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두모형의 교육관 - 한국의 전통교육
정재걸 지음 / 한국교육신문사(Still) / 2001년 2월
평점 :
절판


글쓴이 자신이 머리말에서 서구 “근대적 교육관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우리의 전통교육에서 찾아야 한다”고 밝힌 바처럼, 이 책의 앞부분은 주로 서구교육의 주된 교육관을 ‘주물모형’과 ‘도토리모형’으로 나누어 설명ㆍ비판하고, 자신의 입장인 ‘만두모형’의 교육관을 설명하는데 할애한다. 이에 책의 앞부분을 읽어가며 ‘만두모형의 교육관’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그것이 서구교육과 어떻게 다른지를 나름대로 파악하면 될 것이고, 책의 2부 격인 후반부에서 소개하는 개화기교육, 황민화교육, 미군정기교육, 새교육운동, 60년대 교원노조운동, 발전교육론과 새마을 교육, 국민교육헌장, 80년 7.30교육조치 등은 “교양”의 차원에서라도 한번쯤 읽어두면 좋을 듯싶다. 변변한 한국현대교육사 책 한권 없는 현실에서, 지금의 교육 현실이 어떤 근현대사적 배경에서 나온 것인지를 몇 가지 ‘사건’들을 중심으로 조금이나마(다이제스트판으로라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계기로, 각 시대별 교육의 구체적인 특성들과 교육운동들에 대한 인식으로 좀더 깊숙이 들어가 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서울대를 중심으로 한 연구자들에 의해 [韓國敎育史庫 연구논문] 시리즈물이 나오고 있긴 하지만, 우리의 근현대교육사에 대한 연구물들은 왠지 90년대초까지의 열기에서 멈춰버린 느낌이다.

그렇다면, 글쓴이가 말하는 “만두모형의 교육관”은 무엇이며, 그것은 서구 교육학에서 주로 이야기되는 “주물모형”과 “도토리모형”과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 교육학에 대한 선행지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들에게 주물모형과 도토리모형은 그리 낯선 개념은 아닐 것이다. 교육의 개념은 “외부로부터의 형성”(forming from without)과 “내부로부터의 계발”(development from within)의 의미 모두를 포함하고 있는데, 주로 전자를 강조하는 것을 “주물모형”으로, 후자를 강조하는 것을 “도토리모형”으로 보면 될 것이다. 이런 두 입장은 서구 교육학에서 주로 “전통주의적traditional 입장”(교사/교과중심교육으로 이해되는)과 “진보주의적progressive 입장”(아동/경험중심교육으로 이해되는)으로 대립해 온 것으로, 여전히 진행 중인 논쟁이기도하다.

사실, 피터즈나 듀이 등은 자신의 입장에서 양자를 통합하려 시도한 바 있으나, 여전히 피터즈는 전통주의자로, 듀이는 진보주의자라는 양극단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김정환선생님 역시 여러 글과 책들에서 세 가지 교육관을 언급하는데, 전자의 관점은 “만들다”의 교육관에서, 후자의 관점은 “기르다”의 교육관에서 주로 설명되는 속성들이다. 그는 두 교육관 모두 인간교육의 방법이 될 수 없다고, 그 한계를 지적한 하면서, 독일의 슈프랑어와 볼노 등의 논의에 힘입어 “일깨우다(覺醒)”라는 교육관을 이야기한 바 있다. 글쓴이가 우리의 전통교육을 근거로 삼아 “만두모형”이란 대안적인 교육관을 끄집어 낸 것 역시 위와 유사한 차원으로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두모형의 교육관은 “학습자의 마음 안에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진리가 들어있다는 교육관”으로, 그 비유는 “마음은 본성을 본체로 삼으니, 마음은 본성을 떡이나 만두의 알갱이처럼 가지고 있다”라는 주자의 언급에서 따온 것이다. 곧, “우리 마음은 만두와 같이 그 안에 온갖 잡다한 이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교육이란 외부의 지식을 교사로부터 전달받는 것(주물모형)도 아니고, 학습자 자신의 잠재능력을 최대한 신장시키는 것(도토리모형)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만두모형에 있어서 교육이란 다름 아닌 “학습자가 자신의 마음을 탐구하여 우주 삼라만상의 진리를 깨닫는 것을 말한다.”

