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READ 하이데거 ㅣ How To Read 시리즈
마크 A. 래톨 지음, 권순홍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하이데거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치 정권에 부역했을까. 이 책은 하이데거 철학 전반을 쉽고 간략히 소개하고 있는 정도에 불과하지만 나치 정권에 협력하게 된 사정에 대해 잠깐 나오기는 한다. 독일노동자당에 가입해서 활동할 당시 하이데거는 기독교 세계가 출현하기 위해 예수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듯이 "새로운 세계를 개현하기 위해 본질적인 희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또한 "나치즘이 독일을 현대주의에서 구출하고 새로운 실존의 가능성들을 활짝 열어주는 등 기존하는 세계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리라고 보았다"고. 그러니까 왜?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석연치 않은 설명이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강력한 신념 속에서 나치 정권에 적극적으로 부역했던 독일 지식인들의 그 정교했을(?) 내적 논리에 대해 분석해놓은 책을 한 번 찾아 읽어보고 싶다. 인간이, 특히나 명철한 사고력을 자랑하는 인간이 대체 어떻게 그토록 정교한 오류를 저지를 수 있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또 하나의 로마인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 지음, 한성례 옮김 / 부엔리브로 / 200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로마인 이야기>로 들어가기 위한 에피타이저. 책을 통해 로마 천년의 비결을 꼽아보면, 정치 조직 운영에 있어서의 합리성과 유연성, 점령지 정책에 있어서의 포용력과 개방성, 노블리스 오블리주 정신 등을 꼽을 수 있겠다. 그런데 개방성이란 것도 추진하는 쪽이 호방한 대인배 마인드여야 가능한 정책 기조가 아닌가, 비록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 번영의 비결을 정신적인 것에서 찾으려는 시도를 경계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로 로마인의 태도나 기질에 관해 생각해보게 된다. 공동체에 대한 헌신, 책임의식, 니체가 그토록 칭송한 귀족(주인)정신 등등.

예전에 조선의 역사를 유심히 들여다봤을 때도 결국 조선이라는 나라의 체제 유지 동력으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소위 선비정신 내지는 사대부 문화라고도 할 수 있는 어떤 정신적이고 철학적인 지점이었다. 일신의 안녕이나 개인의 영달보다 유교 이념이 중시하는 고결한 가치를 우선시 하는 마음. 그런 어떤 완고한 윤리준칙 속에서 빛나는 기개. 나라가 오래 가려면 기본적으로 그 나라의 정치 경제를 선도하는 상위 계층의 의식 수준이, 정신 상태가, 삶의 철학이 제대로 정립되어 있어야지만 가능할 것 같다.

그러나 그런건 당연하게도 어떻게 가르친다고 해서 습득하거나 강화되는 정신의 영역도 아니고. 가정 환경처럼 그저 어려서부터 무의식적으로 집안 공기와 함께 자연히 흡수되는 문화의 한 부분일 뿐. 국민성만 그런 것이 아니라 개인에 있어서도 정신의 스케일, 깊이, 품격, 기품 이런 것들은 학습할 수가 없다. 그저 우러나올 따름이지. 감탄하기는 쉬워도 모방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니체와 철학 ㅣ 들뢰즈의 창 1
질 들뢰즈 지음, 이경신 옮김 / 민음사 / 200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반응적인 힘들은 작용을 제한하고 분열시키고 지체시키며 방해한다. 반대로 적극적인 힘들은 창조가 분출되도록 만든다. 적극적 유형은 오로지 적극적 힘들만을 포함한 어떤 유형이 아니다. 적극적 유형은 적극적으로 영향 받고 적극적으로 복종하는 그런 반응적 힘들을 포함하는 관계임. 즉, 적극적인 유형은 힘들이 서로 경합하며 거침없이 분출하는 역동적이고 건강한 관계를 표현한다. 원한은 이런 것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원한은, 작용하는 힘에 대하여 “반응하지 않음”으로써, “영향 받길 중단함”으로써, “피함”으로써 반응적인 힘이 적극적인 힘을 이기는 방식이다. 원한은 하나의 질병이다. 이 질병은 어떻게 해서 적극적인 힘을 이기는가. 그 메커니즘은 어떻게 되는가.

