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늦은 오후, 산책을 하다가 길걷기가 거의 끝나가는 즈음에 ‘아름다운 가게’에 들렀다. 그 곳에는 특이하게 헌책 코너가 있는데 들를 때마다 서가에 빈틈이 많이 생긴다. 아마도 새로 들어오는 책보다는 빠져나가는 책이 더 많은 듯 하다. 그런데 가끔, 예전에는 눈에 띄지 않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내 시선이 꽂혀 기분 좋게 바로 꺼낼 수 있는 책이 있다. 오늘 나의 선택은 『느릅나무가 있는 風景』 (최인훈, 1981, 민음사: 소설가 구보씨의 1일)이다. 운 좋게 2500원을 주었는데 1981년 초판본이 2800원이었으니 적지 않은 세월의 값을 퉁치고서도 더 할인 받아 산 셈이다. 이런 값은 의미 있는 헌 책에 대한 예우 같아서 기분이 좋다. 바람막이 옷 하나와 유기농 건빵 하나를 더 사서 문밖으로 나왔다. 아직도 바람 세차고 구름 가득한 거리엔, 파란 바다 같은 구름 웅덩이가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다. 섬 사람들의 속설에 따르면, 이런 날은 내일 아주 맑은 날이 될 것이다. 기분이 더 좋다. 

2.
길을 마저 걸었다. 이제는 도시의 생경한 풍경마저도 늘 살았던 곳인냥 자연스럽다. 비록 집 한 채 없지만, 열린 바다와 높고 푸른 산, 굽이 도는 길을 내 것인 양 누릴 수 있는 것 만으로도 한 며칠 정도는 충분히 생존 의지가 불타오른다. 버스 정류장엔 서 있는 젊은이들 뒤로 연로한 어른들이 나란히 앉아 있다. 온기가 몸에 알맞게 들어오는 버스 정류장 벤치는 이런 날씨에 더욱 안성마춤이다. 버스가 완전히 설 때까지 일어서지 않으려는 몸짓이 자연스럽다. 가볍게 본다면, 삶은 어느 땅이나 비슷해서 불편한 것엔 느릿하고, 편리한 것엔 빠릿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어느 땅에서나 삶이 전혀 다르게 대접 받아서는 안될 일이다. 땅과 하늘과 바다와 산과 길이 다르지 않다면, 자기 삶의 바닥에 깔린 생존 욕구는 누구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궂은 날씨에 모두가 아침에 나왔던 자기 삶의 터전으로 저녁이 되기 전에 안전하게 되돌아가길 바란다. 

3.
찬 바람에 몸을 휘둘렸더니 평소보다 조금 피곤하다. 잠시 쉬었다 저녁을 먹고 책 제목이기도 한 단편, 「느릅나무가 있는 風景」부터 펼쳤다. 이 글은 1969년에 발표되어 이후 소설가 최인훈의 대표작이라 할만한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관한 15편의 이야기 중 첫 번째 글이 되었다. 소설가 구보씨가 매일 겪는 에피소드를 시간 흐름을 따라 소개하고, 그 사이 사이에 구보씨가 생각하고 되돌아보는 내면의 이야기들을 엮어준다. 이를 토대로 작가는 작고 미미한 개인을 등장 시켜 세계를 조망하고 연대하는 이야기들을 관념적으로 엮어내고 있다. 내가 이 단편에 호감을 갖는 시시한 이유가 있다. 이 소설 첫 단락의 이 문장 때문이다. 
 
“1969년이 다 가는, 동짓날 그믐께를 며칠 앞둔 어느 날 아침, 소설가 구보씨는 잠에서 깼다. 잠에서 깨는 참에 그의 머리 속에 무엇인가 두루마리 같은 것이 두르르 펼져졌다가 곧 사라졌다. 구보씨는 그것을 곧 알아보았다. '그것은, 오늘 하루 그가 치러야 할 일과였다. 다른 누구도 알아보랄 것 없고 구보씨만 알면 그만 이었던 만큼 그 두루마리는 눈 깜박할 사이에 사라졌다.' 구보씨는 잠에서 깬 다음에도 그대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는 옮긴이 강조)

하루 일과가 자신만 알면 그만 인 삶을 사는 소설가 구보씨. 소설은 그가 마주하는 일상과 그 사이사이에 그가 생각하는 것, 좀 더 과장되어 그의 끝없이 이어지는 ‘관념’을 서술한다. 구보씨의 관념을 곧 소설가의 관념이며, 최인훈의 사상이며, 소설의 목적이기도 하다. 

4.
소설과 구보씨는 하루에도 몇 번씩 자신이 겪는 일들에 대해 바로바로 관념에 빠진다. 생각 없는 하루는 소시민인 그에게 용납되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알릴 필요 없는 사소한 일이라도 그 일에 대한 구보씨의 ‘관념’ 행동은 인간의 호흡처럼 중요한 생존 도구라 할만하다. 조금 더 과장해보면, 그의 관념은 평범한 소시민이 이 세계와 ‘연대’하는 방식이며, 자기 작은 삶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이어진 거대한 공감이다. 그것을 미묘한 ‘감수성’으로 제 몸에 각인하는 과정이다. 말이 난해 해서 그렇지 ‘관념’은 ‘잠시 멈추는 것’이며, ‘멍하게 생각 하기’라고 할 수도 있다. 자기 마당을 쓰는 정도의 삶이지만, 자기 밖에서 일어나는 일, 벌어지는 사건, 들려오는 소문에 대해 산과 바다와 길과 나무를 보며 자연스럽게 자기 삶을 잠시 멈춰보는 것이며 뜬금없이 생각해 보는 것이다. ‘관념’은 삶에 곧바로 생산적인 결실을 만들어주지는 못하지만, 오래되고 깊어질수록 의미 있는 결과에 가닿을 수 있다. 물론 아무 것도 아닌 채 사라져버릴 수 있다는 위험도 언제나 존재한다. 결국 구보씨는 누구도 관심갖지 않지만, 없어도 그만 일 듯한 ‘관념’을 디딤돌 삼아 자기만 알아도 충분한 일과로 하루하루를 성벽처럼 쌓아 올리고 있다. 

