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찾아가는 알라딘 서재의 어느 분께 안부글을 남겼다가 이런 과분한 답장을 받았다. 관념의 감옥에 갇혀 방황하다가 새벽 공기도 느껴보지 못하게 되는 우를 경계하라는 글을 구태여 또 서재라고 하는 관념의 공간에 옮겨두는 이런 행태가 사실 난센스이다. 그러나 이제 막 관념의 세계의 원대함에 눈을 뜬 나에게는 자경문으로 삼아도 좋을 글이기도 하여 미욱한 일임을 알면서도 옮겨둔다.    

*

(...) 성인의 독서는 아이들이 낱말 카드 외우는 수준(관념을 그저 습득하는 단계)에서 더 나아가야 하는데 나이가 들어도 전혀 나아지지가 않습니다. 세상과 겨뤄보지도, 세계와 대면하지도 못했고 근근히 버텨왔기 때문에(살아 숨쉰 시간이 없기 때문에) 교묘하고 겉멋나는 말투의 아이로 영원히 남게 됩니다. 습득한 관념의 울타리가 클수록 도피와 핑계의 폭도 커져서 자신이 주체적으로 생각하며 자유롭게 사색한다고 착각합니다.

알라딘 서재의 터줏대감들은 어떤 의미에서 오타 교정반 같은 느낌입니다. '내가 누굴 안다, 내가 이 책을 읽었는데 이게 맞다.' 학자라면 그게 직업이겠죠. 그렇지만 그것은 그걸로 밥 벌어 먹는 사람들- 그런 지식 가공을 통해 생계를 영위하는 사람들의 특이한 생활 양태입니다. 참 밥맛 없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그런 양태가 삶을 옭아매는 한 자신도 주변의 사람들도 즐겁지 않습니다.

-그분들의 작업을 무의미하거나 가소롭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들의 작업이 독서에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어찌 모르겠습니까. 문제는 그분들 중에는 방대한 관념적 지식에 비해 삶은 빈약한 사람도 분명 있다는 것입니다. 특이한 지식 생활자의 삶과 사고 양태를 모범적이거나 지향해야 할 양태로 착각을 해서는 안된다는 그런 노파심일 뿐입니다. 예로부터 대다수 지식인의 삶은 회색이었고 즐겁지가 않았습니다. 소수 권력을 쥔 유복한 지식인만이 때깔을 냈을 뿐입니다.-

공허한 삶이 껍데기만 반지르하게 바꿔서 그걸로 자꾸 목소리를 키워 남에게 자꾸 이래라 저래라 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독서는 이렇습니다. 생활의 개선과 시간을 관념적으로 유희하는 즐거움!... 생활이 세계로 이어질지는 알 바 아닙니다. 그것은 각자의 선택일 뿐, 당위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배우고 습득한다가 아니라 끌리는대로 노닌다는 양태입니다.

군자에서 소인으로! 허망한 가치의 인간보다는 자신의 체험 밖에는 길이 없다는 것을 알고 일상 속의 여행을 감내하는 것, 그리고 비록 볼품 없어도 이대로의 나야말로 삶의 중심이라는 것... 손 안의 반쪽이 손 밖의 백보다 낫다는 것... 몇 장 안 달린 동화나 허름한 공룡책을 보던 어린 시절의 내가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하는 것... 독서와 지식에 위계를 부여하지 않고 그저 새로움의 즐거움에 탐닉했던 아이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

나는 출판업자도 아니고 학자도 학생도 아니라는 것! 그러니 폼잴 필요도 진지할 필요도 없다는 것!... 그 폼과 진지함이 나를 즐겁게도 자유롭게도 하지 못한다면! 결국 무성한 관념과 그로부터 비롯된 무성한 자기 울타리를 벗어나 다만 나인 소박한 자신을 만나야 한다는 것!

자신의 삶이 생겨서 일상 또는 모험에서 끌어올린 체험의 힘으로 독자적인 중력을 형성하지 않는한 끝없는 편집증적 지식 습득과 낭만적 교양의 가식 속에서 삶이 소진되고 말것입니다. 그 가식적이고 집착적인 허황된 에너지를 삶으로 조금만 끌어와도 우리 삶은 윤택해 질 것입니다.

