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reat Gatsby (Paperback, 미국판) - 『위대한 개츠비』원서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 Scribner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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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돈 많아도 근본 없이 그들만의 리그를 넘봤다가는 파멸에 이르고 만다는, 문화자본의 무시무시함을 보여주는 이야기. 가문이나 학벌 같은 것도 좀 번듯한 종류로 갖추고 있어야 하고, 특히 대화할 때는 자꾸 Old sport라는, 이봐 형씨 쯤 되는 이상한 말 같은 건 절대 쓰질 말어야 한다고. 그런 디테일을 챙기지 못했을 때 이카로스 날개의 밀랍은 녹기 시작하는 것이다. 꿈 많은 졸부를 함부로 끼워주지 않는, 카프카의 성처럼 견고한 이 세계에서는. 


읽으면서 드는 의문들. 개츠비는 왜 ‘위대’한가? 감탄인가 조롱인가. 웨민쥔의 웃는 사람 그림처럼, 한없이 웃고 있다 보니 별안간 꺽꺽 우는 것만 같아 흠칫해서 다시 들여다 보면 또 여전한 함박웃음에 잠겨 있는, 그런,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도통 모를 great인가. 작중 화자는 개츠비에 대해 졸부 특유의 서툴고 천박한 구석까지도 흡사 보고서를 쓰듯 초연하고 건조하게 적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애틋함과 측은함을 감추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그 사이 어디쯤의 great일 듯.

또 하나, 데이지는 나쁜 년인가? 글쎄, 그런 면도 분명히 없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판단 자체가 어쩌면 ‘여알못’의 남성 시각적인, 관점주의적인 것인지도. 이 여자는 전형적인 히스테리성 주체 같다. 라캉이 ‘성적 관계 같은 그런 것은 없다’고 선언했을 때 거론했던 그 여성적 범주의 주체. 개츠비가 강박증적으로 ‘넌 이것을 원하지? 원할 것임에 틀림없어! 원한다고 말해!’ 하며 다그치는 식이라면, 이 여자는 자기도 자기가 뭘 원하는지 모른다. ‘종잡을 수 없음’이야말로 그녀의 매력이자 한계이며 또한 그녀의 고통이리라.

워낙에 ‘여잘알’인 그녀의 남편 탐은 신기하게도 그녀의 이런 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The trouble is that sometimes she gets foolish ideas in her head and doesn't know what she's doing” -131쪽) 그녀가 안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고 말하는 개츠비와 달리, 그녀가 모른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고 말함으로써, 그 모든 인간적 결점에도 불구하고 탐은 그녀의 짝이 될 자격을 얻는다. 어떤 면에서 그는 정말로 현자인 것이다. (“He nodded sagely.” -같은 쪽)

그러나 종잡을 수 없는 바로 그 점 때문에, 데이지는 탐과 짝을 이루면서도 또한 결코 탐과 묶이지 않는다. 그녀를 단순히 투박하게 속물적 인간으로 분류해 버리면 탐과 겹치지 않는 그녀의 여분은 조명되지 않은 채로 묻혀버릴 것이다. 만약 소설의 화자가 데이지였다면 어땠을까? 사건을 입체적으로 구성하는 또 다른 진술을 들려주지 않았을까?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그 미지의 진술에서 그녀가 ‘나쁜 년’도 ‘뭘 모르는 년’도 아니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될 지 모른다.


이렇게 다른 시점의 가능성에 대해서 상상해 보게 되는 이유는, 이 소설이 애당초 하나의 작은 핀홀을 통한 특정 각도의 그림만을 제한적이고 부분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화자가 시종 냉철하고 절제된 태도를 취하며 객관적 보고자를 자처하는 듯 하나 그도 역시 간과하고 있는 게 하나 있다. 남녀 사이에 아이가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돌이킬 수 없는 평생의 결탁이며 이미 모종의 공모 관계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여주인공의 캐릭터 말고도 상투적인 요소들이 상당한 이 소설을 식상하지 않게 만드는 힘은 무엇일까. 서사의 전달 방식이라든가 박진감을 자아내는 정교하고도 극적인 장치들 그러니까 이야기를 매혹적으로 조립해 나가는 기술, 피츠제럴드의 내밀한 고백처럼 들려오는 작중 화자의 상념들, 절제된 서술 속에 깃든 인간 심리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 또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지는 이런 간결하고도 아름다운 장면 묘사에도 지분이 있을 것이다.

