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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짝꿍 최영대 ㅣ 나의 학급문고 1
채인선 글, 정순희 그림 / 재미마주 / 1997년 5월
평점 :
<내 짝꿍 최영대>는 나의 첫 그림책이다.(사실 그림책이라기보다 글그림책에 가깝다.
하지만 이 책의 그림은 내게 ‘삽화’ 이상의 의미다. 그래서 나에게 이 책은 동화책이 아니라 그림책이다.) 가장 좋아하는 그림책이기도 하고,
내가 그림책을 읽기 시작한 때 막 만난 그림책이기도 하다. 어떻게 이걸 읽게 되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언제인지, 어떻게인지도 모르게 내
손에 들어왔고, 우연히 책을 펴 읽는 순간, 한 순간에 나를 울렸다. 그리고 봐도 봐도 눈물이 난다.
아이들한테 이 책을 읽어주면 우리 아이들은 책은 보지도 않고 내 양 옆에 앉아 내 얼굴만 본다.
엄마가 이번에도 우나, 안 우나 확인하려는 것이다. 뚫어지게 내 표정만 탐색하는 네 개의 눈을 감지하면서도 나는 어김없이 매번 같은 장면에서 또
눈물이 난다. 책을 덮고 오늘도 또 울었음을 확인하면서 나를 매번 울리는 이 책의 힘에 놀라곤 한다. 자주 들쳐볼 수는 없다. 너무 마음 아픈
얼굴은 자주 들여다 볼 수 없는 법이다. 그래도 지금껏 나를 열 번은 울렸나 보다.
왕따 동화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내 짝꿍 최영대>는 엄마를 일찍 여읜, 그래서
말을 잃어버린, 꾀죄죄한데다 냄새까지 나는 ‘영대’가 전학을 오면서 시작된다. 아이들의 잦은 괴롭힘과 따돌림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고,
시작은 그렇게 진부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영대는 아이들과의 관계를 풀어갈까? 우리는 책을 읽지 않아도 예상해 볼 수
있다.
첫째, 영대의 새롭게 발견되는 능력, 아이들이 무시할 수 없는 어떤 능력이 드러나면서 아이들이
영대의 ‘가치’를 인정하게 되는 이야기 전개가 있을 수 있다. 많은 왕따 동화의 전형이다. 그 ‘가치’ 혹은 ‘능력’으로 선생님 혹은 어른들의
칭찬을 듣게 됨으로서 영대를 다시 보게 되었다든지, 혹은 위기의 순간에서 친구들을 구해낸다든지...... 동화의 세계보다 현실의 세계에 맞추어
예를 들어보면, 그 반의 인기가 많은 한 친구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함으로써 세(勢)를 좀 얻는다고나 할까? 많은 이런 류의 이야기가 난
정말 불만이다. 사람은 사람 자체로 존엄하다는 것을 가르쳐야하는데, 왜 누구에게나 발현되지 못한 달란트가 있음을 상기시키고, 따라서 지금 아무
쓸모없어 보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그 달란트가 발현될 나중을 생각해서?) 무시하거나 따돌리지 말고 인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논리는 정말
못마땅하다. 사람은 그 사람 자체로, 아니 모든 생명은 그 존재 자체로 존엄한 것이며 그 누구도 그것을 짓밟을 수 없다는 논리는 무엇으로
가르쳐야 하는가.
둘째, 영대가 참다 참다 통쾌하게 복수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스토리 전개가 있을 수
있다. 첫 번째 전개보다 더 드라마틱하고 재미지겠지만, 과연 현실성이 있는지 묻고 싶다. 자꾸 그런 이야기가 듣다보면 어른들도 아이들도 현실에서
정말 그런 극적인 탈출구가 존재할 것만 같고, 그래서 피해자인 아이들이 스스로 해쳐나갈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는다. 그래서 ‘왜
당하고만 있는지 모르겠어.’라는 대사가 가해자에게서나, 방관자들의 입에서 나오게 되는 것이다. 당하는 아이가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 그
입장을, 그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타지는 현실을 위로한다. 그것이 가끔은 시간을 견디게도 하고,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게도 한다. 그래서 나는 첫 번째 전개보다는 두 번째 전개가 속 편하다. 물론 <내 짝꿍 최영대>의 스토리 전개는 위의
둘과는 거리가 있다. <내 짝꿍 최영대>는 더 큰 위로가 있다. 이제 이 두 가지 전개를 제외한 <내 짝꿍 최영대>만의
스토리를 들어보자.
