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자로 사는 법
게리 콕스 지음, 지여울 옮김 / 황소걸음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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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급형 실존주의 안내서라고 해야 할까.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깔끔하고 예쁜 책이다. 책 읽고 격앙되어 하는 말인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역시, 실존주의를 구닥다리로 만드는 오래된 공격적 질문-인간에게 과연 자유의지가 존재하는가 하는-에는 전혀 주눅들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거대한 철학사적 흐름 속에서는 유의미한 화두일지라도 개인의 생을 개척해 나가는 데 있어서는 불필요한 질문이다. 차라리 그런 질문에는 망설임 없이 괄호를 쳐버리는 게 낫겠다. 중요한 건, 마치 인간에게 '자유가 존재하는 듯이' 살아가야 한다는 거 아닐까. 부단한 제스처와 끊임없는 추구만이 자유라고 하는 관념의 현실태를 만들어낼 것이다.


신을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보다 이득을 볼 확률이 더 높기 때문에 신을 믿는 편이 낫다는 파스칼의 논증도 떠오른다. 인간의 자유의지 역시 유용성의 문제로 파악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생명활동을 북돋워주는 믿음에 대해 구태여 회의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니체의 계보학적 분석에 따르면 인간의 삶에 유용하고 이로운 것들이 최종적으로 도덕이 된다 하니 그렇담 자유의지도 마찬가지겠다. 자유도 결국은 윤리의 문제인 것이다. 그런 게 있건 없건 상관없이, 윤리적 행동강령으로서 마치 그런 게 있는 듯이 살아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불굴의 접속사를 마법의 주문처럼 되뇌면서. 이보다 더 강력한 반전이, 이보다 더 숭고한 기만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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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읽기 정신분석과 미학총서 2
숀 호머 지음, 김서영 옮김 / 은행나무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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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은 편지>는 편지의 이동 혹은 편지와의 관계(편지는 무의식이라고도 문자라고도 볼 수 있겠죠)에 의해서 주체의 위치가 결정되는 것을 보여 주는 작품이라고 라캉이 말하고 있는데요. (...) 첫 장면의 왕과 두 번째 장면의 경찰의 위치에 대해서만 부연 설명하겠습니다.

첫 번째 장면의 왕과 두 번째 장면의 경찰은 '사실'만을 믿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위치의 사람들입니다. 상징계에서 편지는 현존과 부재를 반복하지만 이 '리얼리스트들'은 '실재'를 한결같은 방식으로 파악하기에 장관의 벽난로 옆에 있는 구겨진 편지를 보지 못하죠. 왜냐하면 '편지'란 편지로써 있어야 하는데 구겨지고 더럽혀 있는 '편지'는 편지라고 보지 못하는 것이죠. <라캉 읽기>에 '왕과 경찰들은 실재라는 개념에 대해 절대 불변의 확신을 가지고 있어서'(92쪽)라는 문구는 우리가 상상계,상징계,실재계라고 할 때의 그 '실재(계)'로 보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라캉 읽기>92쪽


"그렇군요... '실재에 대한 확신'을 가진 왕과 경찰들로서는 구겨지고 더럽혀진 편지는 편지답지 않은 편지인 거로군요. 그리고 또 92쪽 하단의 삼각형에서 각 꼭지점들이 (1)실재계 (2)상상계 (3)상징계로 짝지워지면 않는다는 말씀이시로군요... 그럼 (1)의 위치는 어떤 계(?)적인 상태일까요... 그냥 아무 계도 아닌가...-_-;; '실재'랑 '실재계'의 차이라는 것은 상징계 안에서의 리얼함(reality, 상징계 안에서 진짜처럼 느껴지는)과 상징계를 초월한 (Real, 소름끼치는) 리얼함의 차이인가요... 만약 그렇다면 <도둑맞은 편지>에서 실재계적 상황이란, 이 이야기를 읽는 독자(혹은 이야기를 쓰는 소설가)의 위치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될까요...? (갑자기 머릿속이 카오스로......+_+)"

 

