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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서양철학사 (양장)
버트런드 러셀 지음, 서상복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2차 세계대전 무렵 분석철학을 정초했던 사람이 쓴 책이니 정말 오래된 책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러셀의 서양철학사는 한철하 번역으로 95년도에 대한교과서에서 나온 것인데, 알라딘 도서목록에 없어서 최근에 나온 근사한 책으로 아무 거나 올린다.) 실제로 오늘날 탈근대 철학의 아버지 뻘 되는 철학가들이 이 책에서는 당당히 현대철학자로 분류되어 있고, 60년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적 선구자로 부각된 니체 역시 아직 비합리주의적 파시즘의 원류로 등장한다. 저자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바람에 더 이상 개정되지 못한 이런 부분들이 물론 아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세계대전 시기 자유진영 철학자가 당대를 바라보던 관점을 가늠해볼 수 있어서 흥미롭기도 하다.
러셀은 현대에 와서 방만해진 무정부주의적인 경향들이 급기야 고삐 풀린 낭만주의로 치달아서 그에 반하는 여러 가지 반동사상이 형성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탈근대 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근대 이후로 접어들면서 오히려 대타자의 통제 기능이 더욱 더 세련되고 은밀하고 정교하게 진화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무정부주의가 극에 달했다고 하는 이런 대목은 어쩔 수 없이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진다.) 중간적 타협 철학으로 나온 게 정부와 개인에게 각각 그 한계를 부여하려고 하는 ‘자유주의 사상’이고, 이보다 더 철저한 반동은 신에게 부여했던 지위를 국가에 대해 부여하는 ‘국가 숭배 사상’(파시즘)이라고. ‘공산주의’는 이와는 상관없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국가 숭배의 결과로 나타나는 사회와 대단히 유사한 사회가 된다.
자유진영 대 공산진영, 진보와 보수라는 이분법은 냉전 시대에 숨을 거둔 20세기 철학자 러셀이 서양철학사를 이해하는 하나의 강력한 도식이 된다. 즉, 러셀은 기원 전 600년으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긴 발전을 통해 철학자들이 두 부류로 분류되어 왔다고 설명한다. 사회적 결합을 강화시키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다른 한편으로는 그 결합을 완화시키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그것이다. 전자는 인간성에서 비합리적인 부분을 더 중요시하며, 과학을 적대시하고, 교의체계를 제창하고, 영웅적 행위를 중시하는 규율주의자들이다. 후자, 즉 자유론자들은 극단의 무정부주의자를 제외하고는 과학적이며, 공리주의적이고, 합리주의적이며, 격정을 반대하고, 심오한 종교들과 적대하는 경향을 보인다.
<철학과 굴뚝청소부>에서 이진경이 주체의 구축과 해체를 키워드로 하여 서양철학사를 맥락화했던 데 비해 러셀의 이런 이야기는 어쩔 수 없이 구식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이 신식이고 무엇이 구식인지가 아니라, 시대의 변화에 따라 철학사가 전혀 다른 키워드와 잣대로 새롭게 맥락화 될 수 있다는 점이리라. '맥락화'란 어디까지나 의미 부여의 문제이고 해석하기 나름의 문제이므로, 고정불변의 정답이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인류의 역사에 별처럼 빛나고 있는 위대한 철학가와 철학가를 연결하여 거대한 하나의 별자리를 만들어가는 일이란, 모든 창조적인 작업이 그러하듯 언제나 설레고 떨리는 일이겠다. 그리고 이렇게 별자리를 연결해나가는 일은 최신의 담론으로 논의되는 당대의 작업일 수도 있겠지만, 철학사를 공부하는 개인에게 있어서는 자신만의 고유한 철학을 정립하기 위한 평생의 작업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