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의 주체 - 언어와 향유 사이에서
브루스 핑크 지음, 이성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⓵ 1 다음엔 3이 올 수 없다.
⓶ 2 다음엔 1,2,3 다 올 수 있다.
⓷ 3 다음엔 1이 올 수 없다.

 

동전던지기 놀이(48)에서 발견되는 규칙성(=동일성=구조적 질서=파괴불가능한 정체성)이 위와 같다면, <도둑맞은 편지>에서 발견되는 규칙은 아래와 같다. (숀 호머, <라캉 읽기> 참고)

 ⓵ 1항에 놓이는 인물은 상황을 전체적으로 보고는 있지만 전혀 그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다. 따라서 무능하게도 편지의 흐름에는 전혀 개입할 수 없게 된다. 편지놀이에 참여하지 못하고 그저 배경으로만 존재하는 실재적 위치.
⓶ 2항의 주체는 편지와 자기애적인 관계를 가지는 상상계적 위치에 놓인다. 행동이 제약되어 편지를 일시적으로 소유하지만 끝내 빼앗긴다.
⓷ 3항에 놓이는 인물은 전체적인 상황 속에서 자신을 비롯한 각각의 인물들이 저마다 처해있는 사정을 잘 파악하고 있으며 또한 능동적으로 편지놀이에 뛰어들어 행동할 수 있는 상징계적 위치를 점한다. 편지를 빼앗아 2항으로 이동한다.

 

자리 배치는 편지에 의해서 결정된다. 예를 들어 편지가 여왕에게 머물러 있을 때는 왕이 실재(reality)적 위치, 장관이 상징계적 위치를 점유하게 되고, 편지가 장관에게 머물러 있을 때는 경찰이 실재적 위치, 뒤팽이 상징계적 위치를 점유하게 된다. 결국, 편지는 사람들의 역할을 지정하고(주체화하고), 사람들의 관계를 구조화하고 정렬한다. 사람들은 편지에 의해 비로소 변별적 위치를 부여받고 주체로서 태어나고 규정되고 형성된다. 그런가 하면 편지는 주체들의 관계를 조종하면서 끊임없이 이동한다. 편지가 이동하는 동안 사람들은 편지에 의해 이용되고, 편지의 놀이감이 되고, 편지에 놀아난다. 마치 언어에 의해서 또한 무의식에 의해서 우리가 그러한 것처럼.

 

언어가 인접성에 의하여 결합관계를 맺고 이어져 나가듯이, 또한 동전던지기 놀이에서 일정한 규칙에 의해 1 2 3 사슬이 이어져 나가듯이, 편지 역시 일정한 규칙과 질서에 따라 각각의 등장인물들을 순차적으로 포획함으로써 의미작용의 연쇄를 만들어낸다. 편지가 일시적으로 닻을 내린 경로에 따라서 여왕-장관-뒤팽-경찰-여왕이라는 통사적 연결 사슬의 생성. 그 결과 <도둑맞은 편지>라는 하나의 독창적인 이야기가 만들어짐(=의미화가 이루어짐).

 

통사론적 규칙에 의해 ‘우리는 내일 파리를 떠날’ 다음에 ‘것이다’를 예측할 수 있는 것처럼, <장면 1>에서 장관의 위치를 근거로 <장면 2>에서 장관의 위치를 예측할 수 있다. 또한, 동전놀이에서의 “수 사슬들이 수들의 행로를 보존”하는 것처럼(52), 도둑맞은 편지에서도 여왕에서 장관으로, 장관에서 뒤팽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행로가 보존된다. 즉, 여왕-장관-뒤팽 등의 이어짐은 무작위적인 조합이 아니라, 정교한 규칙에 의해서 행로를 그리고 있는 연결인 것이다. 편지는 여왕-장관-뒤팽-경찰-여왕이라는 행로의 보존 속에서 장관을 “기억한다”. 왜냐하면 편지의 정체성은 바로 ‘여왕-장관-뒤팽-경찰-여왕’이라는 행로로서만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편지 자체의 내용과는 무관하게)

 

무의식은, 실로 자율적이고 자동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는 ‘문자들’로 구성되는 바, 잊을 수 없다. 무의식은 과거에 무의식에 영향을 미쳤던 그 무엇을 현재 속에 보존한다. 개개의 모든 요소를 영원히 붙잡고 있으면서, 그것들 모두에 의해 영원히 표식된 채로 말이다. -p.53