"음...‘실재’와 ‘현실’을 구분해서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왕과 경찰은 현실이겠죠. 사실만을 보는 과학이고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마치 머리만 모래 속에 숨으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타조 같은... 이에 반해 라캉이 말하는 실재는 상징화의 한계로서의 실재. 언어 밖에 있고 상징화에 동화되지 않는 상징화 밖에 존재하는 영역, 상징화를 넘어선 알 수 없는 Ding 이겠죠. <라캉 읽기> 92쪽 하단의 삼각형의 실재계에 왕과 경찰이 위치한다고 보지 마시고, 실재는 상징계와의 연관 속에서 사유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편지를 중심으로 한 세 가지 질서를 표현한 것으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책에선 명확하게 왕과 경찰이 실재계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편지의 순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실재계다! 라고 한다면 분명한 숀 호머의 오독인 것 같구요(5장 과도 모순되죠), 순환에서 벗어나 있다는 의미에서 실재계라고 한다는 것도 실재계의 의미를 너무나 벗어난 얘기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참 그리고 '계’라는 말은 번역의 일관성 혹은 통일성을 위해 만든 걸로 알로 있습니다. 상상적인 것, 상징적인 것, 실재 (어떤 책에서는 상상적, 상징적, 실재적 이렇게 말하더구요) 이렇게 말해야 정확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번역의 통일을 위해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로 하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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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의 주체 - 언어와 향유 사이에서
브루스 핑크 지음, 이성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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⓵ 1 다음엔 3이 올 수 없다.
⓶ 2 다음엔 1,2,3 다 올 수 있다.
⓷ 3 다음엔 1이 올 수 없다.

 

동전던지기 놀이(48)에서 발견되는 규칙성(=동일성=구조적 질서=파괴불가능한 정체성)이 위와 같다면, <도둑맞은 편지>에서 발견되는 규칙은 아래와 같다. (숀 호머, <라캉 읽기> 참고)

 ⓵ 1항에 놓이는 인물은 상황을 전체적으로 보고는 있지만 전혀 그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다. 따라서 무능하게도 편지의 흐름에는 전혀 개입할 수 없게 된다. 편지놀이에 참여하지 못하고 그저 배경으로만 존재하는 실재적 위치.
⓶ 2항의 주체는 편지와 자기애적인 관계를 가지는 상상계적 위치에 놓인다. 행동이 제약되어 편지를 일시적으로 소유하지만 끝내 빼앗긴다.
⓷ 3항에 놓이는 인물은 전체적인 상황 속에서 자신을 비롯한 각각의 인물들이 저마다 처해있는 사정을 잘 파악하고 있으며 또한 능동적으로 편지놀이에 뛰어들어 행동할 수 있는 상징계적 위치를 점한다. 편지를 빼앗아 2항으로 이동한다.

 

자리 배치는 편지에 의해서 결정된다. 예를 들어 편지가 여왕에게 머물러 있을 때는 왕이 실재(reality)적 위치, 장관이 상징계적 위치를 점유하게 되고, 편지가 장관에게 머물러 있을 때는 경찰이 실재적 위치, 뒤팽이 상징계적 위치를 점유하게 된다. 결국, 편지는 사람들의 역할을 지정하고(주체화하고), 사람들의 관계를 구조화하고 정렬한다. 사람들은 편지에 의해 비로소 변별적 위치를 부여받고 주체로서 태어나고 규정되고 형성된다. 그런가 하면 편지는 주체들의 관계를 조종하면서 끊임없이 이동한다. 편지가 이동하는 동안 사람들은 편지에 의해 이용되고, 편지의 놀이감이 되고, 편지에 놀아난다. 마치 언어에 의해서 또한 무의식에 의해서 우리가 그러한 것처럼.

 

언어가 인접성에 의하여 결합관계를 맺고 이어져 나가듯이, 또한 동전던지기 놀이에서 일정한 규칙에 의해 1 2 3 사슬이 이어져 나가듯이, 편지 역시 일정한 규칙과 질서에 따라 각각의 등장인물들을 순차적으로 포획함으로써 의미작용의 연쇄를 만들어낸다. 편지가 일시적으로 닻을 내린 경로에 따라서 여왕-장관-뒤팽-경찰-여왕이라는 통사적 연결 사슬의 생성. 그 결과 <도둑맞은 편지>라는 하나의 독창적인 이야기가 만들어짐(=의미화가 이루어짐).

