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 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ㅡ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서울; 정음사, 1974.-


1.

()가 현실을 상상으로 그려내는 메타포라면, 시인 윤동주 님의 은 적절한 한 예가 될 것이다. 그의 다른 시들과는 별개로, 특히 이 시에는 그 메타포가 세 층위로 쌓여있는 것 같다. 나의 추론에 따르면, 맨 아래 현실 사건이 있다. 이것은 일어난 일이며, 경험한 것이다. 그 위에, 해석 사건이 있다. 그 경험된 사건으로 비판하거나 공감하며 분석한다. 마지막 맨 위층에 현실 사건과 해석 사건을 문학 사건으로 마무리한다. 그렇게 작가의 상상을 시의 언어로 변환시켜 현실 사건을 이미지로 만든다. 내가 보기에 이것의 윤동주 님의 시 이을 읽는 한 과정이라 할만하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층위를 반영하는 글쓰기는 주전 8세기 고대 히브리인들의 성서 <아모스>서를 남겼던 아모스 저자들의 서술방식과 흡사한 것 같다.

 

2.

히브리 성서 타나크의 두 번째 부분인 <느비임>에는 상대적으로 적은 분량으로 구성된 아모스

(Amos)가 들어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기원전 760-775년 경에 활동했다는 이 예언자는 남쪽 유다 출신이면서 국경을 넘어 북쪽 이스라엘 지역에 가서 신언(神言)을 전한 사람이었다. 그가 전달한 주된 주제는 사회적 부정과 종교적·도덕적 퇴폐’, ‘부유층과 가난한 사람 사이의 경제 불균형, 사회 정의등을 바로잡으라는 경고였다. <아모스>서를 연구한 로버트 쿠트(Robert Coote, 1909-1982)<아모서>와 관련해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표했다. 그는 이 책이 최종본으로 완성되기까지 오랜 시간 내재적 발전단계를 거쳤다고 주장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최종본은 실제 일어난 사건과 그 사건의 해석, 덧붙여 신학적 해설이 발전적으로 어우러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무엇이 일어났는가로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해석되었는가, 마지막에는 왜 글을 썼는가?’로 매듭지었다는 것이다. 그가 밝혀낸 것을 받아들인다면, 이 세 층은 구분되지 않으며, 하나로 어우러져 예언자의 고유한 사상을 형성한다. 따라서 <아모서>서는 산문같은 사건을 운문(마치 시와 같이)문학으로 남긴 예언서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내용으로 보자면 당대 사회에 대한 저항문학이라 할만하다. 널리 알려진 대로, ‘예언서는 미래 예견이 아니라 현재에 대해 신이 맡겨놓은() ()을 전달하는 글이다. 미래에 근거해 현재를 해석한 글이다.

 

3.

나의 이 글은 <아모스>서를 읽을 때처럼 윤동주의 시 역시 하나의 예언서(豫言書) 서술방식을 원용해서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시는 고대 예언서같은 서술방식을 투사하여 문학적 서술기법을 표현함으로써 시대를 저항하는 용기 있는 인간을 묘사한다. 이 시에서 서술하는 인간은 두 가지 점이 명확히 드러난다. 하나는 현재 자기 정체성으로서 슬픈 존재로서 무기력하게 길을 걷는 인간이다. 다른 하나는 새 길을 찾아 떠나는 새로운 인간상이다. 그런데 이 두 요소는 하나로 잘 조화된다. 시인은 돌담길과 하늘을 교차대구하여 그 길에 서 있는 자신이 슬픈 가운데에서도 용기를 가지고 새 길을 찾아 떠나는 새로운 인간이라는 것을 그려낸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이 시를 읽는 한 방법으로 기호학적 관찰이 적절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시를 구성하는 세 층위가 어우러져 하나의

시로 조물되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시어에 활용된 공간과 시간의 기호를 따라 분석해 보는 것도 적절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 시가 1940년대 이후 시인 윤동주가 보여준 깊은 감성을 바탕으로 저항적 현실참여라는 자기 태도를 그의 모든 시에 스며들게 하는 전환점에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이해이다.

 



4.

