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와 철학 들뢰즈의 창 1
질 들뢰즈 지음, 이경신 옮김 / 민음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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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반응적인 힘들은 작용을 제한하고 분열시키고 지체시키며 방해한다. 반대로 적극적인 힘들은 창조가 분출되도록 만든다. 적극적 유형은 오로지 적극적 힘들만을 포함한 어떤 유형이 아니다. 적극적 유형은 적극적으로 영향 받고 적극적으로 복종하는 그런 반응적 힘들을 포함하는 관계임. 즉, 적극적인 유형은 힘들이 서로 경합하며 거침없이 분출하는 역동적이고 건강한 관계를 표현한다. 원한은 이런 것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원한은, 작용하는 힘에 대하여 “반응하지 않음”으로써, “영향 받길 중단함”으로써, “피함”으로써 반응적인 힘이 적극적인 힘을 이기는 방식이다. 원한은 하나의 질병이다. 이 질병은 어떻게 해서 적극적인 힘을 이기는가. 그 메커니즘은 어떻게 되는가.

 

2 프로이트의 <위상학적 가설>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흥분을 수용하는 체계가 있고 또 한편으로 흥분을 항구적인 흔적(=기억, 추억)으로 변화시키는 체계가 있다. 전자가 의식에, 후자가 무의식에 상응한다. 니체는 이를 반응적 장치의 두 체계로 본다. 후자 즉 반응적 무의식은 기억의 흔적에 의해서, 항구적인 자국에 의해서 정의된다. 반응적 무의식은 마치 생물이 되새김질을 하듯이 지워지지 않는 자국을 고착시키고 흔적에 집중한다. 전자 즉 반응적 의식은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영향 받고 학습하고 습득하고 훈련 받는, 말하자면 적극적인 반작용을 수행하는 영역이다. 반응적 의식이 가진 적극적인 능력은 바로 망각 능력이다. 망각의 능력이야말로 제동력이고 완화 장치이며 재생시키고 치료하는 조형적 힘이다. 망각 능력=건강한 생체대사능력.

 

망각능력이 쇠약해지면 즉 완화장치가 손상을 입게 되면 인간은 소화불량 환자와 비슷해진다. 이때 흔적들에 대한 대응은 무의식으로부터 의식의 수면 위로 올라와 의식에 침투한다. 흔적들에 대한 반작용은 이제 (의식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어떤 것이 됨과 동시에 흥분에 대한 반작용은 영향받길 중단한다. 반작용을 더 이상 행할 수 없는 적극적인 힘들은 실행의 물리적 조건을 잃고, 그것들의 활동을 실행할 조건을 더 이상 갖지 못하며, 그것들이 할 수 있는 것에서 분리된다. (아팠던 기억, 비난당했던 기억, 위험했던 기억, 맞았던 기억 등등 안 좋은 기억이 나면 순간 움츠러들면서 할 수 있는데도 더 이상 안 하게 됨. 반응하기를 단념하게 됨.) 흔적이 반응적 장치 속에서 흥분을 대신한다.

 

그런데 의식을 치고 올라오는 기억이라는 이러한 반응적 힘들은, 적극적 힘들의 그것보다 더 큰 하나의 힘을 형성하면서 승리하는 게 아니다. 적극적인 힘들을 전염시키고 감염시켜서 그것들의 힘을 빼앗고 무력화시키는 방식으로 승리한다. 여기서 우리는 원한의 정의를 재발견한다. 원한은 느껴질 수 있음과 동시에 영향 받길 중단하는 반작용이다. 원한은 질병이며 사실 모든 질병이 원한의 한 형태이다. 더 이상 적극적으로 에너지를 발산하지 못한 채 혼자 누워서 속으로 끙끙 앓으며 참고 삭이면서 이만 갈고 있는 상태.

 

3 흔적들의 기억에 의한 의식의 침투, 기억의 의식 자체로의 상승. 의식으로 침투하는 기억의 장소 이동. 반응적 힘들의 이동. 이것이 원한의 일차적 모습이자 원한의 위상학적 측면이다. 원한은 그 다음으로 유형학적 측면을 보인다. 장소를 이동한 다음 어떤 하나의 유형(원한의 인간이 보여주는 가치 전복, 힘들의 관계의 전복)을 형성하는 것이다. 유형의 주된 징후는 놀랄 만한 기억력이다. 어떤 것을 잊는 데 있어서의 그 무능력. 아무것도 잊을 수 없는 그 무능력.