- 책 속에는 구원이 없다. 책을 즐기는 나 속에 구원이 있다. 알라딘은 지식과 교양의 장소가 아니다. 일차적으로는 자본주의적인 책시장이다. 터줏대감들은 지식인이 아니다. 일차적으로는 자의든 타의든 책광고를 대신해주는 하수인인 것이다.-

책놀이의 관념성과 책팔이의 종속성을 감안하지 않는다면, 일상의 체험을 키워 자신의 삶의 주체로 자신을 세우지 못한다면, 몰현실적이고 무책임한 관념에 의한 정신의 속박으로 삶 전체가 헛돌 것입니다.

많은 경우 헛된 관념의 감옥 때문에 방황을 합니다. 감옥을 탈출하지 못하면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어요.- 완전 개지랄입니다. 관념의 꼭두각시로 살다가 그런지도 모르고 가는거죠. 정말 외롭고 슬픕니까? 그 외로움은 뭐고 슬픔은 뭐죠? 그냥 그렇게 느껴지십니까? 너무도 주제넘은 질문이었습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하루 종일 골방에서 책에 얽매인 인생보다 새벽 4시에 매일 새벽기도 나가는 사람이 더 행복하고 충실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전 종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벽의 느낌과 일상의 작은 여행이 있는 삶이 더 생동하는 즐거운 삶에 가깝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죠. 힘도 있고 느낌도 있고 생활도 있고 그럴 때 만나는 성경 귀절이란 삶을 변화시키는 만남이 된다는 것이죠. 우리가 독서를 한다면 적어도 새벽기도 같은 체험이어야 하지 않나요? 겨자씨만한 관념이되 삶에 들어와서 어울려 부풀고 충만한 삶을 이루는 누룩같고 숨결같은 메시지 말이죠.

앞의 이야기와 모순되지만... 저도 글을 쓰다가 저도 모르게 빠져버려서 그렇습니다... 꽤 괜찮은 방법일 수는 있겠습니다. 독서가 열림과 즐김 그 너머의 깨달음 그리고 삶에로의 귀환이 아니라면 무엇이겠어요? 그리고 대화가 바로 그런 여행이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일상의 즐김과 영원의 메시지가 결합된다면 더 좋겠죠.

뜬금없는 이야기지만 새벽기도는 교회당안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새벽에 잠을 뿌리치고 깨어나는 그 순간부터라고 생각하는 저에게는 결국 영원의 메시지도 일상에서 솟아난다고 생각이 됩니다. 깨달음에서의 귀환은 다만 새로운 여행, 일상이라는 상투의 껍질에 감춰진 Extreme으로의 출발일 뿐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현실보다 위태로운 미스테리가 없습니다.

차츰 삶의 궁극적인 의미랄지 본질이라는 것이 허구적이고 답습된 상투적 질문이 아닌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런 게 있다해도 그게 언어적인 걸까요? 만약 그런 게 있다해도 명석한 자의 거라면 저와는 무관합니다. 만약 그런게 있다해도 성숙하고 지혜로와야 된다면 유치한 현재는 무가치하다는 말입니까? 아니예요. 제 생각에는 하루를 살다 가도, 세 살을 살다 가도, 스무 살에 사고를 당해도 진정한 의미라면 어느 순간에도 열려있어야 합니다. 지금 바로 이순간 이외의 구원이나 진정한 의미는 없습니다.

상상하건대 구원은 행복한 아이들의 놀이와 같은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놀면서 한없이 즐거운 아이가 구원받은 게 아니라면 구원이라는 게 과연 무어란 말입니까? 진정한 행복이란 이런 게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모든 가치의 기준은 생동하는 삶, 즐거운 삶에 두어야 합니다. 삶은 살라고 있는 것이고 인생은 대체로 긴 길이며 긴 길은 즐기는 자의 것이니까요. 저라면 악취가 나서 코를 틀어막고 달릴 지라도 마음만은 편히 가겠습니다. 여하튼 저도 그런 방식으로 살아봐야 겠습니다.

