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비명 (박형준)

                      

유별나게 긴 다리를 타고난 사내는
돌아다니느라 인생을 허비했다
걷지 않고서는 사는 게 무의미했던
사내가 신었던 신발은 추상적이 되어
길 가장자리에 버려지곤 했다. 시간이 흘러
그 속에 흙이 채워지고 풀씨가 날아와
작은 무덤이 되어 가느다란 꽃잎을 피웠다
허공에 주인의 발바닥을 거꾸로 들어올려
이 곳의 행적을 기록했다,
신발들은 그렇게 잊혀지곤 했다

기억이란 끔찍한 물건이다
망각되기 위해 버려진 신발들이
사실은 나를 신고 다녔음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맨발은 금방 망각을 그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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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1-04 17: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검둥개 2006-01-05 0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저의 근황은 막 제가 올린 뻬빠를 보시면 아실 수 있을 겁니다. ^^;;; 허리가 쑤셔서 죽음이야요. 고생하셨네요. 그래도 걱정하신 건 다 괜찮았으니 천만다행이 아닙니까! 이제 좀 진정하셨죠? 따뜻한 이불 아래 들어가서 마음을 좀 가라앉히셔요. 서재에 가보았는데 아이고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원래 답글 안 다시는 스탈이니 확 지우심이 어떠하시겠습니까 ㅎㅎㅎ? ;)
 

감각의 자연사라는 책을 보고, 사고 싶어 했으나 영어책이라는 것을 알고 자제하기로 맘을 먹었다. 헌책방에서 싸게 사서 읽으면 된다 생각해서. 그런데 책장에 떡하니 꽂혀 있길래 (삼돌이의 것) 공짜라고 좋아하면서 헬렐레 책을 펼쳤더니 이 화려하고 복잡한 형용사와 부사의 향연이여~~~ @.@ 사전을 뒤적여가며 읽다가 즐거운 책을 두통과 함께 읽어야 한다는 것이 억울해서 독서를 중단했다. 아무래도 감각에 대한 글은 모국어로 읽어야 즐거움이 온전하고 내용도 팍팍 전달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

A Natural History of the Senses
  개인적으로 볼 떄 한국판이 더 멋있는 것 같다.
  집에 있는 것이 헌 책이라 더 그럴 수도 있다, 물론. ^^;;;
  A Natural History of the Senses (Vintage)


이 책을 조금 읽다가 사전을 내팽게치고 대신 집어든 책은,
비슷한 제목의, 혹은 제목만 비슷한 <넌센스의 자연사>!

 The Natural History of Nonsense
by Bergen Evans

20세기 초까지도 가열차게 논쟁되던 엉뚱한 주장들을 묶어놓은 무척 재미있는 책이다.

이를테면 아담과 이브에겐 배꼽이 있는가? 아담은 하나님이 빚었고 이브는 아담의 갈비뼈에서 나왔으니 탯줄과는 아무 관련이 없을 터, 그래서 많은 종교인들은 아담과 이브의 아름다운 나체에 배꼽을 그려넣는 것을 신성모독으로 간주했다고 한다. 만약 하느님이 아담과 이브에게 배꼽을 주었다면 아무 쓸모도 없는 것을 부여한 셈이라 되려 신성의 완전성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킨다는데! 어떤 현학자는 하느님이 아담과 이브에게 배꼽을 준 것은 그럼으로써 신앙 대신 이성을 택할 인간들을 시험하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했단다. 그러나 이 설 역시 왜 완전하고 선한 하느님이 인간을 시험하겠냐라는 반박에 부닥쳤다고 한다. ㅎㅎ 불쌍한 현학자,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꼴이다. ^ ^

마찬가지로 지구가 둥글다면 어떻게 인간들이 땅을 그러쥘 발톱 손톱도 없이 땅에서 안 떨어지고 살 수 있냐는 반론이 끈질기게 제기되었다거나,욕조의 대량도입으로 인해 건강이 증진되고 질병발생률이 떨어졌다는 신화 (우리나라에도 대중묙욕탕이 도입되면서 건강이 증진되고 질병발생률이 떨어졌다는 설이 있지 않을까?), 우산은 상대적으로 최근의 발명품이며 처음 우산을 쓰고 다닌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조소를 받았다는 대중 사이에 널리 퍼진 착각, 등등이 재미있게 소개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감각의 자연사를 읽으려다가 넌센스의 자연사 쪽으로 넘어가고 있는 형국이다.
나도 우아한 독서를 하고 싶은데... 오늘은 허리가 너무 아파서 좀 힘들다. (이게 무슨 소리람! =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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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 2005-12-31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감각의 박물학은 한국에서 공수하기로 했답니다.
아마존에서 렛츠룩으로 조금 보았는데 끙;;;

