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의 기이한 옛이야기
완서 지음, 박희병 옮김 / 돌베개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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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용궁부연록, 남염부주지. 나열하면 다소 낯설어 보여도 사실 우리의 고막이 꽉 붙들고 있는, 우리에게는 너무나 친숙한 금오신화의 개별 이름이다. 시대가 변해 바다가 육지가 되는 세상에도, 시대가 변해 사람이 날아다니는 세상에도 여전히 우리의 정서를 자극하는. 만화로 봐도, 영화로 봐도, 책으로 봐도 너무나 친숙한 금오신화. 한국인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 주는, 우리나라만의 골계 원천이다.

이런 금오신화가 베트남에도 보란 듯이 있다는 사실에는 나의 눈이 한없이 휘둥그레진다. 물론, 우리나라 금오신화도 중국의 그것에 영향을 받아 창작되었다고는 하지만, 베트남에도 우리의 금오신화 같은 것이 있다는 점은 선뜻 떠올리기가 힘이 든다. 우리나라의 그것이 너무 돋보여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도 아쉬운 지금, 저기 베트남에서도 베트남 판 금오신화가 있다는 사실은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기 싫어 아망을 부려 서인지도 모르겠다.

비록 금오신화가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나, 그것은 우리의 정서에 더욱 알맞게 각색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기에 우리에겐 더욱 소중하고 더욱 우리의 정서에 부합하는 게다. 그렇다면 베트남의 그것도 마찬가지일터이기에, 우리의 궁금증은 더욱 무럭무럭 발하게 된다. 베트남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는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전기만록>. 이것이 완서가 지었다는 베트남 판 금오신화로, 그 역시 옛날의 신비한 이야기를, 소박한 이야기를 앙증맞게 배에 품고있는, 우리나라의 금오신화와 그 맥을 같이 하는 작품이다. 그리고 여기, 앙증맞게 품고 있던 이야기 꾸러미를 조심스레 한국으로 옮겨 놓은 것이 바로 <베트남의 기이한 옛 이야기>이다.

우리가 베트남에 대해, 지리는 물론 환경, 역사, 인물까지 상당히 낯설다고는 하지만, 이 <베트남의 기이한 옛 이야기>는 전혀 낯설지 않은, 오히려 너무나 친숙한 우리의 글을, 우리의 정서를 보는 듯하다. 지명과 인물만이 조금 다를 뿐. 권선징악적 구조하며, 허무맹랑하지만 왠지 인정해주고 싶은, 그 소박한 소설의 상황구조는 우리나라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우리가 중국의 고전문학을 보며 거의 이질감을 느끼지 않듯, 베트남의 <전기만록>도 전혀 이질감이 느껴지지를 않는다. 베트남의 기이한 옛 이야기, 사실은 우리의 이야기라 해도 큰 손색이 없는 터였다.

하지만 베트남의 기이한 옛 이야기에 실린 작품들은 그 하나 하나가 좀 짧다는, 뭔가 좀 모자라다는 느낌이 들었다. 분량만으로써가 아닌, 독자가 몰입해 사다리를 타고 내려갈 수 있는 그 깊이가 우리나라의 그것과 비교했을 때는 좀 떨어진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런 생각은 곧 흥미에 전염이 된다. 우리나라처럼 전해져 내려오며 조금씩 각색되고, 좀 더 흥미로워 지고, 그래서 한 부분 한 부분이 더욱 흥미롭고 궁금함을 자아내는 상황은 별반 연출되지를 않았다. 다분히 교훈적인 내용인 것은 매한가지지만 깊이와 흥미에서는 그 차이가 컸다.

비록 우리나라의 금오신화와 비교했을 때는 그 흥미가 떨어지지만, 베트남이라는, 문학적으로는 다소 생소한 나라의 작품이 이렇게 우리의 정서와 들어맞는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경험이긴 했다. 저기 저 멀리 살던 그 때 그 사람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소박한 즐거움을 즐길 줄 알았구나. 저기 저 멀리 살던 그 때 그 사람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소망을 가지고 살고 있었구나는 애절한 느낌.

그 시대 고전을 읽으면 그 시대 사람들의 마음가짐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소박하던 민중들의 애환과 기쁨을 읽어내듯 여기 <베트남의 기이한 옛 이야기>에서도 베트남, 그 들만의 심중을 들여다 볼 수 있을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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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소설 속 역사 여행
신병주. 노대환 지음 / 돌베개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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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전, 심청전, 춘향전, 홍길동전. 이름만 들어도 우리의 머릿속에 망설임 없는 한편의 연극이 상영되는, 너무나 친숙한 우리만의 이야기, 우리의 고전이다. 그 시대 민중들에게 폭발적인 사랑을 받아온 고전들은, 시대가 흐르고 세대가 변해도, 아직도 나름의 빛을 발하며 우리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 주고 있다.

