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만 원으로 결혼할 수 있을까?
전혜진 지음 / 니들북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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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미의 <나는 이렇게 결혼했다>와 전혜진의 <천만 원으로 결혼할 수 있을까?>는 둘 다 작년에 발간된, 예식 문화와 업계의 최신 동향을 담고 있는 책이다. 전자가 이 시대에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결혼 준비 과정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세세하게 적어놓았다면, 후자는 이를 보다 비판적으로 접근하면서 비용을 절감하면서도 결혼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대안을 여럿 제시해 놓았다. 같이 읽으면 어느 정도 보완이 되는 듯.

정말 천만 원으로 결혼할 수 있을까? 가능할 것도 같다. 집 마련 비용을 별도로 하고 예물과 예단 모두를 최소화하며 혼수 장만하는 대신 자취방 살림 그대로 시작한다면. 젊은 부부는 아직 돈을 많이 못 모았으니 신혼집은 응당 단촐하게 시작하는 게 맞고, 살림살이는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들이 생길 때마다 하나 둘 장만해 나가는 게 현명한 일이다. 주제를 넘는 예물과 예단은 비합리적이다. 이것이 평소의 생각이었으나 

막상 결혼 준비에 뛰어들어 보니 다른 건 몰라도 예물과 예단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내 생각만 관철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더라. 결혼 준비하면서 인류학적으로 가장 연구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희한한 문화라는 생각이 드는 게 예물과 예단에 관한 것인데, 양가 부모님 그리고 결혼 당사자들 모두 되도록 사치와 낭비 안하고 검소하게 살고자 노력해왔다고 자부하는 편인데도 예물과 예단만큼은 자존심과 윤리 도덕에 결부된 문제라서 그런지 말 꺼내기도 조심스럽고 조율 역시 쉽지 않은 것 같다. 

웨딩의 세계에 눈뜨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된 것은 비단 모든 가정의 깊숙한 곳에 쓰지도 팔지도 먹지도 못하는 수백수천만원어치 돌덩이들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 뿐만이 아니었다. 결혼식을 앞둔 수많은 여자들이 가히 정신 질환에 가까운 드레스 로망에 사로잡혀 예비 신랑을 끌고 웨딩 샵 수 군데를 순례하며 한 번 걸쳐보는 데만 삼만 원을 내놓으라는 드레스를 수십 벌 걸쳐보며 돈과 시간과 인생을 허비한다는 사실도, 신혼여행 때 쇼핑을 위해서만 5~600만원을 환전해 간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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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22 1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9-22 23: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명화로 보는 신약 성경 이야기 명화로 보는 성경 이야기
헨드릭 W. 반 룬 지음, 원재훈 편역 / 그린월드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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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기독교인의 처지로 서양미술사를 살펴보기가 버거워 <명화로 보는 구약 성경 이야기>에 이어서 읽었다. 보티첼리, 브뤼겔, 카라바조, 뒤러, 틴토레토, 히에로니무스 보스, 귀도 레니, 엘 그레코, 지오토, 만테냐 등등 서양미술사를 수놓은 걸출한 화가들의 작품들이 알차게 수록되어 있다. 예수의 생애와 관련된 작품을 뽑다 보니 서양미술사에서 자주 언급되는 대표 작품들이 아니라 오히려 쉽게 보지 못했던 희귀한 작품들을 많이 볼 수 있어 흥미롭다. 구약 편도 그렇고 전반적으로 도판의 질이 썩 좋지는 않은 점, 그림 옆에 작품 제작 연도를 표기해 놓았더라면 시대별 회화 양식의 변화까지 좀 더 효과적으로 파악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점은 아쉽다.

 

이 책만으로 가늠해보는 예수는 명랑하고 다정하고 격의 없고 반(反)권위적인 반면에 현실 감각이나 권력욕 내지 정치력은 다소 부족해보이고 한편으론 초능력자 같기도 하다. 그는 오늘날로 말하면 운동권 지도자 혹은 재야 사상가라고 할 수 있겠는데 카리스마 있고 독기 가득한 저돌적 혁명가라기보다는 차라리 자유분방한 예술가 타입에 가까워 보인다. 그가 베푸는 자비심에는 신앙에 매몰된 자가 보여주는 특유의 과격하고 경직된 실천 의식도, 도덕가를 자처하는 자의 이면에 도사린 원한 감정 따위도 전혀 없어 보인다. 배후의 그 어떤 목표도 전략도 속셈도 의도도 없이, 그는 영혼과 신념이 이끄는 대로 물 흐르듯 행할 뿐 그 외에는 어떤 것에도 개의치 않는 듯하다. 적어도 이 책에 묘사된 그는 진정 니체적 의미로 '강자' 같다.   