검둥개 2006-01-01 0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수하기로 한 거 잘하셨어요. ^^ 저두 한두번 더 시도해보고 정할 생각이랍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마지막 주문을 넣었다.
(서재에만 들어오면 이런 뽐뿌성 뻬빠들 때문에 흑흑.  로드무비님 책임지셔요. =3=3=3)

알라딘US 왈 199불 이상이면 무료배송이라지만, 199불은 너무 쎄다. 고민고민하면서 수많은 보관함의 책 중에 단 네 권을 골랐는데 왜 일케 비싼 거인지 흑흑. 삼돌이가 흥분한 나를 보면서 혀를 차는데. 그래도 마지막 월급을 받았으므로 (안쓴 휴가가 돈으로 환산되어 나왔다.) 나에게 주는 새해 선물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알라딘 유에스에서 사는 한국책의 가격은 대략 정가의 2배이다. 한국에서 배송시키면 배송비가 보통 책값만큼 나오니까 그게 그거라고 생각하지만 속이 쓰리누...  4만원에 이천원 마일리지도 못 받는 것은 눈물이 나려고 한다.

그래두 언제 책이 올 것인가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두근.  ^______^*

 

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1
(준비된
수량 1)
가격 : $ 13.00
마일리지 : $ 0.40 (3%)
대담
도정일 외 지음
1
(준비된
수량 1)
가격 : $ 35.00
마일리지 : $ 1.05 (3%)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가라타니 고진 지음, 김경원 옮김
1
(준비된
수량 1)
가격 : $ 14.00
마일리지 : $ 0.42 (3%)
잘 가라, 서커스
천운영 지음
1
(준비된
수량 1)
가격 : $ 13.00
마일리지 :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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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 2005-12-29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대담(對談)의 가격이 참 대담(大膽)하기도 하네요;;;
저도 알라딘 유에스에서 살까말까 망설이다가 항상 적립금땜에 한국에 주문하고 몇달에 한번씩 엄마한테 부쳐달랜다는 -_-;;;
그나저나 알라딘 무료배송 99불 아니었나요? 왜 199불이 된거지 흑

진주 2005-12-29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러로 나온 가격표 보니 생경스럽네요^^
2006년 연초엔 부자처럼 책 쌓아두고 읽으시겟네요~

paviana 2005-12-29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 이런건 어떨까요..계산을 한번 해보세요..
님이 알라딘에 제삼실로 주문한다.받아서 제가 박스째 님에게 보낸다.
우편요금은 사후에 제통장으로 보내주시거나 책으로 한다.
여기서 미국까지 보내는 우편요금 계산해서 요놈이 더 싸면 제가 받아서 보내드릴께요.이천원 마일리지 아깝자나요.^^

로드무비 2005-12-29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페이지에는 꼭 빠지지 않는 이름.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ㅎㅎ
검둥개님, 주문 잘하셨어요.
<달려라 아비> 저도 오늘 읽고 있는데 무지 재밌네요.^^

검둥개 2005-12-30 0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Kitty님 글쎄 말여요. 국내에선 한 권도 무료배송이라면서 흑흑.
그리구 199불은 쫌 너무 하지 않나요, 저두 99불인줄 알았는데 뭔 일이래요. 쩝.

진주님 저두 책값을 보며 생경스러버요. ^^;;; 일케 쎈 거이 책값이건만 설마 쌓아두고 읽히기야 할라구야. 기껏해야 네 권이어요. ㅎㅎ

파비아나님 아이구 맘만으루도 무지하게 고맙습니다!!! ^ .^ 그래두 강호의 예를 아는 이 검둥개가 어케 그런 폐를 끼칠 수 있겠써요.^^ 괘안아요. (_ _)

로드무비님 슬퍼하실 것까지야. 뽐뿌성 뻬빠두 너무 잘 쓰신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 ^^ 로드무비님이 재밌다니까 저두 더욱 기대가 되는 걸요 ㅎㅎ

2005-12-30 09: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검둥개 2005-12-31 0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갔군요, 드디어!!! ^^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요. ㅎㅎ 그 CD세트가 맞습니다. 아주 알차더라구요. 여러번 듣구 있어요. 왜 좌절스러우신지는 모르겠으니 나중에 꼭 알려주셔야 합네다. ^^ 얼굴 부었다니 푹 휴식을 취하시라요. 저두 나중에 놀러갈께요. 크리스마스 가짜나무 옮기느라고 고생을 했는지 허리를 삐었나봐요. 아이고... ^^