 

건강한 인간에게 흥분이 될 만한 모든 자극들이 원한의 인간에게 다가오는 순간 신속하게 얼어붙는다. 의식의 경직, 경화. 반응 불가능. 오로지 흔적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에도 집중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 질적이고 유형적인 무능력에 대한 책임을 원한의 인간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자극적 대상에게로 전가시킨다. 대상이 주는 흥분에서 흔적들을 제거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을 보상받기 위해서 그는 대상을 증오하고 경멸하고 비난한다. 그래서 원한의 인간이 행하는 복수는 그것이 실현될 때조차 그 원리에 있어서 정신적이고 상상적이며 상징적이다.

 

4 원한의 인간은 악의가 아니라 적의를 갖는다. 적의=경멸하는 능력. (니체는 악의를 건강한 것으로 봄. 강자적인 것으로 봄. 거침없이 무구하고 천진하고 잔혹하고 공격적인, 그래서 건강한 악의.) 그는 친구도, 적도, 불행도, 불행의 원인도, 그 어떤 것도 찬미하거나 존중하지 않는다. 반면에 건강한 악의를 갖는 강자는 어떠한가. 그는 상대에 대하여 정면 대결에의 의지를 갖는다. 싸움의 상대로 기꺼이 대우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적에 대한 존중이다. 그러나 원한의 인간은 존중해야 할 모든 대상을 비난하고 비하할 뿐이다.

 

원한의 인간은 정면 대결할 힘도 의지도 없다. 무반응한 채 속으로만 상대를 비난하고 비하한다. 한마디로 원한의 인간은 평화로운 휴식의 상태에 잠긴다. 정신과 신체의 느슨한 마비상태 속에서 그는 오로지 사랑받기만을 원한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제공되고 쓰다듬어지고 잠재워지기를 원한다. 그는 앓아누운 병자다. 기획할 능력, 맞서 싸우고 대결할 능력, 적극적으로 반응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보살핌 받기만을 원한다. 그는 누워서 그저 이득을 취하려고만 한다. 만인에게 민주적으로 골고루 이득이 분배되기를. 그런 점에서 원한의 인간들은 도덕을 가지고 있다. 실리의 도덕. 원한의 인간의 관점에서는 모두에게 고루 이득이 되는 것이 바로 도덕이 된다.

 

5 강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좋다. (그런데 너는 누구냐 너는 나와는 좀 다르구나) 그러므로 너는 안 좋다. 노예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악하다. (난 그렇지 않은데) 그러므로 나는 선량하다. 강자는 자신의 좋음을 자각하기 위해 비교의 대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저 그 스스로 행동하고 긍정하고 즐김에 따라 자신에 대해 그렇게 말한다. 그는 사물들에게 명예를 부여하고 자신이 가치들을 창조함을 의식한다. 그는 자기 속에서 발견하는 모든 것을 높이 평가한다. 그의 도덕은 자기 자신에 대한 찬미, 충만의 감정, 넘치고자 하는 힘의 감정 속에 있다. 그는 헌신하고자 한다. 주고자 한다. 왜? 자기 스스로 힘이 넘치기 때문에. 강자가 ‘너는 안 좋다’고 말하는 것은 그저 부차적 결론일 따름이다.

 

강자와 달리 노예는 타인에 대한 부정을 필수적으로 전제해야만 겨우 자기 긍정에 이를 수 있다. 부정적인 것이 본질적인 것을 구성하고 긍정적인 것은 부정에 의해서만 현존한다. 노예는 외관상 긍정적인 결론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반작용과 부정의 전제들, 원한과 허무주의의 전제들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또 그 결론은 단지 긍정성의 ‘외관’만을 갖는다. 노예는 긍정의 외관을 만들기 위해서 두 부정을 필요로 한다. 너는 나쁘다(첫 번째 부정). 나는 너처럼 나쁘지 않다(두 번째 부정). 고로 나는 착하다. 이것이 노예의 기이한 삼단논법임. 노예의 기이한 가치 창조.

