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의 윤리 - 칸트와 라캉 슬로베니아 학파 총서 4
알렌카 주판치치 지음, 이성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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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의 윤리'를 논하기에 앞서 주판치치는 윤리를 가능케 하는 전제조건으로서 자유의 가능성에 대해 살피고 있다. 주판치치가 자유의 단서로 들고 있는 것은 '죄책감'이다. 자연법칙의 인과성 속에서는 우리의 어떤 행동도 자유롭지 못하다. 지극히 내적인 심리적 동기들마저도 크게 보면 자연적 인과성의 또 다른 형식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의 모든 행위가 이처럼 필연성의 결과이고 따라서 우리에게 어떠한 자유도 없는 것이라면, 때때로 왜 우리는 벌어진 어떤 일들에 대해서, 이론적으로는 내 잘못도 아닌 그런 일들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끼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이미 우리의 자유를 상정하고 있다는 얘기 아닌가. 주판치치는 “나는 다른 어떤 것도 할 수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죄가 있다”는 표현이 보여주는 그 분열 속에서, 분열과의 조우 속에서 주체의 자유가 현시된다고 말한다.

 

자유가 ‘분열’ 속에서 현시되는 것이라면, "인간은 자신이 믿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자유롭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자유롭다"고 말할 때 후자의 자유란, 굉장히 실재계적인 차원의 개념인 것 같다. 주판치치는 우리가 인식하고 형언할 수는 없지만 이미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 그런 차원의 자유가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사실 이런 자유는 정신분석의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주체가 자신의 무의식에 종속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무의식의 주체로서 그것을 자유롭게 선택(칸트가 말하는 ‘소질’의 차원에서 정위되는)했다고 간주되어야만이 정신분석 자체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자유를 정신분석의 체계를 지탱하기 위한 '외설적 보충물' 같은 것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표면적으로 정신분석에서 인간의 자유 의지는 희박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바르샤바에 간 레닌>(모스크바의 미술 전시회에 레닌의 부인이 공산청년동맹의 단원과 침대에 함께 있는 그림이 전시되었다. 그림의 표제는 ‘바르샤바에 있는 레닌’이었고 그림 속에서 레닌을 찾지 못해 황망해하던 관람객이 묻는다. 레닌은 어디 있지요? 레닌은 바르샤바에 있습니다.)이라는 작품이 완성되기 위해 그림에서 떨어져나가야 했던 ‘레닌’처럼, 정신분석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분석의 체계가 완결되기 위해 제거된 잉여물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신분석에서 부재한 듯 보이는 인간의 자유의지는 정신분석을 가능하게 해주는 원인으로 숨겨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도 인간의 자유의지의 존재를 증명하기에는 뭔가 부족해 보인다. 왜냐하면 이 자체가 순환논증의 오류이기 때문이다.

 

미진한 구석이 있지만 어쨌든, 인간의 자유를 전제로 해서 주판치치는 윤리가 본성상 과잉이고 과도함이라고 말한다. 즉, '의무에 부합해서' 하는 행위가 법적인 것이고, '의무에 부합해서, 그리고 오로지 의무 때문에' 하는 행위가 윤리적인 것이라 할 때, '그리고 오로지 의무 때문에'라는 잉여, 그 과도함, 라캉의 대상 a로 치환될 수 있는 이 부분이 바로 칸트가 말하는 순수형식으로서의 윤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순수한 경지의 윤리적 행위는 그것이 아무리 선한 종류일지라도 자체의 과도한 본성 때문에 공동체 구성원에게는 불온하고 위험하며 심지어는 악마적인 교란 행위로밖에 와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주판치치의 해석대로라면 칸트가 말하는 윤리적으로 이상적인 인간이란, '오로지 의무 때문에' 공동체의 조화를 위협하는 행위를 저지르는, 지극히 반사회적이고 맹목적인 광기의 인간이 되는 것이다. 

 

칸트는 우리가 이런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영혼의 불멸성'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그저 오로지 무한한 자기 정화를 통한 점근선적 접근만이 가능할 뿐이라고 선을 그었지만, 주판치치는 칸트의 이런 입장 자체가 마치 영원한 고문 속에서 쾌락을 증진시키는 사드처럼, 영혼의 불멸성을 전제로 깔아서 스스로를 최고선에 도달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도덕법칙을 영원히 지속시키려는 지극히 정념적인 방식이라고 말한다. 영원히 죽지 않는 희생양이란 건 없다. 그것은 그저 사드가 만들어낸 자기 환상일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칸트가 말하는 최고선 또한 마찬가지 아닌가. 같은 맥락으로 최고선은 결코 불가능한 게 아니다. 영혼의 불멸성이 전제되어야만 도달할 수 있는 최고선이란, 칸트가 자신의 쾌락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다.

