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타는 차가 재규어라니 나는 운이 좋다. 그러자 나를 시기한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요코한텐 재규어가 안 어울려." 어째서냐. 내가 빈농의 자식이라서 그런가. 억울하면 너도 사면 되잖아. 빨리 죽으면 살 수 있다고. 나는 일흔에 죽는 게 꿈이었다. 신은 존재한다. 나는 틀림없이 착한 아이였던 것이다.
(...)
내게는 지금 그 어떤 의무도 없다. 아들은 다 컸고 엄마도 2년 전에 죽었다.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죽지 못할 정도로 일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남은 날이 2년이라는 말을 듣자 십수년 동안 나를 괴롭힌 우울증이 거의 사라졌다. 인간은 신기하다. 인생이 갑자기 알차게 변했다. 매일이 즐거워서 견딜 수 없다.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 건 자유의 획득이나 다름없다.

- 생활의 발견, 242 ~ 243p

내가 너무도 건강하고 쾌활하니까 "요코 제일 오래 살 것 같아"라는 말도 가끔 듣는다. 그럴 때면 죽을 자신이 없어져서 곤란하다.
사람은 태평스러운 존재다. 그간 실수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부끄러워서 살 수가 없는 나조차도 ‘내 인생은 썩 괜찮았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자기 편할 대로 생각하는 사람은 정말로 나뿐일까?

- 생활의 발견, 244 ~ 24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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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보편적 죽음 속에서, 그 보편성과는 사소한 관련도 없이 혼자서 죽는 것이다. 모든 죽음은 끝끝내 개별적이다. 다들 죽지만 다들 혼자서 저 자신의 죽음을 죽어야 하는 것이다. 죽음은 보편화되지 않고 공유되지 않는다. 장모님의 초상을 치르면서 나는 그 절대적인 개별성에 경악했다.
- 목숨 2, 143p.

원고료로 받은 10만 원짜리 수표 두 장을 마누라 몰래 쓰려고 책갈피 속에 감추어놓았는데 찾을 수가 없다. <맹자> 속에 넣었다가, 아무래도 옛 성인께 죄를 짓는 것 같아서 다른 책으로 바꾸었는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맹자> 속에도 없고, <공자> 속에도 없고, <장자> 속에도 없고, 제자백가서와 동서고금을 모조리 뒤져도 없다. 수표를 찾으려고 <장자>를 펼쳐보니 "슬프다, 사람의 삶이란 이다지도 아둔한 것인가! 외물에 얽혀 마음과 다투는구나"라고 적혀 있어 수표 찾기를 단념할까 했으나 또 그다음 페이지에 "무릇 감추어진 것치고 드러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였으니, 내 언젠가는 기어이 이 수표 두 장을 찾아내고야 말 터이다.
- 돈3, 186p.

서민이 선이고 귀족이 악인 것도 아니다. 가난뱅이가 선이고 돈 많은 자가 악인 것도 아니다. 그 반대도 아니다. 부자가 부자의 악덕에서 헤어나기 어렵듯이 가난뱅이에게도 가난뱅이의 악덕은 있다. 또 부자의 미덕이 있듯이, 가난뱅이의 미덕도 있는 것이다. 인간은 전면적으로 선하거나 악하지 않다. (...) 그렇게 뼛골 속부터 서민이고 서민이 그렇게 좋으면 서민으로 꾸역꾸역 일이나 하고 살면 되지, 대통령은 왜 하겠다는 것인가.
- 서민, 19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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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만 가면
고약한 결점이 다시 나를 방해하기 시작했어요.
그러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 자신이 결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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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란 어떤 사람일까? 초등학생 질문 그림책 3
채인선 글, 한지선 그림 / 미세기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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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난히 숫기가 없고 예민한 큰애는 친구 사귀기를 힘들어 했다. 낳았을 때부터 그러리라 짐작했던 것이 딱 낳아놓고 보니 내 판박이인게 생긴대로 논다고, 성격도 나를 닮을 줄 알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사회 생활(?)을 좀 시켰다. 이십 몇 개월인가부터 어린이집을 들어가 유치원까지 만 5년을 별 탈 없이 지냈으니, 학교에 가도 특별히 친구관계에 어려움이 없으리라 여겼다. 그래도 보험 삼아 내가 휴직계를 내고 들어앉았다. 여차하면 내가 발 벗고 나서서 친구를 만들어 줄 참이었다. 1학년때  친구가 6년은 간다하지 않는가. 6년을 우리 애가 친구 없이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나도 바짝 긴장이 들어서다.