중언부언인데 굳이 안 추리고 열어놓습니다. 그냥 선술집 개똥철학이니깐 진지하게 듣지 마세요.^^ 다만 지금의 저는 이런저런 삶의 메시지에 귀 기울이고 있다는 걸 고백할 뿐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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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24 0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양 2010-02-25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그런 마음에 이곳으로 퍼날라 온 건데, 역시 보람이 있군요 :)
 
철학과 굴뚝청소부
이진경 지음 / 그린비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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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판에는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챕터에 ‘들뢰즈와 가타리’가 추가되었고, 삽화가 도판과 도판해설로 대체되었으며, 마지막으로 <근대적 지식의 배치와 노마디즘>이라는 제목의 보론도 하나 실려있다. 새롭게 들어간 ‘들뢰즈와 가타리’ 챕터는 단순히 부연된 부분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오히려 이 책에 나오는 모든 철학사조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부분으로 여겨도 될 만 하다. 이 부분이 추가됨으로써 이전까지의 이야기는 마치 ‘들뢰즈와 가타리’를 설명하기 위한 포석처럼 느껴진다.

보론에서 저자는 ‘인문학의 위기’가 이 시대의 새로운 사태들에 대처할 만한 담론의 생산 능력 부재 탓이라고 지적하면서, 기존의 근대적 담론의 인식론적 배치 모형을 그려 보이고 있다. 이 책에 언급된 내용만을 바탕으로 생각해보면, (들뢰즈-가타리의 개념들은 아예 불가능하더라도) 적어도 푸코의 개념들까지는 어느 정도 모형 안에 끼워 맞춰볼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선험적이고 본질적인 것들'의 항에 놓일 '에피스테메'라는 개념이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배열의 특성을 가지기 때문에 사실상 일그러진(그래서 무너질 수밖에 없는) 모양새가 될 테지만...

한편으로는, 어쩌면 이러한 배치 모형 자체가 ‘철학’이라는 학문 자체를 규정하는 모형이 아닐까 싶기도 한데, 만약 이 배치 모형 안에서의 '변주'가 더 이상 어떤 새로운 의미를 갖기 어렵다면, 생물학이나 화학을 가리켜 흔히 얘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철학 역시 수명이 다 한 학문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겉핥기를 겨우 마친 자의 성급한 결론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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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불만과 슬픔을 야기하는 모든 현상, 그 현상을 아우르는 어떤 본질적이고 항구적이고 절대적인 무언가가 있으리라는 믿음, 어쩌면 그 믿음이 내가 처음부터 상정한 진리가 아니었을까. 2005년도부터 갑자기 오락이 아닌 공부의 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던 것, 책 중에서도 궁극적으로는 종교나 사상서, 철학서를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그리고 철학 가르쳐 준다는 곳을 찾아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있는 현재의 내 처지에 이르기까지

 

본질적인 무언가를 향해 느리지만 서서히 접근해 가고 있다고 여겼던 이러한 여정이 사실은, 내가 처음부터 상정했던 진리(본질적인 무언가가 있으리라는 믿음)가 근간이 되어 정당화된 하나의 실천 활동이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내가 확신했던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것의 존재, '진리가 있을 것이다'라는 내가 지어낸 그 진리란 결국, 나를 둘러싼 바로 이 상황, 나의 실천으로 이루어진 바로 이 환경, 내가 만들어낸 이 카르마 속에서 내가 나 자신을 나의 인식 수준에서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한 믿음이었던 게 아닐까.

 

동원된 믿음과 그러한 믿음을 근간으로 한 일련의 실천들의 기저에서 나를 움직였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내 안의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런 쪽으로 흘러가게 유도했을까? 어떤, 욕구 불만이 있었던 것 같다. 열등감, 아류의식, 자기애 부족, 자기확신과 자기긍정의 부족, 부족한 자아 존중감을 보충하려는 욕심 등. 욕심은 사실상 '생에 대한 욕망'이 아닐까. 오리지날하게 존재하고 싶은, 내가 나로서 여실하게 존재하고 싶은 그런 욕망. 내 몫의 생에 대한 집착.

 

고통과 불만과 슬픔이 미친 불길처럼 치솟아 올라 문득 습관처럼 이 모든 것들을 스스로 우아하게 일거에 종결해버리고 싶은 때가 있다. 사신의 유혹으로 마음이 달뜨는 그런 밤이 있다. 그러나 나는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열렬하게 살고 싶은 사람이 아닐까. '살고 싶은 욕망’에 과부하가 걸려있는 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람 아닐까.

