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어떤 소설일까? contra "Faber est suae quisque fortunae."

- "각자 운명은 스스로 만든다."라는 클라우디우스(Claudius Caesar, B.C10-AD54)의 말에 반하여-















0.

결론으로 말하자면이 소설을 읽고나니 인생은 로망이다에 대한 나의 번역으로서 인생은 ( ) 소설이다라는 괄호에 이렇게 한번 써본다. ‘인생은 (신이 선물로 남겨 준 아름다운 나의소설이다.’

 

( )를 채운다는 것은 이 소설을 읽는 어떤 재미라 할만하다.


1.

소설 인생.’ 아니 로망 인생이라고 해야 할까? 삶은 신비한 이야기다? 소설 때문일까? 소설가 기욤 뮈소(1974~, 프랑스 작가)의 책은 국내에서 오랫동안 회자되었다. 이미 널리 알려진 그를 나는 모른다(나로서는 그가 거쳐온 생애를 알아낼 수 있는 방법도 없다). 다만 그가 남긴 소설이 내 앞에 있을 뿐이다. 이번 책은 인생은 소설이다(밝은 세상, 2020, 양영란 역)이다. 번역된 제목을 읽다가 곁들여진 프랑스판 제목을 얼핏 찾아보니 인생은 로망이다’(원제. La vie est un roman.)였다.

 

2.

소설이야, 읽고 가벼운 느낌 정도면 충분할지 모르겠다. 그렇다해도 가끔 소설은 지리할만큼 진중한 해석을 독자에게 기대하는 것 같다. 물론 해석이야, 묵직한 언어를 자유자재로 활용한 비평가들만의 몫이겠지만, 소설은 가끔 그 해석을 평범한 독자에게 부탁하기도 한다. 어쩌면, 어떤 소설을 나름 알아보고, 그 이름을 높이 떠오르게 해 줄 독자라면 괜히 거부할 필요 없는 즐거운 의무일 수도 있다. 가끔 소설은 좋아요라는 클릭의 꼬투리를 잡기도 한다. ‘좋은 이유를 듣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은 묻는다. ‘어떻게 나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그 이윺가 무엇인지 궁금하다고 말이다.’ 오늘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 질문에 담해본다.

 

3.

나의 글은 기욤 뮈서가 로망이라고 써놓은 저 제목이 소설로 옮겨진 것을 조금 자세하게 이해하려는 것이다. 나의 주장은 그가 사용한 로망이라는 단어가 우리가 가볍게 말하는 그저 소설쓰고 있네는 아니라는 것이다. 저 용어는 이 소설을 이해하는 하나의 해석의 문일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로망은 이상과 현실을 조화시킨 상상계의 언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조금 둘러 말해둘 것이 있다. 일반적인 상식이겠지만, ‘로망에 대응하는 번역어인 우리말 소설은 독자에게 어느 문을 통해 자기 세계로 들어올지 결정하도록 요청할 때가 있다. 그 문은 작가가 미리 남겨두었을 경우가 많지만 동시에 전적으로 독자가 찾아야 할 과제일 때도 있다. 사실, 작가가 소설의 기둥처럼 세워둔 상상력을 독자가 모두 따라가기는 불가능하다. 시험을 출제하는 선생의 의도를 시험에 답해야 하는 학생은 모두 뒤따라갈 수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다행스럽게 소설에는 작가가 남겨놓은 상상력 단서들이 글 어딘가에 생동하고 있기 때문에, 그 해석의 문을 찾아내기 위해 조금 힘을 쓰면 생각보다 힘겨운 일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친절하게도 작가가 자기 글에 대한 해석의 문을 의도적으로 돌출새김해 줄 때가 있다. 그것으로써 작가는 독자와 자기 글로써 이어지고 싶다는 마음을 낯가림하듯 내비췬다.

 

4.

