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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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록이라기보다는 수양록에 가깝겠다. 개체적 삶의 무상함과 미소함, 생명의 일회성과 한시성에 대한 자각, 세계의 무한한 변전 속에서 드러나는 우주만물의 연결성과 전체성에 대한 인식, 자연의 본성에 부합하고 섭리에 순응하며 주어진 운명과 소명에 충실하고자 하는 마음, 충동과 정념에의 경계, 이성에 대한 믿음, 공동체에 헌신하고자 하는 의지(군림하고 지배하고 통치하는 자로서의 자의식이 드러난 대목은 없고, 다만 공화주의의 미덕이라 할 수 있는 강한 공동체 정신과 사회적 책임 의식만이 반복적으로 드러나 있는 점이 흥미롭다), 마음가짐과 생활자세를 다잡기 위한 결의와 각오 등으로 채워져 있다. 참으로 고결하고 아름답고 위대하게 한 생을 살다 간 사람이구나. 

 

*

 

“인간이 사는 시간은 한순간이며, 그의 실체는 유동적이고, 그의 지각은 불분명하고, 그의 육신의 성분은 모두 썩게 되어 있고, 그의 영혼은 소용돌이이고, 그의 운명은 예측할 수 없고, 그의 세평은 불확실하다. 즉 육신의 모든 것은 강이고, 영혼의 모든 것은 꿈이요 연기이다. 또한 삶은 전쟁이자 나그네의 체류이며, 사후의 명성은 망각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길라잡이가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오직 한 가지, 철학뿐이다. 철학이란 우리 내면의 신성을 모욕과 피해에서 지켜주고, 쾌락과 고통을 다스리고, 계획 없이는 어떤 일도 하지 않고, 거짓과 위선을 멀리하고, 남이 행하든 말든 거기에 매이지 않고, 나아가 일어나거나 주어진 것을 마치 자신이 온 곳으로부터 온 것인 양 기꺼이 받아들이고, 무엇보다도 죽음을 모든 피조물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해체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고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데 개개의 구성 요소가 끊임없이 다른 요소로 바뀌는 것이 구성 요소 자체에는 결코 무서운 일이 아니라면, 왜 사람들은 모든 구성 요소의 변화와 해체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는가? 그것은 자연에 맞는 것이며, 자연에 맞는 일은 나쁜 것이 없기에 하는 말이다.”

 

“이웃 사람이 말하고 행하고 생각한 것에 마음 쓰지 않고, 오직 자기가 행하는 것이 올바르고 신의 마음에 들도록 마음 쓰는 사람은 얼마나 많은 여가를 버는가. 선한 사람이라면 주위의 나쁜 성격들을 둘러볼 것이 아니라, 좌고우면하지 말고 목표를 향해 곧장 달려가야 한다. (...) 진실이 어디 있는지 네가 제대로 인식했다면, 남들이 너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생각은 버리고 길든 짧든 남은 인생을 네 본성이 원하는 대로 사는 것으로 만족하라. 따라서 네 본성이 무엇을 원하는지 숙고하고, 그 밖의 다른 어떤 것에도 미혹되어서는 안 된다.”

 

“참다운 삶은 어디에 있는가? 인간의 본성이 요구하는 것을 행하는 데 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충동과 행동의 원천이 되는 원칙을 갖고 있으면 된다. 어떤 원칙 말인가? 선악에 관한 원칙이다. 그 원칙에 따르면, 인간을 정의롭고 신중하고 용감하고 자유롭게 만들지 않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인간에게는 선이 아니며, 방금 말한 것들과 반대되는 것들을 야기하지 않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악이 아니다.”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다니, 나야말로 불운하구나!’ 천만에! 그렇게 말할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말하라. ‘나는 이런 일을 당했는데도 고통을 겪지 않았고, 현재의 불운에도 망가지지 않고 미래의 고통도 두렵지가 않으니, 나야말로 행운아로구나!’ 그런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지만, 그런 일을 당하고도 고통을 겪지 않는 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앞으로 너에게 고통을 가져다주는 일이 일이 일어날 때마다 잊지 말고 다음의 원칙을 적용하라. ‘이것은 불운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을 용감하게 참고 견디는 것은 행운이다.’”

 

“존재하는 것들과 생성되는 것들이 얼마나 빨리 우리 앞을 지나 시야에서 사라지는지 가끔 떠올려보라. 사물들의 실체는 쉴 새 없이 흐르는 강과 같고, 그것들의 활동은 지속적으로 변하며, 그것들의 원인은 한없이 다양하고, 정지해 있는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늘 모든 것이 사라져버리는 과거의 무한한 시간과 입을 쩍 벌린 미래의 심연이 바로 우리 곁에 있다. 하거늘 이러한 상황에서 우쭐대거나, 마음이 산란해지거나, 상당 기간 또는 오랫동안 지속될 고통을 당하는 것처럼 우는소리를 하는 자야말로 바보가 아닌가?”

 

“네가 그것의 가장 작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전(全) 실체를 생각하고, 그중 짧고 순간에 불과한 기간만이 너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이라고 생각하라. 그리고 운명을 생각하라. 너는 그것의 얼마나 작은 부분인가?”

