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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로 보는 구약 성경 이야기 ㅣ 명화로 보는 성경 이야기
헨드릭 W. 반 룬 지음, 원재훈 편역 / 그린월드 / 2013년 3월
평점 :
품절
비기독교인의 처지로 서양미술사를 살펴보려니 여러모로 답답한 점이 있어서 대략적인 이야기라도 알아두고자 읽었다. 성서 내용을 모르고서는 서양미술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까닭에 읽어보기는 하였으나 읽고 나서 드는 의구심은 과연 구약에서 어떤 종교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인간의 충성을 시험하기 위해 가혹한 요구를 하는가 하면, 인간사에 일관성 없이 개입하여 편파적으로 자비를 베푼다. 그는 공평하지 못하고 비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포악하고 심술궂기마저 하다. 유대의 영웅들 역시 인격적으로 썩 고상해 보이지 않는다. 동방의 영웅이 덕스럽다면, 그리고 그리스로마 영웅이 용감무쌍하다면, 유대의 영웅은 영리하고 재주와 수완이 좋아 보인다. 도덕에 크게 구애함이 없어 일견 교활해 보이기도 한다.
구약은 그야말로 불가해하고 가차 없는 자연과 범속한 인간 세계의 풍경을 풍부한 신화적 상상력을 가미하여 더도말도 없이 적나라하게 보여줄 뿐이다. 이러한 구약이 과연 인류의 성서가 될 만큼 독자적이고 심원한 종교적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부족 설화 혹은 소수민족사 이상의 가치가 있는가?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차차로 시편과 잠언 및 전도서 부분만 따로 떼어 엮은 책을 구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책 끄트머리에 나오는 아래 대목 때문이다.
<시편>의 주제는 지난 6세기 동안 지어졌던 시의 주제만큼이나 다양하다. 선악과 복수의 장엄함에서부터 자연에 이르기까지가 가장 오래 전에, 그리고 가장 아름답게 기록되어 있다.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이 무엇을 느끼고 바라고 기도했는지가 희망과 위안을 노래하는 시들 속에 녹아들어 있다. <시편>은 (...) 후대의 위대한 시인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서양 최고의 작곡가들이 여기에 곡을 붙였다. 그 장엄함은 우리가 그 언어를 알지 못하는 경우에도 도드라진다. (...)
<잠언>은 다르다. 여기에는 비전이나 열정이 없다. 다만 현명한 옛사람들의 지혜로운 격언들이 수록되어 있을 뿐이다. (...) <잠언>은 보통사람이 무엇을 생각하는지를 보여주며, 고대 유대인들의 관점에 대해 여러 역사서나 예언서보다 더 많이 말해준다.
그 다음 책인 <전도서>는 순전히 종교적인 책이다. (...) 저자는 묻는다. 평균적인 인간의 삶을 나타내는 70년 동안의 고통과 근심은 과연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모든 것의 끝은 무덤일 뿐이다. 착한 사람도 주고, 악한 사람도 죽는다. 모두 죽는 것이다. 무슨 의미가 있는가? 정의로운 사람은 박해를 받으며, 세속적인 사람은 부유해진다. 인간의 고통에는 아무 의미가 없단 말인가? “헛되고 헛되고, 모든 것이 헛되도다.” 20장 전체가 모두 이 말이다. -400~401쪽 中에서
흥미롭게도 구약이라고 하는 이 도저한 대하극에서 여호와는 결코 주인공이 아니다. 차라리 비중은 적으나 이야기의 전개에 있어 핵심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조커 역할에 가깝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납득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여호와는 그것을 논리적으로 봉합하기 위해 동원된다. 봉합이 끝나면 그는 다시 이야기에서 사라진다. 마치 배우가 대사를 까먹어서 헤매고 있을 때 감독이 돌연 스크린에 등장하여 상황을 수습하고 다시 사라지는 형식의 영화를 감상하는 기분이다.
예전에 완행버스를 타고 지방의 소도시에서 소도시로 여행을 다니던 때가 있었는데, 구약을 읽으면서 난데없이 그때 일이 생각났다. 서울에서는 버스를 타더라도 딱히 용건이 있지 않는 한 운전기사에게 말을 붙이는 승객이 거의 없다. 사실상 운전기사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는 승객들이 대부분이라고 해야 하리라. 그런데 내가 탔던 그 완행버스에서는 아주머니 승객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사과를 깎아 먹으면서 앞에서 운전하고 있는 기사님한테까지도 사과를 마구 입에 넣어 먹여주는 것이 아닌가. 맛나지라우, 하면서.
도로는 구불구불하고 버스는 수시로 출렁대는 와중에 보자기를 풀어헤치고 사과를 깎는 승객들하며, 클클대며 그 사과를 받아먹는 기사님하며, 그들이 주고받는 시시껄렁한 농담하며, 하여간 이 모든 것들이 나로서는 뭐랄까 그야말로 구수한 문화충격이었다. 아, 수많은 방법 중에 이렇게 버스를 타고 가는 방법도 있구나. 왜 여태까지 이런 생각을 못했지. 구약이 내게 준 신선함이 이와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