 

2 프로이트의 <위상학적 가설>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흥분을 수용하는 체계가 있고 또 한편으로 흥분을 항구적인 흔적(=기억, 추억)으로 변화시키는 체계가 있다. 전자가 의식에, 후자가 무의식에 상응한다. 니체는 이를 반응적 장치의 두 체계로 본다. 후자 즉 반응적 무의식은 기억의 흔적에 의해서, 항구적인 자국에 의해서 정의된다. 반응적 무의식은 마치 생물이 되새김질을 하듯이 지워지지 않는 자국을 고착시키고 흔적에 집중한다. 전자 즉 반응적 의식은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영향 받고 학습하고 습득하고 훈련 받는, 말하자면 적극적인 반작용을 수행하는 영역이다. 반응적 의식이 가진 적극적인 능력은 바로 망각 능력이다. 망각의 능력이야말로 제동력이고 완화 장치이며 재생시키고 치료하는 조형적 힘이다. 망각 능력=건강한 생체대사능력.

 

망각능력이 쇠약해지면 즉 완화장치가 손상을 입게 되면 인간은 소화불량 환자와 비슷해진다. 이때 흔적들에 대한 대응은 무의식으로부터 의식의 수면 위로 올라와 의식에 침투한다. 흔적들에 대한 반작용은 이제 (의식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어떤 것이 됨과 동시에 흥분에 대한 반작용은 영향받길 중단한다. 반작용을 더 이상 행할 수 없는 적극적인 힘들은 실행의 물리적 조건을 잃고, 그것들의 활동을 실행할 조건을 더 이상 갖지 못하며, 그것들이 할 수 있는 것에서 분리된다. (아팠던 기억, 비난당했던 기억, 위험했던 기억, 맞았던 기억 등등 안 좋은 기억이 나면 순간 움츠러들면서 할 수 있는데도 더 이상 안 하게 됨. 반응하기를 단념하게 됨.) 흔적이 반응적 장치 속에서 흥분을 대신한다.

 

그런데 의식을 치고 올라오는 기억이라는 이러한 반응적 힘들은, 적극적 힘들의 그것보다 더 큰 하나의 힘을 형성하면서 승리하는 게 아니다. 적극적인 힘들을 전염시키고 감염시켜서 그것들의 힘을 빼앗고 무력화시키는 방식으로 승리한다. 여기서 우리는 원한의 정의를 재발견한다. 원한은 느껴질 수 있음과 동시에 영향 받길 중단하는 반작용이다. 원한은 질병이며 사실 모든 질병이 원한의 한 형태이다. 더 이상 적극적으로 에너지를 발산하지 못한 채 혼자 누워서 속으로 끙끙 앓으며 참고 삭이면서 이만 갈고 있는 상태.

 

3 흔적들의 기억에 의한 의식의 침투, 기억의 의식 자체로의 상승. 의식으로 침투하는 기억의 장소 이동. 반응적 힘들의 이동. 이것이 원한의 일차적 모습이자 원한의 위상학적 측면이다. 원한은 그 다음으로 유형학적 측면을 보인다. 장소를 이동한 다음 어떤 하나의 유형(원한의 인간이 보여주는 가치 전복, 힘들의 관계의 전복)을 형성하는 것이다. 유형의 주된 징후는 놀랄 만한 기억력이다. 어떤 것을 잊는 데 있어서의 그 무능력. 아무것도 잊을 수 없는 그 무능력.

 

건강한 인간에게 흥분이 될 만한 모든 자극들이 원한의 인간에게 다가오는 순간 신속하게 얼어붙는다. 의식의 경직, 경화. 반응 불가능. 오로지 흔적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에도 집중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 질적이고 유형적인 무능력에 대한 책임을 원한의 인간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자극적 대상에게로 전가시킨다. 대상이 주는 흥분에서 흔적들을 제거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을 보상받기 위해서 그는 대상을 증오하고 경멸하고 비난한다. 그래서 원한의 인간이 행하는 복수는 그것이 실현될 때조차 그 원리에 있어서 정신적이고 상상적이며 상징적이다.