 

“우주의 정신은 공동체적이다. 그래서 그것은 우월한 것들을 위해 열등한 것들을 만들어냈고, 우월한 것들은 서로 협조하도록 만들어놓았다. (...) 열등한 것은 우월한 것을 위하여 존재하고 우월한 것은 서로를 위하여 존재한다. (...) 너도 보다시피 우주는 종속시켰고, 결합시켰고, 각자에게 응분의 몫을 주었고, 탁월한 것들은 서로 화목하게 해놓았다.” (우월한 것=이성을 지닌 인간들, 이성을 지닌 인간들끼리는 서로 선의를 보이며 협력한다는 뜻으로 한 말)  

 

“너에게 어떤 일이 어렵다고 해서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길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인간에게 가능하고 인간의 본성에 맞는 일이라면 너도 틀림없이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라.”

 

“황제 티를 내거나 궁정 생활에 물들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러기가 쉽기에 하는 말이다. 따라서 늘 소박하고, 선하고, 순수하고, 진지하고, 가식 없고, 정의를 사랑하고, 신을 두려워하고, 자비롭고, 상냥하고, 맡은 바 의무에 대하여 용감한 사람이 되도록 하라. 철학이 너를 만들려고 했던 그런 사람으로 남도록 노력하라. 신들을 공경하고, 인간들을 구하라. 인생은 짧다. 지상에서의 삶의 유일한 결실은 경건한 성품과 공동체를 위한 행동이다.”

 

“네 몫으로 주어진 사물들에 적응하고, 운명이 네게 정해준 사람들을 사랑하되 진심으로 사랑하라.”

 

“언제나 첫인상만 고집하고 네 마음속으로부터 거기에 뭔가를 덧붙이지 마라. (...) 이러저러한 사물에 대하여 의견을 갖지 않고, 그리하여 영혼을 괴롭히지 않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사물 자체는 우리에게 어떤 판단도 강요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상상을 지워버려라. 더 이상 정념에 조종당하지 마라. 현재 시간에 국한하라. (...) 어떤 외적인 일로 네가 고통 받는다면, 너를 괴롭히는 것은 그 외적인 일이 아니라 그에 대한 네 판단이다. 또한 그 판단을 당장 지워 없애는 것은 너 자신에게 달려 있다. 그러나 너를 괴롭히는 것이 네 마음속에 있는 그 무엇이라면, 네가 네 견해를 바꾸는 것을 대체 누가 막는단 말인가? (...)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사람들의 행동이 아니다. 그들의 행동은 그들의 지배적 이성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사실은 그들의 행동에 대한 우리의 의견이다. 따라서 우리의 의견을 근절하고 그들의 행동이 끔찍하다는 판단을 버릴 각오를 하라. 그러면 분노는 가라앉을 것이다. (...) 모든 것은 의견에 지나지 않고, 의견은 너에게 달려있음을 명심하라. 따라서 원할 때는 의견을 버려라. 그러면 이미 갑(岬)을 돈 선원처럼 너는 모든 것이 평온한 가운데 잔잔한 바다를 지나 안전한 항구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네가 산란한 마음으로 좇거나 피하는 대상들은 너에게 다가오지 않고, 어떤 의미에서는 네가 그것들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들에 대한 판단을 중지하라. 그러면 그것들은 그 자리에 가만히 머물러 있을 것이고, 네가 좇거나 피하는 모습도 남의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각자의 가치는 자신이 추구하는 것의 가치와 일치한다.”

 

“너도 별들과 함께 돌고 있는 양 별들의 운행을 관찰하고, 원소들의 상호 이행을 늘 염두에 두라. 그런 것들에 관한 사색은 지상 생활의 때를 씻어줄 것이다.”

 

“과거를, 그토록 많은 왕조의 변천을 눈앞에 떠올려보라. 그러면 미래사도 내다볼 수 있을 것이다. 미래사는 과거사와 같은 성질의 것이고, 현재사의 리듬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삶을 40년 동안 관찰하든 1만 년 동안 관찰하든 똑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더 볼 것이 따로 뭐가 있겠는가?”

 

“인간의 소질에서 으뜸가는 것은 공공심이고, 두 번째는 육체적 자극에 양보하지 않는 것이다. 이성적 움직임과 지성적 움직임의 특징은 자신을 한정하고 감각적 움직임과 충동적 움직임에 결코 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둘 다 동물적인 까닭이다.”

 

“첫째, 평정을 잃지 마라. 만물은 보편적 본성에 따르고 있으며, 잠시 후면 너도 하드리아누스나 아우구스투스처럼 무(無)가 되어 어느 곳에도 없게 될 것이다. 둘째, 사물을 응시하여 그 실체를 파악하되, 너는 선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고는 인간의 본성이 요구하는 바를 지체 없이 행하라. 그리고 네게 가장 정당해 보이는 것을 말하되 늘 상냥하게 겸손하게 거짓 없이 말하라.”

 

“인간에게는 인간에게 맞지 않는 사건이 일어날 수 없다. 그리고 소에게는 소에게 맞지 않는 사건이 일어날 수 없고, 포도나무에게는 포도나무에게 맞지 않는 사건이 일어날 수 없으며, 돌에게는 돌의 본성에 어울리지 않는 사건이 일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각자에게 통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이 일어나는 것인데 어째서 너는 네 운명에 불만인가? 보편적 자연은 너에게 네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은 가져다주지 않기에 하는 말이다.”