문제는 이러한 개념이 “도토리모형”과 혼동될 수 있다는 점인데, 글쓴이는 다음의 세 측면에서 그것의 구분이 가능하다고 본다. 첫째, 도토리 모형이 점진적이고 누적이라면, 만두모형은 돌발적이고 순간적이라는 점, 둘째 도토리 모형의 교육목표가 자아실현(self realization)에 있다면, 만두모형은 자기극복(自己克服) 혹은 극기(克己)에 있다는 점, 셋째 “만두모형”의 교사는 교육내용을 소유한 주물모형의 교사도 아니요, 조력자인 도토리모형의 교사도 아니라는 점이다. 곧, 교사관에 있어서의 근본적인 차이이다. 이를 테면, 전통교육에서 교육의 목표는 자신이 스승(“경전에 밝고 행실을 닦아 가히 남의 스승이 될만한 자”)이 되는 것인데, 스승의 현존 바로 그 자체가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고 또 그것이 달성 가능한 것을 분명히 보여주기 때문에, 스승(곧, 교사)에 대한 존경이 만두모형의 교육관에서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된다는 것이다. 곧 본보기로서의 교사에 대한 존중으로, 학생들은 끊임없이 교사의 눈치를 보며 어떻게 하면 교사를 기쁘게 할 수 있을지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아울러, 스승은 방과 할의 방법으로 “제자가 깨달음의 문턱에서 더 이상 진전하지 못하고 있을 때 몽둥이로 때리거나, 제자의 귀에 큰 소리를 질러 그 순간 깨달음의 문턱을 넘도록 하는” 역할을 수행하는데, 이는 제자의 학습단계를 정확히 파악함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상의 만두모형의 교육관에 입각한 배움이 존재하는 학교는 일종의 “도량(道場)”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내 마음 안에 존재하는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진리를 스승을 따라 배움으로써 깨닫거나, 스승의 방과 할의 방법에 힘입어 문턱을 넘어서는 것으로 깨달음을 얻는 것이 우리 전통교육의 모습이라는 것에 공감이 가면서도, 이것이 혹 개인의 현실도피를 위한 “탈”역사화로 이어지지는 않을까라는 생각도해본다.

참고로, 이 책에 실린 글들은 글쓴이의 홈페이지에서도 접할 수 있다. (http://vision.taegu-e.ac.kr/~jg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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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인의 이사회 참여에 벌벌 떨며, 학교폐쇄 운운하는 사립학교들의 행태를 보며 답답한 마음에 글 하나를 옮겨둔다. 2001년의 현실발언이 지금의 현실발언이라는 것이 씁쓸할 따름이다. "이사회 구조의 변화와 권한의 분산없이 교육개혁은 공염불이 될 것이다."



‘민립대학’에서 ‘개인왕국’으로 전락한 비리사학의 역사적 뿌리를 다시 본다

사립학교가 중·고등학교의 40%, 대학교육의 85%를 담당하는 우리 현실에서 한번도 사립학교를 다니지 않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그런데 사립학교들이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분규가 발생할 정도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런 심각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사립학교법 개정이 도마 위에 올랐다. 헌법재판소 출범 이래 가장 많은 위헌심판이 청구된 법률의 하나이며, 1963년 제정된 이후 무려 38차례나 개정을 거듭한 이 법안의 개정을 둘러싸고 심각한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설립자, 정말 설립자인가
사립학교법의 기나긴 개악의 역사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1990년의 개악과 1999년의 개악이다. 사립대학 이사장들의 모임인 한국대학법인협의회의 총력 로비 결과 국회에서 민자당 단독으로 날치기 통과된 1990년의 개악은 대학 설립자 직계 존·비속의 총학장 임명 허용, 총장 권한이던 교수 및 직원 임면권의 이사회 이관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1999년의 개악은 비리사학에 파견되는 임시이사 임기를 2년으로 제한하면서 비리관련자의 재단복귀 길을 터주었다. 그 직접적인 결과가 바로 올 상반기의 상문고 사태와 덕성여대의 학원분규이다.
현재 사립학교의 학교 운영비를 보면 중·고등학교의 경우는 재단 부담금이 2%에 불과하고, 사립대학은 6%에 머물고 있다. 사립학교의 운영비가 실질적으로 등록금이나 시민들의 혈세에 의해 조달되고 있다는 사실은 사립학교들이 개인의 소유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 교육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최근의 사립학교법 개정을 둘러싼 논쟁에서 잘 드러나듯이 사학재단 관계자들과 수구세력은 언필칭 시장경제의 원리에 따른 소유권의 절대성을 들먹인다. 그들은 사립학교법 개정안이 사학재단의 경영권을 빼앗는 전체주의적 발상으로 ‘홍위병에 의한 문화혁명’ 또는 ‘인민위원회의 사학접수’라는 터무니없는 언사를 써가며 반발하고 있다.
설립자가 학교를 세우는 순간 학교는 설립자의 재산이라기보다 공익적인 학교법인의 재산이 된다. 민법 규정에 따르더라도 사학 이사진은 사학의 소유자가 아니라 관리자일 뿐이다. 백보를 양보해서 사학재단을 사유재산으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특히 분규가 발생한 사학의 경우 현재 소유권을 주장하거나 설립자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거액의 사유재산을 출연하여 학교를 설립한 사람들인가 하는 점이다. 대부분의 분규사학에서 원설립자문제, 소유권문제를 둘러싼 심각한 의혹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분규가 발생한 모든 사학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상당수의 분규사학에서 우리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숭고한 뜻을 갖고 출발하여 공공의 재산으로 출발한 사립학교가 개인의 사유물로 전락하여 온갖 부정과 비리의 온상이 되었다는 점이다.



