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 구경 - 엿보고 싶은 작가들의 25개 공간
행복이가득한집 엮음 / 디자인하우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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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 생활하는 물리적 공간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생각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단순히 환경미화 차원을 넘어선. 공간은 그곳을 점유한 집단의 가치와 철학과 사고관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되려 사람을 포박하고 지배하기도 한다. 우리는 생각하는대로 살기도 하지만 사는대로 생각할 때가 더 많고, 그런 면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는 곧 어떤 방식으로 구축된 물리적 환경 속에서 어떤 동선에 따라 움직이며 살 것인가 하는 문제와도 직결된다. 최근 살펴본 인테리어 관련서 중에서 자극을 가장 많이 받은 책이다. 인테리어에는 정답이 없고, 다만 일상의 미의식을 유지하며 각자의 삶의 방식과 취향에 따라 소신있게 고유의 양식을 개척해나가면 될 뿐이라는 걸, 25인 예술가들의 작업실 풍경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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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다지 총명하지도 못하면서 자꾸 공부를 하려고 하는 까닭이 뭘까. 생각해보면 결론은 역시 공허감 때문인 것 같다. 어쩌면 나야말로 전형적인 히스테리 자아가 아닐까. 히스테리적 자아를 존재하게 하는 것은 엄청난 공허감이다. 거대한 무(無)로 이루어진 유(有)인 그들은 몸과 마음을 다 바칠 ‘어떤 것’을 찾아내어 그것으로 무(無)라고 하는 자기를 덮어 씌워버림으로써 오로지 그 윤곽으로 자기 존재를 확인한다. 때문에 그 ‘어떤 것’은 무엇보다도 강력해야 한다. 공허를 제대로 덮어 씌워버리기 위해서. 쉽게 구멍이 뚫리거나 벗겨지면 안 되므로 또한 견고하고 튼튼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 ‘어떤 것’이 남편이나 가정이나 직업 따위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결국 관계의 산물인데, 관계라는 건 허물어지기가 너무도 쉬우니까. 강력하고 안전하고 견고한 어떤 것. 내가 찾는 그것이 현재로서 학문인 것 같다. 이런 생각이 계속 이어진다면 나는 아마도 모든 학문 중에서도 가장 형이상학적인 학문에 목매달게 되지 않을까. 철학이나 신학 같은.

 

2 삶이라는 총체적인 비의에서 오는 고독과 단순히 인간관계의 단절에서 오는 고독은 다른 종류의 것일진대 나는 자꾸만 그 둘을 혼동한다. 견고한 자폐의 성 안에 틀어박혀 그간 수집한 몇 되지도 않는 책들을 세계의 전부인 양 끌어안고 마이 프레시어스를 연발하며 사는 것이 내 모습은 아닐까. 그러면서 내가 만들어낸 이 국지적인 공간의 어둠과 음습함을 존재자의 서글픈 필연이라고 거창하게 착각하며 사는 것은 아닐까. 내부로 파고드는 습벽이 나쁜 것이 아니라 그럼으로써 실재로서의 주변을 외면하는 것, 아니 심지어 냉소하고 경멸하는 것, 나와 주변을 대립적 관계로 인식하는 그 편협한 생각의 틀이 잘못된 게 아닐까. 배움이 결코 자폐의 성을 축조하는 작업이 되어서는 안 될 일인데, 오히려 배움이란 궁극적으로 세상을 향한 가교를 놓는 작업이 되어야 할 것인데, 나는 왜 자꾸만 골룸이 되어가는지. 앎이 계속될수록 책에 대한 집착과 탐욕은 늘어나고 심지어는 책에 대한 물신화 증세까지 생겨난다. 더욱 더 어둠 속으로 기어들어가고 있다.