 

이 말을 <도둑맞은 편지>에 적용해볼 수 있을 것이다. 즉, 편지의 정체성은 “실로 자율적이고 자동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는 ‘등장인물들’로 구성되는 바, (편지는 자신이 일시적으로 소유했던 등장인물들을) 잊을 수 없다.” 여왕-장관-뒤팽-경찰-여왕이라는 고유의 이동경로로서 제 정체성을 확립한 편지가 자신을 이루는 사슬의 일부로서 장관을 기억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편지는 과거에 편지와 인연을 맺었던 인물들을 (편지의 정체성을 구성하기 위해) 현재 속에 보존한다.” “편지는 개개의 모든 등장인물들을 영원히 붙잡고 있으면서, 그것들 모두에 의해 영원히 표식된 채”로서 자신을 규정한다.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이라는 라캉의 명제 역시 <도둑맞은 편지>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편지를 규정함에 있어서 편지 안에 적힌 내용은 무용할 뿐만 아니라 무의미하다. 무의식이 타자의 담론인 것처럼, 편지 역시 오로지 여왕과 장관과 뒤팽과 경찰 등의 타자들에 의해서만, 타자들의 연쇄적 조합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에 의해서만 설명된다. 즉, ‘그 편지가 무슨 편지냐’ 하고 물었을 때, 그 편지는 ‘이러이러한 내용이 적힌 편지’가 아니라, ‘여왕에서 장관으로, 장관에서 뒤팽으로, 뒤팽에서 경찰을 거쳐 다시 여왕의 손으로 옮겨 다닌 편지’다.

 

*


라캉이 프로이트와 구별되는 점은, 그가 환자 증상을 분석하는 데 있어서 애당초 “진정한 이해”(증상의 진실, 진리)라는 것을 상정하지 않은 점이다. 사실 라캉한테는 도라의 히스테리 증상이 성적인 억압 때문이든 무엇 때문이든 별 상관이 없다. 라캉한테는 그런 걸 밝히는 게 의미 없고 중요치도 않다. 라캉의 관심사는 도라가 주변인들에게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런 히스테리적 행동을 하는지, 도라와 도라의 주변인들이 만들어내는 총체적 상황 속에서 도라의 히스테리 증상이 관철하고자 하는 의도를 밝혀내는 것이다. 즉,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상징계적 질서 속에서 증상의 논리와 맥락을 찾아내는 것. 환자의 독특한 상상 속에서 전개되는 '사물들의 질서'를 파악하는 것. 이러한 라캉의 정신 분석 작업의 최종 목표는, 의미작용이 끊임없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환자의 무의식 속에서 발생한 어떤 결빙현상을 풀어주는 데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니체 극장 - 영원회귀와 권력의지의 드라마
고명섭 지음 / 김영사 / 201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 쓰신 분이 언론인이라서 그런지 니체를 조망하는 데 있어서 객관성을 확보하려고 몹시 애쓰신 것 같지만 그럼에도 이 분은 니체를 형이상학적으로 보는 관점에 대해서는 확실히 부정적인 것 같다. 조심스러워 하시는 것 같다. 종교인이 아니라 언론인이어서 그러시겠지만. 그러나 니체의 권력의지를 단순히 "우리 세계 안의 우리 생명체들의 문제"로, 더욱이 "사회를 형성하고 역사를 만들어 가는 우리 인간들, 그리고 창조하고 투쟁하는 개인들의 문제”로 선을 그어버리면 니체는 다만 정치심리학자 내지는 사회생물학자밖에 안 되는 거 아닌가. 단지 그 정도만은 아닐 것 같은데. 내가 신비주의 취향이라 그런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막연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 사주명리학과 안티 오이디푸스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 내용대로라면 사주명리야말로 후기구조주의적인 학문에 가까운 것 같다. 그러면서도 푸코나 라캉처럼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구조가 발휘하는 미시적인 영향력 면에 있어서 푸코의 권력이론보다 음양오행의 순환원리에 기반한 사주명리학이 훨씬 더 역동적이고 웅장해 보이기도 하고. 게다가 사주명리학은 '저항'에 대한 생각을 할 것도 없이 그 자체로 충만하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시적이고. 고미숙 선생님의 필터에 걸러져서 이렇게 느껴지는 것인가. 맛보기 책만 겨우 읽어놓고 호들갑을 떠는 지도 모르겠지만.