 

“에피쿠로스는 말한다. ‘몸이 아플 때 나는 육신의 고통에 관해서는 대화하지 않았고, 문병 온 사람들과도 그런 것들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기왕에 시작한 자연 탐구를 계속하며 어떻게 하면 정신이 육신의 그러한 느낌을 의식하면서도 동요하지 않고 자신에게 있는 고유한 선을 견지할 수 있겠느냐는 문제에 전념했다. 그리고 나는 의사들에게도 (...) 내게 무슨 대단한 일을 하는 양 우쭐댈 기회를 주지 않았다. 나는 그때도 행복하고 아름답게 살았으니까.’ 그러니 너도 몸이 아프거나 다른 상황에 놓이면 에피쿠로스처럼 처신하라. 어떤 상황에서도 철학을 포기하지 않고 철학과 자연에 무지한 사람의 수다에 맞장구치지 않는 것은 모든 철학 학파에 공통된 기본 원칙이기 때문이다. 지금 해야 할 일과 그것을 수행할 도구에 생각을 집중하라.”

 

“우주가 원자의 집합체이든 아니면 질서정연한 전체이든, 나의 첫 번째 원칙은 나는 자연에 의해 지배되는 전체의 부분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로, 나는 다른 동종의 부분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원칙을 명심한다면, 내가 부분인 한 전체에서 내게 할당된 그 어떤 것에도 나는 불만을 품지 않을 것이다. 전체에 유익한 것은 결코 부분에 해롭지 않은 까닭이다. 전체는 자신에게 유익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내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본성의 공통점이다. 그러나 보편적 본성은 그밖에 어떤 외부적 원인에 의해서도 자신에게 해로운 것을 생성하도록 강요받지 않는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 따라서 내가 그러한 전체의 부분이라는 점을 명심하게 되면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만족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와 동종인 부분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한 공동체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 모든 노력을 공동체에 유익하도록 조절하고 그와 반대되는 것은 삼가게 될 것이다. 이런 원칙들을 지켜나가면, 동료 시민들에게 유익한 일을 하나씩 실행해나가고 공동체가 부과하는 의무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시민의 삶이 행복하리라고 네가 생각할 수 있듯이, 삶은 행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화가 날 때는, 남자다운 것은 분노가 아니라 온유함과 상냥함이며, 이런 태도가 더 인간적일 뿐 아니라 더 남자다우며, 힘과 근육과 용기를 갖고 있는 것은 이런 성격이지 화내고 불만스러워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생각을 떠올려라. 인간의 성격은 감정에서 자유로워질수록 그만큼 더 힘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슬픔이 허약함의 표시이듯, 분노도 허약함의 표시이다. 이 두 가지 경우 모두 인간은 상처받고 항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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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우리는 싱글맘 싱글대디다
정일호.박소원 지음 / 멘토르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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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일반적인 가정 환경 속에서 어떻게 하면 내 아이를 마음의 상처 없이 건강하게 키울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은 모든 싱글 부모들의 공통된 숙제인 것 같다. 이 숙제를 잘 해결해 나가는 일이 내게도 남은 생에 주어진 가장 막중한 책임이자 의무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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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Get Out (겟 아웃)(지역코드1)(한글무자막)(DVD)
Universal Studios Home Entertainment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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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 중심 사회에 편입된 흑인이 느낄 법한 공포와 불안의 심리를 그로테스크하게 묘파한 수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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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성장 보고서 - EBS 특별기획 다큐멘터리
EBS 아기성장보고서 제작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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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따르면 아기의 애착발달은 생후 1~3년 사이에 이루어지며 이 시기에 보호자와의 지속적인 상호교감이 안정적인 애착발달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일찍부터 아기를 어린이집이나 남의 손에 맡기고 일 나가야 하는 엄마들에겐 죄책감을 심어주는 얘기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아기의 애착 발달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본성이라든지 하는 선천적인 요인도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 같다. 가령 사주에 '인성'이 없으면 저항애착이나 회피애착 유형이 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사주에서의 인성의 유무 혹은 그 발달 정도와 애착유형의 상관관계를 연구한 논문 같은 게 나와도 흥미로울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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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혁명의 구조 - 출간기념50주년 제4판 까치글방 170
토머스 S.쿤 지음, 김명자.홍성욱 옮김 / 까치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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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2 정상과학에로의 길

어느 일정한 시기에 특정 과학자 공동체에게 모범이 되는 문제와 풀이를 제공하는, 그러한 실천의 토대를 제공하는 성취, 다시 말해 특정 시기에 보편적으로 인식된 과학적 성취, 우리는 이것을 패러다임이라고 부른다. 패러다임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①경쟁하는 과학 활동의 양식으로부터 끈질긴 옹호자 집단을 떼어내어 유인할 만큼 놀랄 만하다. ②재편된 연구자 집단에게 온갖 종류의 문제들을 해결하도록 남겨놓을 만큼 충분히 융통성이 있다.

 

과학 발전의 초창기에는 대개 사실의 무작위적인 수집과 장황한 나열 속에서 자연에 관한 상이한 견해들 간의 부단한 경쟁만이 이어진다. 그러다 이윽고 한 과학 분야가 패러다임을 이끌어내고 그것이 허용하는 보다 비전적인 연구 형태를 획득하게 되는데, 이는 그 분야의 발전에서 성숙의 징조이다. 하나의 패러다임으로부터 혁명을 거쳐서 다른 패러다임으로 연속적으로 이행하는 것은 성숙한 과학에서의 통상적인 발달 양상이다.