 

원한의 인간이 볼 때 악의가 있는 자는 자신의 행동에 제동을 걸지 않는 자이다. 자신의 행동이 제3자들에게 초래할 파괴적 결과들에 대해 고려하지 않는 자이다. 그렇다면 원한의 인간이 볼 때 선한 자는? 행동에 제동을 거는 자다. 한마디로 원한의 인간은 모든 행동을 행동하지 않는 자의 관점에, 그것의 결과들을 경험하는 관점에, 그뿐 아니라 그것들의 의도들을 탐색하는 신적인 제3자의 관점에 결부시킨다. 이 과정 속에서 좋음과 나쁨은 선과 악이라는 도덕 판단으로 대체된다.

 

6 원한의 오류추리는 힘과 행동이 분리 가능하다고 보는 허구에 근거한다. 가령, 번개란 곧 치는 것인데 ‘번개가 친다’고 표현한다. 번개가 안 칠 수도 있었는데 친다는 것인가? 의미의 실제 관계를 인과성의 가상의 관계로 대체하는 이러한 허구적 인식 속에서 사람들은 ‘행동하기 위해서보다 자신을 억제하기 위해서 더 많은 추상적인 힘이 필요하다’고까지 상상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약자의 자기합리화에 불과하다. 주체와 분리시키고 중립화시킨 힘을 약자는 더 나아가 도덕화시킨다. 좋음과 나쁨, 우월함과 저열함이라는 힘들의 성질의 차이를 선과 악이라는 도덕적 대립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7 원한의 일차적 단계 즉 위상학적 단계에서 아직 원한은 가공되지 않은 상태와 같다. 그렇다면 아직 가공되지 않은 이러한 상태를 질료로 하여 누가 원한의 형태를 만들어 내는가? 가치의 전복을 시도함으로써 원한의 구체적 형태를 창작해내는 위대한 예술가는 누구인가? 그는 바로 사제다. 유태교에 있어서의 주인인 그는 노예에게 반응적 삼단 논법에 대한 생각을 제공한다. 그 다음으로 그는 새로운 사랑을 고안해낸다. 불행한 자들, 가난하고 무능한 자들, 보잘 것 없는 자들에게 선량함과 아름다움의 가치를 부여한다.

 

사제는 반응적 힘들의 승리를 필요로 하고 또 그것을 조장해나가는데, 실상 그가 지닌 권력의지는 바로 허무주의다. 여기서 우리는 부정하는 힘인 허무주의가 반응적 힘들을 필요로 한다는 근본 명제를 발견하지만, 부정하는 힘인 허무주의는 반응적 힘들을 승리로 이끈다는 그것의 역 또한 발견한다. (15에서 이 이야기가 또 나옴)

 

8 사제가 창작해낸 허구에 의해 적극적인 힘이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분리되고 나면 이제 적극적 힘은 반응적으로 전락한다. 출구를 갖지 못한 힘이 내재화되는 것- 이것이 바로 가책의 기원이다. 한때 강자였던 자들은 반응적 인간들이 퍼붓는 비난을 내재화하면서 더 이상 자신을 향유하지 못하고 자신에게서 등 돌린 채 고통을 생산한다. 고통과 불행에 빠져 주인에서 노예로 전락하는 이러한 상태야말로 원한의 인간이 결정적으로 승리에 도달하는 지점이다. 가책은 고통의 동력이며 기폭제다. 이제 이 새로운 노예들은 자발적으로 끔찍한 고행을 단행하고 적극적으로 자기를 희생하는 마조히스트가 된다. 고통은 이제 구원의 수단이 되고, 이들은 고통에서 회복되기 위해(구원받기 위해) 더 많은 고통을 생산한다.

 

9 사람들은 고통에 대해 새로운 내적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한다. 고통은 원죄의 결과인 것이다. 가책의 첫 번째 측면이 앞서 보았듯 적극적 힘의 내재화로 인한 고통의 생산이라면, 두 번째 측면은 바로 고통의 내재화, 원죄의식의 느낌으로서의 가책이다.

