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기 1 - 난세에 피는 꽃
박영규 지음 / 들녘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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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다`라는 말로써 시작해도 될런지. 어린시절부터 중학교3학년때까지 읽은 책은 단 하나 삼국지 뿐이었다. 과장이 전혀 포함되지 않은 정말 삼국지만 열심히 읽었다. 5권짜리 삼국지도 읽고 18권짜리 삼국지도 그냥 틈만 나면 읽었다. 특히 남자분들이 어릴때 이런 경험들이 많으시리라 보는데 나역시 이런 경험의 소유자중 한사람으로 삼국지 매니아였다고 자처하고 싶다.

굳이 `삼국지`의 내용은 언급할필요없이 유명하다. 이 `후삼국기`또한 삼국지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그 무대가 중국에서 한국으로 `옮겨왔고`(정확히 말하자면 후삼국시대) 그 시기또한 `옮겨졌다` 뿐이다. 그 외에 전장에서 장수들의 긴박한 상황이라든지 서로 물고물리는 전략들, 권모술수 등등은 여타 삼국지의 입맛에 길들여진 사람의 눈을 역시나 즐겁게 해 줄것이다.

얼마전(아니, 오래전) 왕건이라는 TV역사 드라마가 종영되었다.그 드라마에서 나온던 인물들도 역시 이 책에 나오고 사건또한 유사부분이 있었지만 Tv속의 상황과는 이 책은 많은 다른면이 있었다. 등장인물부터 하여 드라마를 보고 다시 책을 보면 그 스토리가 빤히 들여다 보이는것과는 달리 이 책은 예측하기는 힘들었다. 오히려 Tv속의 인물들의 역할을 담당했던 배우들의 얼굴이 떠올라 책의 재미를 조금 반감시키지 않았나 한다.

소설 삼국지가 큰 역사적 교훈이라기보다는 남자다운 패기라던지, 용감무쌍한 남자의 그런면을 많이 나타내 준다. 쉽게말해 `흥미`를 제외하면 그렇게 크게 얻을것은 별로 없다는 것이다.(아.물론 그 흥미란것이 너무 크기에 제외한다는 가정자체는 어불성설인듯 하다.) 이 후삼국기 역시 크게 다를바는 없었다. 작가의 취지는 우리나라 역시 삼국지의 배경과 비슷한 상황이 있었고 그런 상황을 재연함으로써 다시한번 우리역사를 되짚어 보자는 큰 뜻을 내 비치었는데 이 책을 연속 2번읽으면 그런 점은 느끼지를 못했다. 그냥 솔직히 우리나라판, 즉 한국판 삼국지를 새로 각색했다는 표현이 어울릴듯하다.그저 무난히 잠자기 전에 조금씩 읽으며 보아도 좋을듯한 책이다. 삼국지를 즐겨 읽었던 분이라면 결코 이 5권이라는 양이 많다고 느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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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고로야, 고마워
오타니 준코 지음, 오타니 에이지 사진, 구혜영 옮김 / 오늘의책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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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고로.다이고로. 참 주변에서 귀로도 자주 듣고 눈으로도 자주보아 왔던 글이다. 하지만 나는 여태껏 그 `실체`는 보지를 못하고 있었다. 오늘에서야 그 `실체`를 접하고는 그 환희를 감출수가 없다. 아니 오히려 이제서야 만나게 된 나의 게으름에 유감을 감출 수가 없다.

`다이고로` 그는 딸부잣집 가족의 막내둥이 아들. 기형원숭이다. 그 가족의 아버지가 어미 원숭이에게 버려져 가사상태에 있는 기형원숭이를 데리고 와서 무럭무럭 건강히 잘자라거라는 마음에 `다이고로`라고 붙여 주었다. 가족의 보살핌 덕에 아니면 그 이름의 덕을 본것일까. `다이고로`는 정말이지 처음에 가사상태에 있었다는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건강히 자라났다. 비록 팔다리가 거의 없는 상태인데도 말이다. `다이고로`의 의지가 너무나 엿보이는 장면이다.

`다이고로`는 인간의 세상속에 파묻혀 있다보니 자기가 원숭이란 자각은 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가 장애가 있다는데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정말 열심히 그것을 극복하고자 노력한다. 다만, 주위의 시커먼 마음을 가진 인간만이 `얘들아, 그 원숭이는 더러우니까 가까이 가지마라~` 라고 할뿐이다. 그 얼마나 크나큰 편견인가. 오직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어린아이들만이 그 원숭이를 정말 살아있는 하나의 `실체`로만 여겨줄뿐, 이미 속세의 온갖 찌든 때를 다 맛본 이들은 `다이고로`가 원숭이로 보이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더러운 어떤 `것`으로 본다. 생물이 아닌 그냥 그저그런 물건으로 대한다는것이다. 이 시대 사람들의 `다이고로`에 대한 시선과 편견은 그대로 인간 장애자분들께도 전이 되지는 않는가 한다. 부정할수 없는 현실이다.