 

3 정상과학의 성격

패러다임은 새롭거나 보다 엄격한 조건 아래에서 더욱 명료화되고 특성화되어야 하는 대상이다. 패러다임의 완결성을 높이기 위해 정상과학은 어떤 마무리 작업들을 수행하는가. 패러다임에 근거한 정상과학의 연구 양상은?

 

*사실 수집, 즉 사실적 과학탐구에 있어서:

① 패러다임이 특히 흥미롭다고 제시하는 사실들에 대한 지식을 확장시킨다. 패러다임이 주목하는 요소들을 좀 더 정확하고 광범위하게 알아내고자 하는 시도들.

② 사실들과 패러다임의 예측 사이에 일치 정도를 증진시킨다. 사실과 이론의 일치를 증명하려는 여러 시도들. 이론을 증명하려는 설계. 이론을 증명해줄 수 있는 사실들의 발견.

③ 패러다임 자체를 더욱 명료화시킨다. 가령, 물리적 상수를 결정한다든지 정량적인 법칙을 만든다든지 보다 세련되고 정교한 패러다임을 산출하기 위해 여러가지 실험을 고안하고 그 결과를 패러다임을 적용해 해석한다.

 

*이론적 문제들에 있어서:

이론을 이용해서 고유의 가치가 있는 사실적 정보를 예측한다. 패러다임의 새로운 응용을 제시하기 위해 또는 이미 이루어졌던 응용의 정확성을 높이기 위해 수행하는 작업들. 응용에 요구되는 수학을 전개시키기도 한다.

 

결론: ①의미있는 사실의 결정, ②사실과 이론과의 일치, ③이론의 명료화 등은 실험과학과 이론과학 양쪽에서 정상과학 문헌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정상과학이 수행하는 이러한 일련의 작업들은 패러다임이 제공하는, 미리 만들어진, 상당히 고정된 개념상자 속으로 자연을 밀어넣는 시도라고 볼 수도 있다.

 

4 퍼즐 풀이로서의 정상과학

앞서 보았듯이 정상과학은 개념적이거나 현상적으로 예기치 못한 중요한 새로운 발견을 얻어내는 것을 거의 목표로 하지 않는다. 정상연구 문제가 열정을 기울이는 것은 이미 예측한 지점을 새로운 방법으로 성취하는 일이다. 이는 마치 수학적 퍼즐 풀이와도 같다. 패러다임은 과학자 공동체로 하여금 퍼즐을 완성하기 위한 문제들에 선택적으로 집중하도록 유도한다. 즉 페러다임은 어떤 문제들에 대해서는 무가치하게 여기거나 무관심하게 만들고 어떤 문제들에 대해서는 반대로 과도하게 집중하도록 만든다. 포커싱할 주제 선정. 문제설정 방향을 지시.

 

패러다임은 특정 시기 특정 과학자 공동체의 세계관, 우주관, 자연관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형이상학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 또한 패러다임은 방법론적 측면에서 관찰 결과를 어떻게 설명하고 어떻게 개념화할 것인가에 관한 스타일을 제시한다. 진리규명의 양식을 제시.

 

5 패러다임의 우선성

같은 패러다임의 영향력 아래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정상과학 연구들은 마치 우리가 낱말을 익히고 사용하는 이치와 같다. 관념적이고 포괄적이고 총체적인 모델, 어떤 관념 체계가 확고히 서 있어야 그러한 관념틀 안에서 비로소 인식되고 개념화되고 분류되는 것. 이런 점에서 패러다임은 일군의 연구 규칙보다도 더 우선적이며, 더 구속력 있고 더 완전하다. 패러다임이 규칙을 초월하는 영향력을 가진다는 것은 곧 패러다임이 공유된 규칙과 가정에 우선하는 지위를 차지한다는 것이며, 추상화된 규칙들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직접적인 모형을 제공함으로써 연구를 인도한다는 뜻이다. 발견될 수 있는 규칙들의 개입이 없이도 정상과학을 결정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규칙에 대한 패러다임의 우선성을 보여주는 몇 가지 증거들: ①특정한 정상과학 전통을 주도해온 규칙들을 찾아내는 것이 지극히 힘들다. ②구체적인 응용과 참여를 통해 각종 과학 법칙과 이론을 터득하게 하는 과학 교육의 특성. ③규칙은 대개 패러다임이 안전하게 지탱되는 동안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가 패러다임이 위기에 봉착할 때에 비로소 첨예한 논쟁의 화두가 된다. ④동일한 연구영역에서 출발한 사람들이라도 전공의 세분화 과정에서 상당히 차이가 나는 패러다임을 얻을 수 있다. 패러다임은 유연하고 대치가 가능하며 공존하기도 한다. 엄격하고 획일적이고 경직된 어떤 것이 아니다.

 

6 변칙현상 그리고 과학적 발견의 출현

발견은 변칙현상의 지각, 즉 자연이 패러다임이 낳은 예상들을 어떤 식으로든 위배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이는 변칙현상의 영역에 대한 다소 확장된 탐험으로 이어지며, 그 변칙현상이 더 이상현상이 아니도록, 납득하고 예측할 수 있도록 패러다임 이론을 조정하는 경우에 발견은 비로소 발견으로서의 의미를 갖게 된다. 발견이 이와 같이 패러다임의 변화를 포함한다는 것은 한편으로 새로운 과학적 발견의 출현이 패러다임의 변화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전문가 사회가 전통적인 실험과정을 재평가하고, 오랫동안 익숙했던 실체에 대한 개념을 바꾸고, 이 과정에서 자신들이 세계를 다루기 위해 사용하던 이론의 연결망을 개편시키는 와중에 과학적 발견은 일어난다. 기존에 포착할 수 없었던 것들이 패러다임의 변화 속에서 비로소 포착되기 시작하는 것.