그래서, 개인적으로, 독자인 나는 스스로 해석의 문을 찾아내는 연습을 즐긴다. 정답이야 상관없이 그 의도된 돌출을 손으로 만지듯 직감하는 순간을 기대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촉()이다. 그 직감은 거의 본능이지만, 사실은, ‘자세히 읽음(close reading)'으로써 발견될 여지가 높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나의 글 읽기에 감동한 글이 스스로 그 해석의 문을 열어주는 것일 수도 있다. 이번에는 기욤 뮈소의 글이 그러했다. 이 소설이 나를 잡아끌어 그 손에 자기의 문고리를 걸어주었다. 그 촉감은 로망(roman)’이라는 말이다. 그거였다. 이번에는 그의 책 제목을 관찰하는 것이 한 독법(讀法)이며 해석의 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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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기욤 뮈소가 로망roman’이라 쓴 것을 번역자 양영란은 소설(이라 옮긴 것을 생각해 보자. 기욤 뮈서의 글에 대한 여러 독법 중 나는 로망소설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가는냐가 해석의 문이라고 선택한다. 이 말을 토대로 독자인 나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로망과 우리가 쓰는 소설사이에 적절한 접점이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물론 이 두 단어 사이에 원어와 번역어라는 차이 말고, 어떤 감각적인 간극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문학에 문외한이라서 현대 프랑스 문학에서 로망이 차지하는 문학사적 위치나, 현대문학적 의의는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분야다. 다만, 나는 그 로망이 가진 어떤 의도가 그의 글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며 이 용어가 그의 소설을 해석하는데 어떤 단초를 제공할 것 같은 나의 촉감을 믿고 따라가보기로 했을 뿐이다. 생각해보면 작가가 쓴 ‘La vie est un roman.’을 우리말로 옮기면 당연히 인생은 소설이다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독자인 내가 그의 글을 다 읽고 나니 이 소설의 제목은 두 단어 사이에 간극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작가는 두 단어 사이를 비워두고 독자가 그 사이를 자기 말로 채워서 이해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두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를테면 인생은 ( ) 소설이다와 같은 문장이다. 누구든지 이 소설을 읽고 나서 자기가 생각하는대로 이 빈칸을 적절히 채워넣을 수 있다는 것이다.

 

6.

이제 나는 이 추론을 좀 더 생각해보기 위해 저 로망roman’소설’’(小說)이라는 단어의 의미범주를 생각해 보려한다. 당연히 원어에 대한 한글대응어로서 두 단어는 거의 손색이 없다. 하지만, 책을 덮고, 막상 두 단어에 다시 손을 대보면 조금 다른 촉감이 느껴진다. 예를 들면, ‘로망은 자주 뭔가 이뤄질 수 없는 헛한 소망을 담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날 소설은 비웃는 어투로서 말도 안되는 쓸데없는 이야기로 이해할 수도 있다. 우리 문학에서야 여전히 저 앞선 정의로 소설의 정의를 받아들이고 있다 해도, 실제 내가 살고 있는 현장에서 몸에 부딪는 의미는 후자의 의미도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문학에서 쓰는 소설의 의미보다는 실제 삶의 자리에서 쓰는 소설의미가 우리에게는 더 익숙하다. ‘괜한 소리, 허튼 소리라는 뜻 말이다. 그렇다면 로망도 그런 의미였을까?

 

7.

로망(roman)’. 이것은 이상을 향유하는 사람들의 시대에 땅의 일에 몰입하며 살아가야 할 나은 자들, 땅의 사람들을 염두에 둔 용어였던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인들이 사용한 이 용어가 발원한 원천을 보자면, ‘romantic 로마식이라는 정서에는 이성보다는 감정이 차고 넘쳐 흐물대는 낭만(浪漫)이라는 느낌이 물씬 풍긴다. 나아가 그런 물렁한 감성을 넘어 보편성과 차별 없는 개방성을 상징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겠다. 누구나 즐길 수 있고 어떤 방식으로든 향유될 수 있다는 어떤 평안함도 있었다. 고귀한 이데아에 몰입하려는 아리스토텔레스 파의 시대가 지배하는 시대에 자기가 발딛고 살아가는 자리에서 누구나 손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자기 세계가 더 존귀할 수 있다는 것을 웅변한 셈이다. 그런 점에서 로망은 흔하고 가벼우며, 이상과 현실 사이에 간극과 경계가 사라진 어떤 보편적인 상상계를 열어주기에 충분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로망에는 어떤 절망감같은 어감이 스며들었던 모양이다. 예를 들자면, ‘로망일 뿐 현실일 수는 없다는 말이 회자되었는데 그 속엔 로망을 불가능한 어떤 일에 대한 자조감을 반영하는 용어로 이해하려는 태도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점차로 로망은 단순히 이야기’’일 수 없었다. 불가능한 현실이면서 누구나 생각은 하되 손에 잡을 수 없는 어떤 초현실적 이야기를 표현하는 말이 되어버린 것이다. 생각해보면, ‘로망은 점차로 중의적 언어(double Entendre)가 되어 불가분하는 양가 감정이 깊숙이 스며들게 되었다. 절망과 희망의 공존. 나는 그것을 로망이라고 생각한다.