총장님, 한 바퀴 더 돕시다!- 조선대
지역의 교육발전을 위해 뜻있는 인사들의 모금으로 설립되었다가 개인의 소유물로 전락하여 온갖 사학비리의 온상이 되었던 학교로는, 지금은 정상화된 조선대학교를 들 수 있다. 조선대학교가 1947년 9월 미군정청으로부터 학교설립 인가를 받을 때의 설립주체는 조선대학교 설립동지회였다. 동지회에는 머슴에서 지주에 이르기까지 약 7만2천여명의 회원들이 망라돼 있었다. 1988년 <한겨레신문>이 창간될 당시 4천여만명의 국민 중에서 모집한 주주가 6만1천여명이었음을 상기할 때, 전국인구가 1600만명이던 1947년에 호남을 중심으로 7만2천여명이 성금을 내어 도민대학으로 조선대학교를 건립하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은 해방되자 호남에 민립대학을 세우자는 취지에서 작게는 나무 한짐, 쌀 한말, 콩 한말 등에서부터 많게는 수만원의 현금이나 수천평의 토지를 기부하여 학교설립에 필요한 재원과 토지를 마련하였다.


이렇게 해방 이후 민립대학으로 설립된 조선대학교는 박철웅 일가의 사유물로 전락했다. 조선대학교의 설립 당시 지역 원로들이 젊은 사람들이 일선에 나서야 한다고 하여 전라남도 운수과장으로 있던 박철웅이 설립동지회 회장을 맡았다. 그는 학교설립 이후 자신이 학장, 총장에 취임한 이래 자신의 측근으로 이사회를 구성하고, 자신에 비판적인 인사들을 설립동지회 간부와 학교 이사진에서 배제하면서 전횡을 일삼았다. 자유당 국회의원이 된 박철웅은 독재권력의 비호 아래 조선대학교를 자신의 왕국으로 바꾸어갔다. 박철웅은 1960년대 중반부터는 아예 학교의 공식행사에서 학교연혁을 소개할 때 설립동지회에 관한 사항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설립자이며 총장이신 박철웅 선생의 혈루로써 설립되고 운영되어온” 조선대학교라고 강조했다. 이런 식으로 조선대학교의 역사를 심각하게 왜곡해온 박철웅은 그동안 학교에 보관돼온 설립동지회에 관한 자료를 소각하여 자료의 인멸을 꾀했다.
이후 박철웅의 행각은 그야말로 온갖 사학비리의 종합선물세트라고 할 만했다. 부정입학, 교수 해임, 교수 및 학생들에 대한 폭언과 폭행, 공금 횡령 등에서부터 급기야 자신의 처남을 용공조작해 간첩으로 모는 데 이르기까지 박철웅의 개인왕국으로 전락한 조선대학교에서 벌어진 비리의 목록은 끝이 없다. 박철웅 왕국 조선대학교의 역사에서, 아니 크고 작은 개인왕국 천지인 한국의 사립학교 역사에서 최대의 희극이라 하기에는 너무 서글프고, 그렇다고 최대의 비극이라 하기에는 참으로 기막힌 일은 교수들의 아침조회 및 집단구보사건이었다.
1986년 전국의 대학가가 교수들의 시국선언으로 들끓고 있을 때였다. 박철웅은 조선대 교수들의 시국선언을 방지하려고 매일 아침 7시에 전체 교수 및 교직원을 운동장으로 출근시켜 출석을 부르고 노교수, 여교수 할 것 없이 운동장을 두 바퀴씩 구보하게 한 다음 총장님께 올리는 충성서약을 하게 하고 30여분간 훈시를 했다. 일제강점기 도쿄도 학무국 관리였다는 박철웅의 훈화 한 구절. “시국이 혼란스러울수록 나서는 놈만 손해야. 일제 때 독립운동한다고 나대던 놈들 보라고. 이 박 총장처럼 잘된 놈 있어?” 운동장 한켠에는 지각한 교수들이 벌받듯 서 있는데, 어디선가 들려오는 아부 교수의 한마디. “총장님, 한 바퀴 더 돕시다!”



