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 - 폭력과 추방의 시대, 촛불의 민주주의를 다시 묻는다 당비의생각 2
당대비평 기획위원회 엮음 / 산책자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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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촛불 현장에 나도 몇 번인가 나갔었다. 딱히 무슨 정치의식이 있었다기보다는 공권력을 남용하는 무식한 정부에 대한 반발심과 더불어 막연한 반(反)신자유주의 감성 같은 게 작용했던 것 같다. 그러나 정작 집회에 나갔을 땐 아나키즘적 광란의 현장에서 오는 흥분에 도취된 나머지 이후로는 불순하게도 오로지 통제 불능의 아나키 상황을 만끽하러 몇 번인가 더 시위를 빙자하여 촛불을 치켜들었더랬다. 동기가 그러했던 만큼 촛불이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나도 각종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자연히 시들해져 버리고 말았는데, 몇 년이 흐른 오늘에서야 중고서점에서 우연히 이 책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러게, 나는 왜 촛불을 꺼버렸을까.

 

당시 촛불에 참여했던 내 지위라든가 정체성이 전형적으로 “자발성과 비폭력성을 특징으로 하며 어떤 종류의 조직이나 단체와도 무관한, 나와 가족의 식품 안전에 관심을 가지고 검역주권에 우려를 제기하는 일반 시민”(98)이었으며, “평소에 글로벌 상품을 소비하면서 소비 주체로서의 정체성을 키워왔던 여성들”(205) 가운데 하나였고, “사회적으로 ‘안정된 주체’라는 것을 의심받고 싶지” 않은, 즉 “아름다운 ‘촛불 시민’일 수는 있었어도 ‘하위주체’로 오해”받고 싶지는 않은(239), “계급적 문제에 대해서는 무력했고 둔감”(221)했던 “중간 계급”이었기 때문에- 이 책은 그야말로 당시 촛불 현장에 있었던 시위 주체로서의 나 자신의 실체에 대한 꼼꼼한 해부도처럼 읽힌다.

 

촛불이 카타르시스의 축제가 되어버림으로써 경계를 넘어서는 수평적 연대의 쟁점이 묻혀버렸음을 지적하며 “자신이 처한 삶의 불안전함에서 출발하여 연대하여 공동의 싸움을 해나가지 않을 때 자신이 거리에 나온 이유인 자신의 삶에서 느끼는 불안전함도 극복될 수 없음”을 강조하는 백승욱의 글과, 시위를 주도하였던 중간 계급이 강박적으로 사로잡혀 있던 ‘순수성의 모랄’(=정치색의 거부)이 정치의 현존성을 외면 내지 부인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촛불이라는 정치적 행동을 민주적 행동 너머로 정치화시키는 데 실패한 것이 아닌가 반문하는 이상길의 글은 인상적이다.

 

특히 촛불은 환등상(幻燈像)이었을 뿐 ‘진리적 사건’으로 보기 어려우며 “궁극적으로 촛불의 ‘시민들’이 요구한 것은 쾌락의 평등주의”였다는 것, 그리고 네가 즐기는 만큼 나도 즐길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는(촛불에서는 소비 생활의 평등을 주장하는) 이러한 가치관이야말로 새로운 쾌락주의의 시대에 작동하는 패러다임이라고 분석하는 이택광의 글은 알몸을 들킨 것 마냥 화끈거린다. 물론 알몸이 부도덕이나 치부는 아닐 게다. 다만 구태여 자랑하거나 드러내지는 않았던 내밀한 지점을 너무도 적나라하게 까발리니 화끈거리는 것일 뿐-ㅇ-;;

 