We walked through a high hallway into a bright rosy-colored space, fragilely bound into the house by French windows at either end. The windows were ajar and gleaming white against the fresh grass outside that seemed to grow a little way into the house. A breeze blew through the room, blew curtains in at one end and out the other like pale flags, twisting them up toward the frosted wedding-cake of the ceiling, and then rippled over the wine-colored rug, making a shadow on it as wind does on the sea.

The only completely stationary object in the room was an enormous couch on which two young women were buoyed up as though upon an anchored balloon. They were both in white, and their dresses were rippling and fluttering as if they had just been blown back in after a short flight around the house. I must have stood for a few moments listening to the whip and snap of the curtains and the groan of a picture on the wall. Then there was a boom as Tom Buchanan shut the rear windows and the caught wind died out about the room, and the curtains and the rugs and the two young women ballooned slowly to the floor. -8쪽


이 대목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2013년작 영화에서는 그야말로 꿈결같이 구현해 놓았다. 나중에 탐이 커튼을 수습한 뒤 창문을 쾅 닫아버리는 순간까지도. 이 외에도 오로지 피츠제럴드만이 쓸 수 있을 법한 인상적인 구절들이 많다.


"If it wasn't for the mist we could see your home across the bay," said Gatsby. "You always have a green light that burns all night at the end of your dock." Daisy put her arm through his abruptly but he seemed absorbed in what he had just said. Possibly it had occurred to him that the colossal significance of that light had now vanished forever. Compared to the great distance that had separated him from Daisy it had seemed very near to her, almost touching her. It had seemed as close as a star to the moon. Now it was again a green light on a dock. His count of enchanted objects had diminished by one. -93쪽


이 부분도 그 함축하는 바가 예리하게 느껴진다. 개츠비가 멀리서 늘 열망해왔던 초록빛은, 정작 원하던 것을 손에 넣었다고 확신한 순간 공교롭게도 그날따라 짙은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그는 지금 옆에서 데이지가 팔짱을 끼는 것도 모른 채 자기가 한 말에 취해 있다. 이 무슨 양자역학의 역설(?) 같은 상황이란 말인가. 피츠제럴드는 판타지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정확히 꿰뚫고 있다. 그는 우리가 어떻게 판타지로부터 미끄러지는지를, 그 불가피하고도 불가해한 어긋남을 정확하게 포착한다. <위대한 개츠비>는 결국 이 어긋남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동부 드림이든 세이렌 같은 여자에 대한 드림이든.  


번역에 대한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랙 걸린 문장이 한 두 개가 아니지만 초반부에 제일 어려웠던 문장: The wind had blown off, leaving a loud, bright night, with wings beating in the trees and a persistent organ sound as the full bellows of the earth blew the frogs full of life. 큰 소리 나는 밝은 밤을 남겨둔 채로 바람이 가라앉았다. 무슨 소리냐 하면- 나무에서는 날개들이 부딪치는 소리, 대지 가득한 풀무(오르간 칠 때 밑에서 밟는 바람넣는 기구)가 개구리에게 넘치는 생명력을 불어넣을 때마다 계속되는 오르간 소리(=수많은 개구리들이 우는 소리로 대지에 생명력이 가득함).

이게 한국어 한 문장으로 번역이 가능한가. 가능하다. 시사영어사 영한대역 문고본에선 이렇게 풀어놓았다. “바람은 가라앉았고 나무에서는 새들이 푸드득거리는 소리, 땅에서는 개구리들이 대지의 풀무로 생명을 들이마시는 풍금 같은 소리가 요란히 들리는 휘영청 밝은 밤이었다.” 정확하긴 하지만 원문을 참조하지 않은 상태에서 번역된 문장만 읽어보면 좀 의아하게 와닿지 않을까. 대지의 풀무로 생명을 들이마시는 풍금 같은 소리라니, 이 무슨 풀 뜯어먹는 소리란 말인가.

문학동네 김영하 번역본은 이렇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시끌벅적하고 활기찬 밤이 남겨졌다. 나무들에서 날개가 부딪치고 자연이 빚어내는 끊임없는 오르간소리가 땅속에 잠들어 있는 개구리들에게 생명을 불어넣고 있었다.” 오르간 소리가 곧 개구리 울음이라고 생각한 나에게 이 문장은 더 의아할 뿐만 아니라 애당초 선선한 여름밤에 개구리가 왜 땅 속에 잠들어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문장 만큼은 매끄러워 보인다.