학교쪽의 용공유인물 살포 - 상지대


조선대학교를 사유화한 박철웅은 그래도 학교 설립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상지대학교 김문기의 사례는 학교의 설립과 정말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인물이 우연한 기회에 학교 임시이사진에 포함되었다가 학교를 가로채어 개인왕국을 건설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상지대학교도 원래는 조선대학교와 마찬가지로 지역의 뜻있는 인사들이 고향에 인재를 양성할 고등교육기관이 없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 재산을 출연하여 건립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원주지역에서 원홍묵을 중심으로 한 지역인사들이 대학설립 기성회를 조직하여 1955년 6월10일 관서대의숙을 설립했다. 이들은 1962년 재단법인 청암학원을 설립하고 1963년에는 4년제 정규야간대학으로 원주대학을 세웠다. 그러나 청암학원의 자금난으로 원주대학의 경영이 어려워지자 문교부는 1972년 김문기 등을 관선이사로 파견하였다. 김문기는 1973년 12월 청암학원의 3대 이사장에 취임하고 이듬해 1월 이사회의 결정을 통해 학교법인의 명칭을 청암학원에서 상지학원으로 변경했다. 김문기가 청암학원 이사장으로 선출된 이후 취한 첫 번째 조치는 청암학원이 유지·경영하던 원주대학을 폐교하고 교직원을 대부분 해고한 뒤 상지대학을 설립한 것이다. 1970년대 이후 폐교된 4년제 대학은 오직 원주대학뿐이라는 점에서 이 조치의 예외적인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김문기는 1981년에는 상지학원의 정관을 변경하여 자신을 설립자로 기록했다.
1980년 교육여건 개선을 요구하는 학생들을 지지한 전조영 교수를 사상범으로 몰아 법정에 서게 던 김문기는 1986년, 강사채용에 1천만원을 요구한 사건으로 학생들의 시위가 이어지자 이번에는 학생들을 용공으로 조작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해 10월14일 밤 상지대 본관 앞에는 “김일성 수령님”, “가자, 북의 낙원으로!” 등등의 내용을 담은 매우 불온한 유인물이 살포되었다. 그런데 이 유인물은 학생들이 뿌린 것이 아니라 김문기의 사위인 기획실장의 주도 아래 교무처 직원들이 살포한 것이다. 학교비리의 진상규명에 대한 학생들의 요구가 거세지자 재단쪽이 공권력을 끌어들여 학생들을 탄압하기 위해 사건을 조작한 것이다. 김문기 일가의 족벌경영 과정으로 인해 상지대학교는 도민대학으로 출발한 원래의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김문기는 이후 민자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권력과 밀착되었으나, 1993년 김영삼 정권 출범 이후 단행된 사정개혁 당시 사학비리와 반사회적 범죄로 구속되었다. 그러나 1994년 8월 광복절 특사로 풀려난 김문기는 학원으로의 복귀를 꾀하고 있다.



쇠사슬에 묶인 학원- 덕성여대
조선대와 상지대에 이어 ‘사학비리의 종합선물세트’라는 불명예를 계승한 대학은 덕성여대이다. 원래 덕성여대는 독립운동가이고 여성운동가인 차미리사 여사가 건립하였으나, 차미리사 여사가 세상을 떠날 때 학교를 후배인 송금선에게 위임했다. 그런데 송금선은 덕성학원을 사유물로 취급하여 자신의 아들인 박원국에게 물려주었다. 박원국 지배하에 덕성여대는 가장 악질적으로 교수재임용제도를 악용하여 재단에 비판적인 교수들을 해직시켜왔다. 1991년 성낙돈 교수 재임용 탈락에 이어 1997년 한상권 교수의 재임용 탈락, 2001년 남동신 교수 등 5명의 재임용 탈락 등이 꼬리를 물고 발생한 것이다. 특히 박원국은 한상권 교수의 재임용 탈락 이후 전개된 학내 분규와 관련하여 교육부의 감사에 의해 그동안의 비리 146건이 적발돼 이사장 승인이 취소되었으나 2001년 초 승인취소 과정에서의 절차상의 하자를 이유로 대법원의 승인취소처분 취소 판결을 받아 내 이사장으로 복귀했다. 박원국의 복귀로 덕성여대 민주화운동은 큰 타격을 입었고, 재단에 밉보인 비판적 교수 5명이 해직되는 사태로 이어진 것이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남동신 교수가 덕성여대의 원설립자인 차미리사 여사의 초상화 봉정식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총장의 경고를 받았고, 이 문제가 해임의 중요한 사유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사립학교를 탈취한 자들이 학교 내의 역사 바로세우기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박원국에 의해 해직당한 한상권 교수나 남동신 교수는 각각 한국학계에서 권위있는 월봉저작상과 한국사상사학회의 ‘올해의 논문상’을 수상한 빼어난 학자들이다. 학교를 발전시키려면 삼고초려를 해서라도 초빙해와야 할 우수한 학자들을 거리로 내모는 것이 오늘의 비리사학의 현실이다. 박원국의 덕성여대는 학내 분규가 계속되고 학생들이 농성 과정에서 책걸상을 모아 바리케이드를 만들자 아예 책걸상을 움직이지 못하게 용접을 하고 쇠사슬로 묶어버리기까지 했다.