 

   그래도 1학년은 쉽지 않았다. 그 엄마에 그 딸인지, 나도 그리 사교적이지 않으니 아이에게 이렇다 할 코칭을 해 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여차 저차 엄마들은 사귀어 놨지만 엄마들이 모여서 수다 떠는 동안 우리 애는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엄마 옆에 딱 붙어 있을 뿐이었다. 친구는 엄마가 만들어 줄 수 없는 것이란 걸 뼈저리게 통감하는 순간이었다.

 

   엄마, 애들이 끼리끼리 놀아, 나는 안 끼워줘. 이 말이 가슴을 후벼 팠다. 따돌림 당하는 게 아니어도, 참 마음 아플 일이었다. 가장 순진무구하게 뛰놀며 학교생활을 즐겨야 할 1학년 시기에 우리 아이만 어울리지 못하고 멀뚱멀뚱 겉돌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은.

 

   학교 가기 싫어, 나만 친구가 없단 말이야. 이런 말을 되풀이해 들으며 그럭저럭 1학년을 마쳤다. 그래도 시간이 약이라고 후반부에 가니 아이도 제법 안정감을 찾은 듯 해 나도 그만 (부랴부랴) 직장으로 돌아갔다. (그 시간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는지는 언제 다시 말할 짬이 있을 것이다. 내 평생 별 탈 없으면 휴직은 없다. 난 정말이지 직장 생활 체질이다. 내게 남은 육아휴직 가능 기간은 26개월. 쓰지도 않을 거, 팔 수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나 새 학년이 될 때마다 친구 사귈 걱정에 잠 못 자던 내 어릴 적을 생각하니 까마득했다. 겨우 1학년을 마쳤는데. 이것을 또 되풀이해야하나.

 

   다행이도 기우였다. 2학년 학부모 참관수업에 가니 쉬는 시간이 되어도 학교에 찾아온 엄마는 돌아보지 않고 제 친구에게 쪼르르 가버린다. 다행이다. 일단 친구를 만들었으니. 한 고비 또 넘긴 셈이다.

 

   이제 시작이다. 녀석의 교우관계는. 친구의 존재에 대한 생각은 앞으로 그녀석이 자라는 만큼 변할 것이다. 친구는 어떤 존재인지, 친구라는 세계에 어떻게 대응해 나갈 것인지, 친구가 잘 되는 것에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에 대해.

   그래서 이 책을 함께 읽었다.

 

   채인선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이다. 채인선 작가의 글은 늘 단순하면서도 깊이가 있고, 명료하면서도 모든 것을 포함한다. 친구에 대한 모든 것을 질문으로 담아놓았다. 아이에게 그림책의 가장 첫번째 질문을 해보았다.

 "영아야, 친구는 어떤 사람일까?" 시큰둥하게 대답한다. 같이 노는 사람이지 뭐. 그러네. 정답이데. 여기도 그렇게 써 있구만, 같이 노는 사람이라고.

   그러니 씩 웃는다. 책이라고 어려울 게 없구나. 친구가 같이 노는 사람이 맞구나 싶은가보다. 그제야 책에 집중하더니, 금세 친구란 존재에 대한 더 깊은 물음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많이 어려울 것이다. 질문이 주는 의미도, 그 답을 마음으로 느끼는 시간도.

 

   부디 이 책을 자주 펴보면 좋겠다. 이제 가 아니라 우리라는 관계에 발 들여놓은 아이지만, 곧 더 많은 고민을 하게 될 터이다. 친구의 눈에 들기 위해 를 놓아버리는 순간도 올 것이다. 친구와 함께하기 위하여 내 도덕적 신념과 반대되는 일을 하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친구에 대한 열등감에 몸을 떠는 고단한 밤도 있을 것이고, 친구의 좋은 날에 기꺼이 박수쳐주지 못한 자신에 대한 실망에 시달리는 날도 맞을 것이다. 나를 꺾지 못해 고독을 맛보기도 해야 할 테고, 배려를 하려다 불편을 만들어내기도 할 것이다. 그때마다 이 책을 펴고 다시 질문하고 스스로 답을 구하면서 길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이 책과 함께 우리 아이 인생에 있어 친구란 존재가 가르침이고 축복이길 진심으로 바래본다.

