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애니홀>과 <맨하탄> 모두 실존 인물과 사건을 토대로 한 자전적인 이야기였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마도 전자가 '애니'에게 헌정하는 영화라면 후자는 응당 '트레이시'를 기리는 영화가 아닐는지. 이 영화에선 먹물 특유의 찌든 때에 절어있는 다른 등장인물들과는 결이 다른 트레이시만의 독보적인 매력(과묵하고 우직하며 지적 허세가 없는, 그러면서도 누구보다 진지하고 진심어린 태도를 지닌, 한마디로 속물적이지 않은)이 매우 설득력 있게 그려져 있는데, 그래서 줄거리를 따라가다 보면 미성년자인 트레이시와 아이작의 만남이 법적으로 저촉된다든지 우디 앨런의 '소아성애자'로서의 기미가 이 영화에서 이미 드러나고 있다든지 하는 껄끄러운 사실조차 별반 개의치 않아져 버리고 만다. 맨하탄 야경의 아름다운 서정과 낭만 뒤에 사실은 문제적 소지가 될 만한 꽤나 도발적인 설정이 슬며시 (다소 의뭉스럽게?) 깔려있는 셈이다. 영화에서는 트레이시가 런던 유학길에 오르는 것으로 결말이 나면서 등장인물 중 오로지 그녀만 맨하탄에서 벗어난다. 그녀의 속성이 맨하탄적이지 않은 걸까.2 "그는 유태계 자유주의자란 망상을 가진 남성 우월주의자이며 혼자 잘난 염세주의자이자 절망적인 허무주의자다. 인생에 불만이 있었지만 해결책은 없었다. 예술가가 되고 싶어 했지만 필요한 희생엔 주저했다. 가장 개인적인 순간엔 죽음에 대한 공포를 말함으로써 자신의 비참함만 더했고 사실 거의 자기도취증 수준이었다." 극 중에서 우디 앨런이 묘사하는 우디 앨런. 웃겨서 원 이게 또 뭐라고 옮겨적고 있네? 구설이야 많지만 참으로 독보적인 희극인임에는 틀림없다. 아울러 영화의 문을 열고 닫는 거쉰의 <랩소디 인 블루>는 거의 뭐 이 작품에 배경 음악으로 삽입됨으로써 최종적으로 완성된 거나 다름없어 보인다. 마치 맨하탄이라는 도시를 위해 태어난 곡인 양... 이 영화 이후로는 더 이상 둘을 떼놓고 생각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우디 앨런은 스스로 염세주의자를 표방하지만 정작 방향 불문의 에로스가 분별없이 흘러넘치는 이 총체적 난국의 현장에 그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있는 이를 어찌 염세주의자라 할 것인가. 그리고 한 가지 더. 이 사람은 왜 이리도 주절대는가. 영화 속에 나타나 부단히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는가. 왜 이토록 에고를 과하게 드러내며 반복적으로 '기입'되고자 애쓰는가. 어쩌면 뿌리깊은 비관주의가 이 사람으로 하여금 도리어 자기 존재 증명에 강박적으로 매달리게 하는 지도 모르겠다. 사상과 행동의 괴리를 낳는 이런 여러가지 흥미로운 자기모순 내지는 반동성이 이 사람 고유의 무늬를 형성하고 있는 듯하다.
<카이로의 붉은 장미> 다음으로 수작이다 내 기준으로는. 이토록 세련되고 참신하고 획기적인 70년대 멜로 영화라니. 신파적이게 마련인 이야기를 전혀 신파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하고 있다. 젊은 날의 우디 앨런과 다이앤 키튼은 눈부시게 싱그럽고.
(인터뷰 중에서) "전 광대처럼 접근하는 저주에 걸렸어요. 항상 웃기게 접근해야 하죠." 영화가 이 저주받은(?) 접근법의 유구한 역사를 조망한다. 개그 작가 시절부터 시작해서 첫 흥행작 <돈을 갖고 튀어라> 그리고 <미드나잇 인 파리>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건 부단히 계속해서 나아간다는 사실이고 무엇이든 꾸준히 해나가다 보면 개중에 왕왕 얻어걸리게 마련이며("전 작품의 양을 우선으로 일해 왔어요. 영화를 계속 만들면 가끔씩 운좋게 좋은 영화가 나온다고 생각해요. 실제로도 그렇구요.") 근기는 유지하되 지나친 결벽으로 스스로를 괴롭히지만 않는다면("저는 인내심이 별로 없어요. 한 번 더 촬영할 만한 인내심이 없죠. 마음에 들게 나오면 넘어가거나 끝내거나 집에 가요. 위대한 예술가가 되는 데 필요한 집중력이나 집념이 없어요. 집에 가서 농구 보는 게 낫죠.") 양으로 승부하는 이런 방법도 결코 나쁘지 않다는 걸 몸소 증명해 보이고 있는 우디 앨런.
비극에 빠진 한 문제적 인간을 해학적으로 그리고 있는 이런... 우디 앨런은 왜 이런 영화를 만들었을까. 주인공을 대하는 시선이 복잡다단하다. 애정을 가졌으되 냉정하고 그래서 연민과 조롱이 뒤섞여 있으며 결말은 처참한 가운데 엔딩 음악은 짓궂다. 아침드라마 소재로나 나올 법한 단순한 얘기인데도 뒷맛이 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