규명되어야 할 학교인수 과정
현재 학내 분규를 앓고 있는 학교들의 경우 현재의 학교 경영진이 학교를 인수하게 된 과정이 의혹에 싸여 있는 곳이 이 밖에도 많이 있다. 1954년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된 계명대는 문제가 특히 심각하다. 1996년 이후에만도 신일희 현 총장은 본인이 고발한 것과 고소당한 것을 합해 모두 23건의 재판을 치렀다. 현 총장의 아버지로 설립자가 아니면서도 총장직을 아들에게 물려준 괴력을 발휘한 신태식 전 계명대 학장 역시 학원사유화 과정에서 계명대학의 설립자인 경북노회를 상대로 여러 차례의 재판을 치렀다. 현 총장을 비판하는 교수들은 신씨 일가가 미국 장로교 선교부와 경북노회가 설립한 계명대, 계성고, 신명여고 등 8개 학교를 설립자로부터 다 빼앗아 37년 이상을 한 집안이 독점운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신일희는 2000년 1월 대법원으로부터 학원을 자기 일가의 사유물화하고 있다는 판결을 받았으며, 2001년 3월에는 횡령 등으로 유죄가 인정돼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학교를 사유물화하려는 신일희에 대해 1996년부터 학내에서 총장퇴진운동이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총장과 재단은 한철순 교수 등 10여명의 교수들을 해직하였다.



경희대의 경우 심각한 학내 분규를 겪지는 않았으나 조영식 일가의 학교인수 과정과 관련하여 끊임없이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경희대의 전신은 독립운동의 요람이었던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6형제 중 유일하게 살아 돌아온 성재 이시영 선생(초대 부통령)이 세운 신흥대학으로, 학원의 이름도 성재학원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혼란과 이승만 독재권력의 이시영 선생에 대한 견제 과정에서 신흥대학은 불투명한 과정을 거쳐 조영식에게 넘어갔다. 조영식은 단지 학교의 연혁을 숨기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항일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한 신흥이라는 이름이 “너무 속되고 대중적이어서 길거리에서 볼 수 있는 상호로나 쓰이는 이름이기 때문에, 천한 느낌마저 들어 심오한 학리를 연구하는 최고학부의 이름으로서는 부적당하다”라면서 경희대학교로 개명했다.
인하대학교는 원래 대한제국 시기 인천항을 출발하여 하와이로 이민을 간 재미동포들이 돈을 모아 1950년대에 인천에 건립한 학교이다. 이 학교 설립자는 하와이에 깊은 연고를 갖고 있던 이승만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박정희는 이 학교를 자신의 베트남 파병정책에 적극 협조한 한진그룹의 조중훈에게 불하했다. 이후 인하대 총장에는 한진그룹과 깊은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교통부 고위관료 출신들이 많이 임명되었다. 현재 노건일 총장도 교통부 차관 출신으로 인하대 총장이 되었는데, 2000년 교수협의회의 중간평가에서 낙제점을 받았다. 그 이후 인하대는 교수협의회 의장인 김영규 교수를 이사장과 총장의 명예를 훼손하고 노동운동에 개입하여 교수로서의 품위를 손상했다는 이유로 해직했다.
이 밖에 포항 시민의 대학으로 출발했으나 신동아그룹의 후원을 받는 기독교인들의 대학이 되어 지역사회와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는 한동대도 원래의 건학이념이 변질된 경우로 법정분쟁중이다. 사립고등학교 비리의 대명사인 상문고등학교도 원래 황희 정승에 버금가는 명재상으로 이름이 높은 명종 때 영의정 상진(尙震)의 후손인 목천 상씨 문중이 세운 학교였으나, 상춘식 일가가 학교를 사유물화하여 법정분쟁을 겪었고 상춘식 일가는 문중에서 영구제명되었다.