 

수용된 패러다임을 기반으로 발전하는 정상과학은 점점 더 정교하고 심오해지며, 패러다임이 정확해지고 영향력이 커질수록 정상과학은 변칙현상에 대한 예민한 지표를 제공하게 된다. 정상과학이 사실이나 이론의 새로움을 겨냥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억압하는 경향마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상과학의 전통적인 탐구방식 자체가 정상과학 자체의 변화를 야기한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7 위기 그리고 과학 이론의 출현
정상과학 범주 안에서의 과학적 발견이 야기하는 것보다 통상적으로 훨씬 더 큰 대폭적인 변동이 있다. 이는 새로운 이론의 창안으로부터 비롯된다. 새로운 이론의 출현은 대체로 기존의 체계의 불안정함이 현저해지고 위기가 고조되는 선행시기(기존의 이론의 모호성이 점증되고 기존 이론에 대한 여러 가지 수정안이 등장)를 거치게 된다. 몇 가지 역사적 사례를 돌이켜보면, 새로운 이론은 위기에 대한 직접적 반응으로서 정상적 문제 풀이 활동에서 현저한 실패를 겪은 후에야 비로소 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 새로운 이론의 창안은 위기가 고조되는 지극히 특수한 경우에만 ‘비로소’ 출현할까. 다른 생산 활동과 마찬가지로 과학에서도 도구를 새로 만드는 일 자체가 일종의 사치이기 때문이다. 위기의 중요성은 도구를 바꾸어야 할 적기에 도달했음을 가리키는 지표가 된다.

 

8 위기에 대한 반응
위기가 새로운 이론의 출현에 필수적인 선행조건이라면, 과학자들은 위기의 존재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는가. 그들은 그들을 위기로 몰고 간 기존의 패러다임을 곧바로 폐기하지는 않는다. 어떤 과학이론이라도 한 번 패러다임의 지위에 등극하게 되면 그 지위를 찬탈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다른 후보이론이 나타나지 않는 한 버려지지는 않는다. 변칙현상이나 반증사례가 나타나더라도 그것들은 기껏해야 위기 형성을 조장하거나 무르익은 위기를 심화시킬 따름이다.

 

하나의 패러다임을 거부하는 결단은 언제나 그와 동시에 다른 것을 수용하는 결단이 된다.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지 않은 채로 하나의 패러다임을 파기하는 것은 과학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다. 기존의 패러다임을 파기하고 또 다른 패러다임으로 넘어가는 그 결정을 이끌어가는 판단은 패러다임과 자연의 비교 그리고 패러다임끼리의 비교라는 두 가지를 포함한다.

 

어떤 패러다임도 자연의 모든 문제들을 완벽하게 풀지는 못한다. 퍼즐은 결코 완벽하게 맞춰지지 않는다. 항상 패러다임을 위협하는 변칙과 반증 사례가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얻지 못하는 것은 과학자의 탓일 뿐 과학 이론의 흠은 되지 않으며, 그러한 변칙들이 반드시 과학자들로 하여금 심각한 회의를 불러일으키는 것도 아니다. 대개의 변칙들은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막연한 인식만을 남긴 채 간과되거나 유보된다. 만일 하나의 변칙 현상이 위기를 유발한다면, 그것은 보통 단순한 변칙 이상의 것이라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특정한 변칙현상을 집중적으로 탐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가? 이 질문에는 딱히 일반성을 가지는 해답이 없는 것 같다.

 

여러 가지 이유로 특정 변칙현상이 집중적으로 탐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시사적인 주제로서 수면에 떠오르게 되면, 즉 하나의 변칙현상이 많은 과학자들에게 정상과학의 또 다른 퍼즐 이상의 것으로 보이게 되면, 비로소 비정상과학으로의 이행은 시작된다. 변칙현상을 규명하기 위해 기존의 이론에 대한 (하나같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한) 갖가지 임시방편적 수정안이 등장하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정상과학의 규칙들은 점증적으로 모호해진다. 모든 위기는 이렇게 하나의 패러다임이 모호해지면서, 그리고 그에 따라 정상과학의 규칙들이 해이해지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모든 위기는 세 가지 방식 가운데 하나로 종결된다.

 

첫째, 정상과학이 궁극적으로 위기를 발생시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으로 밝혀지는 경우. 즉 기존의 패러다임으로 위기를 극복하는 경우. 둘째, 기존의 패러다임으로도, 새로운 급진적 접근으로도, 문제가 안 풀리는 경우. 이 경우, 문제 풀이는 미래 세대의 몫으로 유보된다. 마지막으로 패러다임의 새로운 후보가 출현하고 그것의 수용을 놓고 잇따른 투쟁이 전개됨에 따라서 위기가 종말을 거두는 경우. 위기가 종말을 거두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이행이 일어나는 그러한 변화는 누적적 과정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이는 오히려 새로운 기반에 근거해서 그 분야를 다시 세우는 것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일반화조차도 변화시키는 재건 사업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게슈탈트 전환과도 비슷하다.