 

살고 싶은 욕망은 곧 앎에 대한 욕망이기도 할 터, 그래서 나는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더욱 더 알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이해하는 데 있어 남들보다 늘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대신에 나에게는 곰곰이 끈덕지게 생각하는 습관이 있으니, 이것을 내 장점으로 삼아도 될 것이다. 또 나는 깨우친 것을 금방 잊어버리기도 잘 하지만, 내게는 생각한 바를 글로 남길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또 한편으로 니체에 따르면 그때그때 잊어버리는 것이야말로 놀라운 능력이라고 하니까 기실 걱정할 바가 못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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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 신곡 강의 - 서양 고전 읽기의 典範
이마미치 도모노부 지음, 이영미 옮김 / 안티쿠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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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곡> 원전을 이탈리아 어로 낭송하면 어떻게 들릴까. 섬세하게 배열된 각운들이 빚어내는 음악적인 효과를 감지하지 못하고 그저 활자로만 <신곡>을 음미할 수밖에 없는 점이 안타깝다. 비록<신곡>을 아직 읽어본 적 없고, 혹자는 제대로 완독하기에도 버거운 고전이라고 하지만, 설령 완독한다 해도 운율을 음미하지 못한다면 영원히 반쪽 밖에 모르는 게 아닐까.

이 책은, 외국시가 운율의 문제 뿐 아니라 원전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있어서도 전혀 다른 느낌을 줄 수 있다는 점 역시 잘 보여준다. 예를 들면, "낭독했을 때 참으로 멋스럽게 들린다"는 지옥편 제 1곡 첫 3행(Nel mezzo del cammin di nostra vita / mi ritrovai per una selva oscura / che la diritta via era smarrita.)은 이렇게나 다양한 뉘앙스로 해석될 수가 있다.

(1)나 올바른 길 잃고, 인생 나그넷길 반 고비에 어두운 수풀에 있었노라
(2)인생길 한가운데에, 올바른 길을 벗어난 내가, 눈을 떴을 때는 어두운 숲속에 있었다
(3)칠십 길 사람 목숨 반 고비에, 올바른 길 잃은 나는, 어느 어스름한 숲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였노라
(4)우리네 생명 길 한가운데에서, 어두운 삼림에 있음을 알았으나,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 있었다 

이 책에서는 저자가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고 있으니까 그러려니 하지만, 원전의 언어를 모르는 상태로 <신곡> 자체만 읽게 되면, 시행이 도중에 이탈리아어에서 라틴어로 바뀐다 해도 그것이 의도하는 효과라든가 어감의 변화를 읽어낼 수 없을 것이다. 다듀나 드렁큰타이거가 아무리 좋아도 투팍이나 에미넴은 도무지 넘사벽이더니 <신곡>도 마찬가지다.

2. 천국편을 시작하기에 앞서 단테는 “성광을 더없이 듬뿍 받는 하늘에서 무수한 것들을 보았으나” 그곳을 떠나 내려온 지금 “이를 이야기할 방도를 모르고 또한 그리할 수도 없”다고 하면서 천국 묘사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천국은 인간 언어의 길을 실로 긍정적인 의미에서 끊어낼 뿐 아니라, 인간 지성이 포괄하는 힘과 범위를 넘어 기억에조차 담을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빛으로 넘쳐난다. 이해를 넘어서는 신비의 세계인 천국을 예언적으로 말해야 하기 때문에” 천국편은 어려울 수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르네상스 시대 인문주의자가 꿈꾸었던 천국의 모습을 가늠해 보면, 그곳은 결코 평화롭고 정적인 상태의 계가 아니라, "무수한 대학자들과의 문답을 통한 지적 대화가 이루어지는 공간"이며, "자연과학, 천문학, 철학, 신학의 학문적 지식이 응축된 장"이다. 천국은 이렇게 “지적 환희의 공간”이면서 또한 “사랑이 작용하며 하계 사람들의 구령(救靈)을 소망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단테가 상상한 지옥과 연옥과 천국의 환경은 지극히 구체적이고 실제적이어서 결코 피안의 관념적 세계로 여겨지지 않고, 현세에도 얼마든지 다른 버전(?)으로 치환되어 존재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 단테가 구상한 천국 역시 어찌보면 꽤 현실감 있는 청사진 같지 않은가.

3. 아래는 이 책에서 인용한 천국편 일부. 아무래도 <신곡>을 펼칠 엄두가 안 나서 '신곡을 안내하는 베아트리체'라는 이 책을 먼저 읽게 되었는데, 이런 멋진 구절을 읽고 있으려니까 원전은 어떨지 궁금해진다.