 

4 원한의 인간은 악의가 아니라 적의를 갖는다. 적의=경멸하는 능력. (니체는 악의를 건강한 것으로 봄. 강자적인 것으로 봄. 거침없이 무구하고 천진하고 잔혹하고 공격적인, 그래서 건강한 악의.) 그는 친구도, 적도, 불행도, 불행의 원인도, 그 어떤 것도 찬미하거나 존중하지 않는다. 반면에 건강한 악의를 갖는 강자는 어떠한가. 그는 상대에 대하여 정면 대결에의 의지를 갖는다. 싸움의 상대로 기꺼이 대우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적에 대한 존중이다. 그러나 원한의 인간은 존중해야 할 모든 대상을 비난하고 비하할 뿐이다.

 

원한의 인간은 정면 대결할 힘도 의지도 없다. 무반응한 채 속으로만 상대를 비난하고 비하한다. 한마디로 원한의 인간은 평화로운 휴식의 상태에 잠긴다. 정신과 신체의 느슨한 마비상태 속에서 그는 오로지 사랑받기만을 원한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제공되고 쓰다듬어지고 잠재워지기를 원한다. 그는 앓아누운 병자다. 기획할 능력, 맞서 싸우고 대결할 능력, 적극적으로 반응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보살핌 받기만을 원한다. 그는 누워서 그저 이득을 취하려고만 한다. 만인에게 민주적으로 골고루 이득이 분배되기를. 그런 점에서 원한의 인간들은 도덕을 가지고 있다. 실리의 도덕. 원한의 인간의 관점에서는 모두에게 고루 이득이 되는 것이 바로 도덕이 된다.

 

5 강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좋다. (그런데 너는 누구냐 너는 나와는 좀 다르구나) 그러므로 너는 안 좋다. 노예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악하다. (난 그렇지 않은데) 그러므로 나는 선량하다. 강자는 자신의 좋음을 자각하기 위해 비교의 대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저 그 스스로 행동하고 긍정하고 즐김에 따라 자신에 대해 그렇게 말한다. 그는 사물들에게 명예를 부여하고 자신이 가치들을 창조함을 의식한다. 그는 자기 속에서 발견하는 모든 것을 높이 평가한다. 그의 도덕은 자기 자신에 대한 찬미, 충만의 감정, 넘치고자 하는 힘의 감정 속에 있다. 그는 헌신하고자 한다. 주고자 한다. 왜? 자기 스스로 힘이 넘치기 때문에. 강자가 ‘너는 안 좋다’고 말하는 것은 그저 부차적 결론일 따름이다.

 

강자와 달리 노예는 타인에 대한 부정을 필수적으로 전제해야만 겨우 자기 긍정에 이를 수 있다. 부정적인 것이 본질적인 것을 구성하고 긍정적인 것은 부정에 의해서만 현존한다. 노예는 외관상 긍정적인 결론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반작용과 부정의 전제들, 원한과 허무주의의 전제들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또 그 결론은 단지 긍정성의 ‘외관’만을 갖는다. 노예는 긍정의 외관을 만들기 위해서 두 부정을 필요로 한다. 너는 나쁘다(첫 번째 부정). 나는 너처럼 나쁘지 않다(두 번째 부정). 고로 나는 착하다. 이것이 노예의 기이한 삼단논법임. 노예의 기이한 가치 창조.

 

원한의 인간이 볼 때 악의가 있는 자는 자신의 행동에 제동을 걸지 않는 자이다. 자신의 행동이 제3자들에게 초래할 파괴적 결과들에 대해 고려하지 않는 자이다. 그렇다면 원한의 인간이 볼 때 선한 자는? 행동에 제동을 거는 자다. 한마디로 원한의 인간은 모든 행동을 행동하지 않는 자의 관점에, 그것의 결과들을 경험하는 관점에, 그뿐 아니라 그것들의 의도들을 탐색하는 신적인 제3자의 관점에 결부시킨다. 이 과정 속에서 좋음과 나쁨은 선과 악이라는 도덕 판단으로 대체된다.