   그리고 이 나이에도 여전히 친구라는 존재가 어려운 나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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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짝꿍 최영대 나의 학급문고 1
채인선 글, 정순희 그림 / 재미마주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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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짝꿍 최영대>는 나의 첫 그림책이다.(사실 그림책이라기보다 글그림책에 가깝다. 하지만 이 책의 그림은 내게 ‘삽화’ 이상의 의미다. 그래서 나에게 이 책은 동화책이 아니라 그림책이다.) 가장 좋아하는 그림책이기도 하고, 내가 그림책을 읽기 시작한 때 막 만난 그림책이기도 하다. 어떻게 이걸 읽게 되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언제인지, 어떻게인지도 모르게 내 손에 들어왔고, 우연히 책을 펴 읽는 순간, 한 순간에 나를 울렸다. 그리고 봐도 봐도 눈물이 난다.

   아이들한테 이 책을 읽어주면 우리 아이들은 책은 보지도 않고 내 양 옆에 앉아 내 얼굴만 본다. 엄마가 이번에도 우나, 안 우나 확인하려는 것이다. 뚫어지게 내 표정만 탐색하는 네 개의 눈을 감지하면서도 나는 어김없이 매번 같은 장면에서 또 눈물이 난다. 책을 덮고 오늘도 또 울었음을 확인하면서 나를 매번 울리는 이 책의 힘에 놀라곤 한다. 자주 들쳐볼 수는 없다. 너무 마음 아픈 얼굴은 자주 들여다 볼 수 없는 법이다. 그래도 지금껏 나를 열 번은 울렸나 보다.

 

   왕따 동화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내 짝꿍 최영대>는 엄마를 일찍 여읜, 그래서 말을 잃어버린, 꾀죄죄한데다 냄새까지 나는 ‘영대’가 전학을 오면서 시작된다. 아이들의 잦은 괴롭힘과 따돌림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고, 시작은 그렇게 진부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영대는 아이들과의 관계를 풀어갈까? 우리는 책을 읽지 않아도 예상해 볼 수 있다.

   첫째, 영대의 새롭게 발견되는 능력, 아이들이 무시할 수 없는 어떤 능력이 드러나면서 아이들이 영대의 ‘가치’를 인정하게 되는 이야기 전개가 있을 수 있다. 많은 왕따 동화의 전형이다. 그 ‘가치’ 혹은 ‘능력’으로 선생님 혹은 어른들의 칭찬을 듣게 됨으로서 영대를 다시 보게 되었다든지, 혹은 위기의 순간에서 친구들을 구해낸다든지...... 동화의 세계보다 현실의 세계에 맞추어 예를 들어보면, 그 반의 인기가 많은 한 친구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함으로써 세(勢)를 좀 얻는다고나 할까? 많은 이런 류의 이야기가 난 정말 불만이다. 사람은 사람 자체로 존엄하다는 것을 가르쳐야하는데, 왜 누구에게나 발현되지 못한 달란트가 있음을 상기시키고, 따라서 지금 아무 쓸모없어 보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그 달란트가 발현될 나중을 생각해서?) 무시하거나 따돌리지 말고 인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논리는 정말 못마땅하다. 사람은 그 사람 자체로, 아니 모든 생명은 그 존재 자체로 존엄한 것이며 그 누구도 그것을 짓밟을 수 없다는 논리는 무엇으로 가르쳐야 하는가.

   둘째, 영대가 참다 참다 통쾌하게 복수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스토리 전개가 있을 수 있다. 첫 번째 전개보다 더 드라마틱하고 재미지겠지만, 과연 현실성이 있는지 묻고 싶다. 자꾸 그런 이야기가 듣다보면 어른들도 아이들도 현실에서 정말 그런 극적인 탈출구가 존재할 것만 같고, 그래서 피해자인 아이들이 스스로 해쳐나갈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는다. 그래서 ‘왜 당하고만 있는지 모르겠어.’라는 대사가 가해자에게서나, 방관자들의 입에서 나오게 되는 것이다. 당하는 아이가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 그 입장을, 그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타지는 현실을 위로한다. 그것이 가끔은 시간을 견디게도 하고,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게도 한다. 그래서 나는 첫 번째 전개보다는 두 번째 전개가 속 편하다. 물론 <내 짝꿍 최영대>의 스토리 전개는 위의 둘과는 거리가 있다. <내 짝꿍 최영대>는 더 큰 위로가 있다. 이제 이 두 가지 전개를 제외한 <내 짝꿍 최영대>만의 스토리를 들어보자.