 

8

따라서 나에게 문학으로서 로망은 절망과 희망이 공존하는 현실의 이야기다. 아주 오래 전, 일리아드의 서사시가 그 기원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때 로망은 노래같은 산문, 들려주는 이야기였다. 노래는 책이 없던 시절에 듣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기억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최적의 방식이었다. 처음에는 신화에 운율을 실어 들려주었다. 이후 전달방식과 소재는 다양해졌다. 전쟁 소식도 궁금했고, 한 사람이 지나온 발자취가 궁금했다. 글은 희귀했으니 말로써 이야기를 전승하는 일은 좀 더 지속되었다. 그러다 마침내 글자가 회자되었다. 그것은 더 이상 이야기를 로 할 필요가 없음을 의미한다. 기억하고 보존하는데 이 탁월하다는 것을 알아갔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글자는 두 가지 상황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지난 이야기가 남아있는 채,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래서 이야기에 다양한 층이 생기기 시작했다. 한 이야기에 덧붙여지거나 옮겨쓰기, 다시 말하기 등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는 몸을 변환시키며 불려갔다. 그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이 선명하고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관계는 더욱 정치해졌다. 그럴수록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이야기 구성은 단순하고 명쾌했다. 그럴수록 결론은 확실해야했다. ‘선이 승리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이야기에서든 당연히 주어져야 할 선()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극적인 로망이 되기 위해서는 주인공이 고난을 겪어야 했고, 그 위기를 넘어 문제를 해결하는 영웅이 되어야만 했다. 그 역경 중에도 교훈이 흔들리지 않아야 했다. 이야기는 궁극적 승리를 위해 궤도를 벗어나지 않는 직선으로 흘러야만 했다.

 

9.

하지만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서사 구조가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듣는 이나 읽는 이가 혼란스러울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글을 읽는 즐거움은 더욱 커졌다. 내용은 점차 궁극적 희극만이 아니라 마음 깊이 아련함을 남기는 비극으로 끝나기도 했다. 그렇다해도 서사는 희극의 토대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비극마저도 희망의 단초였던 것이다. 이야기 갈래만 복잡해졌을 뿐 이야기를 읽는 사람들은 오히려 더 단순해졌다. 이야기를 읽고 들으면서 그 주인공, 그 영웅이 자기 삶에 찾아들기를 갈망한 것이다. 로망이 현실로 남기를 기대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글은 저 영웅을 손으로 잡아보고 마음에 담아두기에 수월한 도구였다. 책을 소장하고 싶은 욕구가 일어났다. 욕구가 커질수록 이야기 소재도 더 세밀해지고 미세해졌다. 인간을 둘러싼 바닥에서부터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아울렀다. 그러다가 마침내 인간 자체로 들어왔다. 신화와 역사를 넘어, 교훈과 훈계는 물론이고, 나와 같은 신분 속에서 어떤 사람을 사랑하고 증오하는 감정을 숨김없이 담아내고 싶어했다. 그렇게 환경과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다가 이제는 자신의 속사람을 관찰하게 되었다. ‘로망이라는 결국 인간이 인간을 잘 들여다보고 싶은 욕망을 견인하는 힘이었다. 현실이면서 상상이었고 이룰 수 있는 일이면서도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이처럼 로망은 현실과 이상을 모두 아울러 인간의 심연을 비추는 한 줄기 빛같은 상상이었다. 그에 힘입어 사람은 로망 속에서 생존하기를 즐겨했다. 로망은 사람들을 시공간에 가두고, 숨죽이며 살아가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로망을 통해 저 하늘을 마음껏 비상하며 자유하면서 생존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추론이라해도 반박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

 

10.