 

통사론적 규칙에 의해 ‘우리는 내일 파리를 떠날’ 다음에 ‘것이다’를 예측할 수 있는 것처럼, <장면 1>에서 장관의 위치를 근거로 <장면 2>에서 장관의 위치를 예측할 수 있다. 또한, 동전놀이에서의 “수 사슬들이 수들의 행로를 보존”하는 것처럼(52), 도둑맞은 편지에서도 여왕에서 장관으로, 장관에서 뒤팽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행로가 보존된다. 즉, 여왕-장관-뒤팽 등의 이어짐은 무작위적인 조합이 아니라, 정교한 규칙에 의해서 행로를 그리고 있는 연결인 것이다. 편지는 여왕-장관-뒤팽-경찰-여왕이라는 행로의 보존 속에서 장관을 “기억한다”. 왜냐하면 편지의 정체성은 바로 ‘여왕-장관-뒤팽-경찰-여왕’이라는 행로로서만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편지 자체의 내용과는 무관하게)

 

무의식은, 실로 자율적이고 자동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는 ‘문자들’로 구성되는 바, 잊을 수 없다. 무의식은 과거에 무의식에 영향을 미쳤던 그 무엇을 현재 속에 보존한다. 개개의 모든 요소를 영원히 붙잡고 있으면서, 그것들 모두에 의해 영원히 표식된 채로 말이다. -p.53

 

이 말을 <도둑맞은 편지>에 적용해볼 수 있을 것이다. 즉, 편지의 정체성은 “실로 자율적이고 자동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는 ‘등장인물들’로 구성되는 바, (편지는 자신이 일시적으로 소유했던 등장인물들을) 잊을 수 없다.” 여왕-장관-뒤팽-경찰-여왕이라는 고유의 이동경로로서 제 정체성을 확립한 편지가 자신을 이루는 사슬의 일부로서 장관을 기억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편지는 과거에 편지와 인연을 맺었던 인물들을 (편지의 정체성을 구성하기 위해) 현재 속에 보존한다.” “편지는 개개의 모든 등장인물들을 영원히 붙잡고 있으면서, 그것들 모두에 의해 영원히 표식된 채”로서 자신을 규정한다.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이라는 라캉의 명제 역시 <도둑맞은 편지>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편지를 규정함에 있어서 편지 안에 적힌 내용은 무용할 뿐만 아니라 무의미하다. 무의식이 타자의 담론인 것처럼, 편지 역시 오로지 여왕과 장관과 뒤팽과 경찰 등의 타자들에 의해서만, 타자들의 연쇄적 조합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에 의해서만 설명된다. 즉, ‘그 편지가 무슨 편지냐’ 하고 물었을 때, 그 편지는 ‘이러이러한 내용이 적힌 편지’가 아니라, ‘여왕에서 장관으로, 장관에서 뒤팽으로, 뒤팽에서 경찰을 거쳐 다시 여왕의 손으로 옮겨 다닌 편지’다.

 