고전을 읽다보면 사실, 그 소설 속 상황이 실제 그 시대의 생활모습인양 착각하기 쉽다. 소설은 시대를 반영한다고 하지 않는가. 아무런 생각 없이 받아들이다 보면 그저 그대로, 주면 주는 데로 받아먹는 수동아가 되어 버릴터다. 하지만 능동적으로 탐구하면 사실이 아님을 알고, 아니라면 과연 이 소설이 창작되던 시기에 그 시대 상황은 어떠하였을 것인지 의문이 자연 생기기 마련이다.

이 의문은 소위 역사, 국사시간에 `외움`을 통해서 그나마 해소되었었다. 아니 외워버림으로써 차단되었다고 보는게 낫겠다. 허생전하면 실학자들의 정치적 입지와 상황, 홍길동전하면 서얼의 차별이 심하던 조선의 생활상 등이 바로바로 튀어나올 수 있게끔, 우리는 그런 의문들을, 탐구해온 것이 아니라 무작정 외워 왔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의문만이 가질 수 있는 지적 궁금증에 대해 강박관념을 가지게 되었고, 이제 고전 소설 속의 시대 상황에는 무관심의 행로를 걷게 되어버린 것이다.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 그렇게 외웠는데 또 그 시대를 살펴보자고? 지긋지긋해 보인다. 아니, 여기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은 기존의 고리타분한 이론중심이 아닌 독자의 흥미를 충분히 유발할 수 있게끔, 시대 상황을 반드시 작품과 연관시켜 소개시켜 놓는다. 가령, 심청전에서 등장하는 심봉사를 예시로 하여 그 시대 맹인들은 어떠한 삶을 누렸는가,

만약, 심청이가 인당수에 뛰어들어 소생하지 못하고 그대로 죽어버렸으면 어떠할 것인가 하는 등, 고전을 읽다보면 자연적으로 발생 할법한, 사소해 보이지만 생각할수록 궁금한 의문들을 담백하게 실어놓는다. 그동안 차단당한체 막혀만 왔던 의문들이 비로소 풀려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재미만을 위한 공소(空疎)적 의문만 제시하는건 아니다. 계축일기에 소개된 광해군은 정말 패륜아인가란 문제로 시대상황과 정치적 논리등의 미묘한 관계를 서술하거나, 옹고집전의 불교배척이 과연 옹고집만의 고집이였던가하는 물음들은 기존의 강압적 주입상황이 아닌, 자연적으로 독자의 관심을 끌게하는, 지적참여를 유도하는 수준있는 장치인거다. 이렇게 재미와 어우러진 지적유도는 고전소설과 그다지 친숙하지 않은 이들에게도 부담없이 대할 수 있는 기회로 다가온다.

자칫 지루의 일변도를 달릴뻔한 고전 살펴보기.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에서 그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놓았다. 이제 고전소설 속 역사적 모순점을 조목조목 찾는데에서 지적 갈망을 충족 시킬터다. 이제 고전소설 속 궁금증을 조목조목 찾는데에서 더없는 흥미를 느낄터다. 마구 쏟아지는 지적호기심의 화살들. 그 과녁을 이제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에 맞춰도 손색이 없을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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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오금학도
이외수 지음 / 동문선 / 199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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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이제껏 거침없이 흐르고 흘러왔다. 아무리 애원하며 발목을 잡아도, 울며불며 매달려 보아도, 시간은 그렇게 냉정히 흐르기만 했다. 그 냉정의 흐름속에 휩쓸려 있던 인간들은 그 속에서 우주의 진정한 섭리를 깨달은 것이 아니라 시간의 냉정함에 원망하는 법만 배워왔다. 자연을 고상히 여기며 더불어 살던 인간의 순수한 모습은 이제 더 이상 우리의 원망스런 눈에 비춰지지 않는, 멸족의 리스트에 올라버렸다. 썩어버린 세상. 서서히 구린내가 난다.

하지만 `세상 만물이 썩지 않는다면 창조의 숲이 어떻게 생겨 나겠는가?` <벽오금학도>의 한 인물이 했던 목가적 말처럼, 오히려 이 속에서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그런 웅크림의 시대인지도 모른다. 이제 새롭고 순수한 또 다른 세상의 맹아를 위해 지금 이 시대는 썩어 거름이 되어주고 있는, 새 싹을 위한 처절한 자기희생을 치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혼란스런 마음 속에서 진행되는 <벽오금학도>. 전원의 향토적 분위기 속에 우리 민족 고유의 신선사상을 절묘히 배합시켜 놓은 작품이다. 시골의 청취함에서 시나브로 묻어나오는 그윽한 배경의 향기는 신선사상의 신비함과 더불어 작품이 주는 이미지를 한층 격상시켜 준다. 그 절묘한 궁합으로 인해, 오히려 현 도시로의 배경전환은 심적 거부감을 일으킨다.