 

3 지금 이 순간이 고독하다면 그건 내가 전적으로 사랑이 고갈된 평화주의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에게도 상처주지 않으면서 또한 아무로부터도 상처받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단단한 껍질을 두른 채 나는 지금 그 안에 단단히 갇혀있다. 가능하면 부딪힘의 횟수를 줄이고 내부로 은신하려는 것이다. 그 어디에도 배팅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지금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생성만이 안전하고 나는 오로지 그것만을 견딜 수 있다. 독서는 사실 배팅하지 않은 데 대한 알리바이인 것이다. 알리바이가 술이나 춤이 아니라 책이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일 뿐이다. 부유하는 선택지들 사이를 아무렇게나 휘저어 낚아챈 것이 때마침 책이었을 뿐이다.

 

4 내가 풀 수 없는 문제에 관해서는 집착을 버려야 할 것이다. 흐릿한 추정과 상상 속에서 스스로를 옭아매지 말자. 무엇보다도 과거의 사건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행동은 현재로의 투신을 지연시킬 뿐이다. 아니, 과거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다. 영원히 메울 수 없는 검고 슬픈 틈 앞에서 더 이상 하릴없이 서성이지 말자. 정념에서 벗어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몫의 생을 꾸려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절망 속에서 진군할 것. 일체의 희망 없음 속에서 미소 지을 것. 현재로서는 확실히, 탐닉하고 몰두할 만한 순수하고 지고한 무언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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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로 보는 구약 성경 이야기 명화로 보는 성경 이야기
헨드릭 W. 반 룬 지음, 원재훈 편역 / 그린월드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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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비기독교인의 처지로 서양미술사를 살펴보려니 여러모로 답답한 점이 있어서 대략적인 이야기라도 알아두고자 읽었다. 성서 내용을 모르고서는 서양미술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까닭에 읽어보기는 하였으나 읽고 나서 드는 의구심은 과연 구약에서 어떤 종교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인간의 충성을 시험하기 위해 가혹한 요구를 하는가 하면, 인간사에 일관성 없이 개입하여 편파적으로 자비를 베푼다. 그는 공평하지 못하고 비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포악하고 심술궂기마저 하다. 유대의 영웅들 역시 인격적으로 썩 고상해 보이지 않는다. 동방의 영웅이 덕스럽다면, 그리고 그리스로마 영웅이 용감무쌍하다면, 유대의 영웅은 영리하고 재주와 수완이 좋아 보인다. 도덕에 크게 구애함이 없어 일견 교활해 보이기도 한다.

 

구약은 그야말로 불가해하고 가차 없는 자연과 범속한 인간 세계의 풍경을 풍부한 신화적 상상력을 가미하여 더도말도 없이 적나라하게 보여줄 뿐이다. 이러한 구약이 과연 인류의 성서가 될 만큼 독자적이고 심원한 종교적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부족 설화 혹은 소수민족사 이상의 가치가 있는가?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차차로 시편과 잠언 및 전도서 부분만 따로 떼어 엮은 책을 구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책 끄트머리에 나오는 아래 대목 때문이다.

 

<시편>의 주제는 지난 6세기 동안 지어졌던 시의 주제만큼이나 다양하다. 선악과 복수의 장엄함에서부터 자연에 이르기까지가 가장 오래 전에, 그리고 가장 아름답게 기록되어 있다.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이 무엇을 느끼고 바라고 기도했는지가 희망과 위안을 노래하는 시들 속에 녹아들어 있다. <시편>은 (...) 후대의 위대한 시인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서양 최고의 작곡가들이 여기에 곡을 붙였다. 그 장엄함은 우리가 그 언어를 알지 못하는 경우에도 도드라진다. (...)

 

<잠언>은 다르다. 여기에는 비전이나 열정이 없다. 다만 현명한 옛사람들의 지혜로운 격언들이 수록되어 있을 뿐이다. (...) <잠언>은 보통사람이 무엇을 생각하는지를 보여주며, 고대 유대인들의 관점에 대해 여러 역사서나 예언서보다 더 많이 말해준다.