 

6 원한의 오류추리는 힘과 행동이 분리 가능하다고 보는 허구에 근거한다. 가령, 번개란 곧 치는 것인데 ‘번개가 친다’고 표현한다. 번개가 안 칠 수도 있었는데 친다는 것인가? 의미의 실제 관계를 인과성의 가상의 관계로 대체하는 이러한 허구적 인식 속에서 사람들은 ‘행동하기 위해서보다 자신을 억제하기 위해서 더 많은 추상적인 힘이 필요하다’고까지 상상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약자의 자기합리화에 불과하다. 주체와 분리시키고 중립화시킨 힘을 약자는 더 나아가 도덕화시킨다. 좋음과 나쁨, 우월함과 저열함이라는 힘들의 성질의 차이를 선과 악이라는 도덕적 대립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7 원한의 일차적 단계 즉 위상학적 단계에서 아직 원한은 가공되지 않은 상태와 같다. 그렇다면 아직 가공되지 않은 이러한 상태를 질료로 하여 누가 원한의 형태를 만들어 내는가? 가치의 전복을 시도함으로써 원한의 구체적 형태를 창작해내는 위대한 예술가는 누구인가? 그는 바로 사제다. 유태교에 있어서의 주인인 그는 노예에게 반응적 삼단 논법에 대한 생각을 제공한다. 그 다음으로 그는 새로운 사랑을 고안해낸다. 불행한 자들, 가난하고 무능한 자들, 보잘 것 없는 자들에게 선량함과 아름다움의 가치를 부여한다.

 

사제는 반응적 힘들의 승리를 필요로 하고 또 그것을 조장해나가는데, 실상 그가 지닌 권력의지는 바로 허무주의다. 여기서 우리는 부정하는 힘인 허무주의가 반응적 힘들을 필요로 한다는 근본 명제를 발견하지만, 부정하는 힘인 허무주의는 반응적 힘들을 승리로 이끈다는 그것의 역 또한 발견한다. (15에서 이 이야기가 또 나옴)

 

8 사제가 창작해낸 허구에 의해 적극적인 힘이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분리되고 나면 이제 적극적 힘은 반응적으로 전락한다. 출구를 갖지 못한 힘이 내재화되는 것- 이것이 바로 가책의 기원이다. 한때 강자였던 자들은 반응적 인간들이 퍼붓는 비난을 내재화하면서 더 이상 자신을 향유하지 못하고 자신에게서 등 돌린 채 고통을 생산한다. 고통과 불행에 빠져 주인에서 노예로 전락하는 이러한 상태야말로 원한의 인간이 결정적으로 승리에 도달하는 지점이다. 가책은 고통의 동력이며 기폭제다. 이제 이 새로운 노예들은 자발적으로 끔찍한 고행을 단행하고 적극적으로 자기를 희생하는 마조히스트가 된다. 고통은 이제 구원의 수단이 되고, 이들은 고통에서 회복되기 위해(구원받기 위해) 더 많은 고통을 생산한다.

 

9 사람들은 고통에 대해 새로운 내적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한다. 고통은 원죄의 결과인 것이다. 가책의 첫 번째 측면이 앞서 보았듯 적극적 힘의 내재화로 인한 고통의 생산이라면, 두 번째 측면은 바로 고통의 내재화, 원죄의식의 느낌으로서의 가책이다.

 

현존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필연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삶의 근본 조건으로서의 고통을 우리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있다. 유사 이래 강자들에게 있어서 고통은 늘 단 하나의 의미만을 가지고 있었다. 즉 고통은 누군가에게 쾌락을 주는 것이다. 가령 전쟁은 신들의 시선을 즐겁게 하기 위한 놀이였다. 그들은 고통을 언제나 그것을 가하는 입장에서 사유했다. 고통은 삶의 흥분제이며 삶을 위한 미끼인 것이며 삶의 적극적 표현이었다. 그러나 반응적인 힘들이 승리하고 난 이후로 사람들은 이제 고통을 당하는 자의 입장에서 사유한다. 고통은 괴롭고 끔찍한 것이며, 현존은 고통으로 인해 절하된다.

 

10 사람들에게 고통이 원죄의 결과라고 적극적으로 인식시키는 자가 바로 사제다. 원죄 개념을 고안함으로써 고통의 내재화를 주재하는 사제인 것. 이상으로 우리는 가책이 원한을 계승하는 모습을 살펴보았다. 원한과 가책 각각 위상학적이고 유형학적인 계기들을 갖고 있으며, 한 계기에서 다른 계기로 이행할 때 사제라는 인물이 개입한다는 점, 그리고 이 사제는 항상 허구를 창작해내어 가치 전복을 이루어낸다는 점까지도 살펴보았다.