`붓 끝에 먹을 한 번 찍어 숨도 쉬지 않고 일필로 순식간에 피워내는 난이었다. 낙관을 찍고 나면 언제나 화선지에서 은은한 난초향기가 맡아져 왔다. 때로는 화선지 속에서 쏴아 하는 솔바람 소리도 들려왔다.` 우리 고유 민족의 내면과 그 이면을 나타내 주는 듯한, 시대를 거스르는 탈과학적 그 이미지. 진정 우리민족의 가슴에 와 닿는 은은한 묵향이 배겨나오는 박진스런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우리의 심적눈을 자극한 작가는 이제 주인공 `강은백`을 통해 더 이상 마음의 눈과 영적인 눈을 뜨지 못하는 현대인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오학동. 한 때는 이 세상 역시 오학동과 다름없었지만 이제는 차원의 벽에 의해 철저히 단절되어 버린 세상. 지금 이 세상이 못내 안타까운 작가의 조용한 절규가 들려온다. 이제는 동경의 대상이 되어버린 그 곳, 율도국처럼 이상적인 그 곳, 그 시절 그 곳에 대한 작가의 울부짖는 소망이 들려온다.

`그래. 짐작했던 대로야. 이쪽 세상은 막혀 있는 세상이야. 막혀 있기 때문에 그림속의 새는 움직일 수가 없어. 아무도 모르고 있을거야. 아무리 말해 주어도 나만 바보 취급을 하겠지.` 작가의 생각이 가득 뭉쳐 있는 이 문장은 이제 결코 가벼이 맘에 닿지를 않는다. 저쪽은 은유의 세상, 여기는 직유의 세상이라 불리는 만큼 처절히 찢겨져 있는 여기. 조야한 우리는 아직도 우리주변의 진정한 벽오금학도를 바라볼 눈을 갖지를 못한다.

이상 추구? 필요없다. 양심의 가치? 필요없다. 물질의 허우대에 온 정신을 빼앗겨 아망을 부리는 우리들, 그런 우리들을 쳐다보는 벽오금학도 인물들의 눈은 애처로워 보인다. 모든 것은 언제나 시작이 현대문명이었다. 그 해석도 마무리도 현대 문명이었다. 이제는 현대문명에서 벗어난 그 무언가를 찾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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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백 브라운 신부 전집 1
G. K. 체스터튼 지음, 홍희정 옮김 / 북하우스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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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처음으로 추리소설이란 분야의 문에 수줍게 노크를 하게 되었다. 그것도 추리소설의 고전으로 불리우는, 전세계 추리소설의 팬들에게 극찬을 받고 있다는 아주 거대한곳, 마천루의 정문에 노크를 하게 되었다. 추리소설하면 셜록 홈즈외에는 떠오르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나에게는 그 노크의 긴장감과 설레임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브라운신부`시리즈 중의 첫편인 <결백>.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장르에 대한 회의가 얼핏 들기 시작 했다. `추리소설의 진행이 원래 이런건가?` 그 즈음, 추리라고 하기에는 너무 밋밋한 진행과 고빗사위는 커녕 클라이막스 조차 없는 싱거운 결과 구성에 나는 당혹감을 일으키고 있었다. 분명 추리영화나 만화에서는 그렇지가 않았다.

추리의 묘미는 무엇일까? 그 요체는 바로 `독자참여`에 있다. 여기에는 누구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저 눈으로만 귀로만 주인공의 행적을 쫓아가는 것이 아닌 자기나름의 의미구성과 결과 예측, 바로 이것이 추리의 재미이자 진정한 묘미이다. 그만큼 추리란 장르는 독자참여가 없으면 껍데기 뿐인 것이다. 단팥빠진 찐빵, 소시지없는 핫도그. 이처럼 그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결코 뗄래야 뗄 수 없는 찐득한 사이다.

추리 = 독자참여. 그런게 추리다. 사건 하나하나의 실마리를 자기나름대로 찾아가며 그 논리적 개연성의 달콤함을 즐기는 하나의 오락. 하지만 <결백>에서는 그런 자기나름의 참여를 위한 오락의 문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그 문을 찾아보지만 오로지 들르는 것은 브라운 신부의 호통소리. `빨리 따라오시오!` 독자는 오직 브라운 신부가 걸어간 자취만을 투덜투덜 따라 가야만 했다.

