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은 또 다른 희망을 낳는다
서진규 지음 / 푸른숲 / 2000년 8월
평점 :
품절


엊그제 친정에 들러 한달 후의 엄마 칠순을 미리 축하드렸다. 칠순날은 누가 찾아오는 것도 싫고, 그렇다고 아무도 안 오면 서운하니 아예 잠시 제주도 여행을 다녀오시겠다고 한다.

엄마를 생각하면 늘 눈물이 난다. 몇년 전, 내가 늦둥이 딸을 낳고 난 후부터이다. 이 리뷰는 아이를 낳고 몸조리를 한 직후에, 그러니까 4년 전에 쓴 글이다.

늦둥이 딸이 또 다시 늦둥이 딸을 낳았다. 우리 엄마와 나, 그리고 두 달 된 딸의 얘기다.

며칠 전, 갓난아이를 데리고 처음으로 친정에 들렀다. 꼭 가야 할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다만 가끔씩 친정에 들를 때마다 살아가는 자극을 받았던 터였고, 요즘 그런 것이 필요해졌다는 내면의 외침을 늦게나마 감지한 것이었다.

항상 그렇듯이 엄마는 돋보기를 쓰고 <희망은 또 다른 희망을 낳는다>라는 책을 읽고 계셨다. 일곱 식구의 살림을 온전히 혼자 힘으로 다 하시면서도 요즘 나오는 책들은 안 읽으신 게 없는 엄마였다.
예순 여섯이라는 나이에, 돋보기를 쓰고도 삼십 분 남짓이면 금방 어지러워져 책을 맘대로 못 읽겠다고 얘기하시면서도 또 엄마는 책을 들고 계셨다.
안경을 쓰시고도 책을 읽으시려면 돋보기를 또 들이대셔야 하는 일흔 하나 친정 아버지와 더불어 엄마는 항상 나의 본보기셨다.

집으로 돌아올 때, 항상 그랬듯이 엄마가 막 읽으신 책들을 빌려왔다. 요즘 한참 텔레비전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도올 김용옥의 노자와 공자 얘기에서부터 해리포터 4권에 이르기까지 십여 권의 책 속에서 <희망은 또 다른 희망을 낳는다>는 서진규의 책은 별로 내 시선을 끌진 못했다.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니까 그 이름을 빌려 속편을 냈나보다고 그저 막연하게 넘겨짚었을 뿐이었다.

지난 책에서는 가난한 환경을 무릅쓰고 가정부로 미국에 건너가 미군 소령으로 그리고 하버드 박사과정 대학원생으로 성공하기까지 힘겨웠던 자신의 이야기였다면 이번 책은 역시 하버드 출신으로 미군 장교인 딸의 얘기를 하는, 그러니까 딸 하나 잘 둬서 책까지 낸 그저그런 이야기일 거라고 미리 생각했다.
이 책이 다른 책들 속에서 먼지를 뒤집어쓰며 굴러다니기만 했던 이유였다.

그러나 책을 손에 잡았을 때, 난 그 강력한 흡입력에 빠져버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호흡에 읽히는데, 그 사이사이에는 그처럼 열악한 환경 속에서 딸을 강하게 키워야 했던 가슴 아픈 모정이 배어 있었다.

이혼녀, 그것도 군인의 몸으로 이곳저곳 아이가 정을 붙일 만하면 금방 옮겨다녀야 했고, 걸핏하면 비상이네 훈련이네 하면서 아이 혼자 내버려두어야 했던 상황을 엄마는 가슴아파하고 있었다.

한국말이 전혀 안 되는 상황에서 한국 학교에 내던져졌고, 겨우 적응하니까 이젠 영어를 다 잊어버린 상황에서 미국 학교에 내던져져야 했다.
남 얘기라면 외국어를 여러 개 할 수 있는 기회가 되겠다거나 혹은 친구를 다양하게 사귈 수 있겠다거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게 내 상황이라면...

내가 갑자기 비상훈련에 소집되어서 겨우 일곱살짜리 딸아이를 미국에서 한국으로 혼자 비행기를 태워 보내야 한다면 도대체 사는 게 뭘까 생각하며 우울증에 걸렸을 것 같다. 