*


라캉이 프로이트와 구별되는 점은, 그가 환자 증상을 분석하는 데 있어서 애당초 “진정한 이해”(증상의 진실, 진리)라는 것을 상정하지 않은 점이다. 사실 라캉한테는 도라의 히스테리 증상이 성적인 억압 때문이든 무엇 때문이든 별 상관이 없다. 라캉한테는 그런 걸 밝히는 게 의미 없고 중요치도 않다. 라캉의 관심사는 도라가 주변인들에게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런 히스테리적 행동을 하는지, 도라와 도라의 주변인들이 만들어내는 총체적 상황 속에서 도라의 히스테리 증상이 관철하고자 하는 의도를 밝혀내는 것이다. 즉,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상징계적 질서 속에서 증상의 논리와 맥락을 찾아내는 것. 환자의 독특한 상상 속에서 전개되는 '사물들의 질서'를 파악하는 것. 이러한 라캉의 정신 분석 작업의 최종 목표는, 의미작용이 끊임없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환자의 무의식 속에서 발생한 어떤 결빙현상을 풀어주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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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극장 - 영원회귀와 권력의지의 드라마
고명섭 지음 / 김영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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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쓰신 분이 언론인이라서 그런지 니체를 조망하는 데 있어서 객관성을 확보하려고 몹시 애쓰신 것 같지만 그럼에도 이 분은 니체를 형이상학적으로 보는 관점에 대해서는 확실히 부정적인 것 같다. 조심스러워 하시는 것 같다. 종교인이 아니라 언론인이어서 그러시겠지만. 그러나 니체의 권력의지를 단순히 "우리 세계 안의 우리 생명체들의 문제"로, 더욱이 "사회를 형성하고 역사를 만들어 가는 우리 인간들, 그리고 창조하고 투쟁하는 개인들의 문제”로 선을 그어버리면 니체는 다만 정치심리학자 내지는 사회생물학자밖에 안 되는 거 아닌가. 단지 그 정도만은 아닐 것 같은데. 내가 신비주의 취향이라 그런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막연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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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 사주명리학과 안티 오이디푸스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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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내용대로라면 사주명리야말로 후기구조주의적인 학문에 가까운 것 같다. 그러면서도 푸코나 라캉처럼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구조가 발휘하는 미시적인 영향력 면에 있어서 푸코의 권력이론보다 음양오행의 순환원리에 기반한 사주명리학이 훨씬 더 역동적이고 웅장해 보이기도 하고. 게다가 사주명리학은 '저항'에 대한 생각을 할 것도 없이 그 자체로 충만하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시적이고. 고미숙 선생님의 필터에 걸러져서 이렇게 느껴지는 것인가. 맛보기 책만 겨우 읽어놓고 호들갑을 떠는 지도 모르겠지만.

 

이론에서 느껴지는 사나운 기운(?)의 강도로만 따지면 니체랑 푸코가 가장 성질이 나 있는 것 같다. 원한감정이 느껴진다. (후기)라캉은 화를 내는 대신 다소간 허무와 공포에 질려있는 것 같다. 반면에 사주명리는 세계에 대해 섬뜩해하지도 경악스러워하지도 않는다. 이 학문은 공포나 비극적 파토스 같은 게 없는 듯하다. 오히려 아름다운 음악이 들리는 것 같다. 우주의 원환(圓環) 속에서 공명이 화음으로 울려 퍼진다. 스피노자하고도 호응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사주명리로 해석된 세계 속에서 구태여 전복적 사유랄 만한 것을 모색해보자면 그것은 아마도 도통(道通), 즉 깨달음일 텐데 그러나 이것을 저항이나 탈주, 주체의 탈구축 등으로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차라리 깨달음은 주체와 구조의 대치 상황 자체를 무화시켜버리는 일이겠다. 그런 언표들로는 설명되지 않는 전혀 새로운 판을 짜버리는 일이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운명 사용 설명서'다. 인터넷 무료 사주사이트 같은 데서 사주명식을 뽑아다가 이 책을 참고하여 자기 사주를 간단히 진단해볼 수 있다. 역시나 자기 사주는 자기 스스로 분석해볼 필요가 있는 듯. 내 몫으로 펼쳐진 판을 한 번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이다. 이 판 위에서 어떻게 하면 신명나게 뛰어놀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미학적으로 빼어난 일생을 완성해낼 수 있을까 궁리를 해보면서. 그러나 궁리의 끝은 결국 ‘도 닦기’로 귀결되는 모양이다. 쉽지 않다 참.

 

사주명리학이 유불도 삼교회통으로, 나아가 궁극적으로 수행론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거듭 말하지만, 자기를 구하는 건 결국 자기밖에 없다! 따라서 용신을 제대로 쓴다는 건 존재 전체를 걸고 베팅을 하는 것, 곧 ‘도를 닦는’ 것을 의미한다. 도란 무엇인가? 육조혜능이 말했듯이, 도는 모름지기 통하고 흘러야 한다. -도수통류(道須通流)! 용신의 핵심이 순환이라면, 이 순환의 동그라미는 반드시 도로 통하게 되어있다.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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