 

그런데 가책 속에서 원한의 방향전환, 즉 고통의 내재화는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는 현상과 얽혀있기 때문에 한결 복잡하다. 고통이 원죄의 결과가 아님을 밝히기 위해, 그런 생각이 단지 사제가 고안해낸 창작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고통의 기원을 역사적 계보학적으로 추적해보면 우리는 문화라는 것과 만나게 된다. 이제 문화에 대해 살펴보자.

 

11 문화는 고문을 비롯한 잔혹한 훈련을 통해 폭력 속에서 탄생한다. 문화가 융성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법에 복종한다. 복종에서 우리는 반응적인 힘을 보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화가 반드시 반응적인 힘만을 양산하는 것은 아니다. 법이라는 것은 또한 어떤 적극적인 힘이 인간에게서 발휘될 수 있도록, 그런 쪽으로 사람들을 길들이는 것을 임무로 삼고 있기도 하다. 사람들을 처벌하고 복종시키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사람들을 훈육하여 주권자적 인간으로, 자율적인 개인으로 양성해내는 법의 양면성.

 

니체가 주목하는 것은 선사적 활동, 종적 활동으로서의 문화다. 문화는 인간에게 습관을 제공하고, 인간을 훈련시키고 교육시킨다. 또한 문화는 인간에게 기억을 부여한다. 여기서의 기억이란 인간을 소화불량으로 만드는 흔적의 기억을 말하는 게 아니라, 약속들의 기억을 말한다. 문화는 인간에게 약속하는 능력을 길러준다. 약속을 기억하는 것은 미래의 어떤 순간에 그것을 실행해야 함을 기억하는 것이다. 약속함으로서 미래를 이용할 수 있는 인간, 자유롭고 강력한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런 인간만이 적극적이다. 약속하는 능력이야말로 문화의 효과다. 약속할 수 있는 인간은 종적 활동으로서의 문화의 산물이다.

 

문화는 어떻게 인간을 약속할 수 있는 인간으로 육성해 내는가. 인간에게 끔찍한 고통을 가함으로써 그렇게 만들어낸다. ‘고통’은 ‘지켜지지 않은 약속’의 정확한 등가물이다. 약속을 까먹음으로써 야기된 손실=감내한 고통. 인간관계의 기원은 교환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가장 원시적인 최초의 인간관계는 바로 채권-채무의 관계였다. 니체는 교환 속에서가 아니라 신용 속에서 사회조직의 원형을 본다.

 

12 채무자는 약속을 망각해서 생겨난 부채를 체벌의 고통을 감당함으로써 벗어난다. 채권자는 채무자가 당하는 고통을 지켜보고 거기서 쾌감을 느낌으로써 피해를 보상받는다. 이걸 제대로 집행하는 것이 바로 문화가 구현하는 ‘정의’이다. 잘못했으면 맞는다, 가해자가 맞는 걸 즐겁게 지켜보면서 피해자는 보상받는다, 이로써 채무관계는 깨끗하게 해소되고 채권자와 채무자 모두 그 어떤 책임으로부터도 해방된다. 채무관계가 해소되는 이러한 과정 어디에도 복수나 원한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정의는 결코 복수나 원한을 그 기원으로 삼지 않는다.

 

이와 같이 구타와 체벌이라는 문화적 훈련을 통해 인간은 비로소 약속할 수 있는 인간이 된다. 주권자인 개인, 자율적이고 초-도덕적인 개인, 더 이상 부채를 만들지 않는 인간, 책임이 없는 자, 자유로운 자, 가벼운 자, 주인이 된다.

 

13 그러나 인류 역사는 열등하고 반응적인 힘들이 승리해온 역사였고 결국 문화는 퇴행하고 말았다. 인간은 주권자 개인이 아니라 군서동물, 순종적이고 병적이며 하찮은 존재, 오늘날의 유럽인이 되었다. 문화는 반응적 삶을 보존하고 조직하고 파급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교회, 국가를 비롯한 규율권력이 인간을 반응적으로 만들었다.