 

산속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예수가 행한 설교의 주된 화두는 위로와 용서 그리고 사랑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얘기한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그러나 인간은 과연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 박해하는 자를 위한 기도는 어디까지 진심일까. 어쩌면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패배자의 자기기만이 아닐까. 값싼 위안이나마 얻기 위한 애처로운 자기타협은 아닐까. 그리하여 너무도 손쉽고 간단하게 출구를 찾아버리는 길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은 얼마나 피상적이고도 저열한 방식인가. 신보다는 인간을 더 믿는 나로서는, 그리고 욕망과 투쟁의 인간인 나로서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장 원대하고 기적적인 역량을 보여주는 순간은 바로 원수를 뼛속까지 치열하게 증오할 때가 아닌가 한다. 그런 점에서 역시 나는 크리스천은 못 될 종자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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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 - 폭력과 추방의 시대, 촛불의 민주주의를 다시 묻는다 당비의생각 2
당대비평 기획위원회 엮음 / 산책자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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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촛불 현장에 나도 몇 번인가 나갔었다. 딱히 무슨 정치의식이 있었다기보다는 공권력을 남용하는 무식한 정부에 대한 반발심과 더불어 막연한 반(反)신자유주의 감성 같은 게 작용했던 것 같다. 그러나 정작 집회에 나갔을 땐 아나키즘적 광란의 현장에서 오는 흥분에 도취된 나머지 이후로는 불순하게도 오로지 통제 불능의 아나키 상황을 만끽하러 몇 번인가 더 시위를 빙자하여 촛불을 치켜들었더랬다. 동기가 그러했던 만큼 촛불이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나도 각종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자연히 시들해져 버리고 말았는데, 몇 년이 흐른 오늘에서야 중고서점에서 우연히 이 책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러게, 나는 왜 촛불을 꺼버렸을까.

 

당시 촛불에 참여했던 내 지위라든가 정체성이 전형적으로 “자발성과 비폭력성을 특징으로 하며 어떤 종류의 조직이나 단체와도 무관한, 나와 가족의 식품 안전에 관심을 가지고 검역주권에 우려를 제기하는 일반 시민”(98)이었으며, “평소에 글로벌 상품을 소비하면서 소비 주체로서의 정체성을 키워왔던 여성들”(205) 가운데 하나였고, “사회적으로 ‘안정된 주체’라는 것을 의심받고 싶지” 않은, 즉 “아름다운 ‘촛불 시민’일 수는 있었어도 ‘하위주체’로 오해”받고 싶지는 않은(239), “계급적 문제에 대해서는 무력했고 둔감”(221)했던 “중간 계급”이었기 때문에- 이 책은 그야말로 당시 촛불 현장에 있었던 시위 주체로서의 나 자신의 실체에 대한 꼼꼼한 해부도처럼 읽힌다.

 

촛불이 카타르시스의 축제가 되어버림으로써 경계를 넘어서는 수평적 연대의 쟁점이 묻혀버렸음을 지적하며 “자신이 처한 삶의 불안전함에서 출발하여 연대하여 공동의 싸움을 해나가지 않을 때 자신이 거리에 나온 이유인 자신의 삶에서 느끼는 불안전함도 극복될 수 없음”을 강조하는 백승욱의 글과, 시위를 주도하였던 중간 계급이 강박적으로 사로잡혀 있던 ‘순수성의 모랄’(=정치색의 거부)이 정치의 현존성을 외면 내지 부인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촛불이라는 정치적 행동을 민주적 행동 너머로 정치화시키는 데 실패한 것이 아닌가 반문하는 이상길의 글은 인상적이다.