이처럼 한국의 대표적인 분규사학들은 현 경영진의 ‘소유권’ 획득 과정에서부터 심각한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흥미있는 것은 이런 식으로 학교를 자기 것으로 만든 사람들일수록 자신들의 업적을 과장하고 학교의 ‘소유권’에 더 집착한다는 것이다. 박철웅이 건재하던 시절 조선대학교에서 발행한 보고서의 한 구절을 보자. “설립자님의 부인이신 정애리시 전 이사장님께서는 의과대학에서 해부학의 교재인 인골을 구하기가 극히 어려울 때에 서울시립 행려병사자 장의사로부터 연락을 받고 서울시 망우리 공동묘지에 직접 가셔서 6·25 때 묻힌 주인없는 묘를 서울특별시 불도저로 밀어서 길을 낼 때에, 그 불도저 앞에서 뼈를 우선 치마에 주워 담아서 푸대에 옮겨 가지고 오신 후 교실에서 표본을 만들게 하셨으며….” 가히 ‘엽기적인 그녀’보다 더 엽기적으로 학교발전을 위해 노력해왔다는 것이다.
이사 두세명이 나쁜 마음을 먹으면 학교의 설립자를 바꿔치고, 재단의 ‘소유권’마저 가로채는 판에 횡령이나 공금유용쯤은 식은죽 먹기다. 감옥갈 각오하고 서류를 빼앗아보지 않는 한 들여다볼 길이 없는 것이 사학재단의 운영이다. <한겨레신문>이 만들어질 때보다 훨씬 어려운 시기에 더 많은 사람들이 돈을 내어 설립한 조선대학교가 너무 손쉽게 박씨 일가의 개인왕국으로 전락한 사실을 상기해보자. 기업이야 주주총회가 최후의 보루일 수 있으나 사학재단에는 그런 것도 없다. 족벌사학의 부패와 비리는 고스란히 우리 아이들의 피해로 돌아온다. 한창 배움에 힘써야 할 학생들, 연구에 매진해야 할 교수들이 땡볕에서 비리재단에 맞서 농성해야 하는 현실. 이사회 구조의 변화와 권한의 분산없이 교육개혁은 공염불이 될 것이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한겨레21, 2001.08.22(수) 제3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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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오며 들었던 '사립학교' 관련 글이 생각나 옮겨둔다.



예전에 인도여행을 하고 온 분에게 어느 ‘명상마을’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쁜 머리 탓에 그 이름은 잊었지만 내용은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입구에서 들어감에 따라 함께 모여 운동을 하거나 춤을 추기도 하는 곳, 함께 식사하는 곳, 함께 공부하는 곳, 그리고 함께 명상하는 곳 등이 차례로 이어진다고 한다. 그런데 거기는 원래는 작은 명상센터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입구에 있는 건물이 그곳인데, 설립자는 자신의 돈을 털어 명상의 집을 짓고 사람들이 마음대로 이용하게 했으며, 자신은 매일 건물을 청소하며 살았다고 한다. 아무 ‘이념’도 강요하지 않았고, 누구든 쉽게 이용할 수 있었기에 많은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고, 그래서 그곳을 다녀간 많은 사람들이 다시 와서 땅을 사고 건물을 지어주어 그 명상센터는 결국 그 지역 일대를 포괄하는 명상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 모든 과정을 시작한 애초의 설립자는 입구에 있는 작은 방에 살면서 화장실청소를 도맡아 하고 허드렛일을 하며 산다고 한다. 하나의 명상센터가 커다란 명상마을이 된 것은 아마도 이런 설립자의 삶과 행동 때문이었을 게다.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어두고 자신의 생각과 상관없이 누구든 편하게 지내게 하며, 가장 허드렛일을 하며 일상을 사는 것. 내가 하긴 힘들어도 누군가 해주었으면 하는 일 아니던가! 그게 사람들의 마음을 열게 하고, 돈을 풀어 건물을 짓게 한 원동력이었을 게다.

훌륭한 교육이란 이런 것 아닐까? 모두에게 마음을 열고 스스로 下心을 갖고 몸으로 행하기에, 하라고 하지 않지만 지나가거나 머물다 간 모든 사람이 무언가를 배우게 하고 결국 그들 또한 돈을 풀어 그런 일을 하게 하는 것. 이렇듯, 훌륭한 교육이란 교사의 입에서 나가는 말로 무식한 아랫것들을 일깨우는 계몽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행하고 살아가는 방식 자체로 다른 이들을 촉발하여 무언가 새로운 것을 꿈꾸거나 행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우리는 최근 이와 전혀 상반되는 분들이 우리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육사업을 벌이고 있음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돈을 풀어 학교를 세우지만, 그 뒤로는 정부와 학생들의 돈으로 학교를 운영하면서 자신이 믿는 신앙을 강요하고 교사들을 자기 맘대로 휘저으며 돈을 벌기 위해 나쁘다는 짓을 별다른 부끄럼 없이 하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그걸 제한하려는 조치들에 대해서는 자신들의 돈을 써가며 이룬 ‘사유재산’을 정부가 앞장서 침해한다고 하며 교육의 자율성을 위협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을 말이다.

