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염된 언어 - 국어의 변두리를 담은 몇 개의 풍경화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199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여러 매체를 통해 드문드문 그의 글을 접하긴 했지만, 책을 산건 이번이 처음이다. ‘자유’에 대해 고민은 해보았을까 의심되는 이들이 어떤 광기를 내보이며 자유의 이름을 걸고 거리로 나선 요즘, 차분히 제정신가진 한국의 자유주의자의 글을 접하고 싶었나 보다. 그의 몇 가지 책들 중 하필 이것을 첫 번째 책으로 고른 건 순전히 “감염된 언어”란 제목 때문이었다. 고종석 개인과 그의 글에 대한 이야기(감염된 언어에 포함된 글들 역시)는 익히 여러 사람들이 한 바 있으니(이를 테면, “지성이란 그저 기억력의 축적일수도 있고 평범과 분리되는 통찰일 수도 있는데 고종석의 경우 전자는 압도적이고 후자는 상당하다”, 김규향, B급 좌파에서), 여기서 다시 책의 내용이나 그에 대한 평가를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고, 다만 요즘 ‘자유’를 엉뚱한 곳에 끌어들이고, 여전히 역사를 거꾸로 알고 있는 이들에게 이 책에 담긴 몇 대목만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들에겐 이러한 제대로 된 자유주의자의 목소리 역시 고종석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는 친북용공분자의 것으로 들릴지 모르겠다.

“내가 이해하는 자유주의자는 만인이 파시즘을 옹호하고, 만인이 볼셰비즘을 지지해도 이를 수락하지 않는 정신의 이름이다. 그 자유주의자는 비판을 통해서, 그리고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을 때는 폭력에 호소해서라도 전체주의를 분쇄할 각오가 돼 있는 사람이다. 그는 사상의 자유시장을 옹호하지만, 그 사상의 자유시장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사상에 대해서만은 너그러울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자유주의자는 때때로 반민주주의자다.”(이 말조차 곡해할까 두렵긴 하다)

“......그러나 설령 제5공화국의 경제정책이 “과감한 자유화”였다고 하더라도, 그 정권이 정치적 자유주의와 상극이었다는 점은 되풀이 강조돼야 한다. 시장에 대한 느슨한 통제와 정치영역에 대한 전체주의적 통제의 결합, 그것은 파시즘이 보여주는 가장 흔한 얼굴이다. 도대체 전두환은 누구인가”

“내게 전두환은 단지 집권과정에서 군기를 어지럽히고 민간인을 학살한 내란의 수괴일 뿐만 아니라, 80년대의 첫 여덟 해 동안 한국 사회를 동토로 만든 파시스트 두목이다. ‘파시스트 두목’이라는 말은 내가 전두환에 대한 나 자신의 정서를 되도록 억제하고 고를 수 있었던, 그나마 가치중립적인 말이다.”

“한국 자본주의를 ‘국가-재벌 지배연합’이라고 규정하는 것에 지나침이 있다고 하더라도, 박정희 이래 역대 정권의 시장 규제에 편승해 가장 커다란 이득을 챙긴 것이 재벌이라는 사실은 되풀이 강조되어야 한다.”

그리고, 여전히 “민족주의”의 외피에 갇혀있는 이들에게 한 마디 전하면,

“민족주의는, 그것이 강대국의 민족주의든 약소국의 민족주의든, 얼마나 자주 대외적 패권주의와 대내적 집단주의를 가져왔는가? 말하자면 개인으로서의 미국인, 개인으로서의 프랑스인, 개인으로서의 신생 독립국 시민들을 자유롭게 한 것은 자유주의적 민족주의가 아니라, 자유주의였다. 설령 그것이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였다고 할지라도 거기서 중요한 것은 ‘자유주의적’이지 민족주의가 아니다.”

그가 “감염된 언어”, 언어의 “개방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혹은 그가 견지하는 입장position)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전개한 학적인 고찰을 통해서도 가능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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