5.
이 소설의 끝은 이렇다. 우연히 길에서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어떤 여자가 있다. 잠시 상상에 빠진 구보씨는 자기도 모르게 ‘백 원짜리 한 장을 꺼내 주었다. 죄인처럼’. 그러자 그 여자가 말한다. “고마워요” 구보씨는 생각했다. 그녀가 ‘비웃음처럼’ 말했다고. 직후 ‘버스가 왔다.’ ‘구보씨는 황황히 이십원 길의 나그네가 되어 밤 속으로 외마디 소리처럼 사라져갔다.’
소설 끝 문장은 70년대로 들어서기 전 시대를 암시한다. 이제 삶은 점점 더 개인이 고립된 사회를 에견 한다.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어떤 모양이든 나의 생각과 그의 생각이 같을 수 없다는 걸 인지해야 한다. 나의 배려는 그의 ‘비웃음’의 이유일 수도 있고, 나의 간절함은 그의 ‘어색함’이 될 수도 있다. 돌이켜보면 ‘멍하게 생각 하기’란 언제나 나의 문제이지 그의 문제가 아니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나의 관념으로 그의 세계가 안정되고 다독여지지만, 누구도 그런 일에 마음을 쓰지 않는다. 그런 생각 없이도 세계는 전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6.
1969년에 발표된 이 소설 속에는 요즘 시대에는 어설프지만, 다양한 시대 변화가 감지된다. 소설과 최인훈은 당대 삶에 다양한 경험들이 밀려오고 있다는 것을 세심하게 감지했던 것 같다. 그의 두 번째 작품이자, 추천 등단작인 「라울전」(1959)도 그러하지만, 인간은 화려한 외양과는 달리 자기도 모르게 고립되고, 삶은 왜소해지는 단서가 포착된다. 더불어 살아가는 삶은 피폐해지고 자기 중심적 삶이 견고하게 뿌리를 내리는 징후가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 소설 역시 그냥 가볍게 읽어둘 만한 소설이지만, 그의 여느 소설처럼 언제나 가벼운 질문을 흘려보내지 않는다. 이로써 한 작은 개인이 스스로 선택하여 소비한 관념의 시간은, 비록 세계를 뒤바꿀만한 업적은 아니겠지만, 세계가 진격하는데 단단히 한 몫했다는 걸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알다시피, 실시간 삶이 공유되는 세계가 다시 전쟁의 공포에 들어 선지 오래다. 끝도 알 수 없다. 최전선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전쟁 여파가 곧바로 나에게 밀려온다. 나와 아무 상관없을 것 같은 푸틴의 옛 소련 제국재건을 위한 정치 야망은 끝없고, 우크라이나의 정치 저항은 속절 없어 보이지만, 싸움은 사상이나 이념이 아니라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총과 무기로 결정 날 것이다. 전선의 위험이 가중될수록 이 세계는 타국의 위험보다도 경제 정치 실이익을 계산하며 정신없이 계산기를 두드릴 것이다. 그것 만은 아니다. 가깝게는 내 삶을 흔드는 정치가 나의 한 표로 결정되었다는 현실을 보면 나의 삶은 그 때 그 후보들의 삶의 행태와 무관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했다. 그들에 대해 냉정하게 잠깐 ‘멈춰 생각하기’는 나의 미미한 행동이라도 올바르게 결정짓기 위한 중요한 요소였고 앞으로도 그럴 깃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무엇을 어떻게보다 ‘왜’가 중요하다는 것을 배운다. 내가 신학으로 평생 살아왔기 때문이다. 

7.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가끔 나는, 나의 예수가 관념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고민한다. 그가 행동하고 사건을 일으킨 일이 부각되어서 그렇지, 그는 답답할 정도로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일, 사소한 일, 아무도 관심 없다고 할만한 그 인간의 일을 ‘관념 한다’. 이유는 한 가지다. 그는 야훼를 사랑하듯, 인간을 지극히 사랑했기 때문이다. 인간을 사랑하는 신이라면 당연히 매일 매일 인간을 위한 고민으로 자기를 ‘멍하게 생각하는’ 골방으로 자신을 밀어 넣을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예수를 삶의 풍요롭게 하는 원천으로 여기고 예수가 삶을 지혜롭게 경영하는 법을 전수해준다고 확신하지만, 오히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물질은 더욱 가난해지고, ‘관념’으로 세계와 연대하는 삶은 풍요로와지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는 세계 확장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에게 공감하고 환대 하는 모범에 자기 모든 삶을 쏟아부은 사람이다. 꿈속 이야기같이 아무도 동의하지 않고, ‘나만 알면 그만 인 것’이다. 이제 이 글의 마침표를 찍고 나면, 바람처럼 사라질 나의 관념이다. 다만, 나의 관념이 무르익어 미미하지만 올바르게, 행동할 날을 기다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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