물론 이 책은 장애자들에 대한 시선을 바로잡자.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책은 아니다. 오히려 동물인 `다이고로`조차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부정하지 않으며 열심히 극복하고자 하는데 `자칭`모든 `생물들의 왕` 인간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부정하지는 말지어다라는 메세지를 전달한것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 시대를 한번 훑어보지 않을수 없었던것 뿐이다.

`다이고로`가 죽는 장면에서는 눈물까지 핑 돌았다. 특히 어머니가 한 말이 가슴을 저리게 했다. `아마 다이고로가 계속 살아 있었다면 내 몸이 견뎌내지를 못했을거다. 어쩌면 다이고로가 나 대신 죽은건지도 모른다.` 난 웬지 이 말이 너무 추상적인 사람의 상상속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너무 공감이 갔다. 꼭 그런것만 같았다. 그동안 잘 보살펴 주었던 보은이라고나 할까. `다이고로`가 죽기전에 어머니를 계속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는데서 난 그것을 굳게 믿을수 밖에 없었다. 역시 동물이라고 인간보다 못한면은 없다. 조금 머리가 나쁠뿐 자기가족을 위하고 희생하는것은 인간보다 더 빛나면 빛났지 결코 덜하지는 않다.

`다이고로` 이 원숭이 한마리가 이 세상에 잠시 다녀간 동안. 이 세상에 남겨진 인간들에게는 많은 의미를 남겨 주었다. 비록 그 전까지는 생명의 귀중함을 모르고, 자기나날을 무의미하게 보냈다 하더라도 이제는 뭔가를 얻을것이다., 또 시커먼 마음의 공터를 지녔다 하더라도 이 조그마한 한마리의 원숭이로 인해 조그마한 등불은 되었을것이다. `실제`로의 `다이고로`는 키워보지는 못하더라도 마음속에만은 모두들 `다이고로`를 한마리씩 키워보는것은 어떠하실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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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 재습격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창해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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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제법 수가 될만큼 하루키의 단편집을 접해왔지만 이제까지 보아왔던것중에 유일하게 단 한권. 이 책만이 조금은 `아니다`싶었다. 그렇다고 내용이 엉망이거나 하는것은 아니지만 단지 책제목과도 연관이 있는 `빵가게 재습격`에 약간의 실망감을 받아서가 아닐까...

원래 빵가게 습격이라고 해서 단편이 따로 있었는데 그때의 그 주인공이 후일 다시 빵가게를 습격하게 된다.(빵가게라고 하기도 약간은 뭐하지만...) 그후 사정은 처음의 `빵가게 습격`사건이랑 비슷하다. 하지만 난 그이후의 `비슷함`이란곳에서 실망감을 느꼈던 것이다. 변화가 전혀 없어 보였다. 주는 메세지 또한 전혀 다를게 없었고 다만 시대, 장소만이 조금 변화했을 뿐이었다.

책제목으로도 나온만큼 나 역시 기대를 하고 봤지만 괜히 기대를 해서일까? 실망이 그 기대를 압도해 버렸다. 그냥 그런 느낌이었다. 꼭 `로보캅`을 보고 주인공은 그대로, 시대만 변화해서 큰 스토리의 차이는 없이 `로보캅2`가 나오듯 그냥 그런 재탕이었다.

사람들이란게 잘한것은 칭찬하며 부각시키길 꺼려하면서 `흠`은 왜그리도 잘 찾아서 질책을 하는지.. 이 단편집에 나온 다른 단편은 `당연히` 하루키의 세상을 잘 보여 준다.(빵가게재습격도 마찬가지이지만.) 그 만큼 뛰어난것이지만 한가지의 실망감이 그 책에대한 인식을 흐려놓는다. 나도 별반 다름없는 `인간`이긴 한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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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똥벌레, 헛간을 태우다, 그 밖의 단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창해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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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소설을 읽고나면 또는 읽으면서 난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한다. 그럴수 밖에 없기도 하다. 하루키 책은 생각을 많이 해 보지 않으면 주제를 찾지 못해 헤매이거나 하루키만이 주는 상실감에만 젖을 뿐이기에. 하지만 이런저런 많은 하루키의 소설,특히 단편들을 읽고나면 생각은 많되 그것을 글로 옮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일단 전반적인 하루키의 메세지는 단편집들이 서로서로 `대동소이` 하기때문에 같은 말만 반복할수는 없다. 그렇다고 각각의 소설을 읽으면서 같은 생각만을 하는것도 아니니 이또한 미묘한 하루키세계의 묘한 매력이 아닌가 한다.

이 책 개똥벌레외 다수의 단편들. 특히 개똥벌레는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의 출발점이며 그 개똥벌레 자신또한 상실의 시대와는 별개로 아주 뛰어난 단편으로 평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개똥벌레란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반딧불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구판이 개똥벌레라고 적혀있다고 한다.) 나도 상실의 시대와 이 책을 다 읽었지만 역시 상실의 시대는 그 나름대로 그리고 개똥벌레 그자체만의 나름도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마지막부분에서 개똥벌레가 날아가는 모습이란..아마 상실의 시대에서 마지막대사에서 주는 `짜릿한`정체성의 물음처럼 여기서는 그 정체성의 방황을 나타내는게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보기도 한다.(또는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모습이나.. 정말 여러가지의 생각을 가질수 있기에 간단한 `텍스트`로는 진정한 표현은 어려울것같다.물론 나의 실력부재이기도 하지만.)