 

14 반응적인 인간들은 국가, 신, 조상 등 모든 위대하고 신성한 것들에 대해 영원히 갚을 길 없는 깊은 채무감을 느낀다. 양심의 가책, 책임져야 한다는 사고방식, 채무자의 자기학대가 너무나 극심해져서 도저히 그 빚을 갚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지경에 도달한 것. 이렇게 부채는 그것이 인간의 해방에 참여했던 적극적인 특성들을 상실하고 변형된다.

 

이를테면 기독교가 대속이라 부르는 것을 보라. 더 이상 부채에서의 해방이 문제가 아니라, 부채의 심화가 문제다. 부채를 갚느라 치르는 고통이 문제가 아니라, 영원히 자신을 채무자로 느끼는 고통이 문제다. 고통이 내재화되고 채무-책임성이 죄의식-책임성이 되면서 이제 고통은 부채의 이자 이외에는 더 이상 아무 것도 갚지 못한다. 적당히 고통 받고 해방되어야 하는데 이제는 아무리 고통을 받아도 해방되지가 않음. 해방으로서의 고통이 아니라 영원한 종속으로서의 고통. 영원한 죄인이 됨.

 

내재화된 고통이 너무나 극심한 나머지 못 견디고 죽어버리면 안 되니까 사제는 고통을 견디기 위한 방어수단 또한 고안해낸다. 신에 대한 봉사, 이웃에 대한 사랑을 장려함으로써 반응적 인간들로 하여금 소소한 기쁨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15 종교는 본질적으로 원한이나 가책과는 관계가 없다. 니체는 끊임없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신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종교, 강자들의 종교가 있음을 말한다. 문제는 어떤 힘들이 종교를 독점하는가 하는 것이다. 어떤 힘들이, 누가 종교를 탈취하는가. 가령 예수라는 개인적 유형을 보자면 그는 원한의 인간도 가책의 인간도 아니었다. 기독교의 진정한 고안자는 예수가 아니라 성 바울이었다.

 

성 바울 같은 사제들이 금욕적 이상이라는 허구를 만들어낸다. 금욕적 이상은 원한과 가책의 복합체로써 고통을 근근이 견딜 만 한 것으로 만든다. 반응적 인간은 이제 천국이라는 금욕적 이상 세계를 꿈꾸며 삶과 삶 속의 모든 적극적인 것을 비하하고 세계에 무의 가치를 부여하면서 반응적 삶을 살아간다. 이렇게 원한+가책+금욕적 이상이라는 삼단 복합체의 수립으로 마침내 반응적 힘들의 승리가 완성되는데, 바로 이것이 사제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바이다. 이렇게 반응적 힘들의 승리에는 무의 의지가 하나의 동력으로서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

 

16 이와 같이 니체는 우리가 자명하게 여기는 가치들의 기원을 계보학적으로 추적함으로써 낡은 형이상학과 초월적 비판을 대체하는 권력의지의 철학을 새롭게 정초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내가 낳은 아기를 귀히 여기는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 인류를, 온생명을, 세계를 그와 똑같은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다정한 마음이 어떻게 그토록 놀라운 규모로 확장될 수 있을까. 역사에 남은 성인들은 그렇게 했다. 그들을 떠올리면 가없는 존경과 경외심으로 눈물이 날 것 같다.

오래 전에 딱 한 번 친구 따라 성당에 가본 일이 있다. 미사가 거의 끝날 즈음이었던가, 신부님의 제안으로 지구 저편에서 오늘도 기아로 고통받는 난민들을 위해 기도를 드렸었다. 남을 위해 기도해 본 적이 있었던가. 그때가 처음이었다. 기도란 절박한 일을 앞두고 나 잘되게 해달라고나 비는 건 줄 알았는데. 그때 받은 뜨거운 충격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나 자신도 그다지 썩 사랑하지 않는 내가 이제 곧 아기를 낳게 생겼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가 자문해보면 머리만 가렵다. 자신을 비하하고 조소하고 경멸한 적이 얼마나 많았나. 하지만 내 몸에서 나온 아기에 대해서 만큼은 절대적 긍정을, 무조건적 사랑을 퍼붓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마음은 어떻게 확장될 수 있을까. 여전히 알 수는 없지만, 출산이 하나의 작은 씨앗이 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해본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hnine 2017-09-09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가 출산예정일이신지 모르지만 건강한 아기 잘 출산하시기 바랍니다. 아기를 낳고 키우는 일은 축복임에 틀림없는 것 같아요 그만한 댓가를 치르고 받는 축복이기는 하지만요 ^^