먼저 이 시의 층위는 모두 세 개로 구분할 수 있다. 우선 이 시의 기록 연대가 1941년 가을 즈음이라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시인 윤동주님은 연희전문학교에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 시절에 그는 북아현동, 옥인동 일대에서 하숙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일대는 요즘도 좁은 골목과 인왕산으로 오르는 언덕길이니 그 시절에 그의 삶의 환경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1 층위

이 시의 가장 아래 층위는 그가 어느 날 골목길을 걸었다는 소소한 일상이다. 이 시에서 골목길에 대한 기본적인 묘사를 찾아보면 이렇다.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이어져 길은 돌담을 끼고 있다

‘(길의)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았고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다.’

길에는 풀 한 포기 없다

 

그가 살았다는 북아현동 하숙집을 생각하면, 이 시의 배경이 된 그의 길 걷기는 아마도 인왕산 한양

도성길, 서대문 형무소, 조금 멀리는 덕수궁 길 중 하나였던 것 같다. 그가 조금 우울한 기분으로 길을 걷는 모습이 연상된다. 이 시기에 일제의 검열도 심해지고, 그 사이에 시인으로 막 등단한 윤동주에게 졸업을 앞두고 첫 시집을 발간하려 했던 상황들은 하루하루 매우 불안하게 흘러갔던 모양이다. 그가 일본 유학을 생각했던 것도 어쩌면 그런 불안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불가피한 시도였을지도 모른다. 불안한 그는 지금 돌과 돌이 이어져 있고, 풀 한 포기 제대로 나 있지 않은 채 쇠문으로 굳게 닫힌 골목길을 늦은 오후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 시간에 우연히 걷고 있다.

 

2 층위

돌담길을 걷는 시인은 그 길을 걸으면서 이 길에 대해 몇 가지 설명을 이어간다. 가장 먼저 그는 이 길이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다고 적는다. 밤새 길을 걸었는지 모르지만 이 구절은 완벽한 시적 표현이다. 독자에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루 종일 이 길을 걷는 시인을 연상시킨다. 이 시를 쓴 시간이 해가 떠있는 어느 낮(‘그림자가 길게 늘어진)시간이라는 것을 추정하면, 그는 꽤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 심지어 다음 날 아침까지 꼬박 하루를 하릴없이 길을 걸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이 길을 걷다 눈물 짓는 모습도 그대로 보여준다. 그 길에서 하늘을 바라보니 부끄럽게 푸르다’. 그의 시에서 자주 언급되는 부끄러움은 내적 감정이 아니라 자기 존재감을 일깨우는 특별한 수사어다. 다른 이들에게 비치는 모습은 더욱 아니다. 오히려 자기 스스로 성찰하는 상태에 가깝다. 이처럼 그는 이 길에서 하늘을 보고, 그 푸르름에 부끄러움을 발견한다. 따라서 이 시에서 두 번째 층위는 밤새 골목을 걷는 자신이 하늘을 올려다보니 부끄럽다는 자기 이해를 함축하고 있다.


3 층위

길을 걷는 자신(1 층위), 부끄러운 자신(2층위)에 이어 마지막으로 문학 사건을 읽을 수 있다. 가장 먼저 제1연으로서 이 시의 문학적 출발이다. 그는 목적어를 쓰지 않은 채 잃어버렸다라고만 표현했다. 이런 서술은 시 전체를 읽기도 전에 나에게 긴장감을 불러 일으킨다. 그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모른다고 말했을 때 나도 그 길에서 잃어버린 것이 있다면 생각이 든다. 시인은 불안한 마음에 두 손을 주머니에 넣어 이리저리 더듬는다그러다 우연히 주머니를 통해 길에 나아갔다’. 이 주머니 속 우연한 길을 헤집고 더 깊이 들어간 시인은 마침내 더 길고 긴 돌담까지 이른다. 그리고 이 시의 문학적 사상은 마지막 연에서 더욱 세밀하게 드러난다. 이 부분에는 그가 이 길을 걷는 이유가 점층적으로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우선 첫 번째 이유는 담 저쪽에 내가 있기 때문이. 이어 다른 이유가 이어진다. ‘내가 사는 이유는 다만 잃는 것을 찾는 까닭이다.’ 이 두 이유는 연관성이 있으면서 없다. 연관성 있다는 것은 그가 잃어버린 것이 담 끝에 존재하는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밝혀 준다는 점이며, 연관성이 없다면, ‘담 끝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과 별개로 그는 여전히 자신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골목을 마냥 걷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제 3 층위를 따라 읽어보면 시인은 그가 잃어버린 것을 문학적 이중성으로 표현하려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고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이 잃어버린 또 다른 어떤 것일 수 있다.