 

이제 주판치치는 '욕망'으로부터 '충동'을 분리해내어 이 둘을 대립시키기에 이른다. 그녀는 아마도 우리가 욕망의 인간(사드, 발몽)으로부터 벗어나 충동의 인간(돈주앙)으로 도약한다면 순수형식으로서의 윤리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고 보는 것 같다. 그러니까 그녀의 논리대로라면 최고선이란(혹 악마적 악이든) 대상의 주위를 에두르며 적당량의 쾌락을 지속적으로 누리는 방식 대신, 쾌락의 최대치를 누리고 파국으로 치달아버리는 과도한 방식을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다. 금욕적인 자기 수양이나 정화가 아니라, 소질의 혁명, 니체적으로 말하면 노예에서 주인으로의 '전향'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전자의 경우(사드나 발몽)의 방식대로라면 우리는 영원히 윤리적인 것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사실상 우리 자신이 도달을 '지연'시키는 것이지만) 언제나 윤리를 목전에 두고 그것을 영원히 '의지의 대상'으로 향유하면서 살게 될 것이다. 여기에는 과잉이랄 만한 게 없으니 이는 애초에 윤리적 국면이 아니다. 그저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하고 정상적인, 도덕적으로 쇠약한 삶의 방식일 뿐이다. 반면에 후자(돈주앙)의 방식을 통해 주체는 비록 자신의 환상 속에서나마 윤리적인 것에 도달한다. 그러나 도달하자마자 주체는 파멸한다. 주체와 대상 a의 관계가 그러하듯이 도달 이후에는 언제나 너무 멀리 가고 마는, 그럼으로써 자기 파괴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게다가 이런 극단적 방법에 따른 행위가 ‘최고선’인지 ‘악마적인 악’인지는 행위하는 주체로서는 판단을 내릴 수도 없다. 왜냐하면 최고선과 악마적인 악은 형식상 동일한 구조를 이루기 때문이다. 사실 칸트의 윤리의 맥락 속에서는 선과 악의 구분이 불가능하다. 의지와 도덕법칙이 일치하는가, 일치하지 않는가 하는 구분만이 가능할 뿐이다. 만약 일치한다면 그것은 윤리적인 행위일 것이며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윤리와 상관없는, 정념적인 행위일 것이다. 선과 악은 의지와 도덕법칙이 일치하는 주체의 어떤 파멸적 행위가 일어난 이후에, 그러니까 그런 실재계적 사건이 벌어진 이후에, 사후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영역일 뿐이다.

 

주판치치의 칸트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아무도 쳐다보지 말고 오로지 네 스스로가 정립한 도덕법칙에 준하여 저 실재의 심연으로 뛰어내려라. 틈새를 현시함으로써 너 스스로 세계의 외상(그리고 향락)이 되어라. 환상으로 상연되어라. 네 행위가 (상징계에 사후적으로) '악마적 악'으로 기입되든 '최고선'으로 기입되든 아무도 탓하지 말라. 어떻게든 너로 인해 상징계의 지형은 변화할 것이다. 이것이 주체의 윤리다." 이 책은 총 9장까지 있는데 너무 어려워 끝까지 읽지 못했다. 심연의 언저리를 배회하며 어떻게든 상징계 안에서 버텨보려는 나의 안전주의 근성, 사드적 노예근성을 (역시 사드처럼) 쾌락주의적으로 위무하기 위해 <실재의 윤리>를 펼쳐 읽기 시작했지만, 반쯤 읽다가 벌써 위무가 다 되어버린 걸 보면 난 역시 윤리하고는 거리가 먼 정념의 인간인가. 아래는 역자 블로그에서 가져온 정오표.

 

12쪽 하2: 욕망의 --> 욕망을
21쪽 상8: 연관되 --> 연관된
215쪽 상1: 경우이다 --> 경우가 아니다
222쪽 상2: 잔여물 이외에 다름아니다 --> 잔여물에 다름아니다
315쪽 하1: 완수한다 --> 완수하는 것이다
357쪽 상1: 그녀는 신의 법칙의 보증을 확보하기 위해 지탱물로 만들지 않는다 --> 그녀는 신의 법칙의 보증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지 않는다("확보"는 고딕체)
377쪽 하4: 위치시킬 수 있다. 첫 번째 것의 --> 위치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 이행 자체는 두 가지 상이한 행로를 취할 수 있다. 첫 번째 것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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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단어 문학과지성 시인선 393
유희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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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제 상처를 물감처럼 찍어 찬란한 그림을 그려놓기라도 했더라면 읽는 사람 마음이 편했을 텐데 이 시인, 그저 두 주먹 꼭 쥐고 슬픔이며 분노며 설움이며를 애써 덤덤하게 삼키고 있다. 즐겁게 춤추어야 할 영혼의 어깨에 누가 이리도 굳은 살을 박아 놓았을까. 물에 젖은 담요처럼, 그 안에 들어있는 사람처럼 무겁고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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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 감정 문학과지성 시인선 318
최정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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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유리창