검둥개 2006-01-01 0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별님 ㅎㅎ 저두 환율은 잘 모르는데 ^^ 대충 1불을 1000원으로 계산해요. 그럼 대담은 35불=35000원. 끄으.... -- .--;;;
 

가구의 힘 (박형준)



얼마 전에 졸부가 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나의 외삼촌이다
나는 그 집에 여러 번 초대받았지만
그때마다 이유를 만들어 한번도 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방마다 사각 브라운관 TV들이 한 대씩 놓여있는 것이
여간 부러운 게 아닌지 다녀오신 얘기를 하며
시장에서 사온 고구마 순을 뚝뚝 끊어 벗겨내실 때마다
무능한 나의 살갗도 아팠지만
나는 그 집이 뭐 여관인가
빈방에도 TV가 있게 하고 한마디 해주었다
책장에 세계문학전집이나 한국문학대계라든가
니체와 왕비열전이 함께 금박에 눌려 숨도 쉬지 못할 그 집을 생각하며,
나는 비좁은 집의 방문을 닫으며 돌아섰다

가구란 그런 것이 아니지
서랍을 열 때마다 몹쓸 기억이건 좋았던 시절들이
하얀 벌레가 기어 나오는 오래된 책처럼 펼칠 때마다
항상 떠올라야 하거든
나는 여러 번 이사를 갔었지만
그때마다 장롱에 생채기가 새로 하나씩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집의 기억을 그 생채기가 끌고 왔던 것이다
 
새로 산 가구는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이 달라졌다는 것만 봐도
금방 초라해지는 여자처럼 사람의 손길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먼지 가득 뒤집어쓴 다리 부러진 가구가
고물이 된 금성라디오를 잘못 틀었다가
우연히 맑은 소리를 만났을 때만큼이나
상심한 가슴을 덥힐 때가 있는 법이다
가구란 추억의 힘이기 때문이다
세월에 닦여 그 집에 길들기 때문이다
전통이란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것----
하고 졸부의 집에서 출발한 생각이 여기에서 막혔을 때
어머니가 밥 먹고 자야지 하는 음성이 좀 누구러져 들려왔다.
너무 조용해서 상심한 나머지 내가 잠든 걸로 오해 하셨나
 
나는 갑자기 억지로라도 생각을 막바지로 몰고 싶어져서
어머니의 오해를 따뜻한 이해로 받아들이며
깨우러 올 때까지 서글픈 가구론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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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12-29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왜 이리 뜸하시단 마립니까!
바쁘신가 봐요.^^

'가구의 힘' 저도 좋아하는 시 중의 하나예요.^^

검둥개 2005-12-29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처음 읽었었어요. ^^*
그렇게 우연히 만나서 잊혀지지 않는 시들이 몇 있어요.

마태우스 2005-12-29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전 이 시 처음 읽었어요...
열 사람 중에서 아홉사람이 내얼굴을 보더니 손가락질해...이런 노래 옛날에 자주 불렀죠. 그 노래 중 한 대목 같네요...느낌이 그렇단 얘기에요

검둥개 2005-12-30 0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마태우스님, 님의 독창적 해석에 감탄을 금치 못하겠어요!!! ^^
그런데 시의 어느 부분이 특히 그 노래와 유사한 느낌인가요? 헤헤
 

맷돌 (문태준)

                     

마룻바닥에 큰 대자로 누운 농투사니 아재의 복숭아뼈 같다
동구에 앉아 주름으로 칭칭 몸을 둘러세운 늙은 팽나무 같다
죽은 돌들끼리 쌓아올린 서러운 돌탑 같다
가을 털갈이를 하는 우리집 새끼 밴 염소 같다
사랑을 잃은 이에게 녹두꽃 같은 눈물을 고이게 할 것 같다
그런 맷돌을, 더는 이 세상에서 아프지 않을 것 같은 내
외할머니가 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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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25 14: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검둥개 2005-12-29 0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몸살 걸려 앓다가 이제야 좀 나아서 들어왔시유. ^^ 우짜 무료하심? 그 털많은 넘의 반응은, "어, 왔어?"였답니다. 집에 가면 <불멸>을 한 번 재독해볼께요. 여기 올 때 들고온 몇 안 되는 책 중의 하나이니. 쿤데라 리뷰 쓴 건 알구 있었슴다. 그 책을 말씀하신 것인 줄을 몰랐을 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