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동아리 사람들끼리 암실을 빌려 사진 작업을 했던 적이 있다. 자궁 같던 암실에서 흑백 필름을 현상하며 느꼈던 흥분과 설렘을, 아직도 나는 두근대는 추억으로 간직하고 산다. 현상액에 인화지를 띄우고 가만가만 흔들면 낮에 찍었던 풍경들이 아스라이 떠오르기 시작하는 것인데, 그때의 벅차오름을 어떻게 필설로 형언할 수 있을까. 상(像)이 꽃처럼 피어나던 그 마법 같은 현현의 순간을.

 

시도 그렇게 오는 시가 있다. 처음엔 아무 것도 안 보이지만 곰곰이 있으면 문득 꽃처럼 피어나는 시. 그래서 어쩔 줄 놀라 두 눈 비비고 다시 들여다보게 되는, 그런 시. 쉬운 시가 재미없는 까닭은 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꽃도 사진도 시도 피어나는 순간이 가장 눈부시다. 피어나는 순간의 시가 가장 아름답지만, 필듯 말듯 하는 순간의 시도 애틋하다. 잡힐 듯하다 놓칠 때마다 정수리가 자꾸만 간지럽다. 난해한 시가 꼭 싫지만은 않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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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운 현실이지만, 이 외 몇 권의 책을 더 독파하고도 동생은 아직 연애에 성공하지 못했다. 동생의 책장에 무슨 업보처럼 쌓여 가는 연애 관련 서적을 볼 때마다 책이라는 것이 대저 얼마나 쓸모없는 물건인가 통감하게 된다. 이만하면 이론은 충분하게 습득하였으니 이제 그만 책일랑 집어던지고 당장 강남역으로 나가 한 마리 굶주린 들개처럼 헌팅을 해봄으로써 실전 경험을 쌓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 하는 충고를 할까 말까 망설이면서 동생과 오손도손 삼겹살을 구워 먹는 크리스마스 저녁이다. 크리스마스에 비가 내린다는 사실에 우리는 얼마나 환호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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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 제3판 개역본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강정인.김경희 옮김 / 까치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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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상과 관념에 매몰된 채 오로지 대의명분만을 추구하는 고담준론도 답답하지만, 윤리에 대한 고려가 전적으로 부재한 채 실제적인 지침으로만 가득한, 그래서 흡사 바둑강좌나 가전제품 사용설명서를 방불케 하는 마키아벨리의 정치학 역시 숨이 막힌다. 권력을 쟁취하고 유지하고 확장하는 갖가지 방법들에 대하여 치밀하게 분석하되 그것이 갖는 본질적인 의미와 목적과 가치에 대해서는 일절 성찰하지 않는 지극히 현실적인 처세 매뉴얼! 그러나 과연 정치가 윤리적 당위나 보편적 가치들로부터 얼마나 유리될 수 있을까. 설령 그 유리된 간극을 가식과 위선으로 메울 수 있다 한들 역사는 그 모든 것을 터럭 하나 놓치지 않고 낱낱이 기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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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원의 고전강의 공산당 선언 - 젊은 세대를 위한 마르크스 입문서
강유원 지음, 정훈이 그림 / 뿌리와이파리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마르크스의 생애에 대한 소개와 <공산당선언>이 나오게 된 시대적 배경에 대한 언급을 서두로 하여 선언문 제1장을 해설하고 있다. 쉽고 명료하고 재미있게 읽힌다. <자본을 넘어선 자본>을 읽기 전에 이 책을 먼저 읽었어야 옳았는데 아무래도 단추를 잘못 끼운 기분- 그동안 대충 이해하고 넘어갔으나 기실 맑스를 이해하는 데 있어 반드시 또렷하게 짚고 넘어갔어야 했을, 이를테면 '역사적 유물론'이나 '계급투쟁' 같은 용어의 정확한 뜻을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으니. 여하튼, 저자가 추천하는 <공산당선언>은 박종철출판사에서 나온 것으로 다른 어떤 고전보다도 두께가 얇다고 하니 바로 그 점 때문에 도전해볼만 하겠다. 
 
<공산당선언> 제1장 끝부분에서 맑스는 자본주의 발달이 부르주아지를 위협하는 '노동자들의 혁명적 단결'을 가져온다면서 공산주의 혁명을 예견하지만, 역사는 결코 그 내적인 논리에 따라 원시공동체에서 노예제, 자본주의, 공산주의로 이행되어가는 식의 단선적 흐름이 아니었다. 때문에 <자본을 넘어선 자본>에서 이진경은 공산주의와는 구별되는 '코뮨주의'를 제안했었다. 공산주의가 내부성의 논리를 따라 자본주의 발전 법칙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코뮨주의는 자본이 지배하는 세계 안에서 자본의 '외부'를 구성하려는 부단한 시도이며, 이는 곧 다양한 양상으로 창안되고 창출될 수 있는 '현재'의 시제를 갖는 이행운동이라는 것. 