매번 절감하지만 영문학 작품은 참 어렵다. 시적이고 서정적인 배경 묘사, 도치된 문장, 완곡어구, 생략된 문장 구성 성분, 암시하는 속뜻이나 뉘앙스, 장면의 분위기와 인물의 태도 등등을 정확하게 알아채기 어려우니 두터운 안갯속을 더듬어 나아가는 기분. 이 소설도 문학동네 김영하 번역본과 시사영어사 영한대역문고본(황당하게도 3,5,6장이 줄거리 요약으로 대체되어 있어 부득이 김영하 번역본으로 갈아탐)에 의존해서 겨우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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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볕 아래 들끓는 날벌레 속에서 어찌나 당당하고 건장하게 피었던지. 화병에 담긴 그 어떤 꽃에서도 감지할 수 없던, 소리 없이 포효하는 기운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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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 개정보급판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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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부는 강제수용소에서의 개인적 체험, 후반부는 정신과 의사인 저자가 정립한 로고테라피 이론의 소개로 이루어져 있다. 인상 깊은 것은 저자가 소위 환경결정론을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그 어떤 극한의 억압적 환경 속에서도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자유의지, 즉 인간에게는 언제나 주체적 선택의 자유가 있음을 부단히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우슈비츠에서 아내와 부모를 잃고 여러 수용소를 전전하다 가까스로 살아 돌아온 저자의 이력을 감안할 때 이러한 주장이 갖는 깊이와 울림, 그 호소력은 상당하다.

주체적 선택의 자유에 앞서 저자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으려는 노력이다. 삶의 의미와 목적이란 결코 항구적인 것도, 추상적으로 접근할 만한 어떤 것도 아니다. 대단히 구체적이고 개별적이며, 상황에 따라 가변적이기도 한, 어디까지나 당사자 스스로 강구해 나가야 하는 실존적 주제이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는 니체의 말을 인용하면서 저자는 삶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끊임없는 상기와 믿음이 자신을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게 한 힘이 되었음을 고백한다.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방법으로 저자가 꼽고 있는 세가지 길은 다음과 같다. 첫째,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둘째,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선, 진리, 아름다움, 자연과 문화의 향유)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사랑의 체험). 셋째,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첫 번째는 창조적인 일을 통해 가치를 실현하는 적극적인 삶이다. 두 번째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소극적인 삶이다. 비교 우위를 논할 수 없는, 둘 모두 개별적인 삶 속에서 인간이 이룰 수 있는 훌륭한 성취이다.

하지만 저자가 단연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창조와 즐거움이라는 두 기회가 모두 절멸했을 때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세 번째 길이다. 인간이 시련을 가져다주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그에 대한 자신의 내적 태도를 스스로 결정할 수는 있다. 시련에서 의미를 구할 것인가, 그러니까 자신의 시련을 가치있는 것으로 만듦으로써 외형적인 운명을 초월해 자신의 존재를 높일 것인가. 아니면 시련과 함께 휩쓸려 갈 것인가. 고귀할 것인가 추락할 것인가. 주체적 선택의 자유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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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말러 & 프로코피예프 : 교향곡 1번 & 피아노 협주곡 3번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외 / euroarts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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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베르비에 페스티벌 실황 녹음이었던 유자왕의 멘델스존 6중주가 참 좋길래 그 뒤로 유튜브에서 유자왕 연주를 계속 찾아보던 중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3번 연주 영상을 발견했다. 아쉽게도 알라딘으로는 옮겨올 수 없게 되어 있는데 아마도 이 DVD에 실린 게 바로 그 영상 아닐까 싶다. 이걸 사지는 않았다. 나로서는 프로코피예프고 말러고 도저히 자주 꺼내 들을 것 같지가 않어.

하지만 유튜브에서 본 영상이 잊히지가 않는다. 아니 잊히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보면 볼수록 홀려든다. 긴장 어린 불협화음과 서정성이 묘하게 공존하는 프로코피예프의 장쾌한 음악과 신의 경지에 오른 연주자의 현란한 손놀림에 완전히 홀려들어 몇 번이고 돌려보게 된다. 사지도 않은 DVD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는 이유다.

어쩜 이 피아니스트는 이름도 유자왕일까. 의상이 과하다든가 깊이는 없이 테크닉만 뛰어나다고 야박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지만 이 영상을 보게 되면 참회하게 될 것이다. 옷이야 웨딩드레스를 입든 거적대기를 입든 무슨 상관이랴. 입는 사람 마음에 들고 연주하는 데 방해만 안 된다면. 폭풍으로 치닫는 1악장을 혼신의 힘으로 통과하고 나서, 작은 한숨과 함께 문득 동의를 구하듯 조심스레 지휘자를 올려다 보는 이이의 표정은 음악만큼이나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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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모차르트 : 피아노 협주곡 20, 21, 25 & 27번
프리드리히 굴다 (Friedrich Gulda) 연주, 클라우디오 아바도 (Cladio A / DG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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