 

특히 촛불은 환등상(幻燈像)이었을 뿐 ‘진리적 사건’으로 보기 어려우며 “궁극적으로 촛불의 ‘시민들’이 요구한 것은 쾌락의 평등주의”였다는 것, 그리고 네가 즐기는 만큼 나도 즐길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는(촛불에서는 소비 생활의 평등을 주장하는) 이러한 가치관이야말로 새로운 쾌락주의의 시대에 작동하는 패러다임이라고 분석하는 이택광의 글은 알몸을 들킨 것 마냥 화끈거린다. 물론 알몸이 부도덕이나 치부는 아닐 게다. 다만 구태여 자랑하거나 드러내지는 않았던 내밀한 지점을 너무도 적나라하게 까발리니 화끈거리는 것일 뿐-ㅇ-;;

 

촛불의 경험이 내게도 그저 한때의 자족적 놀이나 축제가 아니라, 소비 주체에서 사회의 균열과 틈에 대해 보다 민감하게 반응하는 정치적 주체로 진화하는 각성의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는 점을 순순히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점점 더 위험사회가 되어가는 한국에서 자신의 안전한 미래를 스스로 보장해야 하는 보통사람”(213)의 한 명으로서 내 한 몸 건사하기조차 버겁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솔직한 심정이다. 이것이 촛불을 한여름 밤의 꿈 같은 소동으로 끝내버린, 연대 의식 부족한 중산 계급의 인식론적 한계를 대변하는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촛불이 나를 비롯한 386 후속 세대들에게는 당대 현실 문제라든가 민주주의 원칙에 관한 인식 형성에 영향을 준 중요한 경험이자 학습으로 기억될 만한 사건이었다는 점만큼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촛불을 통해 얻은 대중들의 정치적 경험과 잠재력은 분명히 새로운 사회 운동의 순환을 예비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디선가 월러스틴이 1848년 혁명은 1917년 사회주의 혁명의 예행연습이었고, 1968년 혁명은 1989년 사회주의 몰락의 예행연습이었다고 말했듯이, 2008년 촛불항쟁 또한 하나의 예행연습일지 모르겠다. 이것이 무엇을 위한 예행연습일지는 ‘경제 위기의 세계화’를 통과해가야 하는 대중들의 집단행동을 지켜보며 차후 역사가 판단할 것이다.” -148쪽, 김정한, <촛불의 정치학>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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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학 동양고전 슬기바다 4
주희 지음, 윤호창 옮김 / 홍익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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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학이 궁금했던 것은 일전에 어느 책에서 고산 윤선도가 평생토록 소학을 손에서 놓지 않고 극진히 읽었다는 얘기를 접하고부터였다. 그는 유배가 있을 때도 아들들에게 편지를 보내 소학이 인간의 근본을 이루는 본보기이니 일평생 읽고 또 읽으라고 권면했다 한다. 8세 안팎의 아동들을 대상으로 한 책을 평생에 걸쳐 경전처럼 떠받들며 살았다니 과연 어떤 책일까 하는 호기심으로 펼쳐들었으나 온통 경건, 성실, 충실, 공경, 신실, 신의, 수양, 신중, 근면, 청렴, 절제, 단정, 엄숙, 정제, 겸손 등의 단어들로 점철된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현대사회에 태어난 것이 천만다행이다. 16세기 조선의 어느 지식인에게 평생의 바이블이었던 이 책이 21세기를 살아가는 나에게도 비록 견딜 수 없이 숨막히고 고리타분하기는 할망정 그 내용이 대체로 수긍이 갈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적지 않은 부분이 당위로서 받아들여진다는 사실만큼은 새삼 놀랍다. 대저 관습이 되어버린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얼마나 끈질기고도 유구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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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군중 동서문화사 월드북 130
데이비드 리스먼 지음, 류근일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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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먼 메일러의 지적대로 이 책은 '사회과학의 탈을 쓴 문학'에 가깝다고 해야할 것 같다. 리스먼의 이론은 하나의 가설일 뿐이며 그나마 근거조차 부족해 보인다. 이런 것을 사회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글쎄. 리스먼이 말하는 타인지향형이란 기술과 경제가 발달한 인구감퇴기의 고도 산업사회에서 나타나는 특이적 성격이라기보다는 형이상학적 거대담론이 퇴조한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 생존 경쟁력을 가지는 성격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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