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극장 - 영원회귀와 권력의지의 드라마
고명섭 지음 / 김영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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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쓰신 분이 언론인이라서 그런지 니체를 조망하는 데 있어서 객관성을 확보하려고 몹시 애쓰신 것 같지만 그럼에도 이 분은 니체를 형이상학적으로 보는 관점에 대해서는 확실히 부정적인 것 같다. 조심스러워 하시는 것 같다. 종교인이 아니라 언론인이어서 그러시겠지만. 그러나 니체의 권력의지를 단순히 "우리 세계 안의 우리 생명체들의 문제"로, 더욱이 "사회를 형성하고 역사를 만들어 가는 우리 인간들, 그리고 창조하고 투쟁하는 개인들의 문제”로 선을 그어버리면 니체는 다만 정치심리학자 내지는 사회생물학자밖에 안 되는 거 아닌가. 단지 그 정도만은 아닐 것 같은데. 내가 신비주의 취향이라 그런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막연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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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 사주명리학과 안티 오이디푸스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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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내용대로라면 사주명리야말로 후기구조주의적인 학문에 가까운 것 같다. 그러면서도 푸코나 라캉처럼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구조가 발휘하는 미시적인 영향력 면에 있어서 푸코의 권력이론보다 음양오행의 순환원리에 기반한 사주명리학이 훨씬 더 역동적이고 웅장해 보이기도 하고. 게다가 사주명리학은 '저항'에 대한 생각을 할 것도 없이 그 자체로 충만하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시적이고. 고미숙 선생님의 필터에 걸러져서 이렇게 느껴지는 것인가. 맛보기 책만 겨우 읽어놓고 호들갑을 떠는 지도 모르겠지만.

 

이론에서 느껴지는 사나운 기운(?)의 강도로만 따지면 니체랑 푸코가 가장 성질이 나 있는 것 같다. 원한감정이 느껴진다. (후기)라캉은 화를 내는 대신 다소간 허무와 공포에 질려있는 것 같다. 반면에 사주명리는 세계에 대해 섬뜩해하지도 경악스러워하지도 않는다. 이 학문은 공포나 비극적 파토스 같은 게 없는 듯하다. 오히려 아름다운 음악이 들리는 것 같다. 우주의 원환(圓環) 속에서 공명이 화음으로 울려 퍼진다. 스피노자하고도 호응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사주명리로 해석된 세계 속에서 구태여 전복적 사유랄 만한 것을 모색해보자면 그것은 아마도 도통(道通), 즉 깨달음일 텐데 그러나 이것을 저항이나 탈주, 주체의 탈구축 등으로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차라리 깨달음은 주체와 구조의 대치 상황 자체를 무화시켜버리는 일이겠다. 그런 언표들로는 설명되지 않는 전혀 새로운 판을 짜버리는 일이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운명 사용 설명서'다. 인터넷 무료 사주사이트 같은 데서 사주명식을 뽑아다가 이 책을 참고하여 자기 사주를 간단히 진단해볼 수 있다. 역시나 자기 사주는 자기 스스로 분석해볼 필요가 있는 듯. 내 몫으로 펼쳐진 판을 한 번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이다. 이 판 위에서 어떻게 하면 신명나게 뛰어놀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미학적으로 빼어난 일생을 완성해낼 수 있을까 궁리를 해보면서. 그러나 궁리의 끝은 결국 ‘도 닦기’로 귀결되는 모양이다. 쉽지 않다 참.

 

사주명리학이 유불도 삼교회통으로, 나아가 궁극적으로 수행론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거듭 말하지만, 자기를 구하는 건 결국 자기밖에 없다! 따라서 용신을 제대로 쓴다는 건 존재 전체를 걸고 베팅을 하는 것, 곧 ‘도를 닦는’ 것을 의미한다. 도란 무엇인가? 육조혜능이 말했듯이, 도는 모름지기 통하고 흘러야 한다. -도수통류(道須通流)! 용신의 핵심이 순환이라면, 이 순환의 동그라미는 반드시 도로 통하게 되어있다.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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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 현대의 지성 118
다케우치 요시미 지음, 서광덕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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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아전쟁 당시 소집 명령을 받고 중국 전선으로 떠나기 전 지은이가 유언의 심정으로 남긴 책이라 한다. 중국에 총부리를 겨누어야 하는 중국문학 연구자의 운명이란 얼마나 얄궂은가. 삶이 던지는 잔혹한 물음에 응답하기 위한 방편으로 무엇보다 저자 본인을 위해 써내려갔던 책이어서일까. 읽기가 쉽지 않다. 다소 난삽하게 느껴지기마저. 친절한 위인전 같은 걸 기대했다가 예상 밖에 루쉰이라는 한 인간의 심층에 도달하기 위한 지난한 여정으로서의 글쓰기를 만났다. 다양한 각도와 거리에서 이리저리 가늠해 보면서 조심스럽게 수정하고 덧붙여 나가는 조형적 글쓰기. 실마리를 추적해 들어가다 막다른 골목이 나오면 되돌아 나오기도 하는 그런 글쓰기. 그 쉽지 않은 글쓰기를 뒤좇다 보면 서서히 루쉰이라는 인물의 상(像)이 떠오른다.

 

내면 깊은 곳에서의 루쉰은 개인주의자이고 회의주의자였으며, 과감히 말하면 비관주의자요 허무주의자였다. 그런 그가 낡은 사회의 위선을 고발하고 자유에의 갈구를 호소하는 소설을 썼다는 것은 "작가가 작품에서 불거져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처음부터 작품 밖에 서서 작품에 등을 돌리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루쉰은 애당초 자신의 내부가 아닌 외부에 소설의 세계를 구축했던 것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허무의 심연을 내면에 포함한 고독의 정신이 어떻게 현상으로서 계몽가가 될 수 있었을까.” 여기서 저자는 ‘계몽가 루쉰’을 부단히 생성해내는 근원적 동력으로서 '문학가 루쉰'을 불러낸다.