 

패러다임의 붕괴에 대한 최초의 인식과 새로운 패러다임의 출현과의 사이에는 상당한 시간차가 벌어진다. 이 혼돈의 시기에 수행되는 연구가 비정상연구다. 이론의 영역에서 뚜렷하게 근본적인 변칙현상에 부딪치게 되면, 과학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선적으로는 기존의 정상과학의 규칙들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무작위적인 연구와 실험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추론적 가설들을 내세우려고 애쓸 것이다. 비정상연구는 또 다른 다양한 후속 연구와 발견들은 수반하게 되며, 이러한 과정 속에서 패러다임 전환에 필요한 데이터는 늘어난다. 또한 비정상연구는 과학자들로 하여금 당대의 연구 전통에 대한 근본적인 철학적 분석을 유도하기도 한다. 경쟁적인 명료화의 남발, 무엇이든 해보려는 의지, 명백한 불만의 표현, 철학에의 의존과 기본요소에 대한 논쟁, 이 모든 것들은 정상연구로부터 비정상연구로 옮아가는 증세들이다.

 

9 과학혁명의 성격과 필연성
위기의 시절에 다발적으로 출현하여 경쟁하는 패러다임들은 타협과 절충을 통한 양립이 불가능하다. 양립 불가능한 것들 중에서 오로지 하나의 선택만이 가능한데, 이 선택은 정상과학 내의 논리적인 평가 과정에 의해서 결정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패러다임이 패러다임 선택에 관한 논쟁에 끼어들게 되면, 패러다임의 역할은 필연적으로 순환성을 띠게 된다. 그룹마다 제각기 그 패러다임을 옹호하는 논증에 그 고유의 패러다임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순환논증은 명쾌한 논리적 규명이 아니라 그저 설득의 방편일 뿐이며, 결국 하나의 이론이 패러다임의 지위를 획득한다는 것은 그에 대한 해당 집단의 동의와 수용이 얼마나 이루어졌는지가 관건이라고 하겠다.

 

과학혁명의 성격은 패러다임 간 양립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누적적 축적 또한 불가능하다. 새로운 이론은 자연현상과 기존 이론과의 관계 속에서 변칙현상을 해결하기 위해서 요청되는 것인데, 성공적인 새 이론은 그 이전의 이론에서 유도된 예측과는 다른 예측을 내놓아야만 한다. 결국, 두 이론은 논리적으로 양립 불가능할 수밖에 없고, 동화 과정에서 후속 이론이 기존의 이론을 대체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과학사를 봐도 새로운 이론이 자연에 관한 믿음에 비연속적인 변화를 일으키지 않고 나타나는 경우를 목도하기는 매우 어렵다.

 

과학혁명이 일어난다는 것은 기존의 정상과학을 가능하게 했던 기본적인 구조적 요소들, 즉 과학자들의 우주가 구성되는 그런 요소들의 근본적인 변화를 말한다. 이미 확립된 친숙한 개념들이 의미하는 바가 대대적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개념적 변환은 다른 어떤 것 못지않게 이전에 확립된 패러다임을 결정적으로 파괴한다. 그리고 이러한 파괴를 과학에서의 혁명적 재배치의 원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뉴턴에서 아인슈타인 역학으로의 변환은 사물이나 개념을 추가적으로 도입하지 않았고, 바로 이런 이유에서 이 변환은 과학자들이 세계를 보는 데에 사용하는 개념적 네트워크가 변화한 것이 과학혁명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혁명적 재배치 끝에 새로운 패러다임의 승인이 이루어지고 나면, 필연적으로 이에 상응하여 과학의 범주 자체가 재정의된다. 옛날 문제들은 더러 다른 과학 분야로 이관되거나 또는 완전히 비과학적인 것이라고 선언된다.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거나 또는 사소해 보였던 여러 문제들이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과 더불어 유의미한 과학적 성취의 원형이 될 수도 있다. 참된 과학적 해답을 구별 지는 기준이 바뀌는 일도 흔하다. 이와 같이 과학혁명으로부터 출현하는 정상과학의 전통은 앞서 간 것과는 양립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종종 실제로 공약 불가능한 것이다.

 

패러다임은 과학자들에게 지도뿐만 아니라 지도를 만드는 데에 필수적인 방향까지 제시한다. 패러다임을 익히면서 과학자는 이론과 방법과 기준을 보통 한데 뒤엉킨 혼합체로 모두 획득하게 된다. 그러므로 패러다임이 변화하게 되면, 통상적으로 문제와 제안된 풀이 등 양쪽의 정당성을 결정짓는 기준에서도 상당한 변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런 점 때문에 서로 겨루는 패러다임들 중에 어떤 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한지 그 우위를 가린다는 게 애당초 어불성설인 것.

 

10 세계관의 변화로서의 혁명
혁명 기간 동안 과학자들은 이전에 연구했던 곳에서 친숙한 도구를 이용해서 관측하면서 새롭고 색다른 것을 보게 된다. 지각작용에 선행하는 패러다임의 변화가 과학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연구 활동의 세계를 다르게 보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패러다임의 변화가 곧 세계관이 변화인 것이다. 혁명 이전에 오리였던 것이 혁명 이후에는 토끼로 둔갑하는 이러한 시각적 전환은 개인에게는 돌발적이고 비구조적이고 직관적인 사건이며, 과학자들 세계에서는 비가역적이고도 점진적인 변화이다.