`북치고 장구치고.` 브라운 신부를 한마디로 표현해보라고 하면 딱 제격인 말이다. 사건하나 `뻥` 터뜨려 놓는다. `이야. 이제 사건의 시작이다. 두근두근` 하지만 별다른 추리의 건덕지를 남겨놓지도 않은 상황에서 브라운 신부는 밑도끝도 없이 모두 해결해 버린다. `야~대단한 신부구나`가 아니다. `아, 이건 그런 것이 아닐까? 이 사람이 범인이 아닐까?`란 추리만의 진정한 참여는 할래야 할 시간이 없다.

발단, 전개, 그리고 결말. 중간의 무언가가 빠진듯한 허전한 공허감은 실로 막대해 직면한 이로 하여금 사지에 힘이 싹 빠지게 한다. 브라운 신부. 북치고도 장구 친다고 한게 칭찬인줄 아는지 꽹과리 마저 칠려는 모습에는 두 손 두 발 안 들 수가 없다.

태어나서 처음 두드려 본 곳. 추리소설 <결백>. 신선한 추리라는 주위의 평가와는 별개로 초심자인 나에게는 낯설기만 했다. 오히려 초심자의 시선덕택으로 추리소설을 본듯한 느낌이 아니었다. 아마도 나는 아직은 두드리지 말아야 할 곳에 건방지게도 `쾅.쾅` 문을 두드린 것 같다.

역시 멋모르는 초심자에게는 정석의 길부터 밟는게 순리요 도리겠다. 정통추리의 면모를 제대로 익힌 뒤, 그 때서야 다시금 찾아 와 볼만한, 어쩌면 수준높은 곳이였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건방지게, 멋모르게 한 노크의 대가치고는 너무 쓰디쓴 소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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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
아멜리 노통브 지음, 전미연 옮김 / 문학세계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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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멜리 노통다운 소설이었다. 그녀의 소설이 가지는 그 특이한 골계미는 추리, 판타지, 무협소설들의 흥미와는 또 다른 그 무언가가 확실히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녀의 소설속에서 이렇게 허우적 대며 빠져나오지 못할 이유가 없다. 나를 흡입하는 마력. 허우적, 허우적.

일단, 그녀가 가지는 골계는 읽는 이로 하여금 당황스럽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이게 뭐지?` 벌써 얼굴 붉어지는 독자들. 그 당황의 회오리에 직면한 독자는 정신없이 어지러워 진다. 평정심을 찾으려 부단히 애쓰지만 A급 `노통 회오리`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 회오리 속에 빙글뱅글 휩쓸리다 보면 어느새 그 회오리의 일부가 되어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제 더이상 그녀의 소설은 현기증을 유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 소설의 현기증은 즐겁다. 신바람 노통 호~

<이토록 아름다운 세살>. 여기에는 한 아이가 나온다. 그런데 그 아이는 자기가 신이라 굳게 믿고 있다. 맞는지는 몰라도 믿게끔 만드는 구석이 여기저기 있긴하다. 아니, 진짜 신인가? 헷갈린다. 그런 아이의 성장과정을 3살까지, 그것도 탁월한 내적심리진행으로 이루어 진다.

더불어 절대 심각하지도 않다. 오히려 기막힌 재미와 웃음속의 요람에 들어가 누은 듯, 어린 신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이 어찌나 재밌던지. 하지만 그 속에서도 인간존재와 우주본질의 근본철학적 물음표를 가지게 한다. 역시 이 요람은 예사 요람이 아니였던가 보다.

<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은 여타 아멜리 노통의 소설과 같이 분량은 짧고 전개 구성은 단순했다. 하지만 그 아쉬움의 얇음 속에는 절대 과포장되지 않은 알맹이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그 토실토실한 알맹이들을 하나하나 까먹는 재미. 이제는 아쉽지 않으려나. 그것이 이 책에 푹 빠진 요인이었고 또한 노통의 소설이 가지는 커다란 흥미의 자기장이다. 적은 노력으로 큰 만족. 이제는 너무 식상한 경제논리가 되버렸나.

지금의 난 노통이란 안경을 쓰고 말았나 보다. 그 안경을 통해 보는 세상은 이제 편협적이다. 이미 내 눈의 일부가 되어 버린 안경의 폐해는 이제 알아 차릴 수가 없다. 덕분에 난 노통의 매력을 비판할 객관력은 상실하였는지도 모른다.

`넌 노통 골수 팬이야. 말할 자격 없어!` 하지만 이런 상황속에서도 난 노통의 소설을 권한다. 물론 <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도 포함해서. 이제 당당히 외친다. 읽어보고 느껴보라. 이 짧음 속에 스며있는 아쉬움의 마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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