 

   영대의 반은 경주로 수학여행을 간다. 다들 들뜬 모습이고, 영대도 첫 여행에 말없이 들뜬 모습이다. 그리고 수학여행 첫 날 밤, 영대의 울음이 시작된다. 다른 날보다 더 심한 괴롭힘도 아니었고, 더한 따돌림도 없었는데, 늘 듣던 ‘엄마 없는 바보’라는 한마디 놀림에 잠자리에 누운 영대는 울음을 터뜨린다. 아이들이 ‘영대가 울 수 있다는 걸 몰랐’을 정도로 그저 참기만 했던 아이가 ‘그 울음소리가 너무나 슬프고 괴로운 것’으로 느껴질 정도로 ‘양 무릎 사이에 얼굴을 처박고 어깨를 출렁이며 울’기 시작한 거다. 선생님은 영대를 달랠 수도, 야단 칠 수도 없어, 결국 ‘우리’를 혼내기 시작했고, 늘 영대를 불쌍하다고 생각해온 ‘나’를 시작으로 아이들은 영대에게 사과하기 시작하지만, 영대의 눈물은 쉽게 그치지 않는다. 결국 선생님의 계속되는 기합과 영대의 그치지 않는 눈물 때문에 아이들도 하나 둘씩 울고 반 전체가 눈물 바람이 된다. 선생님도 울고 영대도 울고, 우리 모두 운다. 그렇게 수학여행의 첫날이 지나가면서 갈등은 마무리된다.

 

   이것이 <내 짝꿍 최영대>가 선택한 결말이다. ‘측은지심’.

   아이들이 선생님의 꾸중과 벌 때문에 우는지, 아니면 정말 영대에게 미안해서 우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행간을 미루어 짐작하는 것이다. 아니 믿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의 마음을. 그 아이들이 진심으로 영대의 울음을 마음으로 들었고, 그 울음을 통해 영대의 슬픔을 함께 느꼈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그 구절을 읽는 나에게도 영대의 울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남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 즉 측은지심이 아이들에게 발동했다. 한 사람으로서의 나, 존재로서의 내가 그와 똑같은 외로움과 설움을 겪는다면 얼마나 괴로울 것인지 느끼게 된 것이다. 그래서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생각도 들었을 것이고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는 다짐도 했을 것이다. 뼈에 사무치도록 느꼈을 것이고 그리고 자라면서 두고두고 영대의 울음을 꺼내 볼 것이다.

   그렇게 그 사건이 해프닝이 아니라 지속성 있는 깨달음일 것이라고 믿는 이유는 그날 밤을 보내고 나서 아이들의 영대에 대한 태도 때문이다. 다음날 아침 버스 안에서 화해의 행위가 감동적으로 이루어지고-나는 또 울었는데,- 마침내 영대는 반 친구들에게 아이들에게 ‘가장 소중한 아이’가 된다. 그저 다시는 따돌리지도, 놀리지도 않았다가 아니라, 이제부터 사이좋게 놀았다가 아니라, ‘소중한 아이‘가 되었다고 말한다. 아이들은 영대에게 말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엄마처럼 달래주기도 한다. 우리가 스스로 지켜낸 아이, 우리 스스로 깨달은 친구의 존엄함, 그것이 영대이고 그래서 영대가 아이들에게 소중한 아이로 느껴졌던 것이다. 계속 지켜주어야 할 아이로 인식된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는 어른들의 역할이 없다. 나는 아무 대안도 없이 영대가 따돌림 당하는 것을 두고 본 담임선생님이 정말 무능력하고 느꼈는데, 어찌보면 이 이야기에서 담임선생님은 아이들이 스스로 깨닫도록 아무 역할도 맡지 않았던게 아닌가 싶다. 게다가 그런 캐릭터로 인해 리얼리티도 얻었다. 꼭 진짜 교실에 있을 법한 선생님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렇게 <내 짝꿍 최영대>의 결말은 심심하다. 하지만 오히려 현실적이다. 공감으로 소외를 극복하다니 진부하지만, 되려 어렵다. 아이들의 마음이 아니라면 어떻게 울음 하나로 남을 이해하는 순간이 그렇게 쉽게 오겠는가. 그래서 그들의 마음씀은 참 아름답고 고맙고 눈물나는 것이다. 내가 남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공감하는 순간, 그것이 유토피아가 아니겠는가. 어린 아이들의 마음으로만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말이 바로 그 말이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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