훗날 자본주의의 맹아가 된 중세의 자치도시라는 것도 말하자면 봉건신분제라는 당대의 주된 사회 시스템으로부터 탈주한 '외부'의 영역이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당대의 외부였던 중세의 자치도시 역시 다음 시대를 향해 가는 하나의 '이행운동'이 아니었는지. 혁명으로 점화된 20세기 체제 실험이 거대한 막을 내리고 바야흐로 자본주의가 정점에 이르렀다는 이 시대에도 중세의 자치도시처럼 시스템의 외부를 형성하려는 전략들이 여전히 사회 곳곳에서 지속적으로 기획되고 있음은 신기하고 고무적인 일이다. 이러한 활동의 성과들이 점진적으로 축적되어 언젠가는 분명 (지난 세기의 그것과는 또 다른 종류의) '임계치'를 넘어서는 날이 올 거라 믿는다. 맑스가 꿈꾸었던 혁명이 결코 실패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외부를 구성하여 탈주의 공간을 마련함으로써 점진적으로 이행되어가는 그러한 운동으로서 여전히 이 시대에 현재진행형으로서 계속되고 있는 게 맞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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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을 넘어선 자본 리라이팅 클래식 2
이진경 지음 / 그린비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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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도 어떤 힘이 있다면, 시스템 자체를 전복하거나 개조하는데 그 힘을 발휘하기보다, 오히려 힘을 발휘하는 데 있어서 시스템을 적절하게 이용하고 활용하는 편이 낫겠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읽기 시작한 책. 그러나 나의 까칠한 태도가 이내 무색해지도록 이 책은 뜨거운 책이었다. 그러나 뜨거움과는 별개의 문제로, 정통 맑스주의에서 통념화되고 상식화된 내용을 흔들고 뒤집어 보았노라고(p.460) 저자 스스로 이미 고백한 바 있듯이 이 책의 내용을 과연 어느 정도까지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게다가 경제학에 대한 배경지식도 전무할 뿐더러 맑스를 읽어보지도 않은 지금의 상태에서! 때로는 어려워서 때로는 의아해서 갸웃하게 되는 부분이 없지 않았으나 그저 일단 내 수준에서 이해되는대로만 몇몇 부분을 정리해둔다. 자본론 2권과 3권에 해당하는 8~9장은 읽다가 포기했다. 

1. 자본가는 노동자를 착취함으로써 이윤을 얻는데, 이때의 이윤이란 절대이윤과 상대이윤의 합으로 산출된다. 절대이윤은 생산수단의 배타적 소유에 기초하여, '노동이 산출한 가치의 일부를 노동자에게 지불하지 않는 방식'으로 발생하는 잉여가치다. (일정 근무 시간 동안 노동자들이 100을 생산했을 때, 80에 해당하는 몫만 월급으로 주고, 20은 자기가 챙길 때의 그 '20') 상대이윤은 '노동의 가치' 내지 '노동의 대가'를 모두 지불하는 경우에도 발생하는 잉여가치로써 (노동의 대가를 모두 받는 경우에도-정확히 말하면, 노동자가 자신이 행한 노동의 대가를 모두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경우에도- 착취는 발생한다!) 최열등 노동과의 편차에 의해 발생하는 잉여가치를 말한다. (일정 근무 시간 동안 100을 생산하던 노동자들을 닦달해서 140을 생산하게 하고, 아까의 20과는 별도로, 닦달해서 생긴 40을 가로챌 때의 그 '40'-노동자들의 월급은 여전히 80/n)  

"절대이윤은 노동의 가치화가 노동력의 구매에 투입된 가치를 능가해야 한다는 것을 요청한다는 점에서 '가치화의 결과는 항상 잉여가치를 포함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노동자가 받은 돈에 비해 더 많은 가치를 자본가에게 제공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반면 상대이윤은 노동을 가치화하는 순간, 가치화된 것의 비교 자체를 통해서 발생하는 잉여가치고, 가치법칙에 따라 동일하게 지불된 노동력이 산출한 다른 결과란 점에서 노동가치론의 '가치법칙' 안에서 산출되는 잉여가치다. 즉 상대이윤은 '가치법칙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착취법칙임'을 보여준다. 이는 가치화와 동시에 발생하는 잉여가치고, 노동력의 사용과 동시에, 다시 말해 노동과 동시에 발생하는 잉여가치다. 이런 점에서 이렇게 말해도 좋을 것이다. 잉여가치 없는 가치는 없으며, 잉여노동 없는 노동은 없다." -p.149  

2. 19세기 이전의 노동력이란 장인적인 숙련과 도제적 훈련을 거친 일종의 전문 인력이었기 때문에, 노동과정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여 간섭할 수 없는 자본가는 그저 오로지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만을 이윤으로 취할 수 있었다. (노동의 형식적 포섭) 그러나 산업혁명기 이후 분업과 협업 체제가 발달하고 기계가 도입되면서, 기계에 장악된 노동은 점차 숙련노동의 성격을 잃어가고, 자본은 노동과정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 이로 인해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이 촉발된다. (노동의 실질적 포섭) 이 시기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절대적 잉여가치에 해당하는 노동시간마저 늘어남.  