그렇게 보낸 아이가 한국에서 연탄가스를 마셔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엄마는 미국에서 전화통을 붙잡고 피눈물을 흘릴밖에 다른 수가 없다면 난 아마 아이와 함께 삶을 포기해버리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그 엄마와 딸은 항상 즐거웠다. 아이가 사춘기를 겪을 때면 엄마도 함께 사춘기였고, 엄마가 공부하는 것을 보면서 아이도 함께 공부했다.
둘은 때로는 친구였고 때로는 라이벌이었다.
모녀가 함께 하버드를 다니면서 밤을 새워 경쟁적으로 공부하고 때로는 절망하는 모습은 정말 감동적이었다.
엄마는 행동으로 아이에게 얘기했고, 아이는 엄마를 신뢰하고 존경했다. 아름다웠다.

난 요즘, 내 처지에 시시때때로 절망한다.
아이가 셋이 되면서, 이젠 천사옷을 되찾아도 하늘나라로 올라가기는 이미 틀려버렸다고 생각했다.
뒤를 돌아보면서, 내가 예전엔 얼마나 유능한 직장인이었던가를 강조하면서 남편이 나를 눌러 앉혔다고 자책하는 모습을 은근히 즐기고 있었다.

희망은 또 다른 희망을 낳지만, '절망은 또 다른 절망을 낳는다'는 것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엄마는 그런 늦둥이 딸을 책하지 않으시고, 그저 묵묵히 항상 희망을 몸으로 보여주시고 계셨다.

이제 나는 나의 늦둥이 딸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서 있어야 할 것인가.


댓글(7)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숨은아이 2004-08-03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님, 멋지세요.

호랑녀 2004-08-03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예 멋지세요.
그런데 지금은 움직이는 종합병원이셔요. 시한부인생 뭐 이런 거까지는 아니지만, 병원에서도 어쩔 수 없다고 한대요. 그래서 정말 속상해요.
어제 칠순잔치?에서, 사람들이 전부 훌륭한 아내, 어머니, 할머니로서의 엄마만 얘기해서 속상했어요. 엄마 그 자체만으로 평가해도 참 훌륭한 분인데.

반딧불,, 2004-08-03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진규씨 참 멋지지요??
글도 흡인력 있구요.
작년에 읽으면서 아쉬웠던 점은...너무 찬미적인 성향이었지요.
미군에 들어갔기에 얻은 것들이 많았다는 식의...이것도 제 탓이지 그의 탓은 아니지요.

참..노력하는 사람은..언제나 눈에 들어오고, 숙연해지고 그런 듯 해요.

님의 어머니도 대단하시네요. 잘 해드리실거죠??

호랑녀 2004-08-04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도 멋있고, 말도 잘 하더군요.
이 사람에게 미국은 기회의 땅이었으니, 아마 친미 찬미일 수밖에 없을 거예요.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이 참 아름답게 느껴지더군요.
엄마.. 잘 해드려야 하는데...^^

무탄트 2004-08-06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니...
그 말이 왜 이리도 가슴에 사무치는지... 순간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정말 멋진 어머님이시네요. 그리고...
장차 저도 제 아이들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서야 할 것인가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

호랑녀 2004-08-07 0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ㅠㅠ 무탄트님...
서기는커녕, 어젠 애들을 데리고 학교도서실에 가서, 에어컨 앞으로 가서 잠시 퍼질러 잤지요. 그래서 감기 들었습니다. 아, 난 왜 이럴까...

책읽는나무 2004-08-07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님이 주신 피아노교육에 관한 책을 읽고서....호랑녀님의 언니분도 훌륭하시지만 그뒤에 지켜주고 응원해주신 님의 어머님이 참 훌륭한 분이시라고 생각했어요!!
돋보기를 끼실지언정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시는 어머님의 모습이 참 아름다워보이십니다..^^
칠순을 훨씬 넘어 오래오래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셨으면 좋겠어요...^^

호랑녀님은 아이가 셋입니까??
아~~ 세명!!.....두렵고도 가장 부러운 아이들의 숫자에요!!..ㅡ.ㅡ;;
자식욕심은 많은데...낳는것도 두렵고 키우는것도 두렵군요...
이쁜아가들 잘 키워주세요...^^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