수양 2017-09-09 19:34   좋아요 0 | URL
감사해요! 육아야말로 헬게이트라고들 하는데... 아직 겪어보질 못해서... 치러야 할 댓가가 얼만큼인지 상상조차 안 되고 있어요 (겪어봐야지만 비로소 알게 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요ㅠ_ㅠ) 지금은 다만 폭풍 전야의 이 호사스런 고요와 평화를 열심히 누리고 있을 뿐이네요ㅋ

빵가게재습격 2017-09-09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이쿠. 블로그에 낙서 저장하러 잠시 들렀다가 놀라운 소식을 보았네요. 건강한 아기 순산하세요.~~~~~

수양 2017-09-09 19:33   좋아요 1 | URL
재습격님 안녕하신가요^^ 감사해요~ 순산!! 해야죠^^
 

불과 몇 년 전부터다. 흰머리가 늘어나기 시작한 게. 내 나이에 흰머리라니 용납할 수 없다! 아니, 용납은 커녕 용서할 수조차 없다! 처음엔 악의에 불타올라 눈자위가 뻐근해질 때까지 두 눈 치켜뜨고 보이는 족족 뽑았다. 그러나 이제는 너무 많아져 뽑을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안 그래도 머리칼이 가늘어지고 숱도 없어져 가는 마당에 머리가 더 휑해질까봐 더 이상 뽑지도 못하겠다. 흰머리가 삐죽삐죽 보이는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묻는다. 여자는 어떻게 늙어가야 할까. 왜 굳이 앞에 여자를 붙이느냐면, 남자나 여자나 똑같이 늙어가도 밀롱가에서는 보여지는 게 다르더라니까.

 

똑같이 늙었어도 밀롱가에 앉아있으면 늙은 아저씨는 나름 멋있어 보이는 구석이 있다. 그런데 늙은 아줌마는? 아무리 후하게 봐줘도 늙은 아저씨만큼은 아닌 것 같다. 왜 그럴까. 남성에게만 춤 신청권이 있고 여성은 거의 수동적으로밖에 처신할 수 없는 탱고라는 춤 자체의 속성에도 그 원인이 어느 정도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밀롱가에서 늙은 아줌마는 어찌할 수 없이 쓸쓸해 보여. 화장을 안 하고 있으면 나이보다 더 들어 보이고 화장을 진하게 하고 있으면 화장을 진하게 했다는 이유로 더 더욱 처량해 보여. 나만의 생각은 아닐 거다. 실제로도 밀롱가에 늙은 아저씨가 늙은 아줌마보다 더 많은 걸 보면.

 

젊었을 때 너무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게 화근일까, 늙으면 반대로 너무나 애처로워지는 생물이 여자인 것 같다. 세상의 모든 아가씨는 꽃 같다. 아가씨가 걸어가면, 아기들도 어린이도 할머니 할아버지 아줌마 아저씨, 심지어 아가씨도 아가씨만 본다. 모두가 아가씨만 본다고! 아가씨는 존재 그 자체로 어디서나 환영받는다. 그러나 늙으면? 쳐다도 안 본다. 밀롱가에서 남녀 막론하고 사람들이 쏘아대는 강렬한 시선들, 인기도, 춤 신청의 빈도를 추적해보면 여자의 일생의 이러한 생물학적 비극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아, 비정한 현실이여.

 

조지 클루니를 보라. 남자는 확실히 '외모' 이상의 어떤 것이 중요하다. 내뿜는 에너지, 카리스마, 매너, 제스처, 자신감. 총체적으로 말하면 외모가 아니라 풍모랄까. 매력을 결정짓는 데 있어서 남자는 풍모 그러니까 간지가 중요하다. 밀롱가에서 관찰해보면 못 생긴 남자는 없다. 풍모가 찌질한 남자만 있을 뿐. 그리고 남자는 대체로 사회적 성취도가 높을 경우에 늙으면 늙을수록 간지난다. 개기름 잘잘 흐르는 사기꾼 춤선생 같은 간지 말고 정말로 중후함이 넘쳐흐르는 간지, 카이사르 같은 간지 말이다. 왜 밀롱가에서 늙은 남자는 도태되지 않는가. 나름의 경쟁력을 확보하는가. 춤 실력도 실력이지만 늙은 남자들이 내뿜는 바로 이런 간지 때문이지. 아는 사람은 알지.