 

그 다음 책인 <전도서>는 순전히 종교적인 책이다. (...) 저자는 묻는다. 평균적인 인간의 삶을 나타내는 70년 동안의 고통과 근심은 과연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모든 것의 끝은 무덤일 뿐이다. 착한 사람도 주고, 악한 사람도 죽는다. 모두 죽는 것이다. 무슨 의미가 있는가? 정의로운 사람은 박해를 받으며, 세속적인 사람은 부유해진다. 인간의 고통에는 아무 의미가 없단 말인가? “헛되고 헛되고, 모든 것이 헛되도다.” 20장 전체가 모두 이 말이다. -400~401쪽 中에서

 

흥미롭게도 구약이라고 하는 이 도저한 대하극에서 여호와는 결코 주인공이 아니다. 차라리 비중은 적으나 이야기의 전개에 있어 핵심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조커 역할에 가깝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납득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여호와는 그것을 논리적으로 봉합하기 위해 동원된다. 봉합이 끝나면 그는 다시 이야기에서 사라진다. 마치 배우가 대사를 까먹어서 헤매고 있을 때 감독이 돌연 스크린에 등장하여 상황을 수습하고 다시 사라지는 형식의 영화를 감상하는 기분이다.

 

예전에 완행버스를 타고 지방의 소도시에서 소도시로 여행을 다니던 때가 있었는데, 구약을 읽으면서 난데없이 그때 일이 생각났다. 서울에서는 버스를 타더라도 딱히 용건이 있지 않는 한 운전기사에게 말을 붙이는 승객이 거의 없다. 사실상 운전기사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는 승객들이 대부분이라고 해야 하리라. 그런데 내가 탔던 그 완행버스에서는 아주머니 승객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사과를 깎아 먹으면서 앞에서 운전하고 있는 기사님한테까지도 사과를 마구 입에 넣어 먹여주는 것이 아닌가. 맛나지라우, 하면서.

 

도로는 구불구불하고 버스는 수시로 출렁대는 와중에 보자기를 풀어헤치고 사과를 깎는 승객들하며, 클클대며 그 사과를 받아먹는 기사님하며, 그들이 주고받는 시시껄렁한 농담하며, 하여간 이 모든 것들이 나로서는 뭐랄까 그야말로 구수한 문화충격이었다. 아, 수많은 방법 중에 이렇게 버스를 타고 가는 방법도 있구나. 왜 여태까지 이런 생각을 못했지. 구약이 내게 준 신선함이 이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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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의 거의 모든 것 -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가장 알고 싶은 81가지
김병훈 지음 / 원앤원스타일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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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그 무언가에 대해 정성들여 쓴 책을 읽고 나면, 알 수 없는 따스함으로 마음이 충만해진다. 설령 실용서라도 그와 같은 독서 체험은 가능하다. 이 책이 그렇다. "자전거를 사라, 만약 네가 살아있다면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마크 트웨인의 경구로 시작되는 이 책은, "우리 땅이 좁고 더 이상 볼 것이 없다고 생각해왔다면, 꼭 한번 자전거로 이 땅의 속살을 깊숙이 파고드는 강변길을 달려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땅이 얼마나 아름답고 무구한 역사를 가진 풍경인지 새삼 깨닫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라는 저자의 제언으로 끝이 난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정말로, '자전거의 거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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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널 경멸해왔다. 요즘도 이따금 네 블로그에 들어가서 글을 읽을 때마다 도무지 참을 수 없이 역겨운 기분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에 대한 관심을 확 끊어버릴 수 없는 까닭은 네 글에 면면히 흐르는 섬세한 지성 때문이리라. 그래, 너는 재기가 있고 명석하다. 그래서 너는 아름답지. 아, 차라리 네가 시시하기라도 해버렸다면! 그렇다면 나는 당초에 너에 대한 관심조차 없었을 텐데. 이 점이 나를 얼마나 곤혹스럽게 하는지 너는 영원히 모르겠지.

