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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수봉 - Best Of The Best
심수봉 노래 / 소니뮤직(SonyMusic) / 2005년 10월
평점 :
품절
세상에는 단기 알바와 장기 알바가 있고 단기 적금과 장기 적금이 있듯이 하긴 그런 것과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마는 그래도 역시 세상에는 단기 슬픔이 있고 장기 슬픔이 있는 게 아닐까. 단기적인 슬픔은 예컨대 두 시간 짜리 최루성 영화를 통해서 경험할 수 있는, 보고 나면 일요일 아침 목욕탕에라도 다녀온 것 같은 슬픔이다. 그런 건 참 좋다. 개운한 슬픔이 아닌가. 그런데 몇 달이고 몇 년이고 지속되는 도무지 끝이 보이질 않는 장기적인 슬픔은 목욕탕은커녕 점차적으로 인간의 낯빛을 칙칙하게 만들어버리는 아주 강력하고도 사악한 종류의 슬픔인 것 같다.
오랫동안 안 씻어서 땟국물에 찌든 사람 옆에 가면 특유의 냄새를 맡아볼 수가 있듯이 장기적인 슬픔에 찌든 사람에게서도 어찌할 수 없이 시큼한 냄새가 난다. 아무리 호쾌한 표정을 가장해도 결국에는 이상한 냄새가 온몸에서 스물스물 번져 나와버린다. 절여지는 것이다. 음식이든 사람이든 절여진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존재론적으로 완전히 비가역적인 변형이 일어나서 발산하는 기운조차도 전연 새로운 종류가 되고 마는, 그런 무시무시한 현상인 것이다.
장기적인 슬픔은 원, 눈물도 안 나온다. 눈물이 안 나온다는 거야말로 정말이지 눈물 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정화가 안 된다는 거니까. 중금속이 축적되듯이 누액이 체내에서 찐득하게 농축되어 가고 있다는 거니까. 눈물 대신 나의 경우에는 명치 끝에서 종종 이상한 기미가 느껴지고 그런 걸 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그러니까 가슴 속에서 무슨 웨하스 같은 게 서걱서걱 부서진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런 증세로 미루어 짐작컨대 배출되지 못한 모종의 독성 물질로 인하여 나의 내장기관 어느 부위가 서서히 부식되어가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단순히 건강 염려증 환자의 헛소리라고만은 치부할 수 없는 어떤 강력한 직관적 예감마저 드는 것인데
이런 증세는 누적된 슬픔의 원인이 워낙 복합적이라 그런지 완치도 힘든 것 같다. 그러니 만성 비염이나 만성 편두통에 시달리듯이 일평생을 시큼한 냄새가 진동하는 웨하스 부스러기들과 더불어 동고동락하며 살아갈 밖에는. 무식한 건지 축복인 건지 이십대에는 몰랐다. 영혼의 등뼈로 견뎌야 하는 그런 장기적인 종류의 슬픔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그것의 존재를 눈치챘을 즈음에야 비로소 심수봉이 들렸다. 얼굴도 아니 멋도 아니아니 부드러운 사랑만이 필요했다는 그 간곡한 고백이 불현듯, 믿을 수 없이 구성지게 들리기 시작했다. 이것도 일종의 득음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