 

과학적 세계관이 바뀌면 기존의 기기와 기존의 용어 그리고 낡은 실험 조작을 통해서도 이미 알려진 바와는 전혀 다른 자연의 새로운 규칙성을 발견하게 되지만 그러한 관찰 결과를 취합, 해석하여 구축한 새로운 이론이 과학자들에게 쉽게 수용되지는 않는다. 과학자 집단 전체의 세계관이 어느 정도 전환된 후에야 그것을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이게 되고 수용하게 된다. 새로운 이론이 선택될 때, 그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관의 변화 때문에 선택되는 것이다.

 

11 혁명의 비가시성
왜 이전에는 과학혁명을 보기가 어려웠는가. 왜 과학사는 직선적이고 누적적인 것처럼 보이는가. 과학 하면 떠오르는, 권위 있는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교과서 및 교과서를 모델로 한 과학 서적들이 그동안 과학혁명의 존재와 의미를 체계적으로 위장시켜왔기 때문이다. 이런 책들은 모두 과학혁명이 완성된 후 안정화된 ‘결과’들만을 기록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당대 정상과학의 기반을 드러낸다. 교과서는 정상과학의 영속을 위한 교육적 수단이기는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교과서들은 과학혁명을 거칠 때마다 과학사에 대한 편집과 각색을 반복하게 되는 것이며 이렇게 새롭게 쓰인 교과서들은 필연적으로 그것들을 생산했던 혁명의 역할 뿐만 아니라 혁명의 존재 자체까지도 가려버리고 만다.

 

12 혁명의 완결
과학혁명의 시기에는 기존의 패러다임과 새로운 패러다임이 경합한다. 공약불가능성이라는 패러다임의 성격상 각 이론의 정합성에 대한 논리적 입증은 불가능하다. 이론끼리의 경합과 자연선택만이 존재할 뿐이다. 생물들 사이에서 자연선택이 이루어지듯이 과학사에서도 역시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존재하는 실제적 대안들 중에서 가장 적합한 것이 선택된다.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이행은 공약불가능한 것들 사이의 이행이기 때문에 논리나 가치중립적 경험에 의해서 추동되어서 단계적으로 진행되는 성격의 것이 아니며, 이행은 차라리 ‘개종’의 경험이다. 그렇다면 어떤 요인들이 과학자들로 하여금 개종을 하도록 만드는 것일까. 우선적인 요인은 옛 패러다임을 위기로 이끌고 간 문제들을 새로운 패러다임이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보여주는 월등한 미적 호소력 또한 중요하다. 옛 이론에 비해 새로운 이론은 미적으로 세련되고 적합해 보인다. 아직 구체적 근거가 미비함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이론이 갖는 심미적 우월성은 과학자들로 하여금 그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갖게 한다.

 

13 혁명을 통한 진보

왜 유독 과학 분야에서만 진보가 그토록 현저한 특징이 되는가. 일단은 의미론적으로 과학이라는 용어 자체가 ‘확실한 방식으로 진보가 일어나는 분야’에만 국한되어 쓰이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 더 구체적인 상황을 살펴보면, 원래 정상과학 기간에는 연구의 성격상 진보적 특징이 또렷한 게 사실이다. 더구나 사회로부터 고립된 채 전문가 집단 내에서만 폐쇄적으로 심화되어가는 과학이라는 학문 자체의 성격, 학습자가 기존의 패러다임을 철저히 체화해 나감으로써 과학이라는 학문에 입문하게 되는 특유의 교육 방식 등등과 맞물려 정상과학 안에서의 퍼즐 풀이는 필연적으로 더더욱 진보로 비추어질 수밖에 없다. 설령 정상과학이 위기에 몰리고 과학혁명이 일어나더라도 승리를 거둔 새로운 이론의 주창자들은 자기들이 이겼으니까 자기네들이야말로 당연히 과학적 진보의 결과라고 믿게 되고, 이는 과학사의 왜곡으로 이어진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과학의 진보를 당연시 여겨오고 있다. 과학을 ‘자연에 의해서 미리 설정된 어떤 목표를 향해서 부단히 다가가는 활동’으로 간주하는 것에 매우 익숙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새로운 제안을 해본다면 어떨까. 즉, 과학을 생물학적 진화의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다시 말해 과학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들로부터의 진화’로 여긴다면? 그리하여 과학도 마치 생물체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원시적인 태초로부터 출발하여 어떤 목표도 향하지 않고 꾸준히 진행되어온 과정의 산물’로 본다면? 이런 제안이 타당하다면, 더 이상 과학의 진보는 절대적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직선적인 경로가 아니다. 세상에 대한 덜 적절한 관념, 덜 적절한 상호작용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바로 진보의 새로운 개념이 될 것이다.

 

후기

①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에 대한 보충 설명: 이 책의 많은 부분에서 ‘패러다임’이라는 용어가 두 가지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다.
*사회학적인 측면에서의 패러다임: 어떤 주어진 과학자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믿음, 가치, 테크닉 등을 망라한 총체적 집합.
*집단 공약의 집합체로서의 패러다임: 정상과학의 남은 퍼즐을 푸는 기초가 되는, 명시적인 규칙을 대신하는, 공유된 예제들에 암묵적으로 내포된 지식의 요소. 범례를 통해 추상화되는 앎의 양식, 범례로부터 획득하게 되는, '기호적 일반화'가 가능한 어떤 인식. 언어학에 비유하면, 구제적인 단어 습득과 일상 회화를 통해 익히게 되는 추상적인 언어 체계.