 

그러나 여자는, 내가 볼 때 여자는 정말로 고민을 많이 해봐야 한다. 간지만으로는 부족하다. 여자는 꽃 같아서, 젊을 땐 안 예쁜 여자가 없지. 젊으면 웬만하면 다 예쁘지. 화장 안 해도 예뻐. 움직이고 재잘대는 거 자체가 귀여워. 정확히 그 반대급부로, 늙으면 바로 그 늙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웬만한 동년배 남자보다 더 처량해지고 만다. 속절없이 시들기는 쉽고 곱게 늙기는 어려운 것 같다. 젊은 시절이 너무나 화려해서일까. 그에 대한 응보일까. 여자의 경우 드라마틱한 생물학적 시듦 앞에서 간지의 항거는 무력하기 쉽다. 남자보다 더 그래.

 

좋음=예쁨=아름다움=싱싱함=생기발랄=생명력. 특히나 여자한테는 이게 다 같은 말 같다. 이 무슨 반페미니즘적인 무식한 발언이냐고 힐난해도 어쩔 수 없다. 여자는, 아, 이런 직관적 등식을 정치적 올바름의 잣대로 냉철하게 재고해볼 만한 정신머리도 채 차리기 힘들 만큼 순간적으로 강렬하게 엄습하듯이 훅 예뻐버린다고. 정신이 아찔해지도록 예쁘기 때문에 이런 괴상한 등식이 너무나도 쉽게 본능에 호소력을 발휘하고 마는 것이다. 길거리를 지나가는 젊은 여자를 보라. 그녀가 내뿜는 아름다움, 향기, 그 눈부심, 찬란함. 생각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여자를 생각만 해도 여자에 홀린다. 여자는 왜 이토록 예쁜가. 너무나 예뻐서 그 예쁜 것에 갇히고 마는 것이 여자인가.

 

어떻게 하면 더 이상 스스로 여자임에 연연하지 않아도 아름다울 수 있을까. 늙어서도 정성들여 분칠하고 꽃무늬 스카프로 멋을 내는 할머니들도 물론 예쁘다. 티비에 나오는 프랑스 할머니들은 얼마나 고우신지. 김선우 시인의 <봄날 오후>라는 시에서는 탑골공원 공중변소에서 "새악시처럼 연지바르는" 할머니들을 얼마나 사랑스럽게 그려놓았던가. 그렇지만 늙어서도 애써 여자임을 주장하는 여자 말고, 어떻게든 여자임을 잃지 않으려 안달하는 그런 여자 말고, 여자임에 연연하지 않으면서도 여자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는 없을까. 성을 초월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그런 여자는 없을까.

 

도인 같은 할머니는 어떨까. 그러려면 일단은 장신구를 멀리하고 화장을 안 해야 한다. 화려한 꽃무늬 옷도 안 어울린다. 몸매는 마른 듯이 날씬하면서도 자세는 바르고 곧아야 한다. 눈빛이 형형해야 하고 피부는 깨끗해야 하며 몸에선 갓 말린 빨래 냄새나 솔향 같은 게 나야 한다. 하지만 그런 할머니는 너무 무섭지 않을까. 너무 금욕적이어 보이고 B사감 같아 보이지 않을까. 진주목걸이에 챙이 깊은 모자를 쓰고 홍차 마시는 프랑스 할머니는 고와보이지만 한편으론 늙어서도 끝내 여자임에 매몰되어 있는 그 모습이 안쓰럽다. 하지만 도인 같은 할머니는 니체가 말한 금욕적 이상주의자, 니체가 그렇게 비난한 '사제' 같잖아. 역시, 쉽게 결론이 나지 않는군. 머리가 온통 백발로 뒤덮일 때까지 계속해서 연구해봐야 할 모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