마침내 로망 roman’은 인간이 인간의 욕구를 관찰하고, 그 욕망을 해석하는 것에서 절정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삶의 범주를 저인망식으로 모두 아우르며 점령하듯 전진했다. 성과는 좋았다. 로망은 인간 자체에 대한 치밀한 묘사를 가감없이 내세우며 더욱 내달렸다. 서술기법은 날카롭고 찌르는 듯 치밀해졌다. 갈수록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무쌍하게 변모하는 인간이 나타났다. 인간을 바닥에서부터 훑어내며 새로운 인간을 창출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인간을 다루는 로망은 인간의 안과 밖을 종횡으로 질주하며 결국 인간 안을 헤집어 들춰내는 전략을 선호하게 되었다. 이렇게 문학사에서 로망은 세계 경계를 넘어 심지어 언어마저도 무력화시키며 논픽션마저 제압하는 픽션으로서 거대한 힘을 유지한다고 할만하다. 이것이 오늘날 그들의 로망이라면 동시에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소설이다.

 

11.

우리의 소설(小說)’은 작은 이야기로부터 정의된다. 본래 이야기의 길이가 결정했던 단어였기 때문이다. 단편, 중편, 장편이 그러하다. 단편은 가벼워 보이고, 장편은 거대한 서사로 보인다. 하지만 소설은 점점 이야기 분량을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오래 전부터 낮은 자들의 허툴게 보이는 삶, 작고 가치없어 보이는 속설같은 인간 심사를 제대로 꾸며, 이상과 현실 사이를 오가는 이야기로 들려졌기 때문이다. 높은 자리의 사람들이 아니라 낮은 땅의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였다는 것이다. ‘소설역시 인간을 이해하고, 그들이 꿈꾸는 세계에 대한 어떤 열망이 담기게 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의 소설 역시 인간의 모진 심성들이 가감없이 고스란히 담겼다. 어떤 흐릿한 흔적으로만 남겨지는 인간 정서가 소설 안에서 정밀하고 강력하게 묘사된 것이다. 소설이 저 서구의 로망을 답습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 이야기의 방향은 같은 길을 보여주었다고 해야한다. 허균이 저 의적 홍길동을 그려낼 때 그것은 영웅과 인간의 희망, 어쩌면 절망을 아우르는 이야기였다. 소설 역시 어디나 어느 시대나 그 사람들에게 필요했던 절망과 희망의 공존 이야기를 담아내는 그릇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소설 역시 처음 등장했을 때 그것은 저 영웅 홍길동이 창출해낸 세계를 꿈꾸듯 함께 희구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그것이 어떤 절망으로만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함께 담겼다.

 

12.

그런 점에서 인생은 로망이다는 말과 인생은 소설이다는 말 속에는 독자에게 한 가지 큰 해석의 즐거움을 남겨둔다. 독자들은 서구의 로망에서 글이 가진 정서적 희망을 먼저 읽는 다면, ‘소설에서는 절망 너머 현실의 계층의 희망을 먼저 지나치지 않는 것이다. 이 두 단어가 원어로 번역어로 만남으로써 삶에 대한 우리의 희망에 시너지를 일으킨다. 한편으로 로망이 인간의 내적 이상을 서술함으로서 현실에 대한 희망을 이어간다면, ‘소설은 외적 이상을 그려냄으로써 인간의 내적 희망을 공고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로망은 가벼운 뜻의 소설이 아니며, 소설은 로망보다 가벼운 말이 아니다. 두 단어는 모두 인간의 내외적 이상을 현실로 그려내고 싶은 작가의 간구가 담긴 용어라 할 만하다.

그러므로 나는 기욤 뮈소가 한국의 독자가 익숙한 novel(소설)이 아니라 자신에게 익숙한 언어 로망을 원래 제목으로 쓰고, 그것을 한국의 번역자가 소설이라고 옮긴 것에 나름 만족한다. 그는 자기 글을 대중적인 새로운 글 novel’이 아니라 자기에게 익숙하면서 저 중세로부터 이어지는 단어 로망 roman'을 썼기에 나로서는 우리말 소설이라는 번역에서 저 로망을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여 나는 인생은 소설이다라는 말을 작가의 의도와 어긋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내 몸에 기억할 수 있어서 좋다

브루클린, 2010년 가을
6개월 전인 2010년 4월 12일에 당시 세 살이던 내 딸 캐리 콘웨이가 윌리엄스버그의 아파트에서 숨바꼭질을 하던 도중 실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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