20세기에 이르면 '노동의 기계적 포섭'이 진행된다. 자본은 기술의 발전이 이루어낸 자동화(노동능력 자체를 직접적으로 기계화)와 정보화(모든 사회적 활동에 요구되는 '접속'을 기계적으로 포섭하고 장악) 시스템을 이용하여 노동력의 구매 없이 사회적 노동을 직접 착취할 수 있게 된다. 이제 자본은 더 이상 노동자들을 감옥 같은 데다 몰아넣고 닦달하지 않아도 된다. 대신 도처에서 생산에 관여한 사람들로 하여금 기계에 접속하여 활동하게 한다. 이 자체로 기계적 잉여가치가 창출되기 때문에. 기계에 접속한 활동을 원활하고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각종 신분확인과 검열제도가 강화되고, 그 결과 19세기식 훈육사회는 이제 통제사회로 진화. (5장)  

3. 자본은 생산된 잉여가치를 추가 자본으로 전환한다. 이러한 가치증식운동이 진행되면서 최초에 투여된 자본은 무한소에 가까운 크기로 줄어들고, 잉여가치에서 연원하는 자본은 실제로 가동되는 대부분의 자본을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투여된 자본이 확대된다는 것은 노동력 구입에 들어가는 가변자본의 크기보다 재료나 기계 같은 생산수단에 들어가는 불변자본의 크기가 확대됨을 의미한다.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기계를 추가 구입해서 사업규모를 확장하면 했지 인력을 더 고용하려고 하지는 않는다는 것) 오히려 가변자본의 투입 비율은 갈수록 줄어 자본의 축적이 고용의 감소나 임금 삭감을 수반하게 된다. 즉 ‘노동인구는 그들 자신이 생산하는 자본축적에 의해 그들 자신을 상대적으로 불필요하게 만드는 수단을 점점 더 큰 규모로 생산’하게 되는 셈.  

결국 자본사회가 발달할수록 과잉노동인구가 발생하게 되는데, 이렇게 발생한 과잉노동인구, 즉 유휴노동력은 근대산업의 하나의 필요조건으로써,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을 때 자본이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노동력 풀을 형성한다. 이렇게 자본은 노동하는 인간을 자신의 모델로, 동일자로 만들어내지만 동시에 실업자 내지 과잉인구, 유휴노동력이라는 타자(제 존재를 정의하고 확인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타자) 또한 만들어낸다.  

이들 타자에 대한 자본의 가차 없음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실업화 압력’에 시달리도록 하여 더 많은 노동을 착취해내는 동력이 된다. 오로지 일하는 자만 인간으로 취급하며, 일하지 않는 부랑자, 실업자, 거지 등은 철저하게 게으르고 부도덕한 인종으로 내몰아 핍박하고 격리시켜버리는 새로운 사회의 출현. ‘인간’이 되려는 자에게 제시되는 자본의 요구는 이제 노동자 자신의 욕망이 된다. 구태여 강제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스스로 욕망의 노예가 되어 열심히 노동한다. (6장) 

4. 자본 축적의 원천은 잉여가치이고, 일정 시간이 흐른 후 자본의 대부분은 잉여가치로 이루어진 것이 된다지만, 이러한 증식활동의 시작점이라고 할 만한,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최초의 자본이 있을 것 아닌가. 이 ‘본원적 축적’, ‘사전적 축적’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먼저 지배세력과 기득권층에 의한 폭력과 약탈, 강압과 협박에 의해 생산자와 생산수단의 분리가 자행된다. (ex. 영국의 엔클로저 운동, 제국시대의 식민지 정책) 그 결과, 자본가의 생산수단 독점이 이루어지고, 근대적 무산자가 대규모로 양산되어 노동시장(인력풀)이 형성된다. 이렇게 형성된 시장은 더 이상 원시적 형태의 ‘단순상품 내지 소생산에서 비롯되는 국지적인 자연발생적 교환의 장으로서의 시장’이 아니라, ‘기아와 결핍에 의하여 시장에 나가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자본주의적 시장’이다. 국가는 통치 전략으로서 이러한 시장의 전국적인 확대를 지원하는 한편, 노동력으로 기능(?)할 수 없는 자들은 치안을 이유로 모조리 수용소, 병원, 학교, 감옥 등에 격리 또는 감금하고, 교화와 훈육 및 처형을 감행한다. 결국, ‘본원적 축적’이란, 거대한 국가적 폭력이 개입하여 지극히 비경제적이고 반도덕적인 방식으로 탄생된 것. (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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