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여기서
‘인류 평등‘이라는 단어에 주목하고자 한다. 세계를 문명국과 야만국으로 나누고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 정복하는 것이 문명의 시혜라고 받아들여지던 시대에 인류가 평등하다는 엄연한 사실을 선언문맨 앞에 내세웠다. 지금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사회진화론‘을 피억압 민족의 이름으로 거부하고 평화와 평등의시대로 나아가자고 말한 것이다.
- P249

"서울의 거리는 열광적인 독립만세를 연달아 부르는 군중들로 가득 찼다. 어느 틈에 만들었는지 종이로 만든 태극기의 물결, 대열 앞에는 학생들이 선두에 섰으며, 서울 시민들과 지방에서 올라온 시골사람들이 이에 호응하였다. 시위 군중들의 맹렬한 기세에 일본 관헌들도 멍청하게 수수방관하고 있었다. 지금의 광화문 세종로 거리인육조 거리가 콩나물시루같이 인파로 빽빽하였다. 그 속을 인력거를타고 지나던 일본인 경기도 지사에게 모자를 벗어들고 만세를 부르라고 호통을 치니까 혼비백산한 이자는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만세를 불렀다. 해가 저물어도 만세 소리는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들려왔다. "(이희승, ‘내가 겪은 3·1운동‘) - P252

무엇을 향해 ‘만세‘를 부르는 것인가. 군중 가운데 일부는 "독립이되었다 믿고 만세를 부른다"고 하였고, 또 일부는 "군중이 독립만세를 부르고 있는 것이니 독립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하였다. 시위대 중 한 명으로 원산 구세병원 간호사인 탁마리아(탁명숙·25) 씨의 기대는 솔직하다. "조선인이 독립의 희망을 가지고 있는 것을 이같이떠들면 일본 정부나 세계 각국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세계 각국에서도 조선을 독립시켜 준다고 하는 여론이 일어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본 정부도 조선을 독립시켜 줄 것이다.
- P279

미주 방면 조선인 망명객 중 대표적 인사인 이승만 (44) 박사가 3일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우리 조선을 위임통치 하여 달라는 청원서를제출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저희들은 자유를 사랑하는 1500만 한국인의 이름으로 각하께서여기에 동봉한 청원서를 평화회의에 제출하여 주시옵고, 또 이 회의에 모인 연합국 열강이 장래에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조건하에 현재와 같은 일본의 통치로부터 조선을 해방시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에 두는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는 저희들의 자유염원을 평화회의 석상에서 지지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청하는 바입니다. 이것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한반도는 모든 나라에 이익을 제공할중립적 통상지역으로 변할 것입니다.
- P280

 이때 무장독립운동을 벌여온 이회영, 신재호 (39), 박용만 (38)등의 인사들이 반대 의사를 피력하고 나섰다. 특히 독립운동단체인동제사‘ 출신의 신채호 씨가 "이승만은 위임통치를 제창하던 자이므로 국무총리로 신임키 불능하다"며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은 놈"이라고 강하게 비난하였다. - P317

지난 4일, 전북 이리 장터에서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지역 만세운동을 주도한 문용기 (41) 선생과 기독교인 등 300여 명의 군중이 조선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에 나섰다. 금세 1000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에 놀란 일본 헌병대는 총검을 이용해 무자별 진문용기압을 강행하였다. 선두에 있던 문선생이 오른손에 태극기를 들고 군중의 앞으로 나아갔다. 일본 헌병은 문 선생의 오른팔을 칼로 내리쳤다. 잘린 오른팔이 태극기와함께 땅에 떨어졌고 문 선생은 피를 흘리며 왼손으로 다시 태극기를 든 채 만세를 외치며 전진하였다. 극악무도한 헌병은 이번엔 문선생의 왼팔을 칼로 내리쳤다. 그는 두 팔을 잃은 몸으로 뛰어가며계속 "조선독립 만세"를 불렀다. 양팔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격분한 헌병이 그를 따라가 사정없이 난자하여 결국 순국하였다. - P334

존형, 두 달 새 줄잡아 1000번의 만세시위가 조선 땅 방방곡곡에서 일어났습니다. 그사이 헤아릴 수 없는 이들이 피체되고 두들며 맞고 학살당하였습니다. 살아남은 저 같은 이는 그저 그들 죽음에 빚진죄인일 것이옵니다.  - P338

"이 땅의 모든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내 정치경력은 3·1운동으로 시작되었다. 대중운동의 힘이 내 존재를 뿌리부터 뒤흔들어 놓았다."
미국인 기자 님 웨일스를 통해 세상에 털어놓은 회고담 <아리랑>에서 혁명가 김산은 밝혔다. 정확히 오늘로부터 100년 전 조선에서 벌어진 기미년 3월 1일의 싸움이 당대 청년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집약적으로 드러내어 주는 말이다.
- P351

국외에서 3·1운동을 촉발시키고, 운동이 벌어지자 국내에들어와 이를 추동하고, 운동이 지나간 뒤에는 그 가치를 이어 독립운동을 지속했다는 점에서 김마리아는 남녀를 넘어 3·1운동의 정신에가장 부합한 인물이라고 할 만하다.
- P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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