 

왜 나는 너를 혐오하는가. 너는 얄팍하다. 피상성 자체가 나쁜 게 아니다. 사실 우리는 대부분 얄팍하지. 하지만 얄팍한 가운데서도 주어진 조건 안에서 눈물겨울 만큼 정직하고 겸허하고 성실한 사람들이 있어. 그러나 너는 얄팍하면서 오만하다. 얄팍한 주제에 권위적이고, 얄팍한 주제에 어른 행세를 하려 든다. 네 역량을 갉아먹는 너의 가장 큰 폐단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그 특유의 교만함이다. 네 교만이 너로 하여금 너무도 쉽게 정의와 진리를 확정짓도록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너는 별 힘도 들이지 않고 쉽게 그럴싸한 참된 것을 발견해 내어서는 그 뭣도 아닌 앎을 전시하고 계몽하려 한다. 아, 거기서 오는 역겨움을 대체 어쩔 것인가. 구제불능의 그 끔찍한 지적 속물주의를 어쩔 것인가.

 

네가 추구하는 정의라는 것은 내가 볼 땐 순 나이브하기 짝이 없다. 왜냐면 근본적으로 너는 깊이 고민하지를 않기 때문이다. 너는 너 자신과 맹렬하게 싸우지 않는다. 자신을 괴롭히지 않아. 자신에 대해 모질게 회의하려고 하지 않아. 모르지. 속으로는 열심히 회의하는지도. 그러나 너는 설령 너 자신에 대해 진지하게 회의하더라도 그것을 좀처럼 글로 적으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에 대해 회의한 것을 글로 쓰지 않는다면 나머지는 거의 다 헛소리고 개소리다. 그런 것은 그저 다 매캐한 연막 같은 것에 불과하단 말이다. 하지만 너는 특유의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영원히 그 연막을 걷어내지 못하겠지.

 

사회적 능력, 인간관계, 지적 경험, 네가 갖춘 교양과 지식 등 갖가지 방면에서 너는 무의식적으로 끝없이 너 자신을 스타일링하려고 한다. 좀 더 파고들어도 모자랄 시간을, 자기를 예쁘게 연출하고 포장하는데다가 다 써버린다. 너의 글을 보면 마치 집 앞 슈퍼에 나갔다 올 때도 화장을 하는 여자들이 떠오른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취향의 강요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만, 대체 그 화장이 무슨 소용이냐. 그 화장 좀 안 하면 안 되는 것이냐. 그러나 절망적이게도 내가 볼 때 네가 하는 화장은 의식적이라기보다는 그저 습관적이고 무의식적인 것처럼 보인다. 누군가 그러더라. 자세를 필요로 하는 자는 거짓말쟁이라고. 하여튼 너는 어린 시절부터 그래왔으니 이건 뭐 희한한 태생적 기질이라고밖에는 생각되질 않는다.

 

너는 대체 너의 민낯을 한번이라도 정직하게 들여다본 적이 있느냐. 들여다보고 울어본 적은 있느냐. 운 것을 글로 써본 적은 있느냐. 써놓은 것을 보고 역겨워서 더 크게 울어본 적은 있느냐. 너는 없다. 앞으로도 없을 거다. 영원히 없을 거다. 그게 바로 너의 한계다. 네가 영영 거기에 그렇게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는, 너의 끔찍한 한계다. 너는 너 자신을 심지어 스스로에게조차 적나라하게 드러내려 하지 않아. 왜일까. 그건 네가 늘 타인을 지나치게 의식하기 때문이지. 근본적으로 너는 너 스스로에 대해 자신감이 별로 없는 거야. 오로지 자존심만 있지. 그래서 너의 에고이즘은 견고하지 못하다. 애처로울 만큼 위태롭다.

 

자기 자신에게 투철하지도 않으면서 타인으로부터는 끝없이 인정과 선망을 얻고자 애쓰는 너의 끊임없는 자기 연출, 나이브함, 허술한 에고이즘, 어설픈 소녀 취향의 정치적 올바름, 속물성과 허영기... 아, 나는 정말이지 네 등짝이야말로 발로 차주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도무지 네 밉상스런 글을 쉽사리 끊질 못하는 것일까. 네 글에서 나의 일면을 발견하기 때문일까. 너를 혐오하기에는 우리가 꽤나 닮은 구석이 있기 때문일까. 모르겠다. 그저 술 먹고 네 생각이 나서 떠들어댔다고 해두자. 역시 나는 너를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불쾌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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