이 책의 제목에서 알수 있듯이 이 책은 개똥벌레 외에도 다수의 단편이 실려 있다. `헛간을 태우다`에서는 어딘가 알수없는 미묘한존재로부터의 무의식속의 현실세계 접근이라는 나름의 생각을 가지며 읽으면서의 재미보다 읽고나서의 재미가 `쏠쏠`했던 작품이다. 그 외에도 춤추는 난쟁이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던 것같다.(마치 다른 작품중의 `도서관에서 있었던 기이한 이야기`처럼 미묘한 인상을 준다.) 특히 주인공의 여자와의 `키스신`(?)에서의 묘사란 상상을 할경우 아주 비위에 거슬릴 정도였다. 욱~ 지금생각해도 그때의 묘사가 머릿속의 공연장에서 펼쳐지려 한다.

그리고 `장님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는 `렉싱턴의 유령`이란 단편집에서 약간의 수정을 가한 `장님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의 원본격인데 수정을 가한 작품에서나 원본이나 별반 차이는 없었다.(하지만 수정을 가한부분이 좀더 매끄러워 보이긴 했다.) 그리고 나머지 한편은 그다지 나의 마음에 와닿지 못했던 까닭에 머릿속의 방을 얻지못하고 떠돌아다니는 신세라 찾기가 힘들다.

혹시 `상실의 시대`는 읽었으나 이 원본격인 `개똥벌레`는 보지 못한분이 계시는지요? 혹시 계시다면 얼른 보시기 바랍니다.자~ 우리도 한번 개똥벌레처럼 밤하늘을 날아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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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국민은 없다 - 촘스키의 신자유주의 비판
노암 촘스키 지음, 강주헌 옮김 / 모색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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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3대요소라는것을 우리는 어려서부터 배워왔다. `토지` `주권` 그리고 `국민` 이것은 우리 뇌리속에 부정할수 없는 불변의 진리로써 여겨져 왔었다.하지만 이미 그런 불변의 진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조금씩 갈라지고 있었다.토지가 없으면 당연히 국가는 존재할수 없는 것이고 주권역시 마찬가지다. 주권이 없다면 식민지라고도 할수 있으니. 하지만 이 `국민`이라는 개념에 `물`이 새고 있다. 우리가 모르게 조금씩 조금씩 하지만 의도된 물이 새고 있는것이다.

노암 촘스키의 `그들에게 국민은 없다`에서는 그 국민이라는 의미를 상당히 좁은 의미로 정의해준다. 바로 힘있고 돈있는 소수 엘리트 권력층이란것이다. 사회를 조금만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 본다면 이 `소수`에 의해 그리고 `소수`를 위해 나라경제라는 바퀴가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는 있을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소위 국민의 대표라는 자들에게도 자명한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것에 큰 문제가 있다. 실로 안타까운 현실이며 나란 존재가 무기력하게 느껴지는 현실이다.

이 국가의 3대요소개념의 파기는 흔히 말하는 강대국이 앞장서서 저질러 왔다. 강대국이란 개념이 들어가면 반드시 따라오듯 미국이 아주 장하게 해냈다. 교묘한 `신자유주의` `자유시장경제체제`를 울부짖으며 미국내의 `소수`에 타협했다. 이 시대의 세계의 경찰이라고 불려지는(솔직히 이런 표현은 역겹기 짝이 없다.) 나라는 실상이 경찰이 아니라 사기꾼이였던것이다. 앞으로는 엄한 얼굴로 질서를 지키자! 민주주의를 옹호하자! 라고 외치지만 뒤로는 키득거리며 테러를 조장하고 온갖 법의 울타리를 당연하단듯이 넘나들고 있다. 오죽하면 911 테러도 혹시 미국이 조장한것은 아니냐?라는 의심섞인 말들도 나오질 않겠는가.

우리는 현재 `보이지않는 힘`에 의해 식민지를 겪고 있다. 다만 이것을 언론이라는 장막으로 인해 못느끼고 있을뿐이다. `노암 촘스키`는 우리에게 그 장막의 일부분을 살짝 걷어 올려 보였다. 이제는 우리차례다. 그 장막을 걷어올릴게 아니라 확실히 불태워 제대로된 국민의 유리창으로 만들어야 할것이다. 현재 세계의 국민들은 이제 그 `장막`의 존재를 알아 차리고 여기저기 불을 짚이고 있다. 그리고 MAI 의 발진연기또한 커다란 불씨라고 볼수 있다. 이제 그 불씨를 살려야 할때가 온것이다. 저기 어둠속에서 물을 들고 달려오는 그 `소수`를 이기기 위해.`우리가 더 나은 사회를 향한 변화의 가능성이 없다고 체념한다면, 더 나은 사회로의 변화는 없을 것이다. 결국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또한 당신의 몫이기도 하다.`라는 촘스키의 당부를 우리는 잊지 말지어다.

-우리나라 국민들역시 농락당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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