 

문학가란, 혹은 문학가로서의 자세란 무엇일까. 저자의 언설을 추려보면 그것은 고통을 예민하게 지각하고 그 고통과 쉼 없이 대결하는 삶의 태도를 일컫는다. 이를 위해서는 불편과 고통을 낳는 모든 가치들에 대해 끊임없이 부정하고 저항해야 한다. 결코 머물러서는 안 된다. 루쉰은 그렇게 살았다. 그는 과거의 낡은 가치뿐만 아니라 당대의 모든 진보적 가치들 또한 부정했으며 종국에는 ‘절망이 허망한 것은 바로 희망이 그러함과 같다’는 깨달음을 통해 모든 것에 절망하는 자기 자신마저 부정했다.

 

심층의 기저에 완고한 뼈대를 이루고 있는 무(無)에 대한 근원적 자각에도 불구하고 루쉰은 결국, 자신과 철저하게 대립하는 소설을 써낸다. 그것은 곧 자기반역이자 자기희생이다. 게다가 연후에는 엄정한 자기 추궁 끝에 소설마저도 버려버린다. 그는 그렇게 끊임없는 부정성의 운동 속에서 혼돈과 모순을 살아내었다. ‘사람은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신념으로, 성실한 생활인으로서, ‘쩡짜’적으로 살았다. 저자는 여기서 어떤 순교자적인 에토스를 읽어낸다.

 

다케우치가 그려내는 루쉰은 하나의 육중한 슬픔으로 와 닿는다. 차라리 그것은 강철로 된 무지개 같은 슬픔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이 슬픔의 질감과 규모를 머리로밖에 헤아리지 못했다고 적는 편이 옳을 것이다. 아직 온전히 가슴으로는 실감하지 못했다고, 그렇게 적는 편이 정직할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나는 얼마나 더 깊어져야 할까. 얼마나 더 깊어질 수 있을까. 이 책은 읽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이 책은 원래 쉽게 읽어버릴 수 없는 책이라야지 옳다. 루쉰이라는 사람의 내면의 내용에 부합하는 타당한 형식으로서, 안개 낀 깊은 숲처럼 그렇게 이루어져 있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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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정치적으로는 차라리 좌우를 초월한 아나키스트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는 민주주의를 비롯한 모든 '정의로운' 근대 정치개념 자체에 회의적이며, 정치적 주장들의 올바름을 논하기보다 그것들 저마다를 하나의 힘으로서 가치평가하고 그 힘을 어떻게 활용할 지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는, 그러면서 궁극적으로는 국가체제 자체의 붕괴를 전망하는, 어찌 보면 정치적 염세주의자, 견유주의자에 가까워 보인다. <반시대적 고찰>에서 니체가 전망한 이상 국가는 "천재공화국"이었다. 천재공화국이란 아마도 거리에의 파토스를 지닌 천재들로만, 오로지 강자들로만 이루어진, 에고이스트들의 느슨한 연합체 같은 형태가 아닐까. -일주일 전에 쓴 글

 

아니다, 결국 니체는 야만사회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시대착오적 반동주의자일 뿐이다. 정치사상가로서의 니체는 덜 떨어진 미치광이에 불과하다. 니체는 철저히 개인윤리 차원에서만 읽고 치워버려야 할 것이다. 영원회귀에 관해서는 종교적으로 변용하여 이해해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만이다. 심리적인, 정신적인, 영적인 차원에서만 효용이 있다. 거기서도 취할 것만 취하는 게 좋겠다. 갈가리 찢어서 젓가락으로 날렵하게 발라먹고 나머지는 개나 줘버리는 게 낫겠다. 헛소리의 일인자. 정서가 불안한 조증 환자의 경박한 정신상태로 인해 출항할 당시부터 이미 인식의 망망대해에서 난파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자. 정신의 무게중심을 찾지 못해 이카루스처럼 추락해버린 자. 깨달았으나 깨달음을 감당할 그릇이 못되었던 자. 위대하지만 나쁜 예. 허세와 자뻑의 제왕. 백년이 지나도록 텍스트로 살아남아 자신이 비난했던 딱 그 유대인의 방식으로 사람들을 전염시키는 괴물. 철학자가 되고 싶었으나 결국은 너무나 문학적이었던 인간. 그야말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 경멸하고 싶으나 경멸할 수 없는, 열광하고 싶으나 열광할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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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에 만원권 지폐를 주웠다. 내 평생 언제 또 이런 큰 돈을 길바닥에서 줍게 될 날이 오련가 싶어 눈시울을 글썽이며 떨리는 손으로 돈을 줍고 있을 때 등 뒤에서 탄성인지 탄식인지 모를 짧은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행운이 따랐다면 간발의 차이로 나 대신 만원을 주웠을 어느 중년 여인이 뱉어낸 소리였다. 괄약근 단속을 소홀히 하여 얼떨결에 방출되어버린, 흡사 방귀 같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갑자기 쾌감이 배가되어 한 삼만원 쯤 주운 기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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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3-01-05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양님 넘 재미나요ㅎㅎ 솔직하게 기뻐하는 심정. 아흑 올해 대박행운의 조짐인거야요.^^

수양 2013-01-05 16:02   좋아요 0 | URL
그런 거라면 프레이야님께도 대박행운을 나눠드릴게요ㅋ

2013-02-24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그 뒷사람은 아마 어딘가 블로그에 '간발 차에 의한 불운'을 투덜거리는 페이퍼를 썼을 거예요.

수양 2013-02-25 00:17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 마저마저요 그렇겠군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