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예수가 미소를 지으며 작업실 문으로 손을 뻗었다.

"대부분의 길은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아요. 당신을 찾기 위해서라면 어느 길이라도 가겠다는 뜻이죠."

-윌리엄 폴 영, <오두막,The Sheck >, 세계사, 2007/2009, 310쪽.


1

날씨는 맑다. 어느새 봄이 지나고 여름이 턱밑까지 올라왔다. 마른 장마가 무색하다. 서재로 들어오는 도로는 한참 동안 막혔다. 차선 두 개를 가로막고 공사가 한창이라는 것을 체증이 끝나는 지점에 와서야 알았다. 그나마 다행이다. 오랜 만에 들른 서재는 적막으로 가득하다.

2.

짐을 정리하고, 바닥을 닦고, 간단히 그릇을 씻어둔다. 비워둔 서재에 대한 나의 의례다. 잠시 앉아있다보니 어느 새 점심이다. 따로 준비할 것은 없다. 미리 가져 온 호밀 식빵(요즘 이런 이름 붙은 빵들이 많다)과 방금 내린 커피를 곁들였다. 습관처럼 노래를 흐르게 한다. 특별하지 않으면 김광석이 부른 노래 한 두 곡은 꼭 흐른다. 같은 가사, 곡조라도 그가 부르는 노래는 그답다. 당차다. 비장함, 슬픔마저도 옹골차다. '나의 노래'를 새겨듣는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이'는 비굴한 자기비하가 아니다. 그것은 '나의 노래'를 스스로 만들어 부르는 이만이 할 수 있는 선언이다. 화석같은 노래들인데도 들을 때마다 최초의 감성이 발화한다. 노래는 어디로 나를 데려갈지 모른다. 단정짓거나 쉽게 예측하기 어렵다. 노래에 몸을 맡기는 수밖에 없다.


3.

노래가 거의 끝날 즈음에, 커피를 따뜻하게 한 번, 시원하게 한 번 번갈아 마신다. 김현

경의 사회인문학.『사람, 장소, 환대』(문학과 지성사, 2015/2020)를 마저 읽는다. 이번 달 독서나눔에서 다룰 책이다. 이야기 사이사이에 신앙고백같이 새겨둔 문장을 하나씩 꺼내 다시 읽는다. 제목으로 설정된 세 단어는 주제로 가는 징검다리들이라 할만하다. 사람은 인간과 다르고, 장소는 공간과 별개이며, 환대는 대접과 별다른 태도다. 환대없는 인간에게 이 세계는 그저 공간에 불과하다. 몸하나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이들을 받아주는 이 없다면, 이 세계는 암흑이다. ‘절대적 환대’라는 이상이 현실에 가까울수록 이 세계는 비로소 사람과 사람이 만나 어우러지는 ‘대동’이 될 것이다. 책을 덮었다. 여름의 문턱인지라 아지 해가 한참 남았다. 서재 밖으로 이어진 논길, 그 건너편으로 해가 넘어가고 있다. 잠시 몸을 일으켜 논둑길을 걷는다.


4.

논둑길을 걸으니 햇살이 평소와 달리 뭉특하다. 어느 새 논 가득 벼가 자라고 있다. 그 사이를 걸으니 마치 ‘숲’을 걷는 듯하다. 얼마 전 잠시 다녀온 어느 숲이 쉽게 떠오른다. 그 날 비가 내렸다. 비가 쏟아지고 난 다음 날, 숲은 온갖 향기로 가득하다. 빗물이 남아있는 숲 속길은 맑고 파란 하늘 아래서 목적없이 열린 세계다. 숲은 소리로 채워지고 바람도 살아난다 나뭇잎들은 바람이 부는 대로 소리를 바꿔가며 종알거린다.


5.

그 날 오름 몇 곳을 올랐다. 처음에는 가볍게 오를 생각이었다. 생각과 달리 비가 잔뜩 내리던 그 날, 고내봉에서 한참을 걸었다. 가벼운 길이었으나 무슨 이유인지 걸을수록 이러저리 얽히고 섥혔다. 높고 짙은 소나무 사이에 녹두빛 여린 잎들이 엉겨엉겨 살아가는 모습이 새롭다. 정상에서 멀리 내다보는 풍광은 막힘없이 시원하다. 비가 내렸지만, 바다와 산이 한꺼번에 시야에 들어온다. 정상 표지석은 더 이상 올라갈 길이 없다는 안내자이다. 머물다가 다시 내려갈 길을 선택해야 한다. 나는 다시 돌아내려오기로 했다. 다행히 그 숲 끝까지 돌고돌아서 마침내 출발지점에 돌아왔다. 길은 어디나 이어져있었다. 산 아래 내려선 뒤에도 비는 여전하다. 그 빗 속에 저 숲은 살아있다. 숲을 사라지게 할 만한 온갖 불확정성이 난무하다해도 꿋꿋이 '숲답다.'



6.

숲을 걷다보면, 사람이 자기 머무는 곳에서 이유없이 환대받는 세계라는 생각이 가끔 든다. 그 날 비가 내렸고 오늘 맑은 햇살이 논 끝에 내린다. 이 세계가 건네는 어떤 환대같다. 


시간은 시나브로 여름으로 흘러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