영대의 반은 경주로 수학여행을 간다. 다들 들뜬 모습이고, 영대도 첫 여행에 말없이 들뜬
모습이다. 그리고 수학여행 첫 날 밤, 영대의 울음이 시작된다. 다른 날보다 더 심한 괴롭힘도 아니었고, 더한 따돌림도 없었는데, 늘 듣던
‘엄마 없는 바보’라는 한마디 놀림에 잠자리에 누운 영대는 울음을 터뜨린다. 아이들이 ‘영대가
울 수 있다는 걸 몰랐’을 정도로 그저
참기만 했던 아이가 ‘그
울음소리가 너무나 슬프고 괴로운 것’으로
느껴질 정도로 ‘양 무릎
사이에 얼굴을 처박고 어깨를 출렁이며 울’기 시작한 거다. 선생님은 영대를 달랠 수도, 야단 칠 수도
없어, 결국 ‘우리’를 혼내기 시작했고, 늘 영대를 불쌍하다고 생각해온 ‘나’를 시작으로 아이들은 영대에게 사과하기 시작하지만, 영대의 눈물은
쉽게 그치지 않는다. 결국 선생님의 계속되는 기합과 영대의 그치지 않는 눈물 때문에 아이들도 하나 둘씩 울고 반 전체가 눈물 바람이 된다.
선생님도 울고 영대도 울고, 우리 모두 운다. 그렇게 수학여행의 첫날이 지나가면서 갈등은 마무리된다.
이것이 <내 짝꿍 최영대>가 선택한 결말이다.
‘측은지심’.
아이들이 선생님의 꾸중과 벌 때문에 우는지, 아니면 정말 영대에게 미안해서 우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행간을 미루어 짐작하는 것이다. 아니 믿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의 마음을. 그 아이들이 진심으로 영대의 울음을 마음으로 들었고, 그
울음을 통해 영대의 슬픔을 함께 느꼈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그 구절을 읽는 나에게도 영대의 울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남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 즉
측은지심이 아이들에게 발동했다. 한 사람으로서의 나, 존재로서의 내가 그와 똑같은 외로움과 설움을 겪는다면 얼마나 괴로울 것인지 느끼게 된
것이다. 그래서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생각도 들었을 것이고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는 다짐도 했을 것이다. 뼈에 사무치도록 느꼈을 것이고 그리고
자라면서 두고두고 영대의 울음을 꺼내 볼 것이다.
그렇게 그 사건이 해프닝이 아니라 지속성 있는 깨달음일 것이라고 믿는 이유는 그날 밤을 보내고
나서 아이들의 영대에 대한 태도 때문이다. 다음날 아침 버스 안에서 화해의 행위가 감동적으로 이루어지고-나는 또 울었는데,- 마침내 영대는 반
친구들에게 아이들에게 ‘가장 소중한 아이’가 된다. 그저 다시는 따돌리지도, 놀리지도 않았다가 아니라, 이제부터 사이좋게 놀았다가 아니라,
‘소중한 아이‘가 되었다고 말한다. 아이들은 영대에게 말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엄마처럼 달래주기도 한다. 우리가 스스로 지켜낸 아이, 우리
스스로 깨달은 친구의 존엄함, 그것이 영대이고 그래서 영대가 아이들에게 소중한 아이로 느껴졌던 것이다. 계속 지켜주어야 할 아이로 인식된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는 어른들의 역할이 없다. 나는 아무 대안도 없이 영대가 따돌림 당하는 것을 두고
본 담임선생님이 정말 무능력하고 느꼈는데, 어찌보면 이 이야기에서 담임선생님은 아이들이 스스로 깨닫도록 아무 역할도 맡지 않았던게 아닌가 싶다.
게다가 그런 캐릭터로 인해 리얼리티도 얻었다. 꼭 진짜 교실에 있을 법한 선생님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렇게 <내 짝꿍 최영대>의 결말은 심심하다. 하지만 오히려 현실적이다. 공감으로
소외를 극복하다니 진부하지만, 되려 어렵다. 아이들의 마음이 아니라면 어떻게 울음 하나로 남을 이해하는 순간이 그렇게 쉽게 오겠는가. 그래서
그들의 마음씀은 참 아름답고 고맙고 눈물나는 것이다. 내가 남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공감하는 순간, 그것이 유토피아가 아니겠는가. 어린 아이들의
마음으로만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말이 바로 그 말이구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