비리관련자의 복귀제한을 기껏 “직업선택권의 제한”이라고 비난하고, 자기 처자식이나 친척을 요직에 앉히는 걸 “사학의 자율성”이라고 주장하며, 학생은커녕 학부모나 교사가 학교운영에 대해 참여하는 것을 “사회주의”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있으면, 이들에게 교육이나 학교란 대체 무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학교는 그저 자기의 ‘사유재산’이고, 교육이란 자신이 믿는 ‘이념’을 학생들에게 주입하는 것이며, 교육의 자율성은 운영자의 자율성을 뜻한다고 하는 발상, 나는 학교를 ‘가진 자’고 교육은 내가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니, 학교에서 무엇을 하든, 거기서 무엇을 가져가든, 혹은 학생들에게 무엇을 주든 내 맘대로 하겠다는 주장은 대담하다 못해 뻔뻔스럽다. 운영비의 98%를 학생과 국민의 주머니에서 가져다 쓰면서 어쩜 저럴 수 있지 싶다. 저런 사람들에게서라도 배울 게 있을까? 아니 저런 사람들에게 배워야 할까?

그래서 최근에 그들이 모여 시위를 하며 법안이 개정되면 자신들의 학교 문을 닫겠다고 했다는 소식이 너무 반갑다. 그래, 차라리 문을 닫아라! 교육은 백년대계라는데, 저런 사람들에게 배우느니 차라리 안배우는 게 더 낫다. 그들에게 줄 예산으로 새로 학교를 짓고, 문 닫은 그들의 학교를 사서 아이들의 ‘놀이터’로 만들자. 학교 복도를 돌면서 자기의 재산권에 뿌듯해 하는 사람이 아니라, 남들과 함께 살고 남들을 위해 사는 걸 몸으로 보이는 사람이 학생들을 가르치게 하자. 그러고 몇 년 지나면 한국의 학교가 싫어 이민 갔던 사람들이 돌아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진경/ 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원, 씨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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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과 교육은 일제가 1920년대의 교육을 소위 '독서교육'이라고 비판하고 이러한 독서교육이 헛된 사상의 전파와 과격한 발언의 확산으로 이어진다고 보아 조선인민 우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강력하게 추진하였으며, 그들은 이를 '교육실제화정책'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직업과의 도입에 의해 보통학교에서는 매주 2~3시간씩 학생들이 풀베기, 가축 돌보기, 실습지 청소에 동원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공식적인 시간이고 실제로는 이보다 초과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방과 후에나 방학중에도 직업과 교육이라는 이름하에 학생들은 노역에 동원하였다."  정재걸, [만두모형의 교육관]을 읽다가.


여기에서 말하는 직업과 교육은 "노작(勞作)교육"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 바, 우리의 경우 노작교육이 1930년대 조선총독부의 근로주의 교육정책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악용되었던 사실은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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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다고지 - 30주년 기념판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15
파울루 프레이리 지음, 남경태 옮김 / 그린비 / 200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의 원제목인 [억압받고 있는 자들의 교육(학)(Pedagogy of the Oppressed)]이 말해주듯, “우리가 어떻게 억압의 상황을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답변으로, 그의 교육론을 읽을 필요가 있다. “억압자는 그 권력을 피억압자나 자신을 해방시키는 힘으로 만들지 못”하며, “오직 피억압자의 약함으로부터 비롯된 권력만이 양측을 자유롭게 만들 수 있다”는 말과 마찬가지로, 억압하는 자들의 교육(학)(이른바, ‘은행저금식 교육’)은 억압체제의 존속을 위한 수단으로만 복무할 뿐 결코 억압받고 있는 사람들의 해방을 위한 교육(학)이 아니다.




“억압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민중은 먼저 억압의 원인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변혁의 행동을 통해 새로운 상황을 창조하고 더 완전한 인간성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 이에 교육(학)은 “억압과 억압의 원인들을 피억압자가 성찰할 대상으로 만들고”- 프레이리에게 “대화란 인식론적 관계를 특징”으로 하는 것으로, 그러한 “앎의 과정에는 개인적 성격만이 아니라 사회적 성격”이 포함된다-, “이 성찰로부터 피억압자가 자신의 해방을 위한 투쟁에 참여해야 할 필연성이 도출될 것이며, 또한 그 투쟁 안에서 그 교육학은 새로이 다듬어 질 것이다.” 그렇게 다듬어 지는 교육(학)은 ‘문제제기식 교육(혹은 대화)’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프레이리의 문제제기식 교육에 비추면, 해방 과정을 이끄는 대부분의 혁명 지도부가 “억압자가 사용하는 ‘교육’모델을 모방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는 것, 곧 “해방과정에서 교육학적 행동을 부정하고 선전을 이용해서 피억압자들을 설득하려고 한 것”은 중요한 문제다. “피억압자의 신념은 혁명 지도부가 가져다주는 선물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의식화에서 비롯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면, “자신의 삶이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한-필자)투쟁은 시작”되는데, “선전, 책략, 조작은- 이는 모두 지배를 위한 무기들이다- 인간성 회복의 도구가 될 수 없다.” 유일한 “인간화 교육의 방법은 교사(이 경우에 혁명 지도자)가 학생(이 경우에 피억압자)을 조작할 수 있는 도구로 여기는 게 아니라 학생 자신의 의식을 표현하게 만드는 데 있다.” “피억압자의 정치적 행동은 순수한 의미에서 교육적 행동, 곧 피억압자와 함께 하는 행동”인 “공동지향적인 교육”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참된 교육은  A가  B를 위해, 또는  A가  B에 관해 행하는 것이 아니라  A와  B가 함께 행하는 것이다.” “행위자는 단순한 행위자가 아니라 상호의사소통 속의 행위자”, “혁명 지도부는 민중 없이, 또는 민중을 위해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과 더불어 사고하는 것” 등 달리 표현되는 말들이긴 하지만, 모두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가운데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억압적 세계에 묶고 있는 주술과 신화의 탯줄’을 끊고,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모순들을 인식하는 법을 배우고, 현실의 억압적 요소들에 맞서 행위 할 수 있게 된다. 곧, “현실이 제 모습을 드러내면 인간은 침잠 상태에서 탈출하여, 현실에 개입할 수 있게 된다. 이렇듯 현실 개입-역사적 자각-은 탈출구로부터 한 단계 전진한 것이며, 상황에 대한 의식화의 결과이다. 의식화는 모든 탈출의 특징인 자각의 자세를 심화시킨다.”




