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흘러가는 속도를 느끼는 것이 점점 빨라지는 것을 보니
확실히 나이가 들어가는 모양이다.
어느새 11월의 한 가운데로 향하는 이 시간.
아침, 출근 준비를 하는데 전날부터 나던 고열이 채 내리지 않아 땀에 젖어 축축한 몸이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다. 임파선이 잔뜩 부어 돌아누워 잘수도 없었던 간밤의 불편했던 잠 때문에 몸은 더욱더 무겁다. 그러나, 회사를 안나갈수도 없는 일. 억지로 출근했다. 미니스커트에 부츠를 신고 검은색 빅백을 들고 나섰다. 아픈건 아픈거고 출근은 출근이다.
회사에 나가 오전 업무를 정신없이 보고, 점심 시간에 근처 이비인후과에 갔다. 진료를 잘한다는 병원을 찾아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대기 환자가 열세명이다. 맙소사, 그래서 점심을 먼저 먹고 다시 돌아오기로 하고 근처 식당을 둘러보니 도무지 먹을만한 곳이 없다. 할 수 없이 작고 허름한 어느 돈가스 가게에 들어갔다.
주인은 혼자 냄비에서 밥을 떠 먹다가 손님이 들어오자 부리나케 냄비를 치운다. 그래도 냄비안의 내용물이 다 보였다는 걸 주인은 알까? 물을 내주고 음식이 나오기까지 한겨레 신문을 펼쳐 읽으며 기다렸다. 그러다 아는 기자의 기사를 읽고 문자를 보내자 제목이 의도한 바와 너무도 다르게 나와 속상하다며 투정이다.
돈가스가 나와서 먹으려고 집어들어 보니 고기가 붉다. 안 익은 돼지고기를 먹자니 찜찜하여 뒤적거려 허연 부분이 제법 많은 조각을 집어들어 먹었다. 허, 그런데 이번에는 돈가스 튀김 옷에 주인 아저씨 머리카락으로 짐작되는 검고 짧은 머리카락이 쏙 박혀 있는게 아닌가.
이쯤되면, 다시 해달라고 하거나 박차고 나가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러기엔 나는 몸이 아팠고, 병원에 곧 돌아가야 했고 처방받을 약을 먹기 위해선 어디에서든 점심을 먹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머리카락을 뽑아내고 계속 먹었다. 돈가스는 정말 맛이 없었다. 맛이 없다는 말 그대로 순수하게 무미... 했다는 뜻이다.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아 신기할 지경이었다. 소스 통을 집어 들어 돈가스 조각 위에 뿌려서 먹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인 아저씨가 이렇게 말했다.
'돈가스를 참 맛있게 드시네요. 소스도 한 조각 한 조각 따로 뿌려서 드시고. 며칠전에도 어떤 손님이 오셔서 돈가스를 드셨는데 그렇게 드시더라구요. 역시 미식가는 달라요. 그 분이 돈가스를 드시고 나서는 저한테 어디서 돈가스 만드는 걸 배웠냐고 물으시더라구요. 맛있다고 칭찬해주셨어요.'
이쯤 되자 나는 이 주인 아저씨가 안쓰러워 견딜 수 없어졌다. 안그래도 점심 시간에 손님이 나 하나 뿐이었고(어쩌면 당연한 결과) 주인 혼자 먹던 밥이 미안하지만 거의 꿀꿀이 죽 수준이었던지라..결국, 나는 그저 동의한다는 듯한 미소만 어설프게 짓고 돈가스 몇 조각을 남긴채 일어났다.
병원에서 임파선이 부었고 코에 염증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고, 항생제를 포함한 약을 처방받아 약을 지어 회사로 돌아왔다. 외근 나갈 채비를 한 뒤 강남으로 이동, 미팅을 했다. 일이 생각보다 잘 해결되어 한결 가뿐해진 마음으로 회사에 돌아왔다.
회사에 돌아오니 카페테리어가 내일 모레 오픈한다며 분주하게 준비하고 있는게 아닌가. 이때를 놓칠세라 준비가 잘되어가느냐 어쩌냐 하며 참견을 하면서 시음회는 없는거냐고 속 뻔히 보이는 멘트를 날려 맛 좋은 커피를 내려 받아 마셨다.
그리고 바짝 집중하여 여섯시 무렵까지 일을 마쳐놓고, 홍대로 부리나케 이동했다. 오늘 조경란 작가의 신작 발표 낭독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조금 늦게 도착한 탓에 불편한 자리나마 간신히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아 두시간 가량 버텼다. 그 불편한 자리가 하나도 억울하지 않을 만큼 낭독회는 즐거웠다. 전작 <국자>를 선물로 받고 신작 <혀>를 할인받아 구매해 사인을 받아왔다.
저녁을 거른지라 동행과 함께 근처 고깃집에서 목살 소금 구이를 먹고 커피 한 잔 마시고는 집에 돌아왔다. 배고팠을 두희에게 옷도 못갈아입고 밥을 챙겨 먹이고 잠깐 놀아주고는 모 포탈 싸이트에 원고를 후다닥 작성해서 송고했다.
아, 내일도 홍대로군. 마녀파티에 초대받았다지. 이번엔 코엘료 신작 파티다.
임파선이 부었는데도 이렇게 지내는 걸 보면, 내가 왜 임파선이 부었는지 스스로 되묻지 않아도 되겠다. 그래, 나는 언제나 욕심이 참 많다. 그래도 약을 먹었으니 괜찮겠지?
임파선이 부은채로 나는 2007년 11월의 한가운데를 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