촛불의 경험이 내게도 그저 한때의 자족적 놀이나 축제가 아니라, 소비 주체에서 사회의 균열과 틈에 대해 보다 민감하게 반응하는 정치적 주체로 진화하는 각성의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는 점을 순순히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점점 더 위험사회가 되어가는 한국에서 자신의 안전한 미래를 스스로 보장해야 하는 보통사람”(213)의 한 명으로서 내 한 몸 건사하기조차 버겁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솔직한 심정이다. 이것이 촛불을 한여름 밤의 꿈 같은 소동으로 끝내버린, 연대 의식 부족한 중산 계급의 인식론적 한계를 대변하는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촛불이 나를 비롯한 386 후속 세대들에게는 당대 현실 문제라든가 민주주의 원칙에 관한 인식 형성에 영향을 준 중요한 경험이자 학습으로 기억될 만한 사건이었다는 점만큼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촛불을 통해 얻은 대중들의 정치적 경험과 잠재력은 분명히 새로운 사회 운동의 순환을 예비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디선가 월러스틴이 1848년 혁명은 1917년 사회주의 혁명의 예행연습이었고, 1968년 혁명은 1989년 사회주의 몰락의 예행연습이었다고 말했듯이, 2008년 촛불항쟁 또한 하나의 예행연습일지 모르겠다. 이것이 무엇을 위한 예행연습일지는 ‘경제 위기의 세계화’를 통과해가야 하는 대중들의 집단행동을 지켜보며 차후 역사가 판단할 것이다.” -148쪽, 김정한, <촛불의 정치학>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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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학 동양고전 슬기바다 4
주희 지음, 윤호창 옮김 / 홍익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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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학이 궁금했던 것은 일전에 어느 책에서 고산 윤선도가 평생토록 소학을 손에서 놓지 않고 극진히 읽었다는 얘기를 접하고부터였다. 그는 유배가 있을 때도 아들들에게 편지를 보내 소학이 인간의 근본을 이루는 본보기이니 일평생 읽고 또 읽으라고 권면했다 한다. 8세 안팎의 아동들을 대상으로 한 책을 평생에 걸쳐 경전처럼 떠받들며 살았다니 과연 어떤 책일까 하는 호기심으로 펼쳐들었으나 온통 경건, 성실, 충실, 공경, 신실, 신의, 수양, 신중, 근면, 청렴, 절제, 단정, 엄숙, 정제, 겸손 등의 단어들로 점철된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현대사회에 태어난 것이 천만다행이다. 16세기 조선의 어느 지식인에게 평생의 바이블이었던 이 책이 21세기를 살아가는 나에게도 비록 견딜 수 없이 숨막히고 고리타분하기는 할망정 그 내용이 대체로 수긍이 갈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적지 않은 부분이 당위로서 받아들여진다는 사실만큼은 새삼 놀랍다. 대저 관습이 되어버린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얼마나 끈질기고도 유구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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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군중 동서문화사 월드북 130
데이비드 리스먼 지음, 류근일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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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먼 메일러의 지적대로 이 책은 '사회과학의 탈을 쓴 문학'에 가깝다고 해야할 것 같다. 리스먼의 이론은 하나의 가설일 뿐이며 그나마 근거조차 부족해 보인다. 이런 것을 사회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글쎄. 리스먼이 말하는 타인지향형이란 기술과 경제가 발달한 인구감퇴기의 고도 산업사회에서 나타나는 특이적 성격이라기보다는 형이상학적 거대담론이 퇴조한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 생존 경쟁력을 가지는 성격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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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범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봤다. 표범은 번식기에만 암수가 짝을 지어 다니고 이후로는 헤어져 단독 생활을 하는데, 홀로 초원을 배회하던 수컷이 어린 표범을 발견하면 냄새를 맡아 자기 새끼가 아닐 경우 가차 없이 물어 죽인다고 한다. 다큐 초반부에서는 암컷의 생활 공간 근처에 두 마리의 수컷이 서로 영역 다툼을 벌이며 포진해 있자 암컷이 양쪽 수컷을 번갈아 오가며 둘 모두와 교미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렇게 하면 나중에 새끼를 낳더라도 두 마리 수컷 모두 새로 태어난 새끼가 자기 핏줄인 줄 알고 더 이상 물어 죽이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마치 암컷 표범이 오로지 미래의 자식을 건사하고자 어미 된 자로서의 대의에 입각해 일말의 양심이나 수치심도 미련 없이 폐기해버린 듯이 느껴져서 이 대목이 잠시 감격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실상 암컷에게 있어서 신의니 도덕이니 양심이니 수치심이니 하는 따위는 눈물을 삼키며 포기해야 할 필요도 없는, 애당초 존재하지도 않는 덕목일 것이다. 그런 것들의 부재가, 생존과 번식만이 곧 삶의 유일한 의미이며 오로지 본능만이 숭고한 세계에서는 하등의 문제조차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생한 아프리카 대자연의 영상이 보여주고 있었다. 다큐가 마치 인간 사회의 심연을 대변하는 우화 같아서 보는 내내 망연한 전율을 느꼈다.