 

② 과학자 공동체의 성격: 과학 지식의 생산자이자 승인자로서 묘사되는 기본 단위. 패러다임이란 그런 집단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그 무엇을 말한다. 하나의 과학자 공동체는 유사한 교육과 전문적인 지도를 받고 동일한 기술적 문헌을 흡수한다. 집단 내 의사소통은 완전하고 전문적 판단은 잘 일치한다. 반면 상이한 공동체끼리의 소통은 쉽지 않다. 과학자 공동체가 특정 연구 주제를 공유하는 건 아님. (각각 상이한 패러다임에 속한 두 무리의 과학자 공동체가 하나의 특정 연구 주제에 동시에 몰두할 수도 있다. 이럴 경우 똑같은 것을 보고도 두 무리는 각각 다르게 인식한다.) 과학자 공동체는 주제를 공유하는 게 아니라, 믿음, 가치체계, 테크닉, ~의 법칙, ~의 공식, ~의 방정식과 같은 일종의 과학언어를 공유하는 것.

 

③ '위기'에 대한 보충 설명: 위기가 혁명의 절대적 전제조건은 아님. 위기는 단지 통상적인 서막에 불과하며, 위기라는 게 원래는 정상과학의 경직성을 완화하는 자체 교정 메커니즘이기도 함. 그리고 위기가 꼭 공동체의 연구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만도 아님. 새로운 기기라든가 새로운 법칙의 등장이 위기를 낳기도 함.

 

④ 과학의 기초를 논리와 법칙보다는 분석할 수 없는 개인의 직관에서 찾으려 함으로써 과학을 주관적이고 비합리적인 활동으로 만들었다는 비판에 대해: 패러다임이 직관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개인의 직관이 아니라 성공적인 집단 구성원들 사이에서 시험을 거쳐 공유된 체계적인 직관이다. 그리고 그런 직관이 분석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⑤ 양립불가능한 두 이론 사이의 선택의 문제: 공약불가능한 관점을 가진 사람끼리는 서로 다른 언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간주되고 그들 사이의 의사소통 문제는 번역의 문제로 분석될 수 있다.

 

⑥ <과학혁명의 구조>가 그리고 있는 과학의 모습이 지나치게 상대주의적이라는 비난에 대해: 진화론적 관점으로 과학을 보면, 과학의 발전은 생물학적 발전과 마찬가지로 일방향적이고 비가역적인 과정이며, 나중의 과학 이론들은 이전의 이론들보다 진화론적으로 우수하다. 그 까닭은, 나중의 이론이 자연의 진리값에 보다 근접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이전의 이론들보다 ‘퍼즐을 발견하고 해결하는 데 있어서 더 나은 도구’이기 때문이다. (인식의 유용성에 있어서 더 우월하다는 것. 인식의 유용성을 가늠하는 기준은: 정량적 예측의 정확성, 난해한 주제와 일상적 주제 사이의 균형, 해결된 여러 문제들의 수, 단순성, 얼마나 넓은 범위에 적용할 수 있는가, 다른 전공 분야와 양립 가능한가 등등) 이런 맥락에서 나는 과학적 진보를 확신한다. 이는 결코 상대주의자의 입장이 아니다.

 

⑦ 이 책에서 나는 과학의 발전을 단절화되고 비누적적인 전통의 연속으로 묘사했는데, 사실 이런 단절화된 역사 구분의 방식은 문학사, 정치발전사, 음악사, 미술사 등 인간의 여러 활동의 역사에서 이미 적용되어온 바 있다. 나는 흔히들 단선적이고 누적적인 방식으로 발달한다고 생각해왔던 과학이라는 분야에 그러한 개념을 새롭게 도입해봤을 뿐이다.

 

*

 

과학이 과학 자신을 객관적이고 초월론적 시각에서 살펴본다는 점에서, 즉 학문 자체의 자기분석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언뜻 이 책은 푸코의 지적 탐사 여정의 과학 버전 같기도 하다. 쿤이 푸코의 영향을 받은 것일까 푸코가 쿤의 영향을 받은 것일까. 아니면 특별한 교류 없이 푸코나 쿤이나 그저 60년대 탈근대적 흐름 속에서 출현한 일군의 새로운 지적 현상들인가. 쿤이 절대적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직선적 경로로서의 과학의 진보를 부정했다고 해서 그를 상대주의의 선각자로 칭송하는 것(41쪽)은 성급해 보인다. 이 책 후기에서 쿤이 직접 자신은 상대주의자가 아니라고 해명한 걸 보면 그 역시 그러한 칭송을 결코 달가워하지 않을 것 같다.

 

쿤은 이론이 진리에 얼마나 근접하는가 하는, 이론의 존재론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일단 괄호를 치고, 단지 이론이 얼마나 인식론적으로 유용한지를 기준으로 과학의 진보를 긍정한다. 그는 자연의 진리를 어떤 차원에서 어떤 시각으로 규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 즉 프레임의 문제에 집중할 뿐이다. 하지만 진리 규명의 프레임에 대한 고찰 자체가 이미 형이상학적인 어떤 진리의 존재를 암묵적으로 상정하고 있는 셈이 아닐까. 이는 곧 과학이라고 하는 지극히 ‘근대’스러운 학문의 존재론적 조건이기도 할 것이다. 반면에 푸코는 좀 더 급진적이다. 진리 자체를 창안되고 고안된 어떤 것으로, 유기적이고 변형 가능한 구성물로 여긴다는 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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