 

이론에서 느껴지는 사나운 기운(?)의 강도로만 따지면 니체랑 푸코가 가장 성질이 나 있는 것 같다. 원한감정이 느껴진다. (후기)라캉은 화를 내는 대신 다소간 허무와 공포에 질려있는 것 같다. 반면에 사주명리는 세계에 대해 섬뜩해하지도 경악스러워하지도 않는다. 이 학문은 공포나 비극적 파토스 같은 게 없는 듯하다. 오히려 아름다운 음악이 들리는 것 같다. 우주의 원환(圓環) 속에서 공명이 화음으로 울려 퍼진다. 스피노자하고도 호응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사주명리로 해석된 세계 속에서 구태여 전복적 사유랄 만한 것을 모색해보자면 그것은 아마도 도통(道通), 즉 깨달음일 텐데 그러나 이것을 저항이나 탈주, 주체의 탈구축 등으로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차라리 깨달음은 주체와 구조의 대치 상황 자체를 무화시켜버리는 일이겠다. 그런 언표들로는 설명되지 않는 전혀 새로운 판을 짜버리는 일이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운명 사용 설명서'다. 인터넷 무료 사주사이트 같은 데서 사주명식을 뽑아다가 이 책을 참고하여 자기 사주를 간단히 진단해볼 수 있다. 역시나 자기 사주는 자기 스스로 분석해볼 필요가 있는 듯. 내 몫으로 펼쳐진 판을 한 번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이다. 이 판 위에서 어떻게 하면 신명나게 뛰어놀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미학적으로 빼어난 일생을 완성해낼 수 있을까 궁리를 해보면서. 그러나 궁리의 끝은 결국 ‘도 닦기’로 귀결되는 모양이다. 쉽지 않다 참.

 

사주명리학이 유불도 삼교회통으로, 나아가 궁극적으로 수행론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거듭 말하지만, 자기를 구하는 건 결국 자기밖에 없다! 따라서 용신을 제대로 쓴다는 건 존재 전체를 걸고 베팅을 하는 것, 곧 ‘도를 닦는’ 것을 의미한다. 도란 무엇인가? 육조혜능이 말했듯이, 도는 모름지기 통하고 흘러야 한다. -도수통류(道須通流)! 용신의 핵심이 순환이라면, 이 순환의 동그라미는 반드시 도로 통하게 되어있다. -p.12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루쉰 현대의 지성 118
다케우치 요시미 지음, 서광덕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10월
평점 :
품절


대동아전쟁 당시 소집 명령을 받고 중국 전선으로 떠나기 전 지은이가 유언의 심정으로 남긴 책이라 한다. 중국에 총부리를 겨누어야 하는 중국문학 연구자의 운명이란 얼마나 얄궂은가. 삶이 던지는 잔혹한 물음에 응답하기 위한 방편으로 무엇보다 저자 본인을 위해 써내려갔던 책이어서일까. 읽기가 쉽지 않다. 다소 난삽하게 느껴지기마저. 친절한 위인전 같은 걸 기대했다가 예상 밖에 루쉰이라는 한 인간의 심층에 도달하기 위한 지난한 여정으로서의 글쓰기를 만났다. 다양한 각도와 거리에서 이리저리 가늠해 보면서 조심스럽게 수정하고 덧붙여 나가는 조형적 글쓰기. 실마리를 추적해 들어가다 막다른 골목이 나오면 되돌아 나오기도 하는 그런 글쓰기. 그 쉽지 않은 글쓰기를 뒤좇다 보면 서서히 루쉰이라는 인물의 상(像)이 떠오른다.

 

내면 깊은 곳에서의 루쉰은 개인주의자이고 회의주의자였으며, 과감히 말하면 비관주의자요 허무주의자였다. 그런 그가 낡은 사회의 위선을 고발하고 자유에의 갈구를 호소하는 소설을 썼다는 것은 "작가가 작품에서 불거져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처음부터 작품 밖에 서서 작품에 등을 돌리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루쉰은 애당초 자신의 내부가 아닌 외부에 소설의 세계를 구축했던 것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허무의 심연을 내면에 포함한 고독의 정신이 어떻게 현상으로서 계몽가가 될 수 있었을까.” 여기서 저자는 ‘계몽가 루쉰’을 부단히 생성해내는 근원적 동력으로서 '문학가 루쉰'을 불러낸다.