 

현존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필연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삶의 근본 조건으로서의 고통을 우리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있다. 유사 이래 강자들에게 있어서 고통은 늘 단 하나의 의미만을 가지고 있었다. 즉 고통은 누군가에게 쾌락을 주는 것이다. 가령 전쟁은 신들의 시선을 즐겁게 하기 위한 놀이였다. 그들은 고통을 언제나 그것을 가하는 입장에서 사유했다. 고통은 삶의 흥분제이며 삶을 위한 미끼인 것이며 삶의 적극적 표현이었다. 그러나 반응적인 힘들이 승리하고 난 이후로 사람들은 이제 고통을 당하는 자의 입장에서 사유한다. 고통은 괴롭고 끔찍한 것이며, 현존은 고통으로 인해 절하된다.

 

10 사람들에게 고통이 원죄의 결과라고 적극적으로 인식시키는 자가 바로 사제다. 원죄 개념을 고안함으로써 고통의 내재화를 주재하는 사제인 것. 이상으로 우리는 가책이 원한을 계승하는 모습을 살펴보았다. 원한과 가책 각각 위상학적이고 유형학적인 계기들을 갖고 있으며, 한 계기에서 다른 계기로 이행할 때 사제라는 인물이 개입한다는 점, 그리고 이 사제는 항상 허구를 창작해내어 가치 전복을 이루어낸다는 점까지도 살펴보았다.

 

그런데 가책 속에서 원한의 방향전환, 즉 고통의 내재화는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는 현상과 얽혀있기 때문에 한결 복잡하다. 고통이 원죄의 결과가 아님을 밝히기 위해, 그런 생각이 단지 사제가 고안해낸 창작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고통의 기원을 역사적 계보학적으로 추적해보면 우리는 문화라는 것과 만나게 된다. 이제 문화에 대해 살펴보자.

 

11 문화는 고문을 비롯한 잔혹한 훈련을 통해 폭력 속에서 탄생한다. 문화가 융성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법에 복종한다. 복종에서 우리는 반응적인 힘을 보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화가 반드시 반응적인 힘만을 양산하는 것은 아니다. 법이라는 것은 또한 어떤 적극적인 힘이 인간에게서 발휘될 수 있도록, 그런 쪽으로 사람들을 길들이는 것을 임무로 삼고 있기도 하다. 사람들을 처벌하고 복종시키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사람들을 훈육하여 주권자적 인간으로, 자율적인 개인으로 양성해내는 법의 양면성.

 

니체가 주목하는 것은 선사적 활동, 종적 활동으로서의 문화다. 문화는 인간에게 습관을 제공하고, 인간을 훈련시키고 교육시킨다. 또한 문화는 인간에게 기억을 부여한다. 여기서의 기억이란 인간을 소화불량으로 만드는 흔적의 기억을 말하는 게 아니라, 약속들의 기억을 말한다. 문화는 인간에게 약속하는 능력을 길러준다. 약속을 기억하는 것은 미래의 어떤 순간에 그것을 실행해야 함을 기억하는 것이다. 약속함으로서 미래를 이용할 수 있는 인간, 자유롭고 강력한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런 인간만이 적극적이다. 약속하는 능력이야말로 문화의 효과다. 약속할 수 있는 인간은 종적 활동으로서의 문화의 산물이다.

 

문화는 어떻게 인간을 약속할 수 있는 인간으로 육성해 내는가. 인간에게 끔찍한 고통을 가함으로써 그렇게 만들어낸다. ‘고통’은 ‘지켜지지 않은 약속’의 정확한 등가물이다. 약속을 까먹음으로써 야기된 손실=감내한 고통. 인간관계의 기원은 교환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가장 원시적인 최초의 인간관계는 바로 채권-채무의 관계였다. 니체는 교환 속에서가 아니라 신용 속에서 사회조직의 원형을 본다.

