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물고기 (차창룡)

 

물고기는 죽은 후 나무의 몸을 입어

영원히 물고기가 되고

나무는 죽은 후 물고기의 몸을 입어

여의주 입에 물고

 

창자를 꺼내고 허공을 넣으니

물고기는 하늘을 날고

입에 문 여의주 때문에 나무는

날마다 두들겨 맞는다

 

여의주 뱉으라는 스님의 몽둥이는 꼭

새벽 위통처럼 찾아와 세상을 파괴한다

파괴된 세상은 언제나처럼 멀쩡하다

 

오늘도 이빨 하나가 부러지고 비늘 하나가

떨어져 나갔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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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아침 (오규원)

 

땅의 표면과 공기 사이 공기와 내 구두의 바닥 사이 내 구두의 바닥과 발바닥 사이 발바닥과 근육 사이 근육과 뼈 사이 뼈와 발등 사이 발등과 발등을 덮고 있는 바량이 사이 그리고 바랭이와 공기 사이

땅과 제일 먼저 태어난 채송화의 잎 사이 제일 먼저 태어난 잎과 그 다음 나온 잎 사이 제일 어린 잎과 안개 사이 그리고 한 자쯤 높이의 흐린 안개와 수국 사이 수국과 수국 곁에 엉긴 모란 사이 모란의 잎과 모란의 꽃 사이 모란의 꽃과 안개 사이

덜자란 잔디와 웃자란 잔디 사이 웃자란 잔디와 명아주 사이 명아주와 붓꽃 사이 붓꽃과 남천 사이 남천과 배롱나무 사이 매롱나무와 마가목 사이 마가목과 자귀나무 사이 자귀나무와 안개 사이 그 안개와 허공 사이

오늘과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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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운이 좋습니다. 맘에 드는 시를 단 두 번의 시도 끝에 발견했어요.

얼핏 수수해보이지만 누군가 안개를 가르며 딸랑이 종을 울리면서 자전거에다 싣고다니며  파는 두부처럼 신선하고 뭔가 모를 희망이 감도는 듯한 아침의 공기가 시에서 막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정말 그렇게 하실 분은 없겠지만, 이 시가 얼마나 좋은지 보시려면 한 번 직접 손으로 타이프를 해보세요. 눈으로는 잡기 힘든 리듬이 손가락 끝에서 타다다닥하고 튀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과/ 아침".   이 마지막 두 행은 정말이지 화룡점정이죠?

모두들 좋은 아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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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그 풀밭에 (나희덕)

 

누군가 손대지 않음으로써 일구어 놓았나

스스로 무성해진 풀밭

두려움도 없이 나는 풀을 벤다

낫이 움직이면서 내 속에 자란 풀을 먹어치운다

풀을 베어낸 자리마다 흙이 상처처럼

검붉다, 부질없이 부질없이

옮겨 심을 무엇이 더 남아 있다는 것일까

드러난 흙이

뿌리를 삼키기 위해 입을 벌리듯

나의 탐식은 풀밭 위를 달린다

풀은 왜 늙으면서 질겨지는가

가벼워지는가

두려움도 없이 나는 풀을 벤다

마음, 그 풀밭에 불을 놓는다

풀뿌리는 끝내 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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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동시인의 꽤 유명한 <풍장의 습관>만큼 확 눈을 끄는 구석은 없지만, 오래오래 읽어보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아요. 아마 풀밭에 불놓는 것과 마음자리의 욕망을 뜯어내는 것과 그걸 탐식이라 표현하는 시인의 말 사이의 관련성도, 풀이 질겨지면서 늙으면서 동시에 가벼워진다는 말의 의미도 단번에 확 명쾌하게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그렇지만 자세히 읽으면 읽을수록 시인이 하고자 하는 말이 강렬한 이미지와 함께 머릿 속을 화라락 화차처럼  달려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버섯이, 이럴 때 좋은 예가 될 것 같아요. 며칠 비 내린 후에 보면 그늘 구석에서 부지불식간에 무럭무럭 자라있는 버섯들. 그런 버섯들처럼 살아있는 존재들은 늘 무수한 욕망을 산출해내지요. 그런가하면 또 그런 욕망들에 지치고 시달려 제가 만들어낸 그 욕망들을 그만 단칼에 다 날려버리려는 혹은 한 입에 다 먹어치워 없애버리려는 또다른 욕망이 존재의 뒷편에 웅크리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도 목숨이 붙어있는 한 그 욕망의 뿌리는 그렇게도 뽑아내기가 지난한 것이라, 끝끝내 풀뿌리는 타지를 않는다고요. 없어지기란 그러니까 여러번 가벼워지는 것만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닌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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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 - 새움 에크리티시즘 1
이명원 지음 / 새움 / 2001년 7월
평점 :
품절


다른 사람들의 리뷰를 읽고 많이 기대를 하고 읽어서 그랬는지 처음엔 책에 실린 각 글들이 너무 짧다는 생각에 약간 실망을 했더랬다. 이 책을 즐기려면 여기 실린 글의 목적이 독자를 즐겁게 해주려는 데 있지 않다는 사실을 미리 인지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 책은 우리 문학계와 지식인 사회의 불합리와 구조적 문제들을 날카롭게 끈질기게 제기하며 독자의 마음을 지속적으로 불편하게 만드는데, 이것이 바로 이 책의 장점이자 동시에 젊은 비평가인 저자가 의도한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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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배운 것 (유하)

 

인생의 일할을

나는 학교에서 배웠지

아마 그랬을 거야

매 맞고 침묵하는 법과

시기와 질투를 키우는 법

그리고 타인과 나를 끊임없이 비교하는 법과

경멸하는 자를

짐짓 존경하는 법

그 중에서 내가 살아가는 데

가장 도움을 준 것은

그런 많은 법들 앞에 내 상상력을 최대한 굴복시키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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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제도교육이 행해지는 장소로서의 학교는 추한 공간이다. 죽마고우를 얻고 훌륭한 선생님에게서 삶과 지식을 동시에 배우며 유년과 청춘의 가장 반짝이는 시기를 보내는 곳이라는 건 선전이고, 실제로는 시인이 말하듯이 사회를 작동시키는 적자생존의 규칙에 스스로를 복속시키도록 강요당하며 그 규칙이 내면화될 때까지 푸지게 공급되는 매를 맞는 곳이다.

두려운 진실이란 그래서 제도교육된 대중으로서의 우리. 오늘도 사회의 매를 맞고 침묵하며, 누군가를 끊임없이 시기하고 질투하며, 타인에 자신을 비교하기를 그치지 못하고, 경멸하는 자를 짐짓 존경하는 척 하다가 정말로 존경하게 되어버린 대중.

이렇게 비관적인 생각 따위는 정말로 하고 싶지 않지만, 어째 찾아지는 시마다 꼭 이런 빛깔인가 모르겠다.

이상하게 마음이 자꾸 비뚤어지는 날이라 이런 시만 눈에 띄인 걸까?

행복을 찾는 나의 불온하고 신나는 상상력은 다 어디에 말라붙었나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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