 

문학가란, 혹은 문학가로서의 자세란 무엇일까. 저자의 언설을 추려보면 그것은 고통을 예민하게 지각하고 그 고통과 쉼 없이 대결하는 삶의 태도를 일컫는다. 이를 위해서는 불편과 고통을 낳는 모든 가치들에 대해 끊임없이 부정하고 저항해야 한다. 결코 머물러서는 안 된다. 루쉰은 그렇게 살았다. 그는 과거의 낡은 가치뿐만 아니라 당대의 모든 진보적 가치들 또한 부정했으며 종국에는 ‘절망이 허망한 것은 바로 희망이 그러함과 같다’는 깨달음을 통해 모든 것에 절망하는 자기 자신마저 부정했다.

 

심층의 기저에 완고한 뼈대를 이루고 있는 무(無)에 대한 근원적 자각에도 불구하고 루쉰은 결국, 자신과 철저하게 대립하는 소설을 써낸다. 그것은 곧 자기반역이자 자기희생이다. 게다가 연후에는 엄정한 자기 추궁 끝에 소설마저도 버려버린다. 그는 그렇게 끊임없는 부정성의 운동 속에서 혼돈과 모순을 살아내었다. ‘사람은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신념으로, 성실한 생활인으로서, ‘쩡짜’적으로 살았다. 저자는 여기서 어떤 순교자적인 에토스를 읽어낸다.

 

다케우치가 그려내는 루쉰은 하나의 육중한 슬픔으로 와 닿는다. 차라리 그것은 강철로 된 무지개 같은 슬픔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이 슬픔의 질감과 규모를 머리로밖에 헤아리지 못했다고 적는 편이 옳을 것이다. 아직 온전히 가슴으로는 실감하지 못했다고, 그렇게 적는 편이 정직할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나는 얼마나 더 깊어져야 할까. 얼마나 더 깊어질 수 있을까. 이 책은 읽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이 책은 원래 쉽게 읽어버릴 수 없는 책이라야지 옳다. 루쉰이라는 사람의 내면의 내용에 부합하는 타당한 형식으로서, 안개 낀 깊은 숲처럼 그렇게 이루어져 있어야 마땅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니체는 정치적으로는 차라리 좌우를 초월한 아나키스트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는 민주주의를 비롯한 모든 '정의로운' 근대 정치개념 자체에 회의적이며, 정치적 주장들의 올바름을 논하기보다 그것들 저마다를 하나의 힘으로서 가치평가하고 그 힘을 어떻게 활용할 지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는, 그러면서 궁극적으로는 국가체제 자체의 붕괴를 전망하는, 어찌 보면 정치적 염세주의자, 견유주의자에 가까워 보인다. <반시대적 고찰>에서 니체가 전망한 이상 국가는 "천재공화국"이었다. 천재공화국이란 아마도 거리에의 파토스를 지닌 천재들로만, 오로지 강자들로만 이루어진, 에고이스트들의 느슨한 연합체 같은 형태가 아닐까. -일주일 전에 쓴 글

 

아니다, 결국 니체는 야만사회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시대착오적 반동주의자일 뿐이다. 정치사상가로서의 니체는 덜 떨어진 미치광이에 불과하다. 니체는 철저히 개인윤리 차원에서만 읽고 치워버려야 할 것이다. 영원회귀에 관해서는 종교적으로 변용하여 이해해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만이다. 심리적인, 정신적인, 영적인 차원에서만 효용이 있다. 거기서도 취할 것만 취하는 게 좋겠다. 갈가리 찢어서 젓가락으로 날렵하게 발라먹고 나머지는 개나 줘버리는 게 낫겠다. 헛소리의 일인자. 정서가 불안한 조증 환자의 경박한 정신상태로 인해 출항할 당시부터 이미 인식의 망망대해에서 난파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자. 정신의 무게중심을 찾지 못해 이카루스처럼 추락해버린 자. 깨달았으나 깨달음을 감당할 그릇이 못되었던 자. 위대하지만 나쁜 예. 허세와 자뻑의 제왕. 백년이 지나도록 텍스트로 살아남아 자신이 비난했던 딱 그 유대인의 방식으로 사람들을 전염시키는 괴물. 철학자가 되고 싶었으나 결국은 너무나 문학적이었던 인간. 그야말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 경멸하고 싶으나 경멸할 수 없는, 열광하고 싶으나 열광할 수 없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