너무나 쉽사리 단정 지어
들판의 이삭이 채 여물기도 전에
어림으로 값을 매기는 사람이 되지 마라.
겨울에는 염려스럽기 그지없는 가시나무가,
후에 그 앙상한 가지에 장미꽃을
피운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드넓은 창해를 쏜살같이 치달려
머나먼 뱃길을 건너간 배가
항으로 들어서자마자 가라앉는 모습을 보았다.
한 사람이 훔치는 것을, 다른 이가 봉헌하는 것을
보았다 하여 세인(世人)이여 신의 심판이
끝났다 여기지 마라, 있을 수 있는 일은
전자의 갱생 후자의 타락. (p.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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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서양철학사 (양장)
버트런드 러셀 지음, 서상복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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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무렵 분석철학을 정초했던 사람이 쓴 책이니 정말 오래된 책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러셀의 서양철학사는 한철하 번역으로 95년도에 대한교과서에서 나온 것인데, 알라딘 도서목록에 없어서 최근에 나온 근사한 책으로 아무 거나 올린다.) 실제로 오늘날 탈근대 철학의 아버지 뻘 되는 철학가들이 이 책에서는 당당히 현대철학자로 분류되어 있고, 60년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적 선구자로 부각된 니체 역시 아직 비합리주의적 파시즘의 원류로 등장한다. 저자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바람에 더 이상 개정되지 못한 이런 부분들이 물론 아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세계대전 시기 자유진영 철학자가 당대를 바라보던 관점을 가늠해볼 수 있어서 흥미롭기도 하다.  

러셀은 현대에 와서 방만해진 무정부주의적인 경향들이 급기야 고삐 풀린 낭만주의로 치달아서 그에 반하는 여러 가지 반동사상이 형성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탈근대 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근대 이후로 접어들면서 오히려 대타자의 통제 기능이 더욱 더 세련되고 은밀하고 정교하게 진화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무정부주의가 극에 달했다고 하는 이런 대목은 어쩔 수 없이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진다.) 중간적 타협 철학으로 나온 게 정부와 개인에게 각각 그 한계를 부여하려고 하는 ‘자유주의 사상’이고, 이보다 더 철저한 반동은 신에게 부여했던 지위를 국가에 대해 부여하는 ‘국가 숭배 사상’(파시즘)이라고. ‘공산주의’는 이와는 상관없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국가 숭배의 결과로 나타나는 사회와 대단히 유사한 사회가 된다. 

자유진영 대 공산진영, 진보와 보수라는 이분법은 냉전 시대에 숨을 거둔 20세기 철학자 러셀이 서양철학사를 이해하는 하나의 강력한 도식이 된다. 즉, 러셀은 기원 전 600년으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긴 발전을 통해 철학자들이 두 부류로 분류되어 왔다고 설명한다. 사회적 결합을 강화시키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다른 한편으로는 그 결합을 완화시키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그것이다. 전자는 인간성에서 비합리적인 부분을 더 중요시하며, 과학을 적대시하고, 교의체계를 제창하고, 영웅적 행위를 중시하는 규율주의자들이다. 후자, 즉 자유론자들은 극단의 무정부주의자를 제외하고는 과학적이며, 공리주의적이고, 합리주의적이며, 격정을 반대하고, 심오한 종교들과 적대하는 경향을 보인다.

<철학과 굴뚝청소부>에서 이진경이 주체의 구축과 해체를 키워드로 하여 서양철학사를 맥락화했던 데 비해 러셀의 이런 이야기는 어쩔 수 없이 구식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이 신식이고 무엇이 구식인지가 아니라, 시대의 변화에 따라 철학사가 전혀 다른 키워드와 잣대로 새롭게 맥락화 될 수 있다는 점이리라. '맥락화'란 어디까지나 의미 부여의 문제이고 해석하기 나름의 문제이므로, 고정불변의 정답이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인류의 역사에 별처럼 빛나고 있는 위대한 철학가와 철학가를 연결하여 거대한 하나의 별자리를 만들어가는 일이란, 모든 창조적인 작업이 그러하듯 언제나 설레고 떨리는 일이겠다. 그리고 이렇게 별자리를 연결해나가는 일은 최신의 담론으로 논의되는 당대의 작업일 수도 있겠지만, 철학사를 공부하는 개인에게 있어서는 자신만의 고유한 철학을 정립하기 위한 평생의 작업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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