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다가온다. 한 달 정도 여름휴가를 내어 어딘가로 훌쩍 떠날 수 있는 형편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휴가를 쓸 수 있다는 것은 가슴이 설레는 일이다. 로또가 당첨되면 무엇을 할 것이냐는 질문에 가장 많은 순위를 차지한 것이 바로 여행 떠나기 이다.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일상에서의 탈출이며 동시에 짜릿한 휴식이므로 모두 그런 생활을 동경하게 되는 것일 터. 여행을 떠나려고 마음을 먹고 나면 어디를 어떤 식으로 다녀오는 것이 좋을까 고민을 하게 된다. 여행사의 상품을 뒤적여보기도 하고 내가 가고자 하는 곳에 먼저 다녀온 사람들을 수소문하여 정보를 얻어 내기도 한다. 사실, 여행을 즐긴다는 사람들 치고 여행사의 패키지 상품을 이용하는 사람은 드물다. 획일적인 프로그램에 따라서 남들이 다 돌아다니는 코스를 답습하다 보면 특별한 재미는 사라지고 없게 마련이다. 명소들을 훑어보고, 나도 여기에 다녀왔노라고 나중에 한 마디 할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로 국내에 알려진 일본 작가 다치바나 다카시는 최근 출간된 <사색기행>에서 ‘여행의 패턴화는 곧 여행의 자살’이라고 하며 ‘존재의 근본을 만드는 것은 책이 아니라 여행’이라고 했다. 패턴화 되지 않은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남들이 닦아 놓은 길이 아닌, 자신이 낸 길을 걸을 용기가 필요하다. 또한 낯선 이국땅에서 혼자 발걸음을 내딛고 적응해나갈 용기도 필요하다. 나는 이번 여름휴가를 맞이하여 파리 행 티켓을 발권했다. 프랑스에 가고 싶었던 건 한 1~2년 전부터였다. 파리에 가보고 싶어 프랑스에 가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프로방스에 가고 싶어서 프랑스에 가고 싶어졌던 것이다. 내가 프로방스에 가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우연히 그곳의 풍경을 담은 멋진 사진을 접하면서였고 여기에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은 소설가 K씨의 추천이었다. 어느 인터뷰 후 가진 술자리에서 그는 이색적인 제안을 했다. 뜻이 맞는 몇몇 사람들끼리 프로방스의 작은 시골집을 하나 사서 그곳을 별장으로 쓰자는 것이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직장인이 아닌 자유기고가 이거나 문학평론가, 대학교수였으니 이런 제안은 현실화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한 참 솔깃하여 이야기가 무르익던 즈음 소설가 K씨는 내가 평소 프로방스에 관심이 있었다고 하자 <나의 프로방스>라는 책을 권해주었다. 다음날 바로 인터넷 서점에서 이 책을 주문했고, 책을 손에 든 순간 나는 기필코 프로방스에 가야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었다. 시골집을 구입하여 별장 만들기 프로젝트에 참여하지는 못하였고 이후에 그들이 정말 실행에 옮겼는지는 확인 해보지 않았다. 그러나 한 달 뒤면 내가 직접 그 곳에 갈 수 있다는 사실에 혼례 날 받아놓은 새색시 마냥 가슴이 설레어 잠이 안 올 지경이다.
파리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한 친구는 프로방스에 가면 아마 실망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냥 평범한 시골마을보다는 조금 예쁜 정도일 텐데 그곳을 보러 프랑스까지 온다는 건 좀 무모하지 않겠느냐고. 물론 나는 파리도 여행일정에 넣기는 했다. 그러나 사실 파리보다는 프로방스가 주목적이다. 프로방스 역시 바캉스를 보내기 위한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이긴 하지만 파리를 찾는 관광객에 비할 바는 못 된다. 그 친구에게 내가 한 답은 다음과 같다. “에펠탑이나 세느 강변, 곳곳의 미술관, 벼룩시장, 노천카페 등은 이미 영화나 사진으로 마르고 닳도록 보았고 나는 그곳에 꼭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안 들어. 하지만 프로방스는 달라. 남들에겐 그저 조금 예쁜 시골마을이겠지만 나에게는 의미가 있어. 설사 직접 가보고 실망하게 된다한들 후회는 하지 않을 거야. 남들 다 가보는 명소를 내가 간다는 게 중요한건가? 난 내가 가보고 싶은 곳을 가고 싶어 여행을 가는 거야.” 그제야 친구가 미소를 보내온다. (메신저에서 이모티콘으로..)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바람이 분다, 떠나야겠다. (폴 발레리, ‘해변의 묘지’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