 

그렇게도 부드럽게 목덜미에 그렇게도 다정하게 귓불에
그러다가 갑자기 낚아채듯 날렵하게
햇빛이 발꿈치를
햇빛이 발꿈치를 쫓아와 물어 뜯어

 

몸을 피해도 쫓아오고
캄캄한 방에 갇혔는데도
햇빛이
하백의 딸 유화의 허벅지로
어찔어찔하게

 

햇빛과 자고 하백의 딸
닷 되들이만 한 알을 낳아
그 알을 내다 버려도
뭇짐승이 핥고
아지랑이의 깃털이 덮어주어
으앙하고 한 아이가 알에서 걸어 나왔듯

 

너 깜깜절벽 꽝꽝 웅덩이
적막강산에 엎드려 만 번 절해라

 

그때처럼 잉잉거리게
햇빛이 벌떼처럼 달겨들어
혼자 있는 겨울 유리창
으앙하고 또 한 아이가 걸어 나오게

 

나도 여기 깜깜절벽 꽝꽝 웅덩이 적막강산에서 만 번을 절하면, 햇빛이 내 허벅지 사이로 어찔어찔 달려드려나. 발꿈치를 물어뜯는 햇빛이랑 슬프고도 무섭게 한 잠 자고서는 나도 알 하나 점지받을 수 있으려나. 내다 버려도 뭇짐승이 핥고 아지랑이 깃털이 덮어주는 그런 믿을 수 없는 알 하나를 쑤욱. 그러나 나는 (선천적으로) 유화가 아닌데다가 (후천적으로는) 신심마저도 부족한 것 같으니 이런 애석한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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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 범우사상신서 19
콜린 윌슨 지음 / 범우사 / 199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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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인물과 문학 작품들을 통해서 '아웃사이더'라는 인간 유형을 분석하고 있다. 저자의 아웃사이더 분류 기준은 모호한 면이 있고, 해석하기에 따라 아웃사이더적인 인간은 참으로 광범한 것 같기도 하다. 차라리 아웃사이더는 소수의 열외자도, 선구적인 존재도, 희귀하고 독보적인 어떤 유형도 아니라, 우리 안의 가장 깊숙한 장소에 은거하고 있는 보편적 내부자라 하는 편이 옳겠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던 까닭 역시 그만큼 아웃사이더가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사회에 기입되지 못하고 탈각되어버린 자신의 고유한 잉여분에 매순간 시달리고 있는 대다수의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 책이 말하는 아웃사이더 캐릭터에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저자의 분석 가운데 인상깊은 대목은 아웃사이더의 말로이다. 저자는 블레이크의 견해를 인용하면서 조화라는 것이 인생의 궁극의 목적이기는 하나, 그보다 중요한 제1의 목적은 어떠한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보다 충실한 인생을 보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책의 맥락상 '충실하다는 것'은 곧 욕망에 정진하는 일, 즉 삶과의 치열한 투쟁을 의미하는 것이겠다. '조화'는 그 이후의 문제라고 했지만, 그럼에도 저자는 이 책 마지막에서 아웃사이더가 종교적 각성을 통해 궁극적으로 해방에 이르게 된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종교적 각성 이후 해방된 아웃사이더는 더 이상 아웃사이더라고 부를 수도 없을 뿐더러, 어쩌면 인간이 달성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문학적, 사회적, 정치적 성취는 화해와 성찰 이전의 격렬한 고투 속에서만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책은 아웃사이더라는 인간 유형을 설명하기 위해 니체, 도스토예프스키, 헤세 등의 작품들을 면밀히 분석하고 있는데, 우선 나는 이들 대문호들의 문학 작품부터 일독해 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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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꾼
윤성현 감독, 서준영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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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한없이 섬세하고 예민한 촉수를 차라리 사물과 관념을 탐구하는 데 뻗었더라면. 인간관계란 종교로 삼기에는 너무나 불안정하지 않은가. 지나치게 날카로운 촉수를 가진 자들은 곁에 살아 숨쉬는 인간에게 닻을 내리기보다 차라리 자연을 사랑하거나 서가에 숨어 역사와 철학과 죽은 위인 따위를 파고드는 편이 나을 것이다. 불쌍하지만 그 편이 자기 몸을 보신하는 데에는 더 현명한 선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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