 

이처럼 세 층위를 살펴보면 이 시는 어느 늦은 오후 집 근처 돌담으로 길게 늘어선 골목길을 걷던 시인이 자기가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사람인 것을 인식하고 부끄러워하다가 그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아 나서겠다는 용기를 시적으로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에서 시인은 잃은 것을 찾아 나선 길 위에 있는 사람인 셈이다. 그가 일본 유학을 떠나는 이유를 이 시에서 읽을 수 있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5.

이제 이 시를 기호학적 표기들을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특히 이 시에서 서술된 공간과 시간을 주목하는 것이다. 시인이 말하고 싶었던 것과 함께 독자가 무엇을 읽어야 하는지를 관찰하는 독법이다.

 

<공간>

이 시는 수평 공간과 수직 공간이 교차한다. 수평 공간은 우선 돌담이 이어진 긴 골목이다. ‘돌담을 끼고 갑니다라는 표현은 이 길이 여느 골목처럼 구불구불하고 휘돌아나가는 모습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수직 공간은 골목 어딘가 머물러 서서 쳐다본곳이다. 시인은 그 자리에서 눈을 위로 올려 하늘을 쳐다본다. ‘긴 골목을 걸어왔던 그가 수평 공간을 지나온 것이라면, ‘하늘을 쳐다보는 그는 수직 공간에 멈춰 있는 것이다. 이 표현들은 전진적으로 행동이 이어진다:‘긴 길을 걷고- 돌담에서 멈춰서서-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본다-다시 길을 걷는다.’ 따라서 걷고-멈추고, 서서-쳐다본다는 일련의 과정은 시인이 점유한 공간이 평면이 아니라 입체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담 저쪽이라는 표현에서 시인이 서 있는 곳이 담 이쪽이라는 것을 연상시킨다. 이런 정황들을 종합하면, 그는 담으로 길게 이어진 길에서 하늘을 쳐다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하나 주목할 공간이 있다. 그것은 주머니. 마치 오즈의 마법사에서 여주인공 도로시가 토네이도에 휩쓸리다 우연히 오즈 대륙에 들어서게 된 것 같다. ‘주머니는 모든 길과 모든 공간으로 이어지는 좁은 출입구이며 최후의 공간이다. 모든 공간들은 주머니에서 이어진 미로처럼 시작한다.

 

<시간>

이 시에서는 시간도 두드러진다. 시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라는 시간을 쓰고 있다. 마치 히브리 성서 첫 번째 책인 창세기 1장의 문학적 표현을 연상시키는 이 구문은 현실의 시간일 수도 있으나 상상의 시간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그가 지금 돌담길에 서 있는 시간은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시간, 즉 낮의 어느 한 지점이다. 아침이 밝아오는 시간이라면, 저녁은 어둠으로 들어가는 시간이다. 그 사이에 낮과 밤이 일정하게 자리하고 있다. 이 두 시간은 어김없이 반복적으로 교차하고 있다. 아침과 저녁은 무한 반복하고 서로 꼬리를 물고 회귀하여 더 먼 시간으로 흘러간다. 하지만 시인의 표현에 따르면, ‘아침-저녁-저녁-아침이 통하는 것은 더 이상 시간 구분이 의미없어짐과 같다. 그러니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돌고 있고, 돌고 있으면서 흐른다. 마치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돌담을 끼고 가는 것같은 모양이다.