 

12 채무자는 약속을 망각해서 생겨난 부채를 체벌의 고통을 감당함으로써 벗어난다. 채권자는 채무자가 당하는 고통을 지켜보고 거기서 쾌감을 느낌으로써 피해를 보상받는다. 이걸 제대로 집행하는 것이 바로 문화가 구현하는 ‘정의’이다. 잘못했으면 맞는다, 가해자가 맞는 걸 즐겁게 지켜보면서 피해자는 보상받는다, 이로써 채무관계는 깨끗하게 해소되고 채권자와 채무자 모두 그 어떤 책임으로부터도 해방된다. 채무관계가 해소되는 이러한 과정 어디에도 복수나 원한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정의는 결코 복수나 원한을 그 기원으로 삼지 않는다.

 

이와 같이 구타와 체벌이라는 문화적 훈련을 통해 인간은 비로소 약속할 수 있는 인간이 된다. 주권자인 개인, 자율적이고 초-도덕적인 개인, 더 이상 부채를 만들지 않는 인간, 책임이 없는 자, 자유로운 자, 가벼운 자, 주인이 된다.

 

13 그러나 인류 역사는 열등하고 반응적인 힘들이 승리해온 역사였고 결국 문화는 퇴행하고 말았다. 인간은 주권자 개인이 아니라 군서동물, 순종적이고 병적이며 하찮은 존재, 오늘날의 유럽인이 되었다. 문화는 반응적 삶을 보존하고 조직하고 파급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교회, 국가를 비롯한 규율권력이 인간을 반응적으로 만들었다.

 

14 반응적인 인간들은 국가, 신, 조상 등 모든 위대하고 신성한 것들에 대해 영원히 갚을 길 없는 깊은 채무감을 느낀다. 양심의 가책, 책임져야 한다는 사고방식, 채무자의 자기학대가 너무나 극심해져서 도저히 그 빚을 갚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지경에 도달한 것. 이렇게 부채는 그것이 인간의 해방에 참여했던 적극적인 특성들을 상실하고 변형된다.

 

이를테면 기독교가 대속이라 부르는 것을 보라. 더 이상 부채에서의 해방이 문제가 아니라, 부채의 심화가 문제다. 부채를 갚느라 치르는 고통이 문제가 아니라, 영원히 자신을 채무자로 느끼는 고통이 문제다. 고통이 내재화되고 채무-책임성이 죄의식-책임성이 되면서 이제 고통은 부채의 이자 이외에는 더 이상 아무 것도 갚지 못한다. 적당히 고통 받고 해방되어야 하는데 이제는 아무리 고통을 받아도 해방되지가 않음. 해방으로서의 고통이 아니라 영원한 종속으로서의 고통. 영원한 죄인이 됨.

 

내재화된 고통이 너무나 극심한 나머지 못 견디고 죽어버리면 안 되니까 사제는 고통을 견디기 위한 방어수단 또한 고안해낸다. 신에 대한 봉사, 이웃에 대한 사랑을 장려함으로써 반응적 인간들로 하여금 소소한 기쁨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15 종교는 본질적으로 원한이나 가책과는 관계가 없다. 니체는 끊임없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신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종교, 강자들의 종교가 있음을 말한다. 문제는 어떤 힘들이 종교를 독점하는가 하는 것이다. 어떤 힘들이, 누가 종교를 탈취하는가. 가령 예수라는 개인적 유형을 보자면 그는 원한의 인간도 가책의 인간도 아니었다. 기독교의 진정한 고안자는 예수가 아니라 성 바울이었다.

 

성 바울 같은 사제들이 금욕적 이상이라는 허구를 만들어낸다. 금욕적 이상은 원한과 가책의 복합체로써 고통을 근근이 견딜 만 한 것으로 만든다. 반응적 인간은 이제 천국이라는 금욕적 이상 세계를 꿈꾸며 삶과 삶 속의 모든 적극적인 것을 비하하고 세계에 무의 가치를 부여하면서 반응적 삶을 살아간다. 이렇게 원한+가책+금욕적 이상이라는 삼단 복합체의 수립으로 마침내 반응적 힘들의 승리가 완성되는데, 바로 이것이 사제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바이다. 이렇게 반응적 힘들의 승리에는 무의 의지가 하나의 동력으로서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

 

16 이와 같이 니체는 우리가 자명하게 여기는 가치들의 기원을 계보학적으로 추적함으로써 낡은 형이상학과 초월적 비판을 대체하는 권력의지의 철학을 새롭게 정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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