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몇 년 전부터다. 흰머리가 늘어나기 시작한 게. 내 나이에 흰머리라니 용납할 수 없다! 아니, 용납은 커녕 용서할 수조차 없다! 처음엔 악의에 불타올라 눈자위가 뻐근해질 때까지 두 눈 치켜뜨고 보이는 족족 뽑았다. 그러나 이제는 너무 많아져 뽑을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안 그래도 머리칼이 가늘어지고 숱도 없어져 가는 마당에 머리가 더 휑해질까봐 더 이상 뽑지도 못하겠다. 흰머리가 삐죽삐죽 보이는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묻는다. 여자는 어떻게 늙어가야 할까. 왜 굳이 앞에 여자를 붙이느냐면, 남자나 여자나 똑같이 늙어가도 밀롱가에서는 보여지는 게 다르더라니까.

 

똑같이 늙었어도 밀롱가에 앉아있으면 늙은 아저씨는 나름 멋있어 보이는 구석이 있다. 그런데 늙은 아줌마는? 아무리 후하게 봐줘도 늙은 아저씨만큼은 아닌 것 같다. 왜 그럴까. 남성에게만 춤 신청권이 있고 여성은 거의 수동적으로밖에 처신할 수 없는 탱고라는 춤 자체의 속성에도 그 원인이 어느 정도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밀롱가에서 늙은 아줌마는 어찌할 수 없이 쓸쓸해 보여. 화장을 안 하고 있으면 나이보다 더 들어 보이고 화장을 진하게 하고 있으면 화장을 진하게 했다는 이유로 더 더욱 처량해 보여. 나만의 생각은 아닐 거다. 실제로도 밀롱가에 늙은 아저씨가 늙은 아줌마보다 더 많은 걸 보면.

 

젊었을 때 너무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게 화근일까, 늙으면 반대로 너무나 애처로워지는 생물이 여자인 것 같다. 세상의 모든 아가씨는 꽃 같다. 아가씨가 걸어가면, 아기들도 어린이도 할머니 할아버지 아줌마 아저씨, 심지어 아가씨도 아가씨만 본다. 모두가 아가씨만 본다고! 아가씨는 존재 그 자체로 어디서나 환영받는다. 그러나 늙으면? 쳐다도 안 본다. 밀롱가에서 남녀 막론하고 사람들이 쏘아대는 강렬한 시선들, 인기도, 춤 신청의 빈도를 추적해보면 여자의 일생의 이러한 생물학적 비극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아, 비정한 현실이여.

 

조지 클루니를 보라. 남자는 확실히 '외모' 이상의 어떤 것이 중요하다. 내뿜는 에너지, 카리스마, 매너, 제스처, 자신감. 총체적으로 말하면 외모가 아니라 풍모랄까. 매력을 결정짓는 데 있어서 남자는 풍모 그러니까 간지가 중요하다. 밀롱가에서 관찰해보면 못 생긴 남자는 없다. 풍모가 찌질한 남자만 있을 뿐. 그리고 남자는 대체로 사회적 성취도가 높을 경우에 늙으면 늙을수록 간지난다. 개기름 잘잘 흐르는 사기꾼 춤선생 같은 간지 말고 정말로 중후함이 넘쳐흐르는 간지, 카이사르 같은 간지 말이다. 왜 밀롱가에서 늙은 남자는 도태되지 않는가. 나름의 경쟁력을 확보하는가. 춤 실력도 실력이지만 늙은 남자들이 내뿜는 바로 이런 간지 때문이지. 아는 사람은 알지.

 

그러나 여자는, 내가 볼 때 여자는 정말로 고민을 많이 해봐야 한다. 간지만으로는 부족하다. 여자는 꽃 같아서, 젊을 땐 안 예쁜 여자가 없지. 젊으면 웬만하면 다 예쁘지. 화장 안 해도 예뻐. 움직이고 재잘대는 거 자체가 귀여워. 정확히 그 반대급부로, 늙으면 바로 그 늙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웬만한 동년배 남자보다 더 처량해지고 만다. 속절없이 시들기는 쉽고 곱게 늙기는 어려운 것 같다. 젊은 시절이 너무나 화려해서일까. 그에 대한 응보일까. 여자의 경우 드라마틱한 생물학적 시듦 앞에서 간지의 항거는 무력하기 쉽다. 남자보다 더 그래.

 

좋음=예쁨=아름다움=싱싱함=생기발랄=생명력. 특히나 여자한테는 이게 다 같은 말 같다. 이 무슨 반페미니즘적인 무식한 발언이냐고 힐난해도 어쩔 수 없다. 여자는, 아, 이런 직관적 등식을 정치적 올바름의 잣대로 냉철하게 재고해볼 만한 정신머리도 채 차리기 힘들 만큼 순간적으로 강렬하게 엄습하듯이 훅 예뻐버린다고. 정신이 아찔해지도록 예쁘기 때문에 이런 괴상한 등식이 너무나도 쉽게 본능에 호소력을 발휘하고 마는 것이다. 길거리를 지나가는 젊은 여자를 보라. 그녀가 내뿜는 아름다움, 향기, 그 눈부심, 찬란함. 생각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여자를 생각만 해도 여자에 홀린다. 여자는 왜 이토록 예쁜가. 너무나 예뻐서 그 예쁜 것에 갇히고 마는 것이 여자인가.

 

어떻게 하면 더 이상 스스로 여자임에 연연하지 않아도 아름다울 수 있을까. 늙어서도 정성들여 분칠하고 꽃무늬 스카프로 멋을 내는 할머니들도 물론 예쁘다. 티비에 나오는 프랑스 할머니들은 얼마나 고우신지. 김선우 시인의 <봄날 오후>라는 시에서는 탑골공원 공중변소에서 "새악시처럼 연지바르는" 할머니들을 얼마나 사랑스럽게 그려놓았던가. 그렇지만 늙어서도 애써 여자임을 주장하는 여자 말고, 어떻게든 여자임을 잃지 않으려 안달하는 그런 여자 말고, 여자임에 연연하지 않으면서도 여자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는 없을까. 성을 초월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그런 여자는 없을까.

 

도인 같은 할머니는 어떨까. 그러려면 일단은 장신구를 멀리하고 화장을 안 해야 한다. 화려한 꽃무늬 옷도 안 어울린다. 몸매는 마른 듯이 날씬하면서도 자세는 바르고 곧아야 한다. 눈빛이 형형해야 하고 피부는 깨끗해야 하며 몸에선 갓 말린 빨래 냄새나 솔향 같은 게 나야 한다. 하지만 그런 할머니는 너무 무섭지 않을까. 너무 금욕적이어 보이고 B사감 같아 보이지 않을까. 진주목걸이에 챙이 깊은 모자를 쓰고 홍차 마시는 프랑스 할머니는 고와보이지만 한편으론 늙어서도 끝내 여자임에 매몰되어 있는 그 모습이 안쓰럽다. 하지만 도인 같은 할머니는 니체가 말한 금욕적 이상주의자, 니체가 그렇게 비난한 '사제' 같잖아. 역시, 쉽게 결론이 나지 않는군. 머리가 온통 백발로 뒤덮일 때까지 계속해서 연구해봐야 할 모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