 

<시공간>

앞서 읽은 대로 이 시에서 공간과 시간은 구분되면서 한데 어우러져 있다. 시공간인 탄생한 셈이다. 이런 시공간은 이른바 시의 토포스를 형성한다. 이 단락을 다시 읽어 보자.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 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시인은 길에서 시간과 동시에 공간을 경험한다. 이 동시 지점은 바로 그가 돌담을 더듬다 눈물지으면서서 있는 자리다. 수평적으로 아침과 저녁 어느 지점이며, 수직적으로 땅과 하늘로 이어지는 지점이다. 신학 용어로 말하자면, 이 지점은 카이로스(kairos)’이다. 신적 은총의 시간이다. 주목할 것은 이 지점에서 그가 보여주는 반응이다. 이 시에 따르면, ‘돌담을 더듬다눈물 짓는다는 연속되는 행동이다. 이 두 행동은 눈물 짓다를 강조한다. 다시 말해, 시인이 설정한 시공간은 그가 선 채로 눈물짓는 토포스다. 그 눈물은 하늘을 바라보게 되는 동인이었으며, 동시에 자신이 부끄러운 존재라는 것을 일깨우는 근인이었다. 더구나 이 토포스가 함축한 눈물은 그 자리가 자기 정체성을 인식하는 자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 토포스에서 푸르른 하늘풀 한포기 나지 않은 길의 대조 역시 시대 속에서 부끄러운 자아를 더욱 부각시킨다.

 

6.

시인 윤동주 님의 시는 땅에서 하늘을 읽는 예언시다. 운문으로 남겨진 그의 시는 가벼운 노래로 끝날 수 없는 예언이다. 그 예언은 현실에 맞부딪혀 비틀거리면서도 정의로운 길로 걸어가는 자아를 지지하는 하늘의 힘이기도 하다. 그가 가벼운 어투로 스치듯 자기 일상을 소개하는 시조차도 가히 넘볼 수 없는 예언의 힘이 스며있다. 그의 시 에서 우리가 의 상징성만을 주목하는 것은 자칫 이 시가 가진 현실 저항적 예언성을 지나치는 아쉬움을 초래한다. 시인에게 은 공간이며 시간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잃어버린 무엇인가가 감춰진 곳이며, 자신이 하늘을 바라보며 부끄러움을 인식한 공간이면서, 그 끝이 언제 끝날지 몰라 당황하는 슬픈 자신이 멈춰 서버린 토포스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시는 결국 돌담 길 어딘가를 반복해서 걷고 있는 부끄러운 자아에게 아직 용기가 남아있음을 말하고 싶은 따뜻한 권면을 굳게 견지한다. 익히 알 수 있는 대로, 윤동주 시에 등장하는 는 자주 슬픈 존재. 슬프다는 것은 눈물을 전제로 하지만, 그 눈물이 그 존재를 결정짓진 않는다. 그는 그 눈물을 인정하면서 그 부끄러운 존재에게 다시 잃어버린 무엇인가를 찾아 나설 용기를 다독여주기 때문이다. 그 용기 있는 존재는 강한 용사가 아닌 연약한 젊은이 같은 모습을 띠고 있다. 나는 이 시에서 부드러운 강인함으로 길을 걸었던 청년 예수의 이미지를 어렵지 않게 떠올린다. 그런 점에서 그의 시는 우리에게 예언이다.

 

7.

나는 그 못지 않게 길에서 무엇인가를 잃어버리는 일이 많다. 이 시가 노래하는 것처럼 찾아나서기도

하지만, 문득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조차 잊어버려 그저 멍하니 하늘만 바라볼 때가 있다. 그럼에도 그의 시를 읽으며 나도 용기를 내서 그 잃어버린 것을 찾아보려고 애쓴다. 그가 담백하게 적어둔 그 1940년대 어느 동네의 돌담을 끼고 늘어서 있지만, 시공간을 넘어 이제 2022년 오늘 나의 삶에까지 이어져 있는 길이다. 그 길 끝에 내가 서 있다. 이 시를 읽은 나는 시인처럼 골목 사이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 푸르름에 부끄러움을 부정할 수 없지만, 시인의 말에 힘입어 이 시대를 견뎌낼 용기를 다져보는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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