 

표범의 새끼들은 두 살이 넘으면 어미로부터 독립할 수 있다. 그때까지 어미는 밤이고 낮이고 열심히 사냥을 하며 최선을 다해 새끼들을 보살핀다. 사냥은 쉽지 않다. 먹이를 탐색하다가도 사자가 나타나면 즉각 나뭇가지 위로 올라가 피신해야 한다. 사자도 나무를 탈 수는 있지만 몸무게 때문에 표범이 올라간 가늘고 높은 가지까지는 따라 오를 수 없다. 나뭇가지가 견딜 수 있는 하중을 각자 치밀하게 가늠하면서 사자와 표범은 불과 일 미터 남짓한 거리를 사이에 두고 먹느냐 먹히느냐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이기도 한다. 표범을 위협하는 이는 비단 사자만이 아니다. 때로는 개코원숭이 무리를 만나 줄행랑치기도 하고 다잡은 먹이를 하이에나 무리에게 속절없이 내주어야 할 때도 있다.

 

우여곡절 끝에 먹이를 잡으면 어미는 근처 수풀에 숨어있던 자식들에게 어서 오라고 소리를 낸다. 어느 날은 사냥을 떠났다가 한참 만에 토끼를 물어온 어미 표범이 평소 때처럼 새끼들을 부르지만 두 마리 중 한 마리만 나타난다. 다른 한 마리는 아무리 불러도 나타나지 않는다. 어미는 위험을 감수하고 넓은 초원으로 나아가 계속해서 잃어버린 자식을 불러보지만 소식이 없다. 그때 새끼들을 숨겨둔 은신처 옆에서 배가 단단히 부른 채로 느릿느릿 움직이는 비단뱀이 보인다. 비단뱀과 사투를 벌이는 어미. 비단뱀이 결국 새끼를 토해내고 도망가자 어미는 더 이상 비단뱀을 응징하지 않고 내버려 둔다. 그리고는 죽은 새끼를 물고 그늘진 곳으로 가서 새끼의 살점을 뜯어 먹는다. 다큐에서는 이것이 일종의 의식이라고 했다.

 

한동안 축 늘어진 채로 있던 어미가 살아남은 나머지 다른 한 자식이라도 굶어죽이지 않으려는 듯 수척한 몸을 이끌고 다시 사냥에 나선다. 그러나 가까스로 잡은 임팔라는 너무 무거워 안전한 나무 위로 들어 옮길 수가 없다. 할 수 없이 남은 한 마리 새끼를 불러내어 나무 밑에서 임팔라를 뜯어먹도록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피 냄새를 맡고 하이에나가 몰려온다. 새끼 딸린 표범은 하이에나 무리를 이길 수 없으므로 도망칠 밖에. 힘들게 사냥한 먹이가 다른 놈들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다가 어미 표범은 다시 사냥을 떠난다.

 

다큐 속 표범의 생애는 인간의 삶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기구하고 고단해 보인다. 흔히들 사회를 정글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아프리카 정글의 어느 한 암표범이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더 이상 정글은 사회의 냉혹함을 표현하기 위해 은유로서 도용되는 그 무엇이 아니었다. 둘은 비유의 간격을 허락할 것도 없이 본질적인 면에서 전혀 다르지 않았고 표범의 삶은 내가 요근래 본 가장 뜨겁고 가슴 먹먹한 리얼리티였다. 자식을 잃었으나 살기 위해 다시 사냥을 떠나는 어미 표범의 야윈 뒷모습을 기리기 위해 나는 지금 이 긴 글을 적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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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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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탓인지도 모르지만 굉장히 허무주의적이고 비관적이고 냉소적으로 읽힌다. 내게는 이 소설이 '농담'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역사와 세계의 본질에 대한 '폭로'에 가까워 보이고, 그래서인지 책의 제목조차 서늘하게 느껴진다. 농담이라니, 이토록 건조하고 음울한 농담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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