를 하려 했던 시도는 역설적으로 그럼에도 완강히 버티는 그 믿기 힘들 정도의 잔인한 사실들을 더욱 또렷이 부각시킨다. 모두가 대단한 명분이나 현학적 가치를 지향하여 온몸을 던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날, 그 장소에서 그들은 선의와 상식을 가진 인간으로서 함부로 도륙된 같은 인간들의 몸을 수습하고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폭력에 굴복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비슷한 죽음을 맞이하거나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입어야 했다. 살아남은 자들은 단지 그랬다는 이유만으로 부책감을 느껴야 했다. <이것이 인간인가>라고 절규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존자 프리모 레비가 증언의 욕구와 남은 자의 죄책감으로 괴로워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 여름을 견딘 자들은 결코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고 한다.
인간이 인간을 유린하고 파괴하려 했음에도 끝까지 남는 건 무얼까? 이 질문은 내도록 읽는 일을 힘들게 했다. 무고한 젊은 아이들을 아직 꾸지 못한 꿈, 만나지 못한 사람, 미처 경험하지 못한 많은 것들을 함부로 도륙하고 파괴한 저들도 과연 여전히 인간일 걸까? 그들을 이미 만나버리고 살아남은 남은 자들은 대체 그 절망을 어떻게 수습하고 살아나갈 수 있는 걸까? 이러한 질문들은 끊임없이 떠오르고 잊혀졌다 다시 돌아왔다. 이야기 속의 사람들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운다." 이야기에는 가해자들에 대한 설명이 없다. 거대한 악의 현장은 빈곤한 명분과 허접한 논리들로 뒤덮이지만 악은 여전히 악이고 그것이 짓밟아버린 선에 대한 사과나 해명은 여전히 멀다.
"우리는 고귀해" 노동운동의 현장에 있었던 소녀의 이야기가 긴 여운을 끌고 지나간다. 아무리 파괴하고 앗아가려 해도 결국 절대 함부로 갈취할 수 없는 그것의 고결한 핵에는 깨끗하고 절대 오염되지 않는 성역이 남는다. 그것을 어떻게든 짓밟으려는 거대한 악의 빈곤한 행사에 도취된 저들도 역시 같은 인간의 또다른 이름이라는 것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모순이다. 한강은 그것을 머리로 해석할 수 없고, 가슴으로 이해할 수 없는 피해자들의 증언이 담긴 진혼제를 정성껏 지낸다. 소년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또 다시 그 역사를 망각하고 그 실수와 그 상처와 그 훼손을 묻어버리고 정치와 권력행사를 혼동하고 공권력의 남용에 무감각해져 무고한 생명과 인권을 유린할 가능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때로 위험하다. 자신의 욕망과 무지와 폭력이 만날 때 빚어질 비극은 인간의 존엄 그 자체를 위협한다. 이야기의 힘은 여기에 있다. 흩어진 비극적 사실들의 파편을 수습하여 이야기로 만들어 증언한다는 것은 그래서 엄중한 무게를 가진다. 경청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