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나의 벗! 불행이란 전염성이 강한 병인가봅니다.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자기의 불행과 가난이 더 이상 전염되지 않도록 서로서로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당신께 어마어마한 불행을 가져왔군요. 당신께서 지금 겪고 계시는 불행들은, 당신꼐서 혼자 조용하게 사시던 시절에는 전혀 경험하시지 못하던 것들이지요.

- P138

바렌카,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내게 화를 내지는 말아 주십시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가아 견딜 길이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란 원래가 변덕스런 법입니다. 그것은 자연이 그렇게 정해 놓은 것입니다. 가난뱅이란 뒤틀린 성미를 갖고 있습니다. 가난뱅이는 하느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을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일일이 곁눈질합니다. 그뿐 아니라, 자기 주위를 겁먹은 눈으로 둘러보면서 남들이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지나치게 신경을 씁니다. 말하자면 혹시 저 사람들이 내 얘기를 하는 건 아닐까? 하고 다니는 형색이 너무 형편없다고 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어떤 생각을 갖고 어떻게 느끼는지 살피는게 아닐까? (...) 가난한 사람들은 이런 것들에 시시콜콜 신경을 쓰게 됩니다. 바렌카, 가난뱅이는 넝마 조각보다 못한 존재고, 어느 누구하네서도 존경을 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 P145

그렇습니다. 나는 오늘 털이 숭숭 빠진 참새 새끼나 곰 새끼 같은 몰골을 하고 사무실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려니 너무 창피해서 온몸이 확확 달아올랐습니다. 바렌타, 나는 정말 창피해 죽을 것 같았습니다! 옷이 하도 낡아서 팔꿈치가 훤히 드러나 보이고 실오라기 씉에 단추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데, 겁을 잔뜩 집어먹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런데 제 몸에 걸치고 있는 것들은, 마치 일부러 그런 것처럼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형편 없는 꼴이었습니다! 이 정도면 누구라도 기가 죽을 것입니다.

-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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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요! 제가 마치 선생님 말들 사이로 넘실거리는 배 같았어요.˝
시인의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갔다.
˝‘내 말들 사이로 넘실거리는 배‘.˝
˝바로 그래요.˝
˝네가 뭘 만들었는지 아니, 마리오?˝
˝무엇을 만들었죠?˝
˝메타포.˝
˝하지만 소용 없어요. 순전히 우연히 튀어나왔을 뿐인걸요.˝
˝우연이 아닌 이미지는 없어.˝

- P31

˝선생님은 온 세상이, 즉 바람, 바다, 나무, 산, 불, 동물, 집, 사막, 비.......˝
˝...... 이제 그만 ‘기타 등등‘ 이라고 해도 되네.˝
˝...... 기타 등등! 선생님은 온 세상이 다 무엇인가의 메타포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네루다의 입은 턱이 빠질 듯이 떡 벌어졌다.
˝제 질문이 어리석었나요?˝
˝아닐세, 아니야.˝
˝너무 이상한 표정을 지으셨어요.˝
˝아니, 생각에 잠겼을 뿐이야.˝
네루다는 손을 위저어 상상의 연기를 헤치고, 흘러내리는 바지를 추몄다. 그러고는 집게손가락으로 청년의 가슴을 찌르면서 말했다.
˝이봐, 마리오. 우리 협정을 맺지. 나는 지금부터 부엌에 가서 아스피린 오믈렛을 준비하겠네. 그러면서 자네 질문에 대해 머리를 싸매고 생각해 봐야겠어. 내일 내 생각을 이야기해 주지.˝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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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는 비가 내리는 가운데 난로를 틀어 놓고 책 속으로 푹 빠져들 때의 기분을 여러분도 알 것이다.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빠져나가는 책장을 느끼며 읽고 또 읽다 보면 어느덧 왼쪽으로 넘어간 책장이 오른쪽에 남은 책장보다 많아지고, 속도를 늦추고 싶지만 그래도 끝까지 밝혀지지 않았으면 하는 결말을 향해 돌진하는 기분. 나는 그것이 탐정 소설의 남다른 매력이고, 문학이라는 보편적인 카테고리 안에 탐정 소설만의 특별한 자리가 있따고 생각한다. 모든 등장인물 중에서도 ㅏㅁ정이야말로 독자와 사실상 독특한 관계를 맺지 않는가 말이다.

(탐정 일 中)

- P223

탐정 소설의 핵심은 진실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불화실로 가득한 세상에서 모든 게 깔끔하게 정리가 되는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르면 자동적으로 속이 시원해지지 않는가. 이야기는 우리가 실생활에서 경험하는 일들을 모방한다. 우리는 긴장과 애매모호 속에서 살아가며 그것들을 해결하려고 애를 쓰는 데 인생의 절반을 투자하지만 임종을 목전에 두고서야 모든 게 명확해지는 순간에 다다른다. 그런데 거의 모든 탐정 소설이 그런 희열을 제공한다. 그것이 탐정 소설의 존재 이유다.

(탐정 일 中)
-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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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이 잔일에 부려먹기에는 다소 기능이 과하다 싶은 고가의 로봇보다 중요하거나 피곤한 일들이, 영원히 마르지 않는 빨래처럼 일상 곳곳에 널려 있다. 세상은 한 통의 거대한 세탁기이며 사람들은 그 속에서 젖은 면직물 더미처럼 엉켰다 풀어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닳아간다. 단지 그뿐인 일이다.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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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찾는 사람들이 말하는 남아의 효용에는 실체가 없다. ‘든든하다‘ ‘대를 잇는다‘ 같은 정신적 만족감은 남아의 출생과 동시에 충족된다. 즉, 남아는 존재만으로도 목적을 달성한다. 그러나 여아 선호 시대의 부모들은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린다. 딸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갖고 싶은 딸‘에 관한 구체적인 서사가 있다. 태어나서는 키우기 편하고, 어려서는 눈을 즐겁게 하고, 자라서는 가사노동에 손을 더하고, 머리가 굵어서는 부고의 말동무가 되고, 죽기 전까지 간병을 책임지는,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인 그 ‘좋은 딸‘의 심상 말이다.

(우리 ‘탈가정‘ 할 수 있을까 中)

- P28

여자들의 고민은 상비, 하뚱, 부유방, 승모근, 승마살, 엉밑살, 셀룰라이트 등 디테일한 영역으로 가지를 뻗었고, 모두가 거슬리는 근육이나 지방 덩어리만 부분적으로 감량하는 꿈을 꾸었다. 여성 신체의 파편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이상향이 실현될 가능성은 낮아지고, 현실의 몸을 감시하기는 수월해졌다는 것이다. 여성들은 여성의 육체를 더 꼼꼼히 혐오할 수 있게 되었다.

(코르셋 밖으로 中)

- P55

형님이 거부한 전통적 며느리 문화를 계승할 사람, 아들이 미혼 시절 소홀히 했던 효도를 대리 수행해줄 사람, 집 나간 시어머니 대신 시아버지에게 밥을 차려줄 사람이 외어달라는 다각도의 요청이 불쑥불쑥 민사린을 옭아맨다. 문제는 며느리가 ‘화목한 가족‘ 판타지를 완성할 최후의 조각으로 여겨질 때, 며느리의 고유한 인격은 박박 문질러 없애야 할 이물질로 취급된다는 것이다.

(맘카페에서나 하라던 이야기 中)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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