정리하면, “억압자가 억압하기 위해 억압적 행동이론을 필요로 한다면, 피억압자가 자유를 얻기 위해서도 역시 행동이론이 필요하다”는 말에서 ‘행동이론’을 교육이론으로 바꿔 이해한다면, 이 책은 피억압자의 해방을 위한 행동이론으로서의 교육이론이라 할 수 있다. “일단 의사소통 없이 ‘성명’만으로 혁명을 수행한 다음, 혁명이 성공하면 그 뒤에 철저한 교육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생각은 프레이리에게 옳지 않은 생각이다. 곧, 그에게는 “대화의 관계가 따로 있고, 혁명의 단계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혁명 활동의 본질이 대화”이다. 그리고 이는 “권력을 획득한 뒤 시작할 새로운 교육”이 아니며, 일종의 “문화혁명을 준비하는 문화활동”으로서의 교육이다. 이러한 사회변화의 측면을 놓치고 그의 교육론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발간사를 쓴 마세두의 표현처럼 “사이비 비판적 교육자”들에 의해 “그의 혁명적 정치학을 대화적 방법이라는 공허한 내용으로 제한해 버리는” 잘못을 우리 역시 범하게 될 것이다.




몇 가지 생각나는 바를 덧붙이면, 우리 역시 프레이리 등의 비판적 교육학자들이 교직과정에서 잘 다뤄지지 않고, 다뤄진다해도 ‘대화식 방법’과 같은 제한된 범위로만 이해되는 까닭은 30주년 기념판의 발간사를 쓴 마세두가 표현한 바처럼, “교육학교들이 대개 프레이리가 평생을 통해 반대했던 이데올로기와 관습을 대변하는 실증주의적이고 매니지먼트한 모델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아울러, 지배 권력이 언제나 학생들의 의식화에 반대하는 것 역시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란 점이다. 학생들의 “타자(억압자)를 위한 존재”에서 “자신을 위한 존재”로의 변화는 곧, “억압자의 이익을 침해하는 것이고, 그들이 신봉하는 은행 저금식 교육관은 학생의 의식화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의식화와 관련해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의식화’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화를 한다는 명목으로 ‘은행 저금식 교육’의 형태를 되풀이하는 일일 것이다. 끝으로, 이 책의 올바른 독해나 프레이리에 대한 이해의 길잡이가 필요하다면, 앞의 마세두의 발간사가 도움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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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큰 틀에서 그의 교육론을 정리했다. 피억압자 내부에 깊숙이 자리 잡은 이중성의 문제(파농과 멤미, 헤겔의 주인-노예관계 등과 관련시켜), 후설, 사르트르 등과 관련된 그의 인식론과 존재론에 대한 해석, 마오쩌둥, 레닌, 게바라 등 다양한 혁명가들의 논의를 끌어들이는 그의 혁명론에 대한 좀더 자세한 분석과 적합성에 대한 검증이 뒤따라야겠지만, 이는 그의 후속작업을 따라가며 차후의 과제로 남겨둔다. 그의 글에서 어려움을 느끼거나 단순한 교육학 책이라 생각하다 몇 장 넘기지 못하고 포기하는 것은, 우선 그가 왜 이 책을 저술했는가에 대한 배경이해가 생략됐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아울러, 자신이 피부로 느끼는 현 ‘억압’의 정도와 프레이리가 끌어들이는 인물들에 대한 선이해(혹은 관심)의 부족 역시 그 원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004.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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